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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칼럼]2030은 모르겠고 표는 얻고 싶은 민주당‘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더불어민주당이 23일 공개될 ‘새로운 민주당 캠페인―더민주 갤럭시 프로젝트’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티저’용으로 준비했다가 논란이 된 현수막 문안이다. 17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도 보고됐고, 각 시도 당 위원회 등에도 관련 공문이 내려갔다고 한다. 민주당 설명에 따르면 이 캠페인은 ‘개인성과 다양성에 가치를 두는 2030세대’를 주로 겨냥한 것으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나에게 쓸모 있는 민주당’으로 변화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즉 내년 총선을 앞두고 2030 청년세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마련한 전략적 캠페인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민주당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현수막은 당내에서조차 청년세대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파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민주당 내 ‘청년당원 의견그룹’이 17일 “근래 민주당의 메시지 가운데 최악, 저질”이라는 격한 논평을 냈을 정도다. 같은 날 당직자와 보좌진들이 모인 당 홍보국 단체대화방에도 “문구가 너무 시대착오적”이라는 등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파문이 커지자 민주당은 19일 뒤늦게 홍보 문구를 교체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문안은 업체가 준비한 시안”이라며 “당이 개입한 사안은 아니다”라는 해명을 내놨다. 최고위원회의에 보고되고 시도 당 위원회에 공문까지 내려갔는데, 해명치곤 구차스럽다. 민주당이 청년과 관련된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에는 민주당 후보였던 박영선 전 의원이 낮은 20대 지지율에 대한 설명으로 “20대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과거의 역사에 대해 30, 40대나 50대보다는 경험한 경험 수치가 좀 낮지 않냐”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됐다. 이에 앞서 20대 남성의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던 2019년에는 설훈 의원과 홍익표 의원의 ‘민주화 교육 부족’, ‘반공 교육’ 발언이 문제가 됐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개인 차원에서 나온 실언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이번 현수막 게시는 개인이 아닌 당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라는 점에서 좀 더 심각하다. 청년당원들 모임인 ‘파동’이 “지금까지 우리 정치사에서 어느 정당이 당의 이름을 내걸고 한 세대를 조롱한 적이 있던가”라고 개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이번 현수막은 내용 면에서도 종전 발언들에 비해 문제의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우선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라는 문구 속에 상정된 청년들의 초상(肖像)은 정치가 만들어 나가는 국가와 공동체의 운명이나 미래에는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삶만 나아지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모습이다.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라는 문구 속에 비치는 청년들의 초상도,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나 요행을 바라는 일그러진 모습이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지금의 2030은 과거 어느 세대보다 공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세대다. 불이익도 참지 않지만, 나만의 특혜도 바라지 않는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나만의 요행이 아닌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공정한 기회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이런 청년들을 모독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물론 민주당이 일부러 청년세대를 비하하기 위해 이런 현수막을 내걸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나 경제를 모르는 사람도 잘 살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정당이 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알고, 고민하고, 참여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주권자의 소중한 권리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정책과, 당장은 입에 달지만 결국 ‘나랏빚’으로 쌓여 언젠가 자신의 부담으로 돌아올 싸구려 ‘포퓰리즘’ 정책을 구별해 내려면 경제를 몰라서는 안 된다. ‘정치나 경제를 몰라도 괜찮다’는 건 당당한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포퓰리즘의 제물이 되라는 이야기다. 기회만 있으면 ‘참여’를 말하는 정당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앞서 ‘파동’의 논평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민주당이 진정으로 청년세대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면, 어설픈 ‘현수막 마케팅’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민생 정책’을 선보이기 바란다.” ‘2030은 모르겠고 표는 얻고 싶다’는 식의 민주당 기성세대가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11-19 23:51
[천광암 칼럼]이재명 대표의 얄팍하고 실속 없는 ‘3% 성장론’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성장률 3%론’을 들고 나왔다. 2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다. 현재로선, 내년 2% 초반 성장도 낙관하기 어렵지만 정책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위기 극복 방안을 총동원해서 3% 성장을 달성하자는 주장이다. 부분적으로 일리 있는 내용도 있다. 연구개발(R&D)이 저성장을 막고 생산성을 높이는 핵심적인 방안이라는 데는 공감이 간다. 전세대출 이자 부담 완화나 월세 공제 대상 확대 등의 제안도 논의해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얄팍한 내용이 많다. 재원 마련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부터 보이지 않는다. 이 대표는 자신이 제안한 ‘청년 대중교통 3만 원 패스’의 재원 조달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예산소요액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답변을 실무자에게 넘겼고, 실무자는 “특별한 예산 소요를 동반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식으로 답했다. 청년들에게 3만 원짜리 카드를 하나씩 나눠주는데도 들어가는 돈이 없다니, 어디 감춰 놓은 ‘화수분’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1년 한시 ‘임시 소비세액공제’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마찬가지다.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재원은 그렇다 치고 주장 자체가 뜬금없다. 그동안 이 대표와 민주당은 정부·여당이 감세정책으로 막대한 세수 결손을 초래했다며 비판의 날을 세워 왔다. 감세가 문제라면서 감세하자는 게 앞뒤가 맞는 말인가. 더구나 지금은 재정이 과거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상황이다. 당장 올해에만 59조 원의 ‘세수(稅收) 펑크’가 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내년 예산만 하더라도 총수입이 총지출보다 45조 원 부족한 적자 살림이다. 경기 악화로 추가 세수 펑크가 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을 이 대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지적이 나올 때마다 이 대표가 정해진 메뉴처럼 내놓는 답변이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국가채무 비율이 낮기 때문에 정부가 빚을 더 내도 된다’는 것이다. 이번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 대표는 “다른 선진국들의 국가채무 비율이 110∼120% 수준인 데 비해 한국은 꾸준히 50% 아래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낮은 것은 외환위기의 집단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외환보유액이 바닥나고 민간 부문이 과도한 부채에 짓눌려 나라가 와르르 무너지는 와중에서도 경제가 회복 불능으로 완전히 침몰하는 걸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재정이 건전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나라가 망하는 것을 피하려면 재정만큼은 건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때 우리의 DNA에 각인된 ‘집단기억’이다. 그런데 이런 기억들이 흐릿해지면서 2013년 32.6%이던 국가채무비율이 지난해 49.4%까지 급등하는 등 무서운 속도로 높아지는 중이다. 이걸 두고 “국가채무비율이 꾸준히 50% 아래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치지도자로서 정직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이 대표가 또 하나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 있다. 물가다.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 때 풀린 과잉유동성과 유럽, 중동에서 진행되는 두 개의 전쟁으로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정부 재정을 풀어 3% 성장을 달성한다 해도 물가 상승으로 인해 그 이상의 비용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한국 경제의 체력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한 나라의 경제가 물가 상승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최대치를 나타내는 ‘잠재성장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올해 1.9%로 2% 선이 처음 무너지고, 내년에는 1.7%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2030년 이후 전망은 0%대다. 규제혁파와 노동개혁을 통해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풀고 생산성을 개선해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물가 상승 없는 성장률 회복’은 앞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데도 ‘3% 성장론’을 내건 이 대표의 민주당은 ‘노란봉투법’을 9일 본회의에서 강행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이 이대로 시행되면 가뜩이나 노(勞) 측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 기울어져 노동개혁은 완전히 물 건너가고, 한국 경제는 ‘저성장’과 ‘고물가’ 사이를 영원히 오가는 시계추가 될 운명이다. 허울 좋은 ‘3% 성장’은 제쳐 두고 ‘노란봉투법 폭주’부터 멈춰 세우는 게 이 대표가 한국 경제를 위해 할 일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11-05 23:51
[천광암 칼럼]韓 이대로 가다간 ‘아시아의 병자(sick man)’ 된다“올해 하반기 경제가 상반기보다 2배 정도 성장할 것으로 본다. IMF가 전망한 내년 성장률은 GDP 1조 달러가 넘는 국가 중 최고 성장률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지난주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 말이다. 줄곧 강조해 온 상저하고(上低下高)론에 ‘금년은 어렵지만 내년에 나아질 것’이라는 ‘금저래고(今低來高)’론이 보태졌다. 추 부총리는 앞서 15일에는 “물가도 회복 국면에 진입했고 고금리도 대체로 천장을 확인하고 있는 수준으로 보인다”며 물가와 금리에 대해서도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요약하면 한국 경제가 길고 긴 겨울에서 벗어나 따뜻한 봄날을 맞고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사뭇 다르다. 추 부총리가 ‘고금리 천장’론을 꺼낸 지 1주일도 안 돼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6년간 유지돼 온 ‘5% 천장’을 뚫었다. 현재 한국은 미국보다 기준금리가 2%포인트나 낮은데도 가계부채와 경기 부담 때문에 안간힘을 다해 ‘동결’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미국 금리가 추가로 상승 행진을 시작하면 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앞서 추 부총리가 내년 한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근거로 제시한 IMF 전망도 의지할 것이 못 된다. IMF가 ‘2023년 경제전망’을 처음으로 내놓은 지난해 1월 당시 제시한 한국경제의 성장률 전망치는 2.9%였다. 그러나 지난해 7, 10월과 올해 1, 4, 7월 내리 5번 연속 하향 조정을 한 끝에 반토막 수준인 1.4%까지 떨어뜨렸다. 내년 성장률 전망도 이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더구나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으로 글로벌 경제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는 단순한 거시지표보다 산업 구조적인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 최근 ‘유럽의 병자(sick man)’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휘청이고 있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과 1, 2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 슈퍼스타’ ‘유럽의 성장엔진’으로 칭송받던 독일이 ‘병자’로 추락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꼽는다. 주어만 바꾸면 섬뜩할 정도로 한국에 들어맞는 이야기다. 우선 높은 제조업 비중이다. 최근 유일하게 잘나가는 미국 경제의 제조업 비중은 2021년 기준으로 10.7%가량이다. 독일은 그 두 배인 20.8%다. 한국은 이보다 더 높은 27.9%다. 자유무역이 확산되고 전 세계 교역량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라면, 제조업 제품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플러스’다. 하지만 미중 간 패권 경쟁으로 보호무역 장벽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한국과 독일 모두 서비스업 등 내수 비중이 높은 나라들에 비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조업 중에서도 특정 산업에 대한 편중된 구조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독일은 전체 수출의 10%가량을 자동차가 차지하는데,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에 뒤처진 것이 경제 부진의 결정적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한국은 더 심각할 수도 있다. 반도체에 대한 한국의 수출의존도는 20%에 육박한다. 최근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는 조짐이 보인다고는 하지만 반도체 제조 시장을 대만과 함께 사실상 ‘싹쓸이’하던 호시절이 다시 올지는 의문이다. 반도체 설계·소재·장비 등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미국과 일본이 직접 제조에 뛰어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독일 경제가 고전하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이 또한 한국이 독일보다 나을 게 없다. 지난해 독일의 수출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6.7%였다. 한국은 약 3배에 해당하는 22.8%였다. 중국 시장이 위축되거나 또는 경합 품목에서 중국에 따라잡힐 때 받는 충격이 독일보다 훨씬 크다. 굳이 독일의 위기에서 시사점을 찾을 것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1인당 잠재성장률이 2030년 이후에는 0%대로 떨어져 38개 회원국 중 캐나다와 함께 공동 꼴찌를 할 것이라는 전망을 2021년 내놓은 바 있다. 한국 경제의 추락을 막을 유일한 해법은 노동 연금 교육 등 구조개혁을 서두르는 것인데도, 현 정부는 어느 것 하나 작은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한가로운 낙관론을 읊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국 경제는 지금 ‘아시아의 병자(病者)’로 전락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10-22 23:51
[천광암 칼럼]윤석열 대통령이 김행 장관후보자를 빨리 ‘손절’해야 하는 이유윤석열 대통령이 인사청문회가 끝난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명을 7일 강행했다. 이 중 신 장관은 현 정부 들어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18번째 장관급 인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야당이 과거 ‘막말과 편향적’ 역사관을 문제 삼으면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관심사는 23년 인사청문회 역사상 처음으로 ‘36계 줄행랑’ 파문을 빚은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임명을 윤 대통령이 강행할지 여부다. 김 후보자는 스스로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다. 2009년 온라인 뉴스 사이트 ‘위키트리’를 공동 창업했고, 2013년 청와대 대변인이 되면서 주식을 처분했지만, 2018년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주식을 재인수했으며, 이후 탁월한 경영 수완을 발휘해 불과 4, 5년 만에 기업 가치를 79배로 키웠다는 것이다. 회사 성장 과정에서 선정적이고 성차별적인 저질 기사를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방식으로 ‘돈벌이’를 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은 경영자여서 직접 기사를 쓰거나 보지 않았으며 “이게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말했다. 공직자의 기본 자질에 해당하는 책임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낯 두꺼운 자기변명이자 억지다. 문제의 기사가 한두 번에 그친 것이라면 해당 기자의 책임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기사가 반복적이고 상습적으로 나왔다면 회사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고 끌고 나가는 경영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안 된 것은 남 탓, 잘된 것은 내 덕’이라는 자세로 대한민국의 여성·청소년 정책을 책임지는 여성가족부 장관직을 어떻게 맡을 수 있겠는가. ‘주식 파킹’ 의혹은 더 심각하다. 김 후보자는 2013년 위키트리 주식을 시누이에게 매각했다가 나중에 되산 것에 대해 불법적인 파킹이 아니라 선의에서 이뤄진 정상 매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검사 출신이면서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인 김웅 의원조차도 “99.9% 주식 파킹이며 수사 대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설령 법률 영역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언론 검증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나온 김 후보자의 잦은 말 바꾸기만으로도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진 상황이다. 그가 앞으로 무슨 해명을 내놓는다 해도 이미 눈덩이처럼 커진 의혹을 해소하기는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이런데도 윤 대통령이 김 후보자 지명을 강행한다면 정치적으로도 두고두고 큰 짐이 될 것이다. ‘윤석열 검찰’은 2019년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단골 미용사 명의로 차명 주식투자를 한 혐의 등으로 기소한 적이 있다. ‘차명 주식투자’가 ‘주식 파킹’의 다른 이름이다. 조 전 장관이 최근 “정 전 교수 차명주식 의혹을 수사하듯이 김행 후보자 및 그 배우자, 친인척을 수사하라”며 마치 좋은 기회라도 만난 듯 공세를 펴고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 윤 대통령이 김 후보자 임명을 강행할 경우, ‘인사청문회 제도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든 대통령’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전임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장관급 인사 34명을 국회가 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가운데 독단으로 임명하긴 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대통령도 국회 인사청문회장에서 제 발로 뛰쳐나간 장관 후보자를 임명했다는 기록을 남긴 적은 없고, 그럴 일 자체가 없었다. 인사청문회 제도의 역사가 230년이 넘는 미국에서조차 전무했던 일이다. 미국에서라면 의회모욕죄로 형사처벌을 받았을 사안이다. 혹자는 정책을 위주로 인사청문회를 진행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인사청문회가 지나치게 개인의 도덕성이나 사생활 문제로 흐른다고 지적한다. 틀린 이야기다. 미국의 경우 장관 후보자로 지명이 되면 연방수사국(FBI)이 나서서 심한 경우 2개월 이상 사생활을 샅샅이 캔다. 이혼한 전처나 전 직장 동료를 만나 주량과 술버릇, 이성 문제, 심지어 양말 사이즈까지 조사해서 백악관과 의회에 보고한다. 정책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음주 등 사생활 문제로 낙마한 사례가 실제로 적지 않다. 김 후보자가 여성가족부를 이끌 정책 능력이나 비전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이미 제기된 의혹과 인사청문회에서 보인 행태만으로도 ‘부적격’ 판단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나마 서둘러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 윤 대통령에게 지워진 인선과 검증 책임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10-08 23:51
[천광암 칼럼]경제는 실용, 이념 아닌 실용“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입니다…우리 당은 이념보다는 실용이다 하는데 기본적으로 분명한 이런 철학과 방향성 없이 실용이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했던 말이다.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 환경과 야당의 후쿠시마 오염수 대응 등의 이슈도 거론됐지만 가장 큰 비중이 실린 내용은 경제였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 운영을 망하기 직전인 기업의 ‘화려한 껍데기’에 비유하면서, 건전한 재정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나랏빚을 늘리는 국채 발행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했다. 건전 재정을 윤석열 정부 경제 정책의 축으로 삼겠다는 것은 전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문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한국의 국가채무는 5년간 400조가 늘었고, 지난해 마침내 1000조 원을 넘어섰다. 미래세대를 빚더미 위에서 허우적대지 않도록 하려면 윤 대통령이 강조해온 것처럼 ‘재정 다이어트’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직진’을 하다가는 큰 탈이 날 수 있다. 아무리 과체중 부작용이 심각한 비만 환자라고 해도, 일주일쯤 굶은 사람에게 당장 고강도 다이어트를 시작하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 한국의 나라살림이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올해 400조 원의 세금(국세)이 걷힐 것이라는 기획재정부 전망을 믿고 여기에 맞춰 지출 계획을 짰다. 그런데 한 해가 4분의 3이나 지난 시점에 와서 기재부는 당초 예상했던 액수보다 59조 원 덜 걷힐 것 같다는 수정 전망을 내놨다. 역대 최대의 ‘세수(稅收) 펑크’다. 심각한 경제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세수 펑크가 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2020년 정도다. 당장 이 여파가 전 경제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정상적인 해법은 ‘국채 발행’이다. 일단 정부가 빚을 내서 급한 고비를 넘기는 방법이다. 경제부총리는 물론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까지 경제관료 출신들이 겹겹이 포진한 현 정부가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국채 발행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건전 재정과 국채 발행’ 문제를 타협 불가능한 ‘이념’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 정책 선택의 폭을 좁히는 족쇄가 돼버린 모양새다. 국채 발행 대신 현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세 가지다. 첫째 작년에 다 못 쓴 예산을 쓰는 것이다. 상식적인 방법인데 문제는 액수다. 기껏해야 6조 원밖에 안 된다. 두 번째 이미 편성된 예산을 쓰지 않는 것인데, 지금 같은 불경기에는 지나치면 약보다 독이 된다. 마지막으로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에 쌓여 있는 원화 중 20조 원을 정부 예산으로 끌어다 쓰는 방법이다. 외평기금 활용에 대해서는 일부 ‘묘수’라는 평가도 있다. 미시적으로만 보면 손해가 아니라 득이 되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외평기금이 환율이 불안할 때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쌓아 놓은 ‘방파제’라는 점이다. 1997년 당시 ‘세계의 경제 대통령’ 격이던 앨런 그린스펀 미 연준 의장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정부가 대외적으로 공표한 장부에 250억 달러나 되는 외환보유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액 중 상당액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금고’에 넣어두지 않고 은행에 빌려주는 등 다른 목적에 쓰는 바람에, 장부상으로만 쓸 수 있는 돈이 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순간을 다시 맞지 않으려면 외평기금에는 ‘외환시장 안정’ 이외의 어떤 임무도 부여해선 안 된다. 물론 최악의 ‘세수 펑크’ 상황에서 빚을 내서 지출을 35조 원이나 늘리자는 식의 더불어민주당의 추경 주장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현 정부가 국채 발행을 꺼리는 데는 야당의 주장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전략도 깔려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외평기금 동원이라는 ‘위험한 불장난’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순 없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념에 현실과 통계를 억지로 꿰맞추려 하다가 임기 전반부를 완전히 허송하고 통계 조작 논란에까지 휩싸였다. 건전 재정과 국채 발행 여부가 정책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이념이 되면, 현 정부도 실패한 ‘소주성’의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9-24 23:51
[천광암 칼럼]김만배 음성파일… ‘악마의 편집’과 ‘국가반역죄’ 사이뉴스타파가 작년 대통령 선거를 3일 앞두고 보도했던 ‘김만배 음성파일’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대통령실과 여당, 검찰은 음성파일이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 사전에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만배 씨가 대화 상대방인 신학림 당시 뉴스타파 전문위원에게 책 3권 값으로 건넨 1억6500만 원이 ‘거짓 인터뷰’의 대가라는 것이다. 당시 뉴스타파의 보도는 2011년 당시 대검 중수 2과장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저축은행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영수 전 특별검사의 부탁을 받고 조우형이라는 인물의 혐의를 무마해줬다는 내용이다. 조 씨는 대장동 초기 사업비 1100억 원을 부산저축은행에서 끌어오고, 그 대가로 10억 원의 뒷돈을 챙긴 인물이다. 중수부 수사에서는 처벌을 피했지만 4년 뒤 이 건으로 수원지검에서 기소돼 실형을 선고 받았다. 파문이 커지자 뉴스타파는 ‘기획 인터뷰’ 의혹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72분짜리 녹음파일 원문을 7일 공개했다. 하지만 혹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격이 됐다. 기획 인터뷰 논란과는 별개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짜깁기해 ‘악마의 편집’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편집은 윤석열 중수 2과장이 조 씨에게 직접 커피까지 타줘가며 형식적인 조사를 한 뒤 수사를 무마해줬다고 들리게 돼 있다. 그러나 원본을 보면 ‘주어’가 윤석열 2과장이 아니라 직원들과 박모 검사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뉴스타파 측은 “커피를 누가 타줬는지는 핵심이 아니며, 담당 검사가 과장의 허락 없이 사건을 덮을 수 있겠느냐”는 식의, 황당한 사후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뉴스타파 측은 보도 경위를 설명하면서 “관련 의혹들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던 내용으로 새로운 것이 없으며, 김만배 스스로의 육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 씨의 발언을 최대한 충실하게 소개했어야 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짜 맞춰 앞뒤 잘라내고, 주어를 바꾸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조작일 뿐이다. ‘담당 검사가 봐줬는데 실상은 중수 2과장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제작진의 추론과 ‘중수 2과장이 직접 부탁을 받고 사건을 없애 버렸다’는 당사자의 직접 진술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파일 원문을 들어보지도 않고 뉴스타파가 공개한 편집본을 인용해 의혹을 전파하거나 확대 재생산한 매체들의 태도도 저널리즘의 기본이나 보도윤리에서 크게 벗어났다. 특히 MBC는 문제가 많다. 당시 MBC 보도에는 국민의힘 측에서 “녹음파일에 끊긴 흔적이 있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선 이틀 전이라는 민감한 시점에, 짜깁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을 네 꼭지나 할애해서 보도한 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철저한 경위 조사와 진솔한 반성, 실효성 있는 재발 방지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응분의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다만,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이번 건을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의 국가반역죄”로 규정하고, 당이 나서서 뉴스타파, MBC, JTBC 등의 전현직 취재기자들을 다짜고짜 고발부터 한 것이 적절한 대응인지는 의문이다. 우선은 해당 언론사들의 자체 조사와 상응 조치를 지켜보고, 사법적인 대응에 나서도 늦지 않다. 여권의 대응이 도를 넘게 되면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을 길들이려 한다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 대표는 원내대표 시절이던 2021년 더불어민주당이 강행하려던 ‘언론중재법’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반대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고 강조했었다. 일부 잘못된 보도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짜 뉴스는 명확한 진실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12월 대선후보 관훈토론 등에서 부산저축은행 관련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자세히 해명해 왔다. 하지만 어렴풋한 기억, 전언, 당시 관행 등에 근거한 설명이 적지 않았다. 10억 원의 뒷돈을 챙긴 조우형이 중수부에 불려 가고도 입건조차 되지 않은 것은, 설령 김만배 음성파일이 조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실 규명 절차가 뒤따르지 않으면 앞으로도 의혹과 논란이 꼬리를 물 가능성이 크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9-11 00:03
[천광암 칼럼]기초과학 잡는 “R&D 카르텔 타파”… ‘노벨상 0’ 국가의 자충수인공지능(AI) 바둑 ‘알파고’가 선보인 것은 2016년 초다. AI 반도체로 유명한 엔비디아의 당시 시가 총액은 약 160억 달러. 전 세계 반도체 기업 가운데 13위였다.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난 지금 엔비디아의 시총은 75배인 1조2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전 세계 반도체 기업 중 1위. 인구 2억7753만 명의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금액이다. 바야흐로 AI 붐이다. 포털, 자동차, 유통, 반도체, 바이오, 미디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 글로벌 기업들이 사활을 건 AI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AI 인재 확보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미국에서는 ‘연봉 12억 원’ 공개 채용공고까지 나붙었다. 어디든 ‘AI’라는 수식어만 붙으면 사람이 몰리고 돈이 붙는다. 하지만 AI가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한 봄날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약 반세기에 가까운, 길고도 추운 ‘겨울(AI winter)’이 있었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신경망 AI’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7년이다. 신경망 AI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당시 주류 학자들의 반응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런 데다 눈앞의 성과도 보이지 않자 초기 AI 연구 지원의 ‘큰손’이었던 영국과 미국 정부는 이후 수십 년간 자금줄을 끊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돈도 안 되고 가망도 없는’ AI 전문가들을 데려다가 “마음껏 연구하라”고 지원해준 나라가 캐나다다. 그곳으로 향하는 행렬 속에는 제프리 힌턴 교수(토론토대)도 포함돼 있었다. 힌턴 교수는 토론토대에 뿌리를 내린 지 19년 만인 2006년 ‘심층신경망(딥러닝)’을 개발해 ‘AI 혁명’에 결정적 돌파구를 열었다. 연구자들의 순수한 호기심을 조건 없이 지원한 캐나다 정부 덕분에 오늘날 토론토, 몬트리올, 에드먼턴 등은 세계적인 ‘AI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토론토는 2016∼2021년 미국을 포함한 북미 지역에서 ‘테크 일자리’가 가장 많이 늘어난 도시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9월 ‘AI 강국’에 대해 ‘한 수’ 배우기 위해 달려갔던 곳도 토론토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인물이 힌턴 교수다. 힌턴 교수는 당시 만남에서 ‘AI 암흑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캐나다 정부의 노력을 거론하며 AI 발전의 결정적 키워드 중 하나로 “정부 지원”을 꼽았다. 힌턴 교수가 인터뷰 등을 통해 꾸준히 밝혀 온 내용을 보면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원 중에서도 학자의 호기심이 바탕이 된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이다. 구체적인 성과를 닦달하는 ‘목표 중심형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은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정부가 22일 발표한 내년 R&D 예산안을 보면 힌턴 교수의 조언과는 거꾸로 가는 듯하다. 우선 총액에서 내년 주요 R&D 예산은 올해보다 3조4000억 원이 깎였다. 혈세 낭비는 막아야 한다지만 ‘선거용 토건 사업’은 마구 끼워 넣으면서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R&D 예산부터 손봐야 했나. 특히 구체 내역을 보면 기초연구 분야에서 6.2%를 깎았고, 정부 출연연 예산에서 10.8%를 삭감했다. ‘R&D 카르텔 타파’가 명분이다. 대신 바이오, AI, 이차전지 등 국가전략기술, 즉 ‘목표 중심형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한다. 힌턴 교수의 경우도 그렇지만 하이테크 분야에서 ‘의도나 목표’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많다. 어디서 ‘잭팟’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챗GPT를 발표해 AI 붐에 불을 댕긴 오픈AI의 출발은 “인공지능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순수한 꿈들이 모여 만들어진 비영리단체다. 엔비디아만 해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AI용 반도체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엔비디아는 컴퓨터 게임에 쓰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에 특화된 반도체 기업이다. 엔비디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처음에는 암호화폐 채굴꾼들이, 다음에는 AI 혁명이 엔비디아 GPU의 쓰임새를 ‘발명’했다. AI를 앞세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과학과 과학, 기술과 기술, 산업과 산업, 기업과 기업 간의 다양한 조합과 융합에서 나온다. 그 공통의 토대가 되는 기초과학을 죽이는 것은 모래 위에 성 쌓기다. 한국은 아직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오랜 염원을 이루려면 다른 예산을 확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기초과학만큼은 긴 안목에서 집중 지원해야 한다. ‘노벨상 0’ 국가의 자충수는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는 게 좋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8-28 00:03
[천광암 칼럼]‘주먹구구-열정페이’식 軍 대민지원, 과연 필요한가고 채수근 해병 순직 사고 조사 결과를 놓고 국방부와 해병대 수사단장을 맡았던 박정훈 대령 간에 진실 공방이 뜨겁다. 박 대령은 국방부가 해병대 1사단장의 형사책임을 축소하기 위해 외압을 넣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방부는 박 대령이 부당한 외압이 아니라 상부의 정당한 지시를 어긴 항명 사건이라고 맞서고 있다. 절차적 논란까지 덧붙여지면서 형사책임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채수근 해병과 유족의 원통함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형사책임을 철저하게 규명해 응분의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형사책임 규명이 전부는 아니다.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면 제도나 관행 등에 문제가 없었는지도 철저히 따져 봐야 한다. 이제는 군의 대민(對民) 지원이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디까지가 적정한 수준인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볼 때가 됐다. 한국군이 2020년부터 3년간 대민 지원에 투입한 병력은 평균 83만여 명(연인원 기준)에 이른다. 그 범위도 태풍·호우·폭설 같은 자연재해 대응과 피해 복구 작업, 코로나19 대응, 가축전염병 대응, 농촌 일손 돕기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 중 대규모 재난은 기후변화 등으로 예측이 점점 어려워지고 그 규모나 범위도 커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군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흐름에도 맞다. 미군도 인도적 지원과 재난구조(HA/DR)를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삼고 있다. 대형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는 자위대가 지자체·경찰·소방보다 더 큰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자위대의 경우 동일본대지진 당시 독자적으로 또는 지자체·경찰·소방과 연계해서 1만9286명을 구출했다. 전체 생존 구출자의 약 70%에 해당하는 수치다. 재해 발생에 앞서 지자체·경찰·소방은 물론 해당 지역 주민까지 포함해 ‘실전’과 같은 대규모 훈련을 거듭해 온 결과였다. 한국 해병대의 ‘주먹구구식’ 대응은 이와 극명하게 차이 난다. 해병대는 해상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포병을 수변 수색 작업에 투입했고, 주요 임무가 수색 작업이라는 사실을 현장 지휘관에게 뒤늦게 전달해 구명조끼나 로프 같은 기본 안전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이래서는 군이 재난 대응에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한국군이 재해 대응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려면 허점투성이인 관련 법규와 매뉴얼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재난 대응 훈련 경험을 쌓아야 한다. 훈련되지 않은 병력을 현장에 투입해 2차 재난을 자초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군 본연의 임무와 무관한 ‘노력 동원’식의 대민 지원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과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4대강 사업 비용 절감을 위해 청강부대를 창설해 운영하다가 군을 정권의 사병(私兵)쯤으로 여긴다는 지적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평창 올림픽 쇼트트랙 빙상장을 교체하는 작업에 군 장병을 동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연례행사인 농촌 일손 돕기에 대해서도 ‘열정페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당초 농촌 일손 돕기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파병 장병의 가족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시작됐다. 농가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시절이었기에 대부분 ‘농민의 자식’인 군인들이 모심기와 추수를 거드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농가 인구의 비중이 4%대에 불과하고 특히 농촌은 저출산 현상이 더 심각하다. 요즘 젊은 군인들에게 농사일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낯설고 고된 일일 뿐이다. 해병대 수사단이 밝힌 채수근 해병 사망 관련 수사기록에 따르면 현장 지휘관들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무리한 수색 작업을 한 것은 병사들의 안전보다 해병대의 홍보에만 연연한 1사단장의 행태에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0년 국감에서는 장병들을 대민 지원에 보내 놓고 장성급을 포함한 간부들은 근처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대민 지원이 ‘공짜 노동력’을 활용한 장교들의 실적 쌓기로 변질돼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들이다. 청년들 사이에서 “소중한 청춘을 군 간부들의 출세를 위해 잡일하는 데 낭비했다”는 말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대민 지원 전반을 원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8-14 00:03
[천광암 칼럼]‘약탈적 상속세’ 그대로… 2년차 尹정부 ‘맹탕’ 세제 개편안머크와 보쉬. 둘 다 한국 투자에 적극적인 독일 기업들이다. 글로벌 연 매출액이 각각 31조 원, 124조 원이 넘고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대기업들이다. 이 밖에도 공통점이 있다. 머크는 355년, 보쉬는 137년의 역사를 이어온 가족기업이라는 점이다. 머크는 13대째다. 두 회사 모두 창업자의 후손 일가가 지분관리회사나 공익재단 등을 통해 지배구조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머크나 보쉬 같은 기업들이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 부담 때문이다. 명목상 최고세율만 보면 한국이나 독일이나 50%로 똑같다. 하지만 실질적인 내용 면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국은 경영권 승계에 대해 ‘획일적인 20% 할증률’을 적용해 60%의 상속세를 때린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만의 제도다. 이에 비해 독일은 아들딸 등 직계비속에게 상속을 할 때는 최고세율이 30%로 낮아진다. 그나마 실제 내는 세금은 5%도 안 된다. 가업 승계 시에는 몇 가지 조건을 붙여 85%를 공제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도 가업 승계 시 세금을 깎아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대상이 제한적이고 요건도 까다롭다. 그렇다 보니 이 제도를 이용한 기업이 2021년을 기준으로 110개 사에 그쳤다. 독일의 2만8482건(2017년 기준)과 비교하면 0.4%에 불과하다. 독일에서는 이런 제도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에도 지분관리회사나 공익재단 등을 활용해 투기자본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고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다. 한국과 독일은 상속세를 매기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한국은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을 기준으로 상속액을 정한 뒤 물려받는 사람이 배분받아야 할 비율에 따라 나누는, 일명 ‘유산세’ 방식이다. 이에 비해 독일은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인 입장에서 받은 몫만큼 세금을 내는, ‘유산취득세’ 방식이다. 상속인이 여러 명일 때는 유산취득세가 부담이 작다. 상속세 제도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 회원국 중 ‘유산세’를 채택한 나라는 한국 미국 영국 덴마크 등 4개국뿐이다. 이 중 덴마크는 아들딸 등 직계비속에 대한 상속세율이 15%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도 상속세율이 한국보다 낮은 40%다. 더구나 미국은 상속세와 증여세를 합해 1170만 달러(약 150억 원·연방정부 기준)까지는 세금이 면제된다. 영국의 경우 집권 보수당이 상속세 폐지안을 내년 하원 선거의 대표 공약으로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독 한국만이 삼중사중의 징벌적 상속세 부과 장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유산세를 유산취득세로 바꾼다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하거나 부담이 덜한 다른 세목(稅目)으로 대체해 나가는 글로벌 추세에 비춰 보면 ‘겨우 시늉을 내는 수준’의 공약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27일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2년차 세제 개편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부의 편중을 막으려면 상속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과도한 상속세는 ‘기업가 정신’을 죽이고 경영권을 위협하는 등 기업의 뿌리를 통째로 흔든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은 포이즌 필, 차등의결주식, 초다수의결제 등 한국에 없는 다양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허용하고 있다. 설령 상속세 납부 등으로 인해 지분이 크게 떨어져도 한국에 비해서는 경영권 위협을 덜 느낀다. 피도 눈물도 없는 투기자본의 발톱 앞에 알몸인 채로 내던져지는 것은 한국 기업뿐이다. 윤 대통령은 이달 4일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회의에서 “기업인들의 투자 결정을 저해하는 ‘킬러 규제’를 팍팍 걷어 내라”고 주문했다. 즉시 TF가 꾸려졌고 지시 열흘 만에 산업단지 입지 규제와 화학물질 관련 규제 등 15개 개선 과제가 선정, 발표됐다. 모두 필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다 실현이 된다고 해서 기업 투자가 팍팍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 과도한 상속세 등으로 기업 경영의 뿌리가 흔들리는 현실에 비춰 보면 ‘곁가지 쳐내기’ 수준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기업계에 200년, 300년 가는 ‘기업 거목’들을 키워내려면 상속세 제도를 서둘러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업 승계 공제 확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약탈적’ 상속세율 자체를 손봐야 한다. 이 정도는 해야 후일 윤석열 정부가 킬러 규제를 팍팍 걷어 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광암 칼럼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7-31 00:03
[천광암 칼럼]일타강사보단 특별감찰관이 필요하다대선 국면에서 ‘대장동 특강’으로 존재감을 보여줬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또 한번 ‘일타강사’로 나섰다. 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특혜 의혹은 더불어민주당의 근거 없는 거짓 선동이라는 취지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다. 12일 처음 올라온 이 영상은 16일 현재 조회수 56만을 넘겼다.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한 ‘원안’이나 ‘민주당 수정안’보다는 ‘국토부 대안’이 편익이나 기술 면에서 우월하고 지역 주민들의 기대에도 부응하는 안이라는 게 이 강의의 요지다. 주장의 구체적인 뼈대는 크게 세 줄기다. 첫째, 노선 변경 의견을 처음 제시한 것은 전문 엔지니어링 업체이며, 이 업체에 관련 용역을 발주하는 절차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 이뤄졌다. 또한 이 업체가 대안을 국토부에 처음 보고한 것은 자신이 국토부 장관에 취임한 지 불과 3일 뒤의 일이라고 원 장관은 설명한다. 국토부 대안은 실질적으로 이전 정부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취지다. 둘째, 전문가들의 검토에 따르면 도로 설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교통량 흡수 측면에서 예타 원안보다 국토부 대안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환경이나 문화재 보호, 마을 보존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도 ‘국토부 대안’이 월등하다고 원 장관은 설명한다. 끝으로 국토부 대안의 종점에 김건희 여사 일가의 땅이 있다고 해서 특혜라고 할 수는 없다고 원 장관은 강조한다. 서울∼양평고속도로 종점은 진출입로가 없는 분기점이어서 땅값을 끌어올리는 호재가 아닌 데다, 일가 땅도 이미 ‘1980년부터 갖고 있던 땅’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회수나 댓글 반응을 보면 일단 원 장관이 일타강사로서의 ‘이름값’을 높이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지지층 일각에서는 ‘제2의 한동훈’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하지만 원 장관의 특강이 특혜 의혹 해소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거의 모든 쟁점에 대해 국토부·여당과 민주당 간에 반론과 재반론이 오가며 공방은 확산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김 여사 일가가 ‘1980년부터 갖고 있던 땅’이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일가 소유의 땅이 2005년 이후 매매를 통해 취득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강력한 반론에 부딪힌 상태다. 여야 공방은 그렇다 치자. 무엇보다 유튜브 특강에서처럼 일도양단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내용이라면 그동안 원 장관이 보여준 ‘오락가락 행보’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원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국민적인 의혹을 사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강상면 종점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달 3일 기자간담회에서는 ‘늘공’ ‘어공’ 비유까지 해가면서 실무진의 ‘정무 감각 부재’를 질타했다. 그러다가 6일 뜬금없는 전면 백지화 카드를 던졌다. 여야 공방의 비용을 고스란히 국민에게 떠넘긴 ‘고속도로 사업 전면 백지화’는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원 장관은 “민주당이 정치 공세를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정부 임기 안에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민주당이 의혹 제기를 하는 정책, 사업마다 건건이 백지화로 대응할 셈인가. 민주당이 김 여사를 최고의 ‘정치공세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종점 의혹’이 나올 것이다. 우상호 의원은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지난해 8월 “우리들 입장에선 김건희 여사가 계속 사고를 치는 게 더 재미있다”는 ‘속내’를 내비친 적이 있다. 대통령 주변의 비위를 감찰할 ‘특별감찰관’ 임명과 관련해서 “야당 입장에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라는 발언을 부연하면서 나온 말이다. 여당이 김 여사를 둘러싼 의혹과 정치 공세의 늪에서 헤어나는 길은 우 의원의 말속에 실마리가 있다. 윤 정부 출범 이후 1년 이상 비어 있는 특별감찰관 자리를 서둘러 채워야 한다. 대통령 주변의 비위를 상시적으로 감찰하는 특별감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지간한 의혹은 국민에게 먹혀들지 않는 ‘백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수적인 효과를 떠나 대통령 주변에서 비위가 자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본질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일타강사가 와도 ‘건드릴수록 커진다’는 의혹의 속성을 바꿔 놓을 수는 없다. ‘고속도로 종점 의혹’이 해소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특별감찰관 임명을 서두르는 게 좋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7-17 00:03
[천광암 칼럼]홋카이도 여행과 수조물 ‘먹방’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 해양 방류를 둘러싼 여야의 장외 공방이 점입가경이다. 5월부터 방류 반대 서명운동을 벌여온 더불어민주당은 1일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국민의힘은 ‘릴레이 회 먹방’을 이어가는 중이다. 일부 여당 의원들은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 수조 속 바닷물을 떠 마시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는 여야 모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정치적 득실 계산이 앞선다. 그러다 보니 ‘과학’은 뒷전이고 억지 주장과 앞뒤 안 맞는 언행이 난무한다. 심지어 한 야당 중진의원은 앞에서는 오염수 반대 서명을 받고 뒤에서는 홋카이도 골프 여행을 가는 계획을 짜는 일까지 있었다. 민주당은 안전성 검증을 맡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해상 방류 이외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민주당의 주장이 진정성과 실현 가능성을 가지려면 민주당이 여당 시절이던 문재인 정부에서 답이 나왔어야 한다. 일본에서 해상 방류가 본격 거론된 것은 2020년 2월의 일이다. 일본 정부 산하 자문기구는 그때까지 검토되던 5가지 방안 중 해양 방출과 대기 방출 2가지 방안이 현실적이며, 둘 중에는 해양 방출이 낫다는 권고안을 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자문단 권고에 대한 IAEA의 검증을 거쳐 2021년 4월 각료회의에서 해양 방출 방침을 확정했다. 이런 과정을 문재인 정부는 지켜만 봤다. 2020년 10월 당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2021년 4월 당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한 답변에 문재인 정부의 인식이 잘 반영돼 있다. 강 장관은 “(오염수 방류는) 원칙적으로 일본의 주권적 결정 사항”이라고 말했고, 정 장관은 “IAEA 기준에 맞는 적합한 절차에 따른다면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했다. IAEA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에 부적절한 점이 있다면 문제를 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치적 입지가 바뀌었다는 사정만으로 합당한 이유도 없이 IAEA라는 기관의 신뢰성 자체에 시비를 거는 것은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는 일이다. 국민의힘도 민주당의 주장을 모두 ‘괴담’으로 몰아가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층의 53%와 무당층의 82%가 ‘후쿠시마 방류가 우리나라의 해양과 수산물을 오염시킬까 봐 걱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불안감이 커진 데는 국민의힘도 한몫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제주지사 시절이던 2020년 10월 “제주와 대한민국은 단 한 방울의 후쿠시마 오염수도 용납할 수 없다”며 “민형사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김기현 대표도 2020년 10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오염수가 1년 정도 걸려서 동해로 흘러 들어온다는 일본 가나자와대 등의 발표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제안한 국제해양법재판소 제소 방안에 대해 “발상 자체가 아이러니고 코미디”라고 비판했지만 제 발등 찍기다. “유엔해양법협약 제207조에 의하면 육상 오염원에 대한 해양 오염을 방지할 의무가 각국에 부과돼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국제 소송과 가처분신청도 해야 될 것이고….” 이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닌 김 대표가 국회에서 했던 발언이다. 이 방안이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 자기주장을 뒤집을 때는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원전 오염수 처리의 안전성에 대한 검증은 해당 분야에 대한 고도의 전문성과 방대한 데이터의 실증분석이 필요하다. IAEA와 한국 후쿠시마시찰단의 최종보고서와 원자료가 전부 투명하게 공개된 다음 민간 전문가들이 최대한 참여해 신뢰성을 검증해야 안전성에 대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과정 없이 민주당이 무조건 반대를 외치며 장외로 뛰쳐나가는 것은 당리당략적 차원의 ‘불안 마케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도 안전성을 최종 확인하기 전에 오염수 방류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일어나선 안 될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여러 차례 되풀이했던 말은 “상정외(想定外)”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정부 여당이 할 일은 ‘먹방’이 아니라 0.1%의 ‘상정외’ 가능성까지도 ‘상정’해서 일본에 안전대책을 요구하는 것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7-03 00:03
[천광암 칼럼]“중국 초청받아 티베트 간 게 뭔 문제냐”는 야당 의원들중국 인민해방군 병력 4만 명이 양쯔강을 넘어 티베트(시짱·西藏) 동부를 침공한 것은 1950년 10월의 일이다.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무수한 실전으로 단련된 인민해방군이 제대로 된 훈련 한번 받은 적이 없는 티베트군을 궤멸시키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유엔 등 국제사회도 ‘약소국’ 티베트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여유가 없었다. 그해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외형적으로는 ‘협의’, 실질적으로는 ‘강압’으로 티베트를 병합한 중국은 독립이나 자치를 요구하는 봉기나 시위에 대해 가차 없는 폭력으로 대응했다. 폭격기나 탱크를 앞세운 무차별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불교 탄압과 티베트어 말살 등 민족 정체성을 지워버리려는 ‘공작’이 진행됐다. 한족(漢族) 노동자와 군인 등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티베트를 식민지화하는 작업도 줄기차게 진행 중이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 후폭풍이 거센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의원 7명이 ‘논란의’ 티베트 방문을 강행했다. 단장 격인 도종환 의원은 ‘제5회 시짱관광문화국제엑스포’의 부대 행사로 17일 열린 키노트포럼에 참석해 축사까지 했다. 도 의원은 티베트 방문에 비판적인 국내 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부정 여론을 만들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나머지 6명의 의원도 이번 방문을 전후해 시종일관 “정치와 무관한 관광·문화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평소 ‘소수자 인권의 옹호자’이자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언행치고는 무개념하다. 최근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현상 중에 ‘그린 워싱(Greenwashing)’ ‘스포츠 워싱’이라는 것이 있다. 악덕 기업이 ‘눈속임’성 친환경 행보로 이미지를 분칠하거나, 인권 침해 논란에 휩싸인 국가가 사람들의 이목을 혹하게 만들 만큼 화려한 스포츠 행사로 ‘이미지 물타기’를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혁주의자인 후야오방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1980년 중국이 티베트에 저질러 놓은 참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티베트를 둘러싼 어두운 역사를 지금의 중국은 어떻게든 지우고 덧칠하려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개발워싱’ ‘관광워싱’ ‘문화워싱’이다. 이를 통해 중국이 만들어 내려는 티베트상(像)은 2021년 10월 당시 왕이 외교부장이 했던 연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티베트는 중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티베트는 개방과 협력의 중요한 창구입니다. … 시짱관광문화엑스포 등이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이웃 국가들과의 일대일로 협력은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 우리는 티베트의 발전과 진보에 대한 어떠한 공격이나 비방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수사와는 달리 티베트의 인권은 여전히 후진(後進)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월 일본 히로시마에 모인 주요 7개국(G7) 정상들은 티베트와 신장 지역의 강제 노동에 대한 우려를 공동선언문에 담았다. 또 미 국무부는 5월 공개한 종교의 자유에 관한 보고서에서 티베트불교 등 종교단체에 대한 재정 감시 강화 등을 거론하며 중국을 ‘세계 최악의 인권 및 종교자유 침해국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티베트의 실질적 1인자이자 이번 박람회의 주최자 격인 왕쥔정(王君正) 시짱 당서기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당 부서기와 신장생산건설병단 서기를 지낸 왕쥔정은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돼 2021년 3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 대상 명단에 오른 전력이 있다. 정치·외교 무대에서는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장면,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도 의원은 심각한 인권 침해로 국제사회의 손가락질을 받는 인물이 주제 연설을 한 그 시각, 그 자리에서 ‘한국 의원 대표단 단장’ 타이틀을 걸고 축사를 한 자신의 행동이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갖게 될지를 스스로 숙고해 보기 바란다. 2009년 이후 지금까지 승려를 비롯한 티베트인 159명이 분신(焚身)을 했다. 이들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 가면서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7명의 민주당 의원들 귀에는 가서 닿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6-19 00:03
[천광암 칼럼]‘대결의 정치’가 연 대재앙의 門 ‘타협의 정치’가 닫았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상·하원을 거쳐 넘어온 부채한도 유예 법안에 3일 서명했다. ‘미국 정부의 디폴트’를 불과 이틀 앞두고서다. 그런데 만약 이 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됐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세계적 신용평가회사인 S&P는 72년 역사에서 딱 한 차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조정한 적이 있다. 2011년 8월의 일이다. S&P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그 여파로 미국의 주요 주가지수가 하루 새 6% 이상 폭락하는 등 세계 증시 전체가 ‘검은 월요일’을 맞았다. 미국 정부의 디폴트는 신용등급이 하루아침에 ‘20단계 아래’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 세계 경제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대혼돈에 휩싸이게 됐을 것이다. 이런 대재앙의 문을 열어젖히려 한 것도 정치였고, 문을 닫은 것도 정치였다. 전자는 ‘대결과 극단의 정치’였고, 후자는 ‘타협과 중도의 정치’였다. 정부의 부채한도를 의회가 정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미국과 덴마크 두 나라뿐이다. 그나마 덴마크에서는 사문화한 조항이고, 미국에서도 2011년을 제외하고는 심각하게 논의된 전례가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부채한도’는 이 금액 안에서 정부가 마음대로 돈을 쓰라는 뜻이 아니다. 이미 의회가 심사하고 승인한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빚을 낼 일이 있으면 그 한도 안에서 하라는 제도다. 이런 제도가 없어도 행정부가 의회의 통제권을 벗어날 일은 없다. 그런데도 부채한도가 ‘갈등의 핵’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극단주의로 치닫는 미국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오바마 정부 시절이던 2010년 미국에서는 강한 보수 성향을 띤 티파티(Tea Party) 바람이 거셌고, 이는 그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결과로 이어졌다. 티파티 세력이 2011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위해 정치적 무기로 들고나온 것이 ‘부채한도’다. 올해 상황도 그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번에 부채한도를 놓고 벼랑 끝 공세를 편 정치세력은 ‘티파티’의 후신으로 극단주의 성향이 더 짙어진 ‘프리덤 코커스’ 그룹이다. 이들은 케빈 매카시 의원(공화당)이 하원의장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투표를 14차례나 부결시키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었다. 의회 주요 위원회의 요직을 보장받은 것은 물론이고 의원 한 명만 동의(動議)해도 의장 사퇴를 표결에 부칠 수 있는 조항을 관철시켜 매카시 의장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이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매카시 의장이 타협에 응하지 않도록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왔다. 매카시 의장은 강경 우파의 반발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혼돈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합의안에 서명했다. 다행히 파국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공화당 의원은 매카시 의장 혼자가 아니었다. 하원에서만 149명의 공화당 중도파 의원들이 부채한도 유예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해서 타협 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 나온 ‘재무부가 1조 달러(약 1310조 원)짜리 동전을 주조하는 것과 같은 해법’도 궁여지책이긴 하나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타협에 대한 당내 강경파들의 반발도 거셌다. “우리는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 왜 공화당이라는 경제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려 하는가”라고 외치는 민주당 의원도 있었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타협을 선택했고 백악관 고위 참모들이 나서서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도록 했다. 매카시 의장과 타협안을 도출한 이후에도 공화당 의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로키 전략’으로 일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매카시 의장과 잠정 합의안에 사인한 뒤 기자들과 만나 “아무도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타협안”이라며 “그것이 통치에 따르는 책임”이라고 말했다. 평범하고 상식적이지만 지당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다. 최근 국회를 거쳐 윤석열 대통령의 책상에 쌓이는 법안들은 ‘거부권 행사 대상’ 아니면 ‘여야 짬짬이 포퓰리즘’ 법안들뿐이다. 여야 모두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식으로 상식과 중도를 잃어버린 탓이다. ‘제로 성장’ ‘인구소멸’ ‘연금 파탄’으로 치닫는 대한민국의 발걸음을 돌려세울 협치 법안이 윤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오를 날이 과연 올지 걱정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6-05 03:00
[천광암 칼럼]‘코인 타짜’의 국회의원 놀이… 우리끼리 “프로테고 막시마”가상화폐는 가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사를 국내에서 꼽으라면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그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2018년 1월 30일 김어준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밝힌 적이 있다. 유 전 이사장은 가상화폐 투자는 한마디로 ‘도박’이자 ‘다단계 사기’라고 잘라 말한다. 절반 인터뷰, 절반 대담처럼 진행된 방송에서 김 씨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화는 “사기다”(유 전 이사장) “사기에 가깝다”(김 씨)로 마무리됐다. 실제로 최근의 코인시장의 상당 부분은 사기꾼, 다단계업자, 시세조종 기술자, 사채업자들이 활개 치는 ‘투전판’으로 변질돼 가는 중이다. 이른바 ‘러그 풀(Rug Pull)’이라는 사기극이 빈발한다. 러그 풀이란 겉으로만 그럴싸한 프로젝트를 하나 만들어서 투자자를 끌어모은 뒤 높은 가격에 팔아치우고 일제히 ‘잠수’를 타는 ‘먹튀 사기’다. 양탄자 위에 사람을 올라가게 한 뒤 확 잡아빼서 넘어뜨리는 것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러그 풀 작업의 최적 소재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디파이(탈중앙화 금융)’다. 신생 잡(雜)코인은 대개 대형 거래소에서 사고팔 수가 없기 때문에 큰손들이 코인을 묻어 ‘사설 거래소’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을 흔히 ‘유동성 공급자(LP)’라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위믹스 코인 34억 원어치를 교환해서 LP 투자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 클레이스타가 바로 디파이 서비스를 통해 거래되는 코인이다(업체 측은 러그 풀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러그 풀을 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김 의원이 이런 고위험-고난도 투자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국회의원의 코인 투자 부업’이라기보다는 ‘코인 타짜의 국회의원 놀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상임위 회의시간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코인 거래를 했다는 자체가 이런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유 전 이사장의 견해를 원용하자면 수십억 원의 판돈을 걸고 평시와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하우스’를 찾았다는 자체가 ‘프로 도박꾼’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럼에도 민주당과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김 의원 감싸기가 끊이지 않는다. 민주당 박찬대 최고위원은 15일 페이스북에 ‘프로테고 막시마’라는 문구를 띄웠다.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말로 악마들로부터 거대한 보호막을 치는 주문이다. 또 같은 당 유정주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사냥하지 말자. 상처 주지 말자. 우리끼리라도!’라는 문구를 올렸다. 이어 19일에는 “비트코인 자체가 사회악이 되는 것이 안타깝다”며 “비트코인은 청년들에게 불안과 앞날을 준비하고픈 열망의 단면 자체”라는 글을 게시했다. 또 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은 19일 라디오에 출연해서 “코인에 투자하는 국민이 600만 명이 넘고, 자산을 불리지 못해 실망에 빠진 청년들이 많다는데 코인 투자가 비도덕적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김 의원을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청년이나 600만 명의 코인 투자자들 중 ‘한 명’으로 비치게 하려는 게 두 의원의 속셈인지 모르지만 속아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고위험 코인에 수십억 원을 아무렇지 않게 지르고, 여러 가지 의혹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김 의원의 코인 투자를 거론하면서 청년들의 불안과 앞날을 운운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청년 팔이’다. 이들보다 더 강력한 ‘프로테고 막시마’ 주문을 건 인물은 앞서 가상화폐를 ‘사기에 가깝다’고 한 유튜버 김어준 씨다. 두 차례에 걸쳐 김 의원을 불러 해명 인터뷰 장을 열어준 김씨는 10일 방송에서 “김남국 의원 60억 가상화폐 사건은 검찰이, 혹은 보수매체가 정치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키우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게 가능한 토대가 진보는 도덕성 이걸 스스로 자기 굴레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며 진보의 도덕성을 탓한다. 그러면서 김 씨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돈 많이 버는 것과 진보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룰’만 지키면 되는 거예요.” 김 씨의 말을 듣고 든 두 가지 의문이다. 첫째, 도박판이든 다단계 사기판이든 그 세계의 ‘룰’만 지키기만 하면 문제가 없는 돈벌이라는 말인가. 두 번째 궁금증은 진보의 도덕성을 ‘떨이’로 처분해 버릴 자격을 누가 김 씨에게 줬는지 하는 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5-22 03:00
[천광암 칼럼]토론 잘하는 ‘영업사원’은 없다영업사원의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토론에 이기면 상담(商談)이 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담(商談)은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다. 반면 토론은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서로의 주장이 맞부딪치고 결과로써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비록 옳은 말이라도 자신을 이기려 들거나 아픈 곳을 찌르는 영업사원에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가 간의 비즈니스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마치 ‘상담(商談)의 시대’에서 ‘토론의 시대’로 옮겨가는 듯한 양상이다. 공동의 이익보다는 대만 문제나 ‘장진호 전투’처럼 상호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슈가 전면에 부상했다. 주고받는 말의 수위도 예사롭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지자면, 윤 대통령이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국익의 관점에서 필요한 말인지 필요하지 않은 말인지, 이득이 되는 말인지 손해가 되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해볼 여지가 많다. 우리에게 중국은 대체 가능한 시장인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2001년만 해도 중국(홍콩 포함)과의 무역이 한국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5% 정도였다. 미국 일본 두 나라와의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33.2%)에는 절반도 못 미쳤다. 하지만 2007년 그 비중이 22.8%로 미국과 일본을 합한 비중(22.7%)을 추월했다. 지금도 중국이 미국과 일본 두 나라를 합한 것보다 규모가 큰 무역상대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중국을 대체하는 시장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음으로 한중 간의 교역은 일대일 수평적인 관계인가. 2020년을 기준으로 중국과의 무역액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대(對)중국 무역의존도는 16.3%에 이른다. 이에 비해 중국의 대한(對韓) 무역의존도는 1.9%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통상 갈등이 빚어졌을 때 한국은 중국보다 8배 이상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안보 문제와 달리 무역마찰에는 동맹인 미국도 이렇다 할 우군이 되지 못한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이후 롯데 등 한국 기업들이 받았던 보복 조치와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한한령의 전개 양상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 ‘노(NO)’를 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대놓고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위태로운 행동이다.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주 사례가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 모리타 창업주는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워크맨’ 등 숱한 마케팅 신화를 쓴 경영인이다. ‘일본 주식회사’의 ‘대표 영업사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말년에 돌이키기 어려운 큰 실수를 했다. 1989년 극우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더불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쓴 일이다. 이 책은 당시 소니의 컬럼비아영화사 매입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키워가던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모리타 창업주 자신도 이 책을 쓴 일을 후회한 나머지 영문 번역본에는 자신의 이름과 원고를 모두 빼도록 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쑥대밭으로 만든 미국의 ‘보복’도 이 책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힘이 부족할 때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지혜다. 과감한 개혁개방으로 ‘경제대국’의 토대를 닦은 덩샤오핑이 좋은 본보기다. 1990년대 초 소련 붕괴를 앞두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중국이 국제사회의 리더로 나서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에 덩샤오핑이 내놓은 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키운다는 뜻으로, 덩샤오핑이 부연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도광양회는 우리나라의 기본 상황과 국제적 역량을 대비하는 현실에서 출발해 큰 뜻을 품고 또 약점을 잘 감추면서,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을 과시하는 것, 스스로 표적이 되는 것, 스스로 지른 불에 타 죽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미국이 국운을 걸고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탈(脫)중국’은 동맹인 한국으로서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나서서 중국의 ‘타깃’이 될 이유는 없다. 중국도 미국을 상대로 할 말을 하기까지는 30년의 도광양회가 있었다. 아직은 토론보다 상담(商談)이 필요한 때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5-08 03:00
[천광암 칼럼]‘바이든 동맹열차’ 승객들… 윤석열 vs 마크롱·모디·숄츠2000년 이후 작년까지 미국이 ‘국빈방문(state visit)’ 형식으로 외국 정상을 맞은 것은 모두 18차례다. 1년에 한 번꼴이 채 안 된다. 2013년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청 의혹에 분노해 국빈방문 직전에 전격 취소한 일이 있긴 했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최상의 예우와 대접을 받는 일이다 보니, 성사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외교적 성과가 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위해 오늘 미국으로 향한다. 이번 방문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대(對)중국, 대러시아 외교 관계의 중요 전환점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를 놓고 한-미 대 중-러 간에 격렬하게 벌어진 전초전이 예고하는 바다. 대통령실은 대만-우크라이나 관련 윤 대통령의 발언은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이라는 입장이다. 중-러의 괜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이다. 발언의 득실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크게 다르다. “미국 중심 동맹열차의 앞자리에 올라타야 한다”는 ‘전략적 명확성’ 옹호론과, “중-러와 각을 세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라는 ‘전략적 모호성’ 옹호론이 교차한다. 미국과 중-러의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황이고, 양자택일이 가져올 결과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쉽게 결론을 낼 일은 아니다. 이런 때 미국과 중-러 간, 전략적 명확성과 전략적 모호성 간의 갈림길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행보는 우리에게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00년 이후 미국을 유일하게 두 번 국빈방문한 국가원수다. 미국으로선 최선의 호의를 베푼 셈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은 미국 독립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관계다. 그런데도 마크롱 대통령은 이달 초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만 문제와 관련해서 “유럽은 미국의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되며, 유럽의 것이 아닌 위기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유럽과 미국은 다르다’는 ‘전략적 자율성’론이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과 윤 대통령에 이은, 바이든 정부의 세 번째 ‘국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도는 미국이 중국의 인도·태평양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이는 나라 중 하나다. 미국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다자안보협의체 ‘쿼드’의 멤버다. 하지만 인도는 미국 등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결정적인 ‘구멍’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전 발발 후 러시아산 석유를 중국 다음으로 많이 수입하고 있고, 인도 루피-러시아 루블의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금융제재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까지 논의하는 중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해 10월 유럽연합(EU) 정상들과 함께 중국을 “적대적 경쟁자”라고 선언해 놓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80년 혈맹’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간청을 뿌리치고 산유국들의 유가 기습 인상을 주도해 인플레 전쟁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외로워지고 있다”는 로런스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의 최근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미국의 주요 동맹 리더들이 ‘바이든 동맹열차’의 앞자리를 굳이 비워 두는 이유는 미국과 정서적으로 덜 친밀해서도, ‘바보’여서도 아닐 것이다. 미-중 간 ‘디커플링(Decoupling)’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데다 도를 넘어선 ‘메이드 인 USA 우선주의’가 동맹국들의 국익과 충돌하는 부분이 점점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이미 미국의 반도체법이나 인플레감축법(IRA) 발효 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안보 현실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동맹’과 ‘국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싫든 좋든 아직은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라는 현실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 70년간 피로 나눈 한미의 진한 유대와 우정을 확인하는 샴페인 잔이 오가는 순간에도, 윤 대통령이 국익을 위한 주판과 계산기만큼은 치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방미 성과를 내는 만큼이나 국빈방문의 ‘사후 청구서’를 줄이는 일도 중요하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4-24 03:00
[천광암 칼럼]3자녀 병역 면제, 밥 한 공기, 주 69시간미국 인디애나대 연구에 따르면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존재해온 25만여 년 동안, 첫아이를 본 아버지의 평균 나이는 30.7세였다고 한다. 만혼(晩婚)이 일상화된 2023년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국 남성은 대개 20대 초반에 군대에 간다. 제대 후 ‘취업운’이 순탄하면 대졸자의 경우 26세 안팎, 비대졸자의 경우 23세 안팎에 첫 직장에 들어간다. 그런 다음 열심히 저축을 해서 전셋집 한 칸이라도 마련할 여유가 생기는 33, 34세 정도에 결혼을 한다. 첫아이는 30대 중반은 돼야 보게 된다. 설령 입대를 미루고 결혼부터 서두르려 해도 심각한 취업난·주택난이 앞을 막는다. 첫아이를 보는 나이가 ‘호모사피엔스 평균’에 도달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의힘 정책위원회에서 나왔다는 ‘30세 전 아이 셋 낳은 아빠 병역 면제’ 아이디어는 이런 점에서 현실성이 전혀 없는 탁상공론이다. 사전에 길 가는 청년 서너 명만 붙잡고 물어봤어도, “왜 애는 여자가 낳는데 혜택은 남자가 보느냐”와 같은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당 민생특위에서 나왔다는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운동’ 아이디어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령에 힘겹게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생각하면 매년 쌀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쌀 소비 감소가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남기는 여성들 때문은 아니다. 밥상에서 쌀을 밀어내는 ‘주범’을 굳이 찾자면 다이어트가 아니라 고기다. 2012년까지만 하더라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등 육류보다 29.2kg이나 많았다. 하지만 ‘밥보다 고기’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작년을 기점으로 육류가 쌀 소비를 추월했다. 그렇다고 ‘고기 덜 먹기 운동’을 해서 쌀 소비를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쌀 소비를 늘리자는 논의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쌀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양곡관리법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이상 희화화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주 69시간’ 논란에서 보여준 갈팡질팡과 정책 난맥상은 더 심각하다. 노동개혁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 중에서도 현 정부가 첫손가락에 꼽는 핵심 과제다. 주 52시간제 개편안은 그중에서도 ‘1호 법안’이다.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윤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고 정부 안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시작된 것도 지난해 6월부터다. 3대 개혁은 비단 중요하다고 해서만 3대 개혁인 것이 아니다. 계층 간, 세대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다 보니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모순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여있는 영역이다. 그만큼 어려운 숙제라는 의미다.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과의 충분한 사전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대의(大義)만 앞서고 ‘디테일’이 없어서는 추진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반발이나 난관을 돌파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바뀌는 산업 환경에 맞춰 근로시간을 다양화하고 선택권을 확대한다는 제도 개혁의 취지를 전달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예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인 사례인 ‘주 69시간’이 마치 법안의 본질인 것처럼 여론이 흘러가는데도 전혀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가 해명이라고 내놓은 어설픈 카드뉴스는 거꾸로 비판 여론에 불을 질렀다. 결정적으로 윤 대통령과 대통령 참모들은 주당 근로시간 ‘60시간 상한’을 놓고 계속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국민의힘은 소수 여당이다. 윤석열 정부가 불리한 국회 의석 구조를 극복하고 국정 주도력을 발휘하려면 국민의 지지 외에는 달리 우군이 없다. 그러나 최근 한국갤럽 조사나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기관의 공동 조사를 보면, 윤 대통령의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나 주 52시간제 개편 모두에 대해 비판 여론이 긍정 여론을 압도한다. 최근 정부 여당이 연이어 쏟아낸 자책골과 정책 참사가 자초한 결과다. 윤 대통령은 최근 이 같은 난맥상을 수습하기 위해 당정 협의를 강화하라고 지시했지만, 당과 정부가 모두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협의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있을지 의문이다. 불신의 늪에 빠진 정책 신뢰성을 회복하려면, 우선 정부 여당이 바뀌려 한다는 믿음부터 심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단추가 철저한 자기반성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4-10 03:00
[천광암 칼럼]“50조 원 피해 코인 사기” 권도형, 차라리 미국으로?‘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지난주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됐다. 그는 작년 9월 인터폴 적색수배가 떨어진 이후에도 트위터를 통해 “죄도 없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위조여권까지 갖고 있었던 걸 보면, 영락없는 ‘도주 범죄자’의 행색이다. 그는 한국 검찰뿐 아니라 미국과 싱가포르 사법당국에도 쫓기는 신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검찰은 이미 그를 기소까지 한 상태다. 그가 설계한 ‘테라’는 일명 ‘스테이블 코인’이다. ‘스테이블(안정적이라는 뜻)’은 코인 1개의 가치가 항상 1달러가 유지되도록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테이블 코인이 이름값을 하려면 통상 발행된 코인의 총액만큼 달러화를 담보로 예치해 둬야 한다. 하지만 테라는 이런 담보가 없어도 ‘루나’라는 자매 코인과의 ‘알고리즘’을 통해 ‘1테라=1달러’를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권도형은 이런 허황된 이야기만으로는 투자자를 모으기가 어렵다고 봤는지, 연 20%짜리 코인 예금상품까지 내걸었다. 현란한 전문용어로 포장된 디지털 눈속임과 폰지 사기에서 흔히 보이는 고수익 미끼가 ‘테라-루나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었던 셈이다. 테라-루나는 한때 성공 가도를 걷는 것처럼 보였다. 코인의 가치가 100배 넘게 올랐고, 시가총액은 50조 원 이상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쌓아올린 성이 오래 버틸 리 없었다. 작년 5월 테라-루나의 안정성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자, 불과 일주일 만에 가격이 1만분의 1로 폭락했다. 시가총액 50조 원이 한순간에 증발했고, 국내에서만 20여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미국 SEC는 테라-루나 사태를 권도형이 주장하는 “실패”가 아니라 ‘증권 사기’라고 단언한다. SEC가 공개한 소장(訴狀)에 따르면 권도형은 2021년 5월 ‘1테라=1달러’가 무너지자 제3자에게 테라를 대량으로 매집하게 해서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러고선 마치 테라-루나의 알고리즘이 ‘자기회복력’을 발휘한 것처럼 선전했다. 폭락 사태로 “전 재산을 잃었다”는 그의 말 또한 거짓이었다. 지난해 6월 이후 스위스 은행을 통해 1억 달러 이상의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출한 사실이 SEC에 꼬리를 밟혔다. 그가 검거된 현시점에서 최대 관심사는 어느 나라에서 재판을 받게 되느냐는 것이다.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한국으로의 송환을 희망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에서라면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법원이 금융·증권 범죄를 얼마나 중한 범죄로 여기는지는, 2009년 70조 원대 다단계 금융사기로 기소됐던 버나드 메이도프가 징역 150년을 선고받은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 비하면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한국의 단죄와 처벌은 한마디로 ‘솜방망이’ 수준이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주가조작 등 증권 불공정 거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64명 중 40%에 해당하는 26명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사회적으로 크게 이목이 집중됐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만 하더라도, 1심 법원은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의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실패한 시세조종”이라는 이유를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검찰은 검찰대로 김건희 여사 관련 부분에 대해 수사 의지 자체를 의심받고 있다. 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등 이른바 ‘문재인 정권의 3대 펀드 사건’에 대해서도 부실수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권도형의 국적은 한국이다. 인터폴을 통해 먼저 적색수배를 건 것도 한국이다. 실낱같지만 피해 구제를 위해서도 권도형은 한국으로 데려올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권도형 체포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그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게 나은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2020년 미국 사법당국이 한국에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인 손정우에 대해 범죄인 인도를 요청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라면 징역 50년 이상의 중형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손정우는 결국 한국에서 재판을 받았고 징역 2년(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쳤던 상황)의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권도형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재연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철저한 수사를 통해 빈틈없는 증거와 법리를 갖춰야겠지만, 법원의 양형이나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3-27 03:00
[천광암 칼럼]“1호 영업사원” 윤석열, ‘퍼스트 비즈니스맨’ 바이든사업가를 뜻하는 영어 단어 ‘비즈니스맨(Businessman)’은 원래 영국에서 ‘공직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은 어떤 나라보다 공직과 비즈니스 간의 경계가 희미하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비즈니스다(The chief business of the American people is business).” 캘빈 쿨리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외교통이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한국과의 관계에서 보여 온 행보를 돌이켜 보면 ‘퍼스트 비즈니스맨’이라는 칭호가 가장 어울려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5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 대기업들로부터 44조 원의 ‘투자 선물 보따리’를 챙겼다. 이어 지난해 5월 하순에는 한국을 직접 방문해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 보따리’를 100조 원으로 키워서 가져갔다. 이런 투자 계획들이 구체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지난해 어떤 외국 기업보다 많은 일자리를 미국 안에서 만들어 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기업에 ‘러브콜’을 보낼 때마다 지원 약속을 빼놓지 않았었다. 지난해 방한 당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나서는 “투자에 보답하기 위해 실망시키지 않도록 지원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고,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방문해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양국 간 기술동맹을 통해 더욱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약속과 공언(公言)은 현재로선 ‘공수표’가 된 상태다. 현대차는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현대차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기습공격”이라고 평가했고, 현대차 공장을 유치한 조지아주 팻 윌슨 경제개발부 장관은 “불이익과 모욕”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나마 배터리 업체들은 IRA의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손을 잡고 ‘IRA 우회로’를 찾으면서 자칫하면 헛물만 켠 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반도체는 더 심각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로 각각 33조 원과 22조 원을 투자해 놓은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의 ‘업그레이드’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될 처지다. 여기에 더해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서 보조금을 받을 경우 영업기밀까지 들여다보겠다는 부대조건을 내걸었다. 이쯤 되면 미국의 ‘칼날’이 중국만 겨냥한 것인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까지 동시에 겨냥한 것인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운데,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의 최근 언행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러몬도 장관은 지난달 23일 한 강연에서 “난 미국이 모든 최첨단 반도체 생산 기업이 상당한 연구개발 및 대량 제조 시설을 둔 ‘유일한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작년 6월에는 러몬도 장관이 한국에 7조 원을 들여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던 대만의 반도체웨이퍼 업체를 미국으로 ‘가로채 간’ 일도 있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중증(重症)의 복합위기에 빠져 있다. 수출, 성장, 물가, 경상수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부진한 성적표를 한 달이 멀다 하고 갈아 치우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인 지표상의 부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이 미국에 최종 소비재를 내다 팔고, 한국은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데서 오는 구조적인 위기라는 점이다. 중국시장이 급속히 위축되는 와중에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줄 것 다 주고 뒤통수까지 맞는 현실에서는 한국 경제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4월 말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는 결코 허비해선 안 되는 기회다. 미중 간의 신냉전 구도 속에서도 ‘한국이 땅에 발을 딛고 설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 방미에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사실상 ‘밑장 빼기’로 변질돼 가는 IRA와 반도체법을 ‘공정한 법’ ‘동맹과 같이 가는 법’으로 돌려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퍼스트 비즈니스맨’을 상대할 수 있는 카운터파트는 한국에서 ‘1호 영업사원’뿐이다. 결국은 윤 대통령의 숙제라는 이야기다.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입 밖으로 꺼내 놓은 ‘말 빚’이 있기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3-13 03:00
[천광암 칼럼]번지수 틀린 이재명의 식량안보론한국은 2005년부터 매년 햅쌀 수천억∼1조 원어치를 사들여 창고에 쌓아 두는 ‘공공비축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 이와 별개로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나서서 과잉 생산된 물량을 사들이는 ‘시장격리제’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중순까지만 해도 10여 차례나 시장격리를 단행했고, 거기에 들어간 돈만 5조 원이 넘는다. 비축·격리로 창고에 재어둔 쌀은 3년쯤 뒤 매입·보관비용의 10분의 1이 조금 넘는 헐값에 가공용으로 처분된다. 이런 식으로 매년 1조 원이 훨씬 넘는 혈세가 허공으로 증발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현실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쌀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게 될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현행 양곡관리법에는 ‘쌀 시장격리’가 정부의 재량사항인데, 아예 의무조항으로 ‘대못질’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24일 “양곡관리법 처리를 반드시 매듭짓겠다”고 강조하면서 주된 명분 중 하나로 ‘식량안보’를 내세웠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식량안보’의 정의는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이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식습관과 음식선호를 충족시키는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식탁에 물리적·경제적으로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식량안보의 정의다.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은 ‘음식선호’다. 어떤 비상상황에서도 밥, 잡곡, 라면, 빵, 고기, 야채 등을 식탁에 골고루 공급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식량안보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식량안보는 극히 취약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지나친 쌀 편중 때문이다. 쌀은 매년 초과공급 물량을 처리하느라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나머지 작물의 자급률은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2020년 기준으로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고 옥수수와 콩도 각각 4.2%와 23.7%에 그친다. 한정된 재원으로, 쌀에 지금처럼 많은 돈을 쏟아붓다 보면 밀·콩·옥수수 등 다른 작물의 자급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 대표가 쌀 과잉생산을 더 심화시킬 개정안을 강행하는 명분으로 “식량안보” 운운한 것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9월 민주당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는 경우를 가정해 추산한 바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30년까지 초과생산된 쌀을 ‘시장격리’시키는 데 매년 평균 1조443억 원의 재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일부 민주당 의원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함께 포함돼 있는 ‘쌀 생산조정제’(타 작물 재배 지원사업)의 효과 때문에 쌀 생산이 줄어들어 시장격리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가당착이다. 쌀 시장격리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굳이 재량사항을 의무사항으로 바꿀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공공비축과 시장격리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자원 낭비인지는 쌀 소비량이 우리의 2배가량인 일본과 비교해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생산분의 경우 한국은 공공비축용과 시장격리용으로 각각 45만 t씩 총 90만 t을 사들였다. 이에 비해 일본은 20만 t을 공공비축용으로 사들였다. 정부 예산으로 남아도는 쌀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시키는 제도는 아예 없다. 개정안을 ‘악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법안이 담고 있는 ‘메시지’ 때문이다. 개정안의 내용은 쌀을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과잉생산 물량을 정부가 사들여서 가격을 떠받칠 테니 마음 놓고 쌀농사를 지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쌀 과잉생산의 악순환이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민주당이 국회의장의 중재를 받아들였다며 내놓은 수정안도 본질은 매한가지다. 숫자 몇 개 바꾸고 조건 한두 개 더 붙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 대표는 2021년 2월 25일 대선후보 토론에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상대로 마치 가르치기라도 하듯 “식량안보란 밀, 콩 같은 전략식량에 대해 지원금을 준다는 뜻”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정된 재정 여건상 밀, 콩 같은 전략식량을 지원하려면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는 쌀 시장격리 의무화 조항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작 자신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정치지도자가 아닌 요설가의 행동이다. 이 대표가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한국의 식량안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2-2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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