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광암 칼럼]윤석열, 고이즈미, 트뤼도의 도어스테핑“위험할 수 있다” “스스로 판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원고를 안 읽으면 사고가 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공식 일과로 굳어져 가고 있는 ‘출근길 약식회견’(도어스테핑)을 놓고 야권에서 나온 반응이다. 차례로 더불어민주당의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과 윤건영 의원,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말이다. 이들의 부정적 전망에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어스테핑이 ‘100% 리스크’라고만 볼 일은 아니다. 해외를 보면 성공 사례가 적지 않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비근한 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막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파벌정치 관행을 과감히 깨고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극장 정치’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당내 비주류였던 그가 자민당 주류의 거센 저항을 이겨내고 굵직굵직한 개혁 작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무기 중 하나가 도어스테핑이었다. 고이즈미식 도어스테핑의 특징은 간결과 함축이었다. 질문 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개 8초를 넘기지 않았다. 방송 편집 과정에서 자신의 발언 영상 일부가 잘려 나가 메시지가 왜곡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짧은 문구 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것. 이는 ‘One Phrase Politics(한 문구 정치학)’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고이즈미식 도어스테핑에 정략적인 구석이 없지 않다면, 트뤼도식 도어스테핑은 정치 지도자가 국민에 대한 ‘설명 의무’를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경우다. 트뤼도 총리는 팬데믹 초기이던 2020년 3월부터 관저 문 앞에서 아침 도어스테핑을 시작했다. 장소만 도어스텝(문간)이었을 뿐 실제 내용은 공식 기자회견에 가까웠다. 두툼한 노트를 들고 나온 트뤼도 총리가 코로나 관련 주요 현안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고 온라인으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다 보면 30분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트뤼도 총리는 2020년 3월 이후 110일 동안 80차례나 도어스텝 회견을 했다. 이는 코로나 극복 과정의 한 상징이 됐고, 그가 지난해 9월 조기 총선을 치르고 3연임을 하는 데 중요한 동인 중 하나가 됐다. 이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갈 길이 멀다. 고이즈미식 절제와 여운도 없고, 트뤼도식 성실함과도 거리가 멀다. 전략 부재에, 메시지는 뒤죽박죽이다. 물론 1년에 한두 번 하는 기자회견조차도 이 핑계 저 핑계 들어가며 안 하려고 한 전임자들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신선한 충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보다 정치 문화가 후진적인 일본에서조차 20년째 이어지고 있는 도어스테핑을 놓고 언제까지 “신선” 운운하면서 자기만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참가에 의의’ 수준에서 벗어나 질적인 업그레이드를 서둘러야 할 때다. 우선 도어스테핑은 도어스테핑일 뿐이다. 한국은 이미 세계 10위 경제대국이고 사회 각 분야가 급속히 다원화된 나라다. 대통령이 발걸음을 잠깐 멈춰 세우고, 불쑥 날아드는 질문에 일도양단으로 답할 수 있는 수준의 현안은 많지 않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면 ‘주 52시간제’와 같은 중대 현안을 대통령이 나서서 꼬이게 만드는 일들이 수시로 재연될 것이다. 단답형 도어스테핑은 그것대로 하되, 복잡한 현안을 다루는 고밀도 소통은 약식이 아닌 정식 기자회견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점은 윤 대통령의 입이 향해야 할 ‘청중’은 야당도 아니고, 눈앞의 기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청중을 눈앞의 기자로 착각하면 “대통령은 처음이라… 어떻게 방법을 알려주시라” 같은 엉뚱한 답변이 나온다. 입이 야당을 향하면 “과거에 민변 출신들이 아주 뭐 도배를 하지 않았습니까”와 같은 문제 발언이 나온다. 청중이 국민이라고 생각했다면, ‘민변 도배’ 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선거에서 소명을 부여받은 대통령의 입에서 과거 정권을 구실 삼아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하겠다는 말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의식해야 할 청중은 오직 국민뿐이다. 단 한순간도 카메라 너머 있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놓쳐선 안 된다. 그래야 도어스테핑이 심각한 정치적 리스크로 비화하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7-04 03:00 
[천광암 칼럼]윤 대통령이 잊지 말아야 할 ‘허니문 선거’의 법칙문민정부 탄생부터 시작하면 지금까지 총 22번의 전국 규모 선거가 있었다. 7명의 대통령 중 정권 출범 직후인 허니문 기간에 첫 선거를 치른 대통령은 김대중(DJ), 이명박(MB), 윤석열 등 3명이다. DJ는 취임 후 99일 만에 제2회 지방선거를, MB는 44일 만에 18대 총선을, 윤 대통령은 22일 만에 이번 제8회 지방선거를 치렀다. 나머지 대통령들은 모두 취임한 지 한두 해가 지난 시점에 첫 선거를 맞았다. 총선과 지방선거는 성격이 많이 다른데도 3번의 ‘허니문 선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낮은 투표율이다. DJ의 허니문 선거는 당시로서는 역대 최저인 48.9%를 기록했다. 이 기록을 아래로 다시 깬 것이 MB의 허니문 선거(46.1%)다. 이번 6·1선거가 역대 8번의 지방선거 중 두 번째로 낮은 투표율을 보인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둘째, 모두 여당이 이겼다. 2회 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이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모두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을 눌렀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일방적인 압승을 거뒀다. 18대 총선은 극심한 공천 갈등으로 친박 세력이 당을 뛰쳐나간 가운데 치러졌으나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범보수 진영은 200석을 넘겼고 제1야당은 겨우 81석을 건졌다. 인물, 이슈, 정치적 환경이 완전히 달랐음에도 이런 공통점이 보이는 것은 ‘이제 막 시작하는 대통령에게 제대로 한번 일해 볼 기회는 주자’는 것이 우리 유권자들의 정서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낮은 투표율은 ‘표는 줄 수 없지만 그래도 기회는 줘 보자’는 야당 지지자들의 존재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대선에 지고도 ‘졌지만 잘 싸웠다’는 ‘뇌피셜’에 안주한 더불어민주당이 참패를 자초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원래 유리할 수밖에 없는 선거에 ‘야당 복’까지 겹쳤으니 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윤 대통령이 행여 ‘내가 잘해서’ 또는 ‘여당이 잘해서…’라는 착각에 빠지면 지금의 민주당 꼴이 나기 십상이다. 불행히도 앞서 두 번의 허니문 선거에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DJ는 허니문 선거 후 679일 만에 열린 총선에서 야당에 패배했다. MB는 784일 만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충격적인 수준으로 참패했다. 윤 대통령의 허니문 선거와 다음 총선 사이의 간격은 679일. 두 대통령에게 주어졌던 골든타임과 똑같거나 거의 비슷한 기간이다. 윤 대통령이 허니문 선거의 세 번째 징크스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윤 대통령 주변에는 김대기 비서실장 등 MB 정권 인사들이 많다. ‘7·4·7(성장률 7%, 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 공약’을 앞세웠던 MB노믹스의 운명을 기억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MB노믹스는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고유가·고물가 위기를 연이어 만나 ‘리만(李萬·이명박 대통령과 측근인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조합한 것) 브러더스 사태’라는 조롱 속에 막을 내렸다. 그런데 윤 대통령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위기는 MB가 맞닥뜨렸던 것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으로 인한 ‘공급망 요동’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및 곡물 가격의 폭등 사태는 14년 전의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훨씬 구조적인 데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복잡한 국제정치가 얽혀 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날 예정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쓰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암살한 배후라고 바이든 행정부가 공식 지목한 인물이다. 또 바이든 행정부는 마약 밀매 혐의로 미국 사법 당국에 기소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도 관계 개선을 추진 중이다. 다 국제유가 때문이다. 인권과 가치관을 중시한다는 바이든 행정부가 ‘살인교사범’과 ‘마약사범’을 따질 여유조차 없는 게 지금의 인플레이션 위기다. 윤 대통령이 존경하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을 일컬어 “한 사회를 파멸시킬 수 있는 병폐”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3일 지방선거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경제 위기를 비롯한 태풍에 들어와 있다. 정당의 정치적 승리를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바른 인식이다. 다만 “집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것”보다 태풍이 훨씬 가까이 와 있다는 점 한 가지를 빼고는.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6-06 03:00 
[천광암 칼럼]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배워야 할 한 가지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을 할 때 일본부터 가는 것은 관례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모두 그랬다. 그래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하고, 80세라는 나이와 장시간 비행 사실을 잊은 듯 공항에 내리기 무섭게 반도체공장으로 달려가는 것은 무척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이 그간 미국에서 보여 온 행보를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미국 대통령은 매해 연초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 참석해서 연두교서 연설을 한다. 올해 바이든 대통령의 초청 명단에는 미국 최대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팻 겔싱어 CEO가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설의 상당 부분을 인텔이 오하이오주에 지으려는 첨단 반도체공장에 대해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연설 도중 겔싱어 CEO를 가리키며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인텔의 투자를 지원하기 위한 ‘초당적혁신법안’을 빨리 통과시켜 달라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이 법안은 양원에서 각각 다른 명칭으로 통과된 뒤 현재 병합심사가 진행 중이다. 여기에는 앞으로 5년간 반도체 관련 분야에 520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반도체 관련 회의를 직접 주재하거나 의회에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중국과의 안보·경제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반도체가 핵심 중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관료들의 입에서 “반도체가 석유보다 중요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인텔의 공장 예정지를 ‘꿈의 땅’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산업계에는 인텔의 꿈이 한낱 ‘꿈’으로 끝날 수 있다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인텔이 7나노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사이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는 5나노, 4나노를 넘어 이제 3나노 양산을 서두르고 있다. ‘초(超)격차’가 놓여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20일 삼성 반도체에서 서명한 웨이퍼의 지름은 300mm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웨이퍼를 ‘서울∼부산 거리의 지름을 가진 웨이퍼’로 확대한다고 가정할 때 그 안에 있는 개미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3나노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다. 신기(神技)에 근접한 이 기술을 우리와 대만만 갖고 있다. 더구나 삼성이 두 정상에게 선보인 웨이퍼는 세계 최초로 ‘GAA 기술’을 적용한 제품이다. 3나노까지는 기존 기술로도 가능하지만 2나노 이하는 GAA 없이는 못 나간다. TSMC는 3나노는 기존 기술로 가고, 차세대인 2나노부터 이를 적용한다는 전략이다. 비메모리 분야에서 TSMC에 밀리기만 해온 삼성으로서는 모처럼 역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는 웨이퍼에서만 승부가 나는 산업이 아니다. 패키징 등 부가기술, 마케팅력, 소재·장비 등 연관 산업, 용지·용수·전력·세제 환경, 전문 인력 양성 및 공급 능력 등 사실상 한 나라의 총체적 역량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삼성과 TSMC, 고수끼리의 승부에서는 기술력보다 나머지 변수가 더 크다. 이전 문재인 정부는 이런 사실을 바이든 대통령이 작년 4월 ‘반도체화상회의’를 주재하면서 웨이퍼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불현듯 깨달은 것 같다. 문 대통령이 나서서 “반도체 강국을 위해 기업과 일심동체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여당은 특위까지 만들어 반도체특별법을 제정한다며 뒤늦은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올 1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여야 의원들과 정부 부처 관료 등 강고한 ‘규제 기득권 세력’의 손을 타면서 누더기가 된 조문들로 채워져 있다. ‘대기업 특혜 불가론’ ‘지방 균형 발전론’ 등으로 포장된 규제 논리를 앞세워 마구 칼질을 해댄 결과였다. 껍데기만 남은 지원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대만이 사활을 걸고 덤비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겠다는 것은 몽상일 뿐이다. ‘쭉정이 특별법’은 없느니만 못하다. 백지 상태에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또 한번 ‘누더기 입법 공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윤 대통령이 디테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야 한다. ‘반도체 대통령’이라는 소명감이 필요하다. 국회가 장애물이 되면 수십 번이라도 설득하고 호소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좋은 모델이다. 바이든에게는 없는 ‘신기(神技)’를 썩혀선 안 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5-23 03:00 
[천광암 칼럼]인천 간 이재명, 부산 간 노무현“저는 정치를 끝내기에는 아직 젊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대선 코앞에 이 말을 했을 때부터, 그의 복귀는 확정적으로 예견됐던 일이다. 다만 3월 10일 새벽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패배를 승복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유권자들로서는 빨라도 너무 빠른 그의 복귀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일 것이다. “대선 패배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을 계기로 좀 더 성숙하고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58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다른 곳도 아닌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지경이다. 14대 대선에서 YS에게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DJ는 2년 7개월이 지난 뒤에야 정치무대에 공식 복귀했다. 15대, 16대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이회창 후보가 정치 전면에 다시 나서기까지는 각각 8개월과 4년 11개월이 걸렸다. 18대 대선의 패자인 문재인 후보도 2년이 넘는 긴 잠행 기간을 가졌다. 물론 이 고문 동렬의 ‘초고속 복귀’가 없진 않았다. 17대 대선의 패자인 정동영 후보는 대선 후 3개월 만에 총선에 출마했다. 19대 대선의 패자인 홍준표 후보는 41일 만에 당 대표 출마선언을 하고, 그로부터 13일 뒤에 대표로 선출됐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모두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 후보는 그해 총선에서 낙선해 체면을 구겼고, 홍 후보는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0선’인 윤석열 후보에게 쓴잔을 마셨다. 당장은 속성 복귀의 실리가 커 보이겠지만 긴 안목에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결과는 이 고문 자신의 몫일 테니 복귀 타이밍은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0.73%포인트, 지근거리까지 대권에 다가갔던 유력 주자의 행보치고는 너무 구차하고 옹색한 복귀 명분과 ‘가오’다. 이 고문에게는 자신을 대권후보로 키워준 정치적 터전인 성남 분당갑이라는, 그다지 명분이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있다. 그런데도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 계양을을 택했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5선을 할 정도로 잘 닦아놓은 ‘문전옥답’이라는 정치공학의 작동 외에는 달리 설명이 안 된다. 사정기관의 수사에 대한 ‘방탄용 배지’를 손에 넣기 위해 쉬운 길을 택해 정치 재개의 노정에 올랐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의 정치행로에 훈장일까, 주홍글씨일까. 이 고문은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작년 8월 말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함께 찍은 대담 영상에서 “제가 정치를 하게 만든 분이 사실은 노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두 달 뒤 노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을 때는 방명록에 “대통령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따라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끝까지 가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고문의 선택은 ‘노 전 대통령의 그 길’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던 노 전 대통령이 대권 도전에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 만들어진 것이 2000년 4월의 16대 총선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종로라는 ‘좋은 밭’을 굳이 마다하고 ‘자갈밭’이나 다름없는 부산 북-강서을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에 잘 나와 있다. “정치 1번지라는 종로에서 당선된 명예로운 국회의원이면서도 내심 몹시 불편했다. 부산에서 도망쳐 나와 안락한 곳에 피신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책감이 들었다.” “‘동서 통합을 위해서 부산으로 갑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심 ‘이익을 위한 정치’와는 다른 ‘희생의 정치’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경에도 경기도지사 여론조사에서 여러 차례 1위를 했었다. 하지만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마다하고, ‘험지’인 부산을 택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연고 있는 분당갑을 마다하고 연고 없는 계양을을 선택한 이 고문과는 대비되는 행보다. 앞서 이 고문과 대담 영상을 찍은 적이 있는 박 전 장관은 계양을 출마가 공표된 7일 페이스북에 ‘정치는 명분일까 실리일까’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민화에 나오는 고양이 탈을 쓴 호랑이보다 단원 김홍도의 기백이 넘치는 호랑이를 너무나 당연시했나 보다. 이 혼란의 시대에 김홍도의 호랑이를 닮은 ‘이 시대의 노무현’은 찾기 힘든 모양이다.” 인천으로 간 이재명과 부산으로 간 노무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5-09 03:00 
[천광암 칼럼]취임식까지 보름, ‘서오남 인사’ 바로잡을 시간한국갤럽이 지난주 발표한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응답은 42%에 그쳤다. 윤 당선인이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에서 6.56%포인트가 빠졌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보다도 2%포인트 낮은 수치다.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퇴임 대통령보다 낮은 지지율로 취임식을 맞은 대통령은 한 명도 없다. 퇴임 대통령의 마지막 3개월 지지율과 신임 대통령의 첫 3개월 지지율을 비교한 배수를 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11.8배, 문재인 대통령은 6.8배, 김영삼 전 대통령은 5.9배(*)였다.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전 대통령도 1.8∼2.5배 수준이었다. 수시로 등락하는 지지율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172석 거대야당이라는 벽과 마주하고 있는 윤 당선인에게 낮은 지지율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의석수도 의석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검수완박’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당리당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도부가 장악하고 있는 당이다. 이런 야당을 움찔이라도 하게 만들려면, 국민의 지지를 업지 않으면 안 된다. 갤럽 조사에서 윤 당선인이 직무를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한 응답자 중 가장 많은 26%가 ‘인사’를 이유로 꼽았다. 윤 당선인의 ‘서오남(서울대·50대 이상·남자) 인사’가 국민들로부터 이 전 대통령의 ‘고소영 인사’나, 박 전 대통령의 ‘성시경 인사’보다 결코 나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별반 다를 게 없다. 윤석열 1기 내각 장관 후보자들의 평균재산은 38억8000만 원으로 박근혜 1기 내각의 2배 수준이다. 19명의 국무위원 후보자 중 ‘아빠찬스’ ‘엄마찬스’ ‘세금탈루’ ‘위장전입’ ‘사외이사 회전문’ 등 크고 작은 의혹이나 논란에 휩싸이지 않은 후보자는 한두 명뿐이다. 이런 인사들만으로 채워진 내각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집 한 채가 있다는 이유로 8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복지 사각지대에서 쓸쓸하게 죽어가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까. 윤 당선인은 자신의 인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능력주의’를 든다. 하지만 성과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민간 기업들조차도 이제는 다양성 존중이나 균형인사가 능력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거나, 실적을 훼손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보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사회의 구성이 다양한 기업의 실적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뛰어난 실적을 낸다’는 것이 맥킨지나 딜로이트 같은 글로벌 경영컨설팅 기업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은 실증분석 보고서의 내용이다. 능력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다양성이 아니다. 사사로운 정이나 관계에 이끌리는 정실(情實)주의나, 편한 사람만 골라 쓰는 페이버리티즘(favoritism)이다. 윤 당선인이 아무리 능력주의를 강조한들 40년 지기라는 점 외에는 달리 인선 배경을 설명하기 힘든 인물이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를 꿰차고, 당선인의 옆자리가 과거 검찰에서 편하게 부렸던 부하들로 채워진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윤 당선인은 최근 한 TV 예능에 출연해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는 글귀가 적힌 패를 임기 내내 책상 위에 놓아뒀던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러나 뭐에 한번 꽂히면 뒤도 안 보고 직진하는 스타일인 윤 당선인에게 약이 될 만한 트루먼의 어록은 따로 있는 것 같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1959년 컬럼비아대에서 한 강연에서 ‘효율적인 정부란 독재 정부밖에 없다’라고 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배운 것이 많은, 동질한 집단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말귀 밝은 오랜 측근들로 비서진을 짜면 ‘효율’이 높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트루먼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국무위원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아직 막도 오르지 않았고, 각 부처 차관이나 비서진 인선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부적격 장관 후보자들을 솎아내고, 균형 잡힌 인선으로 지나친 능력주의 인사의 폐해를 바로잡을 기회가 윤 당선인에게는 남아 있다. 윤 당선인이 퇴임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낮은 첫 신임 대통령이라는 멍에만은 지지 않기를 바란다. 취임식까지 남은 보름은 길다고 보면 얼마든지 긴 시간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 두 번째 분기 수치와 비교.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4-25 03:00 
[천광암 칼럼]‘대통령실 민관합동위’ 자칫하다간 또 하나의 지뢰밭 된다미국에서는 기업인의 입각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트럼프 정부의 경우 렉스 틸러슨 국무, 마크 에스퍼 국방, 스티븐 므누신 재무, 윌버 로스 상무, 베치 디보스 교육장관이 억만장자 오너거나 전문경영인 출신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한때 벤처캐피털을 운영했고, 오바마 행정부의 상무장관 페니 프리츠커는 하이엇호텔 창업자의 딸로 부동산투자회사를 경영했다. 골드만삭스처럼 재무장관을 3명이나 배출한 기업도 있다. 한국에서는 2003년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된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런데 그의 발탁은 역설적이게도 기업인 고위공직 임용의 씨를 말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이 논란이 되면서 백지신탁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사청문회마저 ‘망신 주기’로 흐르는 일이 많아지면서 기업인이 아닌 민간 전문가들의 공직 진출도 바늘구멍이 돼가고 있다. 대통령실에 ‘민관합동위원회’를 만들어 정책 컨트롤타워로 삼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구상에는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 당선인의 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수위가 기존 청와대 정책실의 기능을 민관합동위원회로 넘기고, 정책 결정권까지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인사청문회나 주식 백지신탁제를 우회해서 민간 전문가나 기업인들의 능력과 경험을 국정에 활용하는 모델인 셈이다. 인수위는 참고 사례로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이 오바마 정부와 트럼프 정부에서 각각 인공지능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 의장, 국방 혁신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사례를 살펴보는 중이라고 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첨단산업 분야의 기술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민간의 창의력을 정부의 정책결정 메커니즘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책실 기능 이전’이나 ‘정책 의결권 부여’는 너무 나갔다. 지금까지 큰 문제 중 하나가 인사청문회도 거치지 않은 대통령 참모들이, 도덕성과 정책역량에 대해 혹독한 인사청문회 검증을 거친 각료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는 점이다. ‘소주성’ ‘탈원전’ 등 문재인 정부의 정책 참사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나마 청와대 참모들은 길든 짧든 정치나 공직 경험이 있어서 공직자로서 기본은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기업인들이나 민간 전문가는 다르다. 이들이 최고 권부(權府)인 대통령실에 상주하면서 정책 결정에 간여하게 되면 이해 상충과 자질 시비로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윤 당선인에게는 청와대 이전에 이어 또 하나의 지뢰밭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에릭 슈밋 사례도 번지수가 틀렸다. 그가 의장을 맡았던 NSCAI는 백악관이 아니라 의회 주도로 출범한 기구다. 위원 15명 중 12명을 의회가 임명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국방장관, 1명은 상무장관이 임명했다. 국방 혁신자문위원회도 백악관이 아닌 국방부의 자문기구다. 1년에 겨우 4번 모인다. 대통령 집무실과 같은 건물에 민관합동위원회를 두고 수시로 토론을 한다는 윤 당선인의 구상과는 별로 접점이 없다. 더구나 슈밋 전 회장이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 간부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거나 구글 전현직 직원을 심어 영향력 확장을 꾀했다는 의혹이 최근 불거져 ‘역풍’이 부는 중이다. 제왕적 청와대를 탈피해 ‘작은 대통령실’로 가겠다는 윤 당선인의 방향 설정은 옳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모든 것을 틀어쥐고 가야 한다는 발상이 바뀌지 않으면 실장, 수석 두세 자리를 없애고 인원을 줄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책실이 없어진 빈자리에 민관합동위원회가 완장만 바꿔 차고 또 다른 ‘옥상옥’ 노릇을 하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하다. 우리나라에는 행정기관이 민간에 자문을 하고 의견을 수렴한다는 취지로 만든 위원회가 작년 말 기준으로 622개에 이른다. 이 중 71개 위원회는 1년간 단 한 번도 회의를 하지 않았다. 민간을 책임회피용 들러리로 보는 것이다. 심지어 ‘헌법상’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조차도 지난 5년간 대통령 주재 회의가 5번 열린 게 고작이다. 설익은 아이디어인 데다 사회적 합의도 없는 대통령실 민관합동위원회에 ‘정책 결정’과 같은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형해화한 이런 제도부터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이 민간의 창의성을 생산적으로 살리는 길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4-11 03:00 
[천광암 칼럼]블랙리스트로 챙겨 먹고, 알박기로 한번 더 우려 먹고…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自制)를 꼽았다. 법체계에는 본질적으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이 내포돼 있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상호관용’과 법적인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제도적 자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중 제도적 자제의 경우 민주주의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절대왕정 시대의 유럽 군주들조차도 지나친 권력 행사를 자제했다는 것이다. 임기가 두 달도 안 남은 문재인 정권의 알박기 인사에 대한 탐욕이 끝없다. 대표적 탈원전 인사인 김제남 전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난달 10일 임기가 시작된 한국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에 앉히더니, 한국은행 총재와 감사위원 인사에까지 집착하면서 신권력과 갈등을 빚었다. 감사위원의 경우 제청권을 가진 감사원의 ‘반란’으로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알박기 전반에 마침표가 찍힐지는 의문이다. 합법인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은 16일 낙하산·알박기 인사 논란과 관련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인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임원의 임기는 정부가 바뀌더라도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문 정권이 ‘제도적 자제’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난이라고 치더라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운운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 집권 초부터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낙하산을 내리꽂은 게 문 정권이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그 적나라한 실태를 보여준다. 올 1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이 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주모자인 김은경 당시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대통령균형인사비서관은 사전공모를 하고, 환경부 공무원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서 벌인 범행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김 장관과 신 비서관은 2017년 11월경부터 산하기관에 심을 인사들의 리스트를 미리 만든 뒤, 민관 후보추천위원회에 참여하는 환경부 공무원들로 하여금 ‘바람잡이’ 역할을 하게 하거나 역량에 관계없이 높은 점수를 주게 했다. 또한 낙하산 인사용 자리를 만들기 위해 멀쩡히 임기가 남은 산하기관 임원들로부터 사표를 받았고, 버티는 임원에 대해서는 ‘표적감사’를 벌여서 밀어내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의 항소심 판결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청와대가 추천·임명하는 몫의 공공기관 직위에 대해서는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이 주재하고 소관 수석비서관이 참여하며 피고인 신미숙이 실무를 주관하는 청와대 인사간담회에서 단수 후보자를 선정하였고….’ 청와대 내 신 비서관의 ‘윗선’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과연 환경부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졌겠느냐는 것이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은 “청와대 특감반장이 특감반원들에게 ‘(현 정부 인사들을 위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면서 전국 330개 공공기관 기관장·감사 660명의 리스트 작성을 지시했으며, 이 중 전 정권 때 임명됐거나 야당 성향인 100명은 따로 추려 감찰했다”고 폭로했었다. 이후 블랙리스트 의혹은 환경부를 넘어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보훈처 등으로도 확산됐지만 검찰은 수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랬던 검찰이 25일 산업부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 했다. 고발장이 접수된 지 3년 2개월 만에 ‘산업부 블랙리스트’를 정조준하고 나선 것이다. 검찰이 3년 넘게 사건을 뭉개다가 ‘윤석열 인수위’ 출범이 무섭게 칼을 뽑아 든 모습이 그다지 순수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당시 산업부 산하 공기업 사장 등이 임기를 남겨 둔 상태에서 사표를 낸 객관적인 사실이 있고, 자의(自意)에 반한 사표였다는 증언도 나오는 만큼 누구도 검찰의 수사를 막을 명분은 없다. 기왕 하는 수사라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운만 뗀 윗선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도 명확한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그래야 문 정권을 비롯한 역대 정권들이 공공기관 임원 자리를 선거 전리품으로 여기면서 무자격자들을 마구 내리꽂아 온 오랜 ‘적폐’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3-28 03:00 
[천광암 칼럼]제왕적 행태 그대로, 장소만 바뀌는 ‘광화문 청와대’는 안 된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윤석열 당선인의 공약인 청와대 이전을 1호 사업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새 집무실은 광화문에 있는 정부서울청사로 굳어지는 중이다. 살림집에 해당하는 관사 후보지로는 삼청동 총리공관과 안전가옥 등이 거론된다. 임기 첫날부터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하겠다는 당선인의 의지가 확고해, 5월부터 ‘광화문 대통령 시대’가 열릴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이전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대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해온 공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과 2017년 등 두 번의 대선에서 광화문 이전을 약속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오래전부터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온 셈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복병’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윤 당선인은 1월 27일 공약을 처음 내놓으면서 청와대 이전이 필요한 이유로 ‘불통(不通)의 공간 배치’를 꼽았다. 윤 당선인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비서동에서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까지 차를 타고 가지 않느냐”면서 “이런 구조에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한 것이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를 중심으로 참모들의 사무실이 다닥다닥 밀집해 있는 미국 백악관이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은 청와대 비서동 안에 대통령 집무실이 만들어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참모들과 넥타이를 풀어 제치고 토론을 할 수 있다. 현 정부 들어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청와대 본관’은 의전용 공간이 됐고, 비서동 안에 있는 집무실이 주(主) 집무실이 됐다. 대통령이 구중심처(九重深處)를 버리고 광장으로 나온다는 상징의 무게는 논외로 치고, 당장 청와대를 뛰쳐나와야만 미국식 소통이 가능한 건 아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옮기는 데는 근접 경호 외에도 군사적 대비 등 복잡한 위기관리 문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일본은 우리 대통령보다 격이 떨어지는 총리의 관저(집무 공간)를 신축하는 데도, 검토부터 완공까지 27년이 걸렸다. 제대로 하려면 그만큼 검토할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다. 안보와 안전의 문제는 1000가지를 검토했어도 하나를 놓치는 데서 큰 구멍이 생긴다.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는 문제는 ‘임기 첫날 출근’이라는 시간표에 당선인이 스스로를 구속시킬 이유가 없다. 문 대통령은 공약뿐 아니라 취임사에서도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했으나 임기 중 이를 백지화했다. 윤 당선인으로서는 ‘문재인이 못 한 일을 윤석열은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권 교체를 바라고 표를 던진 민의에 답하기 위해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 취임 첫해만 해도 ‘유리알 소통이다’, ‘오바마보다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던 문 대통령이 불통과 독선의 상징으로 추락한 것은 집무실 이전 공약을 백지화해서가 아니다. 보여주기 ‘쇼통’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청와대가 정부 부처 위에 군림하면서 모든 인사와 정책을 마음대로 주무른 제왕적 행태가 문제였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있었던 정책실을 부활시키고 장하성 실장, 반장식 일자리수석, 홍장표 경제수석, 김수현 사회수석, 김현철 경제보좌관 등 ‘코드사단’을 집결시킨 뒤 힘을 실어줬다. 이들이 정책사령탑 행세를 하면서 쏟아낸 작품들이 소득주도성장, 공급을 배제한 부동산 수요 억제, 탈원전 등 경제 참사로 이어진 정책들이다.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주무부처의 장관은 의사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됐고, 공직사회는 청와대의 눈치만 살피는 복지부동이 체질화했다. 윤 당선인이 문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인원 30% 감축’ 공약처럼 작고 스마트한 청와대를 만드는 일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집무실 이전 시간표에 쫓겨 경호, 의전, 시민의 교통 불편, 비용, 관련 법률의 정비 등 복잡한 실타래를 푸는 데 매달리다가 권위주의와 불통, 권력 남용 등 ‘비서정치’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청와대의 오랜 독주(獨走)에 ‘좀비화’한 일선 정부 부처들이 책임감을 갖고 스스로 일을 하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도 시급하다. 제왕적 행태를 그대로 두고, 일하는 공간만 바뀌는 ‘광화문 청와대’는 안 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3-14 03:00 
[천광암 칼럼]제2의 한국을 꿈꾼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의 시련우크라이나 남쪽의 항구 마리우폴은 러시아가 이번 침공을 시작하면서 공격 목표 중 하나로 삼은 도시다. 지금은 포성에 휩싸여 있지만, 한때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경제 청사진과 관련해 서구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곳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9년 해외 기업인과 투자자들을 이곳으로 초청해서 투자포럼을 열었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이 투자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내민 키워드는 ‘한국’이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은 수십 년 만에 부유한 하이테크 국가로 변모했다”면서 우크라이나를 제2의 한국으로 만들 ‘코리아 플랜’이 준비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우크라이나 경제의 이정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리에 ‘한국’을 들고나온 것은 두 나라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낀 고난의 역사, 4000만∼5000만 명대의 인구 규모 등 유사점이 적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라는 쓰라린 경험을 한 것도 닮은꼴이다. 다만 IMF 구제금융 이후 양국 경제가 걸은 길은 크게 달랐다. 1997년 210억 달러를 지원받은 한국은 3년 만에 모든 빚을 갚고 IMF 체제를 성공적으로 ‘졸업’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2008년 164억 달러 지원 결정을 얻어낸 이후 지금까지 수년 단위로 추가 지원을 받거나 부채 연장을 하면서 경제를 연명하고 있다. IMF와 서구 세계의 금융지원 없는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곧 파산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2019년 당시 41세의 ‘코미디언’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원부국인 우크라이나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은 ‘올리가르히’라고 불리는 소수 신흥재벌과 권력층의 부정부패다. IMF가 추가 지원을 하거나 부채상환 연장을 할 때 늘 부패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런 현실에 신물이 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아무리 국정 경험이 없더라도 때 묻지 않은 젤렌스키가, 오염된 기득권층보다는 나을 것으로 봤다. 젤렌스키가 교사 출신 ‘아웃사이더’ 대통령으로 출연해서 기득권을 깨부수는 TV 드라마가 현실 속에서도 재연돼 주기를 우크라이나 국민은 고대했다. 젤렌스키 대통령 나름으로는 다양한 개혁 플랜을 가동했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이나 IMF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부패 몸통’ 중 하나로 꼽히는 ‘올리가르히’ 이호르 콜로모이스키와의 관계다. 콜로모이스키는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TV 채널의 소유주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콜로모이스키에게 부당한 이권을 제공할지 모른다’는 IMF와 서방 세계의 불안감을 말끔히 해소시키지 못해서 ‘틈’을 만들었다. 젤렌스키는 선거 운동 때 콜로모이스키의 개인 변호사인 안드리 보단을 고위 선거 참모로 썼을 뿐만 아니라, 집권 후에는 첫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2016년부터 콜로모이스키에게 56억 달러에 이르는 회계 조작과 자금세탁 의혹 등이 제기돼 왔지만,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겹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클린’ 이미지에는 금이 갔다. 여기에 푸틴의 위협이 현실화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무능’이라는 프레임이 강하게 씌워졌고, 마침내 한국 대선판에까지 소환됐다. 25일 TV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6개월 된 초보 정치인이 미숙한 외교로 러시아를 자극해 충돌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 후보가 다음 날 바로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지만, 푸틴의 침략전쟁이 젤렌스키의 과오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푸틴의 불만을 산 ‘친(親)서방 반(反)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다수 국민의 여론인 동시에 이미 이전 정부에서부터 지향해온 노선이다. 개전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이 보인 행동은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고 있다. 그는 해외로 대피하라는 미국 측의 권유를 마다하고 국내에서 대(對)러시아 항전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국민을 버리고 해외로 꽁무니를 뺐던 아슈라프 가니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앞으로 젤렌스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화력의 절대적인 열세 앞에서 낙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푸틴의 침공을 이겨내고 ‘코리아 플랜’으로 우크라이나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기원하고 응원한다. 그의 실패는 4300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목숨과 피, 눈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2-28 03:00 
[천광암 칼럼]‘퍼주기 주도 성장’으로 5대 강국 간다는 이재명의 몽상문민정부를 표방했던 YS가 경제 분야에서 내걸었던 구호는 ‘신경제’다. 임기 초부터 신경제 100일 계획,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연이어 내놨다. 1995년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고 이듬해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성사되자, YS정부는 신이 났다. 하지만 작은 성공이 대재앙의 단초가 됐다. 때 이른 선진국 행세는 임금 물가 부동산가격 등을 끌어올려 거품을 잔뜩 키웠다.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지키기 위한 저환율 정책은 외환 유출을 가속화시켰다. 그 불행한 대단원이 1997년 국가부도였다. 이처럼 YS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신경제’ 캐치프레이즈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들고나왔다. 이 후보는 11일 ‘신경제 비전 선포식’을 갖고 “이재명 신경제의 목표는 종합국력 세계 5강의 경제대국”이라고 밝혔다. 이어 12일에는 1·5·5공약(수출 1조 달러, 국민소득 5만 달러, 글로벌 G5 시대)을 제시했는데, 여기서는 MB의 7·4·7공약(연 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좌파 이미지 탈색에 명운을 걸다시피 한 이 후보가 우파의 정책 창고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쓸어 담는 사정은 알겠지만, 신경제나 7·4·7처럼 실패한 아이콘까지 재활용하는 것은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비단 명칭의 문제가 아니다. 영혼 없는 ‘우파 성장론 코스프레’를 하다 보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욕심냈던 신경제나 7·4·7의 과오까지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력을 잴 때 가장 일반적으로 쓰는 것은 국내총생산(GDP)이다. 한국의 현재 순위는 세계 10위다. 이 후보가 경제 5강 진입을 본인 임기 중에 달성하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넉넉히 2030년을 기준으로 잡아보자. 영국의 경제경영연구센터가 전망한 2030년 한국의 예상 순위는 중국 미국 인도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브라질 캐나다 러시아에 이어 11위다. 러시아 캐나다 브라질 프랑스 영국은 물론이고 GDP가 한국의 2.3배에 이르는 세계 최고의 제조업 강국 독일까지 제쳐야 넘볼 수 있는 자리가 경제 5강이다. 이 후보에게 이런 ‘기적’을 일궈낼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가. 이 후보는 신경제 비전 선포식에서 5강 실현을 위한 전략으로 과학기술·산업·교육·국토 등 4대 대전환을 제시했지만,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그가 실제로 향후 5년 한국 경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는, 구체성 없는 미사여구 몇 마디보다는 평소 강조해온 핵심 공약이나 현실 속의 행보에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이 후보가 지금까지 가장 공을 들여온 간판 공약은 기본소득 기본금융 기본주택 등 기본 시리즈와 토지이익배당제다. 지금까지 주요 선진국 가운데 어떤 나라에서도 해보지 않은 매머드급 퍼주기 정책들이다. 이런 공약을 폐기하지 않고 5대 강국을 가겠다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론보다 더 황당한 ‘퍼주기 주도 성장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후보가 퍼주기 공약들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하겠다”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 이 후보의 ‘퍼주기’ 본능은 대형 공약이 아닌 ‘소확행’ 공약 등에서도 나타난다. 탈모치료약 건강보험 적용 공약이 대표적이다. 건강보험 재정 부담 따위는 안중에 없다. ‘병사 월급 200만 원 공약’도 비슷하다. 반대 여론을 의식해 스스로 접었던 전 국민 재난지원금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꺼내든다. 말 안 듣는 기획재정부에서 예산 기능을 떼어내 청와대나 국무총리실로 가져가겠다는 구상도 내비쳤다. 퍼주기 정책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다 치워버리겠다는 섬뜩함마저 엿보인다. 퍼주기 정책은 막대한 국가부채에 의해서만 뒷받침될 수 있다. 이 후보에 비하면 소소해 보이는 문재인 정부의 퍼주기 5년 만으로도 660조 원이던 국가부채가 1064조 원으로 늘어났다. 막대한 빚으로 성장과 복지를 떠받치는 경제의 말로는 자명하다.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가 단적인 예다. PIGS는 2010년 심각한 부채위기를 겪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포퓰리즘과 재정위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퍼주기 공약에 대한 대수술이 없는 이재명의 ‘신경제 1·5·5’는 허황된 몽상일 뿐이다. 또한 PIGS의 실패를 그대로 뒤따르는 길이기도 하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2-01-17 03:00 
[천광암 칼럼]‘측근 아닌 가까운 사이’ 유동규, ‘어려울 때 도와준 인연’ 최순실지난주 경기도 국감에서 이재명 지사의 답변은, 강변이든 궤변이든 대체로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유동규’ 세 글자만 만나면 ‘크크크’를 곁들인 ‘사이다 화법’이 일순 답답한 ‘고구마 어법’으로 돌변했다. 이틀간의 국감에서 심상정, 이영, 이종배 의원 등 3명이 ‘2010년 유 씨를 성남시 시설관리공단 기획본부장에 임명하는 인사에 지시하거나 개입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이 지사는 “기억이 안 난다”는 표현을 18일에 4번, 20일에 6번 썼다.(참고로 이 지사의 측근인 이한주 전 경기연구원장이 임원추천위원회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이 인사에 대해서는 경력 조작, 부실 심사, 맹탕 감사 등의 의혹이 쏟아지는 중이다.) 20일 국감에서 이 지사는 “유 씨와는 작년 말 이후 연락이 끊겼다”고 강조하다가 “유 씨가 압수수색을 당할 당시 자살한다고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꺼냈다. 하지만 “누구에게 들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또 한 번 “기억이 안 난다”는 방패 뒤로 숨었다. 유 씨가 압수수색을 당한 것은 지난달 29일, 불과 한 달도 안 지난 일이다. 유 씨의 말 한마디에 수사 칼날이 어디로도 튈 수 있는 비상한 시기에, 그처럼 내밀한 정보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믿으란 것인가. 이 지사는 유 씨와 “오랜 친분”, “가까운 사이”를 인정하면서도 ‘측근’이라는 수식어는 한사코 거부했다. 그리고 그 근거 중 하나로 유 씨가 ‘사장도 아닌 본부장’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다. 유 씨는 2015년 3월 대장동 개발 사업자 선정을 불과 보름 정도 앞둔 시점에 임기를 절반도 못 채운 황무성 사장을 밀어내고 직무대리 자격으로 사장 권한을 틀어쥐었다. 후임 사장이 올 때까지 3개월간 벌어진 일이 성남의뜰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민간 분야 초과이익 환수 조항’이 빠진 사업협약서 확정 등의 일이다. 토건 비리세력에 ‘돈벼락’을 안기는 설계 작업이 이 기간 동안 완벽하게 처리된 것이다. 통상 정부부처 차관이나 국회의원 출신이 가던 경기관광공사 사장 자리에 유 씨가 앉게 된 배경을, 이 지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유 씨가 압수수색을 당한 바로 다음 날 토론회에서다. “이분이 시설관리공단과 도시개발공사에서 직원 관리하는 업무를 맡아서 매우 잘했기 때문이다.” 황당한 이야기다. 유 씨는 2010년 이사장이 공석이던 시설관리공단에 입사하자마자 3개월간 20번이나 인사권을 휘둘렀다. 자신의 업무추진비 자료가 언론에 공개됐다는 이유로 회계담당 직원 5명 전원을 직위해제했다가 복직시키는 등의 전횡으로 감사원 지적을 받기도 했다. 도시개발공사 본부장 시절에는 남욱, 정영학 등 토건비리 세력의 끄나풀들을 끌어들여 별동대를 조직한 뒤 화천대유를 위한 일확천금 실무 설계를 맡겼다. 그 대가로 유 씨는 700억 원이 넘는 뇌물을 약속받았다. 유 씨가 이 지사의 ‘측근’으로 언론에 등장한 것은 9년도 더 된 일이다. 2012년 5월 2일자 한 중앙일간지는 이런 소식을 싣고 있다.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줄곧 대장동을 공영개발하겠다는 방침을 밝혀왔는데도, ‘측근으로 불리는’ 유 씨가 민관공동개발 방식을 검토 중이라고 밝혀 논란이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당시 성남시 관계자는 “시 소유 시설물을 관리하는 기관의 간부가 시장이 외국 출장 중인 시점에 도시개발을 멋대로 발표한 배경을 파악 중”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대장동 개발은 유 씨가 밝힌 내용대로 진행됐다. 이런 유 씨가 측근이 아니면 비선실세였단 말인가. 2016년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게이트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3번에 걸쳐 대국민 사과담화를 했다. 1차 때는 최 씨와의 관계를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고 했다. 2차 때는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곁을 지켜줬다”고 말했다. 3차 때는 “주변을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이라고 했다. ‘비선실세’라는 이미지를 탈색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적인 인연을 강조하거나 ‘주변’이라는 모호한 명사를 골랐을 터다. 이 지사의 ‘측근 아닌 가까운 사이’와 박 전 대통령의 ‘어려울 때 도와준 사이’라는 이상야릇한 어법 뒤에 가려진 본질은 같을까, 다를까. 이 지사가 ‘측근’이라는 표현을 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커지는 의구심이다. 진실을 밝혀내기까지 검경 수사의 갈 길이 멀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1-10-25 03:00 
[천광암 칼럼]이재명과 오리너구리, 그리고 대장동 개발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대표 공약인 기본소득을 오리너구리에 비유한다. 오리너구리는 주둥이는 오리, 몸통은 너구리를 닮은 희귀동물이다. 이 지사는 기본소득이 제대로 된 복지정책도, 경제정책도 아니라는 비판을 겨냥해 “오리너구리를 보지 못한 사람은 오리냐 너구리냐 논쟁하겠지만, 세상에는 오리너구리도 있다”고 했다. 기본소득은 ‘복지적 경제정책’이라는 것이다. 기본소득보다는 대장동 개발의 사업모델이 오리너구리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이런 사업은 대개 공공개발이나 민간개발 중 하나로 진행되는데, 대장동 개발은 둘을 혼합한 부분공영 방식으로 진행됐다. 결과에 대해 이 지사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공익환수 사업”이라고 자평한다. 민간개발로 진행했으면 모든 개발이익을 민간이 독식했을 텐데 부분공영 방식을 통해 5503억 원을 환수했다는 것이다. 설득력도 떨어지고 본질에서도 벗어난 프레이밍일 뿐이다. 수익 원천이 공공에 있는데도 ‘곁가지’인 화천대유와 관련자들이 말도 안 되는 수익을 쓸어 담은 것이 대장동 ‘게이트’의 본질이다. 경기도 싱크탱크인 경기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토지개발 사업의 개발이익은 공공의 인허가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실제로 대장동 개발 같은 사업의 성패는 땅주인들로부터 얼마나 빨리, 얼마나 싼 가격에 땅을 사들이고 인허가를 얼마나 수월하게 받느냐에 달려 있다. 대장동 개발은 성남시가 토지 수용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길면 10년도 넘게 걸릴 수 있는 사업기간을 3년 반으로 줄이고 토지 수용가격도 낮출 수 있었다. 성남시가 100% 출자한 성남도시개발공사가 인허가 업무까지 지원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성남의뜰’ 배당을 보면 화천대유와 관계자들이 4040억 원, 성남도시개발공사가 1830억 원이었다. 이 지사 측이 말하는 5503억 원은 배당 외에 화천대유 측이 부담한 공원 조성비와 터널 공사비 등을 포함한 금액이다. 화천대유는 배당금 4040억 원과 별개로, 분양사업까지 직접 벌여 3000억 원을 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먹이는 주둥이(공공)가 잡고 영양은 몸통(화천대유)에 쌓인 모양새다. 그런 데다 ‘공공’이라는 외피가 ‘꾼’들이 벌인 구린 돈 잔치에 가림막까지 해준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 지사 측은 수익배분 구조가 이렇게 짜인 이유를 “화천대유가 모든 리스크를 지는 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지사 경선캠프가 작성한 ‘대장동 개발 Q&A’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업이 잘 안되면 초기 사업비로 투자한 350억 원을 모두 날리는 것 이외에도, 대출금 7000억 원을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 화천대유와 그 대표는 완전히 망하고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집도 경매에 넘어가고 가족도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것입니다.” 자영업자들은 겨우겨우 먹고사는 데만도 목숨을 담보로 잡혀야 하는 시절이다.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는 리스크만으로 7000억 수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사업 설계 당시 실무진이 “민간 개발이익 통제 장치가 필요하다” “부동산 경기가 좋아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 등의 의견을 냈다는 보도도 연이어 나오고 있다. 유동규 당시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은 부인하고 있으나, 설령 건의가 없었더라도 조(兆) 단위 프로젝트에 그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이 지사 측 Q&A 자료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화천대유가 앞으로,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수익을 거둔 사정과 국민정서를 감안하여 사회 또는 공공 기여를 추가적으로 통 크게 하기 바랍니다.” 권순일 전 대법관이 고액을 받고 화천대유 고문을 맡은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자 보수 전액을 기부한 것과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만약 대장동 의혹이 이런 식으로 무마되거나 국민의 관심 밖으로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새로운 의혹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데도 검경의 수사는 더디기만 하다. 이 지사 측은 국민의힘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화천대유에서 근무하다가 50억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퇴직금을 받은 점, 원유철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고문을 지낸 점 등 여러 근거를 들어 대장동 의혹이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수사든, 특검이든, 국정조사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서 국민 앞에 하루 속히 진실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대상에도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재명 게이트’인가, ‘국민의힘 게이트’인가 작명은 실체가 밝혀진 다음 일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2021-09-27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