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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칼럼]2030은 모르겠고 표는 얻고 싶은 민주당‘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더불어민주당이 23일 공개될 ‘새로운 민주당 캠페인―더민주 갤럭시 프로젝트’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티저’용으로 준비했다가 논란이 된 현수막 문안이다. 17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도 보고됐고, 각 시도 당 위원회 등에도 관련 공문이 내려갔다고 한다. 민주당 설명에 따르면 이 캠페인은 ‘개인성과 다양성에 가치를 두는 2030세대’를 주로 겨냥한 것으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나에게 쓸모 있는 민주당’으로 변화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즉 내년 총선을 앞두고 2030 청년세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마련한 전략적 캠페인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민주당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현수막은 당내에서조차 청년세대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파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민주당 내 ‘청년당원 의견그룹’이 17일 “근래 민주당의 메시지 가운데 최악, 저질”이라는 격한 논평을 냈을 정도다. 같은 날 당직자와 보좌진들이 모인 당 홍보국 단체대화방에도 “문구가 너무 시대착오적”이라는 등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파문이 커지자 민주당은 19일 뒤늦게 홍보 문구를 교체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문안은 업체가 준비한 시안”이라며 “당이 개입한 사안은 아니다”라는 해명을 내놨다. 최고위원회의에 보고되고 시도 당 위원회에 공문까지 내려갔는데, 해명치곤 구차스럽다. 민주당이 청년과 관련된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에는 민주당 후보였던 박영선 전 의원이 낮은 20대 지지율에 대한 설명으로 “20대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과거의 역사에 대해 30, 40대나 50대보다는 경험한 경험 수치가 좀 낮지 않냐”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됐다. 이에 앞서 20대 남성의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던 2019년에는 설훈 의원과 홍익표 의원의 ‘민주화 교육 부족’, ‘반공 교육’ 발언이 문제가 됐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개인 차원에서 나온 실언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이번 현수막 게시는 개인이 아닌 당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라는 점에서 좀 더 심각하다. 청년당원들 모임인 ‘파동’이 “지금까지 우리 정치사에서 어느 정당이 당의 이름을 내걸고 한 세대를 조롱한 적이 있던가”라고 개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이번 현수막은 내용 면에서도 종전 발언들에 비해 문제의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우선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라는 문구 속에 상정된 청년들의 초상(肖像)은 정치가 만들어 나가는 국가와 공동체의 운명이나 미래에는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삶만 나아지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모습이다.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라는 문구 속에 비치는 청년들의 초상도,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나 요행을 바라는 일그러진 모습이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지금의 2030은 과거 어느 세대보다 공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세대다. 불이익도 참지 않지만, 나만의 특혜도 바라지 않는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나만의 요행이 아닌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공정한 기회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이런 청년들을 모독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물론 민주당이 일부러 청년세대를 비하하기 위해 이런 현수막을 내걸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나 경제를 모르는 사람도 잘 살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정당이 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알고, 고민하고, 참여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주권자의 소중한 권리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정책과, 당장은 입에 달지만 결국 ‘나랏빚’으로 쌓여 언젠가 자신의 부담으로 돌아올 싸구려 ‘포퓰리즘’ 정책을 구별해 내려면 경제를 몰라서는 안 된다. ‘정치나 경제를 몰라도 괜찮다’는 건 당당한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포퓰리즘의 제물이 되라는 이야기다. 기회만 있으면 ‘참여’를 말하는 정당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앞서 ‘파동’의 논평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민주당이 진정으로 청년세대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면, 어설픈 ‘현수막 마케팅’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민생 정책’을 선보이기 바란다.” ‘2030은 모르겠고 표는 얻고 싶다’는 식의 민주당 기성세대가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11-19 23:51 
[천광암 칼럼]윤석열 대통령이 김행 장관후보자를 빨리 ‘손절’해야 하는 이유윤석열 대통령이 인사청문회가 끝난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명을 7일 강행했다. 이 중 신 장관은 현 정부 들어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18번째 장관급 인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야당이 과거 ‘막말과 편향적’ 역사관을 문제 삼으면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관심사는 23년 인사청문회 역사상 처음으로 ‘36계 줄행랑’ 파문을 빚은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임명을 윤 대통령이 강행할지 여부다. 김 후보자는 스스로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다. 2009년 온라인 뉴스 사이트 ‘위키트리’를 공동 창업했고, 2013년 청와대 대변인이 되면서 주식을 처분했지만, 2018년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주식을 재인수했으며, 이후 탁월한 경영 수완을 발휘해 불과 4, 5년 만에 기업 가치를 79배로 키웠다는 것이다. 회사 성장 과정에서 선정적이고 성차별적인 저질 기사를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방식으로 ‘돈벌이’를 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은 경영자여서 직접 기사를 쓰거나 보지 않았으며 “이게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말했다. 공직자의 기본 자질에 해당하는 책임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낯 두꺼운 자기변명이자 억지다. 문제의 기사가 한두 번에 그친 것이라면 해당 기자의 책임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기사가 반복적이고 상습적으로 나왔다면 회사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고 끌고 나가는 경영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안 된 것은 남 탓, 잘된 것은 내 덕’이라는 자세로 대한민국의 여성·청소년 정책을 책임지는 여성가족부 장관직을 어떻게 맡을 수 있겠는가. ‘주식 파킹’ 의혹은 더 심각하다. 김 후보자는 2013년 위키트리 주식을 시누이에게 매각했다가 나중에 되산 것에 대해 불법적인 파킹이 아니라 선의에서 이뤄진 정상 매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검사 출신이면서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인 김웅 의원조차도 “99.9% 주식 파킹이며 수사 대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설령 법률 영역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언론 검증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나온 김 후보자의 잦은 말 바꾸기만으로도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진 상황이다. 그가 앞으로 무슨 해명을 내놓는다 해도 이미 눈덩이처럼 커진 의혹을 해소하기는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이런데도 윤 대통령이 김 후보자 지명을 강행한다면 정치적으로도 두고두고 큰 짐이 될 것이다. ‘윤석열 검찰’은 2019년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단골 미용사 명의로 차명 주식투자를 한 혐의 등으로 기소한 적이 있다. ‘차명 주식투자’가 ‘주식 파킹’의 다른 이름이다. 조 전 장관이 최근 “정 전 교수 차명주식 의혹을 수사하듯이 김행 후보자 및 그 배우자, 친인척을 수사하라”며 마치 좋은 기회라도 만난 듯 공세를 펴고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 윤 대통령이 김 후보자 임명을 강행할 경우, ‘인사청문회 제도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든 대통령’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전임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장관급 인사 34명을 국회가 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가운데 독단으로 임명하긴 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대통령도 국회 인사청문회장에서 제 발로 뛰쳐나간 장관 후보자를 임명했다는 기록을 남긴 적은 없고, 그럴 일 자체가 없었다. 인사청문회 제도의 역사가 230년이 넘는 미국에서조차 전무했던 일이다. 미국에서라면 의회모욕죄로 형사처벌을 받았을 사안이다. 혹자는 정책을 위주로 인사청문회를 진행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인사청문회가 지나치게 개인의 도덕성이나 사생활 문제로 흐른다고 지적한다. 틀린 이야기다. 미국의 경우 장관 후보자로 지명이 되면 연방수사국(FBI)이 나서서 심한 경우 2개월 이상 사생활을 샅샅이 캔다. 이혼한 전처나 전 직장 동료를 만나 주량과 술버릇, 이성 문제, 심지어 양말 사이즈까지 조사해서 백악관과 의회에 보고한다. 정책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음주 등 사생활 문제로 낙마한 사례가 실제로 적지 않다. 김 후보자가 여성가족부를 이끌 정책 능력이나 비전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이미 제기된 의혹과 인사청문회에서 보인 행태만으로도 ‘부적격’ 판단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나마 서둘러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 윤 대통령에게 지워진 인선과 검증 책임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10-08 23:51 
[천광암 칼럼]김만배 음성파일… ‘악마의 편집’과 ‘국가반역죄’ 사이뉴스타파가 작년 대통령 선거를 3일 앞두고 보도했던 ‘김만배 음성파일’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대통령실과 여당, 검찰은 음성파일이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 사전에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만배 씨가 대화 상대방인 신학림 당시 뉴스타파 전문위원에게 책 3권 값으로 건넨 1억6500만 원이 ‘거짓 인터뷰’의 대가라는 것이다. 당시 뉴스타파의 보도는 2011년 당시 대검 중수 2과장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저축은행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영수 전 특별검사의 부탁을 받고 조우형이라는 인물의 혐의를 무마해줬다는 내용이다. 조 씨는 대장동 초기 사업비 1100억 원을 부산저축은행에서 끌어오고, 그 대가로 10억 원의 뒷돈을 챙긴 인물이다. 중수부 수사에서는 처벌을 피했지만 4년 뒤 이 건으로 수원지검에서 기소돼 실형을 선고 받았다. 파문이 커지자 뉴스타파는 ‘기획 인터뷰’ 의혹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72분짜리 녹음파일 원문을 7일 공개했다. 하지만 혹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격이 됐다. 기획 인터뷰 논란과는 별개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짜깁기해 ‘악마의 편집’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편집은 윤석열 중수 2과장이 조 씨에게 직접 커피까지 타줘가며 형식적인 조사를 한 뒤 수사를 무마해줬다고 들리게 돼 있다. 그러나 원본을 보면 ‘주어’가 윤석열 2과장이 아니라 직원들과 박모 검사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뉴스타파 측은 “커피를 누가 타줬는지는 핵심이 아니며, 담당 검사가 과장의 허락 없이 사건을 덮을 수 있겠느냐”는 식의, 황당한 사후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뉴스타파 측은 보도 경위를 설명하면서 “관련 의혹들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던 내용으로 새로운 것이 없으며, 김만배 스스로의 육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 씨의 발언을 최대한 충실하게 소개했어야 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짜 맞춰 앞뒤 잘라내고, 주어를 바꾸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조작일 뿐이다. ‘담당 검사가 봐줬는데 실상은 중수 2과장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제작진의 추론과 ‘중수 2과장이 직접 부탁을 받고 사건을 없애 버렸다’는 당사자의 직접 진술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파일 원문을 들어보지도 않고 뉴스타파가 공개한 편집본을 인용해 의혹을 전파하거나 확대 재생산한 매체들의 태도도 저널리즘의 기본이나 보도윤리에서 크게 벗어났다. 특히 MBC는 문제가 많다. 당시 MBC 보도에는 국민의힘 측에서 “녹음파일에 끊긴 흔적이 있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선 이틀 전이라는 민감한 시점에, 짜깁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을 네 꼭지나 할애해서 보도한 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철저한 경위 조사와 진솔한 반성, 실효성 있는 재발 방지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응분의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다만,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이번 건을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의 국가반역죄”로 규정하고, 당이 나서서 뉴스타파, MBC, JTBC 등의 전현직 취재기자들을 다짜고짜 고발부터 한 것이 적절한 대응인지는 의문이다. 우선은 해당 언론사들의 자체 조사와 상응 조치를 지켜보고, 사법적인 대응에 나서도 늦지 않다. 여권의 대응이 도를 넘게 되면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을 길들이려 한다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 대표는 원내대표 시절이던 2021년 더불어민주당이 강행하려던 ‘언론중재법’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반대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고 강조했었다. 일부 잘못된 보도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짜 뉴스는 명확한 진실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12월 대선후보 관훈토론 등에서 부산저축은행 관련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자세히 해명해 왔다. 하지만 어렴풋한 기억, 전언, 당시 관행 등에 근거한 설명이 적지 않았다. 10억 원의 뒷돈을 챙긴 조우형이 중수부에 불려 가고도 입건조차 되지 않은 것은, 설령 김만배 음성파일이 조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실 규명 절차가 뒤따르지 않으면 앞으로도 의혹과 논란이 꼬리를 물 가능성이 크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9-11 00:03 
[천광암 칼럼]기초과학 잡는 “R&D 카르텔 타파”… ‘노벨상 0’ 국가의 자충수인공지능(AI) 바둑 ‘알파고’가 선보인 것은 2016년 초다. AI 반도체로 유명한 엔비디아의 당시 시가 총액은 약 160억 달러. 전 세계 반도체 기업 가운데 13위였다.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난 지금 엔비디아의 시총은 75배인 1조2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전 세계 반도체 기업 중 1위. 인구 2억7753만 명의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금액이다. 바야흐로 AI 붐이다. 포털, 자동차, 유통, 반도체, 바이오, 미디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 글로벌 기업들이 사활을 건 AI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AI 인재 확보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미국에서는 ‘연봉 12억 원’ 공개 채용공고까지 나붙었다. 어디든 ‘AI’라는 수식어만 붙으면 사람이 몰리고 돈이 붙는다. 하지만 AI가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한 봄날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약 반세기에 가까운, 길고도 추운 ‘겨울(AI winter)’이 있었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신경망 AI’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7년이다. 신경망 AI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당시 주류 학자들의 반응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런 데다 눈앞의 성과도 보이지 않자 초기 AI 연구 지원의 ‘큰손’이었던 영국과 미국 정부는 이후 수십 년간 자금줄을 끊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돈도 안 되고 가망도 없는’ AI 전문가들을 데려다가 “마음껏 연구하라”고 지원해준 나라가 캐나다다. 그곳으로 향하는 행렬 속에는 제프리 힌턴 교수(토론토대)도 포함돼 있었다. 힌턴 교수는 토론토대에 뿌리를 내린 지 19년 만인 2006년 ‘심층신경망(딥러닝)’을 개발해 ‘AI 혁명’에 결정적 돌파구를 열었다. 연구자들의 순수한 호기심을 조건 없이 지원한 캐나다 정부 덕분에 오늘날 토론토, 몬트리올, 에드먼턴 등은 세계적인 ‘AI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토론토는 2016∼2021년 미국을 포함한 북미 지역에서 ‘테크 일자리’가 가장 많이 늘어난 도시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9월 ‘AI 강국’에 대해 ‘한 수’ 배우기 위해 달려갔던 곳도 토론토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인물이 힌턴 교수다. 힌턴 교수는 당시 만남에서 ‘AI 암흑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캐나다 정부의 노력을 거론하며 AI 발전의 결정적 키워드 중 하나로 “정부 지원”을 꼽았다. 힌턴 교수가 인터뷰 등을 통해 꾸준히 밝혀 온 내용을 보면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원 중에서도 학자의 호기심이 바탕이 된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이다. 구체적인 성과를 닦달하는 ‘목표 중심형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은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정부가 22일 발표한 내년 R&D 예산안을 보면 힌턴 교수의 조언과는 거꾸로 가는 듯하다. 우선 총액에서 내년 주요 R&D 예산은 올해보다 3조4000억 원이 깎였다. 혈세 낭비는 막아야 한다지만 ‘선거용 토건 사업’은 마구 끼워 넣으면서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R&D 예산부터 손봐야 했나. 특히 구체 내역을 보면 기초연구 분야에서 6.2%를 깎았고, 정부 출연연 예산에서 10.8%를 삭감했다. ‘R&D 카르텔 타파’가 명분이다. 대신 바이오, AI, 이차전지 등 국가전략기술, 즉 ‘목표 중심형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한다. 힌턴 교수의 경우도 그렇지만 하이테크 분야에서 ‘의도나 목표’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많다. 어디서 ‘잭팟’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챗GPT를 발표해 AI 붐에 불을 댕긴 오픈AI의 출발은 “인공지능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순수한 꿈들이 모여 만들어진 비영리단체다. 엔비디아만 해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AI용 반도체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엔비디아는 컴퓨터 게임에 쓰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에 특화된 반도체 기업이다. 엔비디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처음에는 암호화폐 채굴꾼들이, 다음에는 AI 혁명이 엔비디아 GPU의 쓰임새를 ‘발명’했다. AI를 앞세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과학과 과학, 기술과 기술, 산업과 산업, 기업과 기업 간의 다양한 조합과 융합에서 나온다. 그 공통의 토대가 되는 기초과학을 죽이는 것은 모래 위에 성 쌓기다. 한국은 아직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오랜 염원을 이루려면 다른 예산을 확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기초과학만큼은 긴 안목에서 집중 지원해야 한다. ‘노벨상 0’ 국가의 자충수는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는 게 좋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8-28 00:03 
[천광암 칼럼]‘코인 타짜’의 국회의원 놀이… 우리끼리 “프로테고 막시마”가상화폐는 가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사를 국내에서 꼽으라면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그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2018년 1월 30일 김어준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밝힌 적이 있다. 유 전 이사장은 가상화폐 투자는 한마디로 ‘도박’이자 ‘다단계 사기’라고 잘라 말한다. 절반 인터뷰, 절반 대담처럼 진행된 방송에서 김 씨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화는 “사기다”(유 전 이사장) “사기에 가깝다”(김 씨)로 마무리됐다. 실제로 최근의 코인시장의 상당 부분은 사기꾼, 다단계업자, 시세조종 기술자, 사채업자들이 활개 치는 ‘투전판’으로 변질돼 가는 중이다. 이른바 ‘러그 풀(Rug Pull)’이라는 사기극이 빈발한다. 러그 풀이란 겉으로만 그럴싸한 프로젝트를 하나 만들어서 투자자를 끌어모은 뒤 높은 가격에 팔아치우고 일제히 ‘잠수’를 타는 ‘먹튀 사기’다. 양탄자 위에 사람을 올라가게 한 뒤 확 잡아빼서 넘어뜨리는 것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러그 풀 작업의 최적 소재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디파이(탈중앙화 금융)’다. 신생 잡(雜)코인은 대개 대형 거래소에서 사고팔 수가 없기 때문에 큰손들이 코인을 묻어 ‘사설 거래소’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을 흔히 ‘유동성 공급자(LP)’라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위믹스 코인 34억 원어치를 교환해서 LP 투자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 클레이스타가 바로 디파이 서비스를 통해 거래되는 코인이다(업체 측은 러그 풀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러그 풀을 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김 의원이 이런 고위험-고난도 투자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국회의원의 코인 투자 부업’이라기보다는 ‘코인 타짜의 국회의원 놀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상임위 회의시간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코인 거래를 했다는 자체가 이런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유 전 이사장의 견해를 원용하자면 수십억 원의 판돈을 걸고 평시와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하우스’를 찾았다는 자체가 ‘프로 도박꾼’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럼에도 민주당과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김 의원 감싸기가 끊이지 않는다. 민주당 박찬대 최고위원은 15일 페이스북에 ‘프로테고 막시마’라는 문구를 띄웠다.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말로 악마들로부터 거대한 보호막을 치는 주문이다. 또 같은 당 유정주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사냥하지 말자. 상처 주지 말자. 우리끼리라도!’라는 문구를 올렸다. 이어 19일에는 “비트코인 자체가 사회악이 되는 것이 안타깝다”며 “비트코인은 청년들에게 불안과 앞날을 준비하고픈 열망의 단면 자체”라는 글을 게시했다. 또 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은 19일 라디오에 출연해서 “코인에 투자하는 국민이 600만 명이 넘고, 자산을 불리지 못해 실망에 빠진 청년들이 많다는데 코인 투자가 비도덕적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김 의원을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청년이나 600만 명의 코인 투자자들 중 ‘한 명’으로 비치게 하려는 게 두 의원의 속셈인지 모르지만 속아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고위험 코인에 수십억 원을 아무렇지 않게 지르고, 여러 가지 의혹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김 의원의 코인 투자를 거론하면서 청년들의 불안과 앞날을 운운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청년 팔이’다. 이들보다 더 강력한 ‘프로테고 막시마’ 주문을 건 인물은 앞서 가상화폐를 ‘사기에 가깝다’고 한 유튜버 김어준 씨다. 두 차례에 걸쳐 김 의원을 불러 해명 인터뷰 장을 열어준 김씨는 10일 방송에서 “김남국 의원 60억 가상화폐 사건은 검찰이, 혹은 보수매체가 정치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키우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게 가능한 토대가 진보는 도덕성 이걸 스스로 자기 굴레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며 진보의 도덕성을 탓한다. 그러면서 김 씨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돈 많이 버는 것과 진보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룰’만 지키면 되는 거예요.” 김 씨의 말을 듣고 든 두 가지 의문이다. 첫째, 도박판이든 다단계 사기판이든 그 세계의 ‘룰’만 지키기만 하면 문제가 없는 돈벌이라는 말인가. 두 번째 궁금증은 진보의 도덕성을 ‘떨이’로 처분해 버릴 자격을 누가 김 씨에게 줬는지 하는 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5-22 03:00 
[천광암 칼럼]‘바이든 동맹열차’ 승객들… 윤석열 vs 마크롱·모디·숄츠2000년 이후 작년까지 미국이 ‘국빈방문(state visit)’ 형식으로 외국 정상을 맞은 것은 모두 18차례다. 1년에 한 번꼴이 채 안 된다. 2013년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청 의혹에 분노해 국빈방문 직전에 전격 취소한 일이 있긴 했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최상의 예우와 대접을 받는 일이다 보니, 성사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외교적 성과가 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위해 오늘 미국으로 향한다. 이번 방문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대(對)중국, 대러시아 외교 관계의 중요 전환점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를 놓고 한-미 대 중-러 간에 격렬하게 벌어진 전초전이 예고하는 바다. 대통령실은 대만-우크라이나 관련 윤 대통령의 발언은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이라는 입장이다. 중-러의 괜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이다. 발언의 득실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크게 다르다. “미국 중심 동맹열차의 앞자리에 올라타야 한다”는 ‘전략적 명확성’ 옹호론과, “중-러와 각을 세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라는 ‘전략적 모호성’ 옹호론이 교차한다. 미국과 중-러의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황이고, 양자택일이 가져올 결과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쉽게 결론을 낼 일은 아니다. 이런 때 미국과 중-러 간, 전략적 명확성과 전략적 모호성 간의 갈림길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행보는 우리에게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00년 이후 미국을 유일하게 두 번 국빈방문한 국가원수다. 미국으로선 최선의 호의를 베푼 셈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은 미국 독립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관계다. 그런데도 마크롱 대통령은 이달 초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만 문제와 관련해서 “유럽은 미국의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되며, 유럽의 것이 아닌 위기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유럽과 미국은 다르다’는 ‘전략적 자율성’론이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과 윤 대통령에 이은, 바이든 정부의 세 번째 ‘국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도는 미국이 중국의 인도·태평양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이는 나라 중 하나다. 미국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다자안보협의체 ‘쿼드’의 멤버다. 하지만 인도는 미국 등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결정적인 ‘구멍’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전 발발 후 러시아산 석유를 중국 다음으로 많이 수입하고 있고, 인도 루피-러시아 루블의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금융제재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까지 논의하는 중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해 10월 유럽연합(EU) 정상들과 함께 중국을 “적대적 경쟁자”라고 선언해 놓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80년 혈맹’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간청을 뿌리치고 산유국들의 유가 기습 인상을 주도해 인플레 전쟁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외로워지고 있다”는 로런스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의 최근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미국의 주요 동맹 리더들이 ‘바이든 동맹열차’의 앞자리를 굳이 비워 두는 이유는 미국과 정서적으로 덜 친밀해서도, ‘바보’여서도 아닐 것이다. 미-중 간 ‘디커플링(Decoupling)’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데다 도를 넘어선 ‘메이드 인 USA 우선주의’가 동맹국들의 국익과 충돌하는 부분이 점점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이미 미국의 반도체법이나 인플레감축법(IRA) 발효 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안보 현실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동맹’과 ‘국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싫든 좋든 아직은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라는 현실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 70년간 피로 나눈 한미의 진한 유대와 우정을 확인하는 샴페인 잔이 오가는 순간에도, 윤 대통령이 국익을 위한 주판과 계산기만큼은 치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방미 성과를 내는 만큼이나 국빈방문의 ‘사후 청구서’를 줄이는 일도 중요하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4-24 03:00 
[천광암 칼럼]3자녀 병역 면제, 밥 한 공기, 주 69시간미국 인디애나대 연구에 따르면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존재해온 25만여 년 동안, 첫아이를 본 아버지의 평균 나이는 30.7세였다고 한다. 만혼(晩婚)이 일상화된 2023년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국 남성은 대개 20대 초반에 군대에 간다. 제대 후 ‘취업운’이 순탄하면 대졸자의 경우 26세 안팎, 비대졸자의 경우 23세 안팎에 첫 직장에 들어간다. 그런 다음 열심히 저축을 해서 전셋집 한 칸이라도 마련할 여유가 생기는 33, 34세 정도에 결혼을 한다. 첫아이는 30대 중반은 돼야 보게 된다. 설령 입대를 미루고 결혼부터 서두르려 해도 심각한 취업난·주택난이 앞을 막는다. 첫아이를 보는 나이가 ‘호모사피엔스 평균’에 도달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의힘 정책위원회에서 나왔다는 ‘30세 전 아이 셋 낳은 아빠 병역 면제’ 아이디어는 이런 점에서 현실성이 전혀 없는 탁상공론이다. 사전에 길 가는 청년 서너 명만 붙잡고 물어봤어도, “왜 애는 여자가 낳는데 혜택은 남자가 보느냐”와 같은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당 민생특위에서 나왔다는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운동’ 아이디어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령에 힘겹게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생각하면 매년 쌀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쌀 소비 감소가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남기는 여성들 때문은 아니다. 밥상에서 쌀을 밀어내는 ‘주범’을 굳이 찾자면 다이어트가 아니라 고기다. 2012년까지만 하더라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등 육류보다 29.2kg이나 많았다. 하지만 ‘밥보다 고기’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작년을 기점으로 육류가 쌀 소비를 추월했다. 그렇다고 ‘고기 덜 먹기 운동’을 해서 쌀 소비를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쌀 소비를 늘리자는 논의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쌀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양곡관리법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이상 희화화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주 69시간’ 논란에서 보여준 갈팡질팡과 정책 난맥상은 더 심각하다. 노동개혁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 중에서도 현 정부가 첫손가락에 꼽는 핵심 과제다. 주 52시간제 개편안은 그중에서도 ‘1호 법안’이다.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윤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고 정부 안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시작된 것도 지난해 6월부터다. 3대 개혁은 비단 중요하다고 해서만 3대 개혁인 것이 아니다. 계층 간, 세대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다 보니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모순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여있는 영역이다. 그만큼 어려운 숙제라는 의미다.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과의 충분한 사전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대의(大義)만 앞서고 ‘디테일’이 없어서는 추진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반발이나 난관을 돌파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바뀌는 산업 환경에 맞춰 근로시간을 다양화하고 선택권을 확대한다는 제도 개혁의 취지를 전달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예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인 사례인 ‘주 69시간’이 마치 법안의 본질인 것처럼 여론이 흘러가는데도 전혀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가 해명이라고 내놓은 어설픈 카드뉴스는 거꾸로 비판 여론에 불을 질렀다. 결정적으로 윤 대통령과 대통령 참모들은 주당 근로시간 ‘60시간 상한’을 놓고 계속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국민의힘은 소수 여당이다. 윤석열 정부가 불리한 국회 의석 구조를 극복하고 국정 주도력을 발휘하려면 국민의 지지 외에는 달리 우군이 없다. 그러나 최근 한국갤럽 조사나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기관의 공동 조사를 보면, 윤 대통령의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나 주 52시간제 개편 모두에 대해 비판 여론이 긍정 여론을 압도한다. 최근 정부 여당이 연이어 쏟아낸 자책골과 정책 참사가 자초한 결과다. 윤 대통령은 최근 이 같은 난맥상을 수습하기 위해 당정 협의를 강화하라고 지시했지만, 당과 정부가 모두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협의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있을지 의문이다. 불신의 늪에 빠진 정책 신뢰성을 회복하려면, 우선 정부 여당이 바뀌려 한다는 믿음부터 심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단추가 철저한 자기반성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4-10 03:00 
[천광암 칼럼]“50조 원 피해 코인 사기” 권도형, 차라리 미국으로?‘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지난주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됐다. 그는 작년 9월 인터폴 적색수배가 떨어진 이후에도 트위터를 통해 “죄도 없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위조여권까지 갖고 있었던 걸 보면, 영락없는 ‘도주 범죄자’의 행색이다. 그는 한국 검찰뿐 아니라 미국과 싱가포르 사법당국에도 쫓기는 신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검찰은 이미 그를 기소까지 한 상태다. 그가 설계한 ‘테라’는 일명 ‘스테이블 코인’이다. ‘스테이블(안정적이라는 뜻)’은 코인 1개의 가치가 항상 1달러가 유지되도록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테이블 코인이 이름값을 하려면 통상 발행된 코인의 총액만큼 달러화를 담보로 예치해 둬야 한다. 하지만 테라는 이런 담보가 없어도 ‘루나’라는 자매 코인과의 ‘알고리즘’을 통해 ‘1테라=1달러’를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권도형은 이런 허황된 이야기만으로는 투자자를 모으기가 어렵다고 봤는지, 연 20%짜리 코인 예금상품까지 내걸었다. 현란한 전문용어로 포장된 디지털 눈속임과 폰지 사기에서 흔히 보이는 고수익 미끼가 ‘테라-루나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었던 셈이다. 테라-루나는 한때 성공 가도를 걷는 것처럼 보였다. 코인의 가치가 100배 넘게 올랐고, 시가총액은 50조 원 이상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쌓아올린 성이 오래 버틸 리 없었다. 작년 5월 테라-루나의 안정성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자, 불과 일주일 만에 가격이 1만분의 1로 폭락했다. 시가총액 50조 원이 한순간에 증발했고, 국내에서만 20여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미국 SEC는 테라-루나 사태를 권도형이 주장하는 “실패”가 아니라 ‘증권 사기’라고 단언한다. SEC가 공개한 소장(訴狀)에 따르면 권도형은 2021년 5월 ‘1테라=1달러’가 무너지자 제3자에게 테라를 대량으로 매집하게 해서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러고선 마치 테라-루나의 알고리즘이 ‘자기회복력’을 발휘한 것처럼 선전했다. 폭락 사태로 “전 재산을 잃었다”는 그의 말 또한 거짓이었다. 지난해 6월 이후 스위스 은행을 통해 1억 달러 이상의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출한 사실이 SEC에 꼬리를 밟혔다. 그가 검거된 현시점에서 최대 관심사는 어느 나라에서 재판을 받게 되느냐는 것이다.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한국으로의 송환을 희망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에서라면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법원이 금융·증권 범죄를 얼마나 중한 범죄로 여기는지는, 2009년 70조 원대 다단계 금융사기로 기소됐던 버나드 메이도프가 징역 150년을 선고받은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 비하면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한국의 단죄와 처벌은 한마디로 ‘솜방망이’ 수준이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주가조작 등 증권 불공정 거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64명 중 40%에 해당하는 26명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사회적으로 크게 이목이 집중됐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만 하더라도, 1심 법원은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의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실패한 시세조종”이라는 이유를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검찰은 검찰대로 김건희 여사 관련 부분에 대해 수사 의지 자체를 의심받고 있다. 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등 이른바 ‘문재인 정권의 3대 펀드 사건’에 대해서도 부실수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권도형의 국적은 한국이다. 인터폴을 통해 먼저 적색수배를 건 것도 한국이다. 실낱같지만 피해 구제를 위해서도 권도형은 한국으로 데려올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권도형 체포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그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게 나은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2020년 미국 사법당국이 한국에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인 손정우에 대해 범죄인 인도를 요청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라면 징역 50년 이상의 중형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손정우는 결국 한국에서 재판을 받았고 징역 2년(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쳤던 상황)의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권도형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재연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철저한 수사를 통해 빈틈없는 증거와 법리를 갖춰야겠지만, 법원의 양형이나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3-27 03:00 
[천광암 칼럼]“1호 영업사원” 윤석열, ‘퍼스트 비즈니스맨’ 바이든사업가를 뜻하는 영어 단어 ‘비즈니스맨(Businessman)’은 원래 영국에서 ‘공직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은 어떤 나라보다 공직과 비즈니스 간의 경계가 희미하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비즈니스다(The chief business of the American people is business).” 캘빈 쿨리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외교통이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한국과의 관계에서 보여 온 행보를 돌이켜 보면 ‘퍼스트 비즈니스맨’이라는 칭호가 가장 어울려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5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 대기업들로부터 44조 원의 ‘투자 선물 보따리’를 챙겼다. 이어 지난해 5월 하순에는 한국을 직접 방문해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 보따리’를 100조 원으로 키워서 가져갔다. 이런 투자 계획들이 구체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지난해 어떤 외국 기업보다 많은 일자리를 미국 안에서 만들어 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기업에 ‘러브콜’을 보낼 때마다 지원 약속을 빼놓지 않았었다. 지난해 방한 당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나서는 “투자에 보답하기 위해 실망시키지 않도록 지원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고,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방문해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양국 간 기술동맹을 통해 더욱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약속과 공언(公言)은 현재로선 ‘공수표’가 된 상태다. 현대차는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현대차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기습공격”이라고 평가했고, 현대차 공장을 유치한 조지아주 팻 윌슨 경제개발부 장관은 “불이익과 모욕”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나마 배터리 업체들은 IRA의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손을 잡고 ‘IRA 우회로’를 찾으면서 자칫하면 헛물만 켠 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반도체는 더 심각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로 각각 33조 원과 22조 원을 투자해 놓은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의 ‘업그레이드’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될 처지다. 여기에 더해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서 보조금을 받을 경우 영업기밀까지 들여다보겠다는 부대조건을 내걸었다. 이쯤 되면 미국의 ‘칼날’이 중국만 겨냥한 것인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까지 동시에 겨냥한 것인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운데,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의 최근 언행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러몬도 장관은 지난달 23일 한 강연에서 “난 미국이 모든 최첨단 반도체 생산 기업이 상당한 연구개발 및 대량 제조 시설을 둔 ‘유일한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작년 6월에는 러몬도 장관이 한국에 7조 원을 들여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던 대만의 반도체웨이퍼 업체를 미국으로 ‘가로채 간’ 일도 있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중증(重症)의 복합위기에 빠져 있다. 수출, 성장, 물가, 경상수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부진한 성적표를 한 달이 멀다 하고 갈아 치우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인 지표상의 부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이 미국에 최종 소비재를 내다 팔고, 한국은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데서 오는 구조적인 위기라는 점이다. 중국시장이 급속히 위축되는 와중에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줄 것 다 주고 뒤통수까지 맞는 현실에서는 한국 경제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4월 말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는 결코 허비해선 안 되는 기회다. 미중 간의 신냉전 구도 속에서도 ‘한국이 땅에 발을 딛고 설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 방미에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사실상 ‘밑장 빼기’로 변질돼 가는 IRA와 반도체법을 ‘공정한 법’ ‘동맹과 같이 가는 법’으로 돌려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퍼스트 비즈니스맨’을 상대할 수 있는 카운터파트는 한국에서 ‘1호 영업사원’뿐이다. 결국은 윤 대통령의 숙제라는 이야기다.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입 밖으로 꺼내 놓은 ‘말 빚’이 있기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3-13 03:00 
[천광암 칼럼]번지수 틀린 이재명의 식량안보론한국은 2005년부터 매년 햅쌀 수천억∼1조 원어치를 사들여 창고에 쌓아 두는 ‘공공비축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 이와 별개로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나서서 과잉 생산된 물량을 사들이는 ‘시장격리제’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중순까지만 해도 10여 차례나 시장격리를 단행했고, 거기에 들어간 돈만 5조 원이 넘는다. 비축·격리로 창고에 재어둔 쌀은 3년쯤 뒤 매입·보관비용의 10분의 1이 조금 넘는 헐값에 가공용으로 처분된다. 이런 식으로 매년 1조 원이 훨씬 넘는 혈세가 허공으로 증발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현실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쌀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게 될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현행 양곡관리법에는 ‘쌀 시장격리’가 정부의 재량사항인데, 아예 의무조항으로 ‘대못질’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24일 “양곡관리법 처리를 반드시 매듭짓겠다”고 강조하면서 주된 명분 중 하나로 ‘식량안보’를 내세웠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식량안보’의 정의는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이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식습관과 음식선호를 충족시키는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식탁에 물리적·경제적으로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식량안보의 정의다.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은 ‘음식선호’다. 어떤 비상상황에서도 밥, 잡곡, 라면, 빵, 고기, 야채 등을 식탁에 골고루 공급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식량안보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식량안보는 극히 취약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지나친 쌀 편중 때문이다. 쌀은 매년 초과공급 물량을 처리하느라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나머지 작물의 자급률은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2020년 기준으로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고 옥수수와 콩도 각각 4.2%와 23.7%에 그친다. 한정된 재원으로, 쌀에 지금처럼 많은 돈을 쏟아붓다 보면 밀·콩·옥수수 등 다른 작물의 자급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 대표가 쌀 과잉생산을 더 심화시킬 개정안을 강행하는 명분으로 “식량안보” 운운한 것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9월 민주당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는 경우를 가정해 추산한 바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30년까지 초과생산된 쌀을 ‘시장격리’시키는 데 매년 평균 1조443억 원의 재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일부 민주당 의원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함께 포함돼 있는 ‘쌀 생산조정제’(타 작물 재배 지원사업)의 효과 때문에 쌀 생산이 줄어들어 시장격리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가당착이다. 쌀 시장격리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굳이 재량사항을 의무사항으로 바꿀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공공비축과 시장격리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자원 낭비인지는 쌀 소비량이 우리의 2배가량인 일본과 비교해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생산분의 경우 한국은 공공비축용과 시장격리용으로 각각 45만 t씩 총 90만 t을 사들였다. 이에 비해 일본은 20만 t을 공공비축용으로 사들였다. 정부 예산으로 남아도는 쌀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시키는 제도는 아예 없다. 개정안을 ‘악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법안이 담고 있는 ‘메시지’ 때문이다. 개정안의 내용은 쌀을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과잉생산 물량을 정부가 사들여서 가격을 떠받칠 테니 마음 놓고 쌀농사를 지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쌀 과잉생산의 악순환이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민주당이 국회의장의 중재를 받아들였다며 내놓은 수정안도 본질은 매한가지다. 숫자 몇 개 바꾸고 조건 한두 개 더 붙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 대표는 2021년 2월 25일 대선후보 토론에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상대로 마치 가르치기라도 하듯 “식량안보란 밀, 콩 같은 전략식량에 대해 지원금을 준다는 뜻”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정된 재정 여건상 밀, 콩 같은 전략식량을 지원하려면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는 쌀 시장격리 의무화 조항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작 자신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정치지도자가 아닌 요설가의 행동이다. 이 대표가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한국의 식량안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2023-02-27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