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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천광암 논설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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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2024-04-25
칼럼100%
  • [광화문에서/천광암]만혼처벌법, 독신세, 생리경찰…

    출산장려 정책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기원전 5세기 전반 중국 월(越)나라를 다스린 구천은 남자가 20세, 여자가 17세를 넘어도 결혼하지 않으면 그 부모를 처벌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25∼60세의 남자나 20∼50세의 여자가 결혼하지 않으면 독신세(稅)를 물렸다. 1960∼80년 루마니아를 통치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콘돔 판매와 낙태를 금지하고, 심지어 중학생의 출산까지 권장했다. 여성들의 직장으로 찾아가 임신검사를 하는 공무원, 일명 ‘생리(生理)경찰’까지 뒀다. 이 정책들의 성패는 반반으로 갈린다. 구천의 정책은 국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은 로마의 인구 감소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차우셰스쿠의 정책은 출산율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고아가 급증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정권이 패망하는 한 원인이 됐다. 이런 강제 수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은 인구구조를 바꾸기가 훨씬 어렵다.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 문제를 경험한 일본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989년 합계출산율이 1.57로 떨어지자 집단 쇼크를 받은 일본은 이후 ‘에인절플랜’ ‘신에인절플랜’ ‘신신에인절플랜’ 등을 쏟아내며 출산율 끌어올리기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1.2대이던 합계출산율은 2006년 이후 1.3∼1.4대로 소폭 오르는 데 그쳤다. 이마저도 출산장려 정책이 아니라 경기회복 덕분이라는 게 냉정한 평가다. 한국은 저출산 현상을 일본보다 ‘약간 늦게’ 맞았지만 정책 대응은 ‘많이’ 늦었다. 인구구조가 재생산되려면 합계출산율이 2.1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합계출산율이 1983년 이미 2.1 아래로 떨어졌고 이후 계속 내리막 곡선을 그려 왔다. 30년이 넘게 저출산 현상이 지속돼온 것이다. 이에 비해 정부가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을 내놓고 본격적으로 대응을 시작한 것은 2006년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1년부터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일견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구절벽’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총인구만큼이나 중요한 지표인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내년 정점에 이른 뒤 2017년 감소 국면으로 접어든다. 인구재앙이 눈앞에 닥치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은 한가하기만 하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 시안은 ‘지금까지의 인구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으며 앞으로도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고백과 다름없다. 시안은 2013년 기준 1.19명인 합계출산율을 2020년까지 1.5명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자료를 아무리 뜯어봐도 이를 실현할 만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1.5로 올리더라도 2.1에는 못 미치고, 만약에 만약을 더해 2.1로 끌어올리더라도 신생아들이 생산가능인구에 편입되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추가로 걸린다.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면 인구감소의 충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이민(移民) 허용이다. 미국이 저출산 문제를 겪지 않고 끊임없이 경제적 역동성을 유지하는 원인은 이민에 대해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이 출산율을 올리려고 안간힘을 써도 급속한 인구감소 쇼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은 정치·사회적 갈등 등 많은 문제를 낳는다. 하지만 인구감소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에 ‘제한적이고 단계적’으로라도 이민을 허용하는 방안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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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더티 디젤게이트’의 손익계산서

    독일의 한 여론조사업체가 몇 달 전 독일인 1000명에게 ‘어떤 사람(또는 사물)이 독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요한 볼프강 괴테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응답은 폴크스바겐이었다. 폴크스바겐은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자사뿐 아니라 독일차 브랜드 전반에 깊은 흠집을 남겼다. 소비자들의 불신은 폴크스바겐을 넘어 ‘클린(Clean) 디젤’의 기치(旗幟)를 들어온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등으로도 확산되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디젤게이트’가 현대·기아차에 반사이익을 안길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봤을 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폴크스바겐 비리를 발표한 당일, 미국에서는 자동차산업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빅뉴스가 언론을 탔다. 애플이 전기차 시장 참여를 사실상 공식화한 것이다. 애플이 약 600명의 연구진을 고용해 전기차 개발을 해온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했지만, ‘애플 카’의 출시 시기를 2019년으로 못 박는 등 본격 출사표를 냈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양상이 바뀌었다.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전기자동차의 점유율은 1% 미만으로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충전 문제 등 결정적인 약점들이 빠른 속도로 극복되고, 높은 연료소비효율과 싼 유지비라는 강점은 더욱 강화되고 있어 전기차 시장이 곧 고속 성장기에 접어들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전기차 분야의 선두주자인 테슬라는 지난해 1월 자사 제품으로 미국 대륙을 4일 만에 횡단하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랠리팀은 테슬라가 미국 전역에 설치한 무료태양광초고속충전소만을 이용해 ‘장거리 주행+연료비 제로+배출가스 제로’가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에너지혁명 2030’의 저자인 토니 세바는 테슬라 등의 사례를 들어 2025년경에는 내연기관 자동차들이, 필름회사 코닥이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겪었던 것과 같은 순간을 맞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전기차 기반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관련 기업들이나 구매자들에게 파격적인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전 세계 자동차회사들이 갖고 있는 현금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현금을 갖고 있으면서, 브랜드에 대한 광적인 충성고객까지 확보하고 있는 애플까지 전기차 진영에 가세한다면 기존 자동차업체들이 맞아야 할 ‘코닥의 순간’은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요란한 악대(樂隊)를 앞세운 행렬에 마차와 사람이 몰리는 밴드왜건(Band Wagon) 효과 때문이다. 디젤게이트는 전기차에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이 밴드왜건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기아차는 수소연료전지차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왔다. 유럽 시장을 잡기 위해 ‘클린 디젤’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반면 전기차 투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현대·기아차가 내놓은 양산 전기차는 기아의 쏘울EV와 레이EV뿐이다. 다만 최근에는 전기차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바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모두 내년에 준중형급 전기차를 출시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한국 정부는 2020년까지 전기차 20만 대를 보급한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놨지만, 올해 상반기(1∼6월) 한국 시장의 전기차 출하대수는 823대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중국에 비하면 1.1%에 불과한 수치다. 말만 앞서고 실행이 뒤따르지 않은 결과다. 한국이 전기차 분야에서의 부진을 만회하려면 제조업체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들도 전국적인 충전망 구축과 초기 수요 견인에 하루빨리 발 벗고 나서야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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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過猶不及 배임죄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나중에 배임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다. 이사회 출석 여부를 묻는 담당자에게 ‘해외출장을 가서 연락이 안 된다고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지낸 적이 있는, 현 정부의 한 장관급 공직자가 최근 사석에서 한 말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이사회에 참석하는 사외이사가 이 정도이고, 일상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기업오너나 사내이사가 느끼는 공포는 훨씬 크다. 배임죄에 대한 공포는, 기업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는 일부 기업인의 해사(害社) 행위를 예방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업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투자의욕을 꺾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양면이 모두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서는 후자의 측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배임죄 규정을 갖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배임’이라는 말은 있지만 ‘배임죄’라는 용어는 없다. 배임을 당사자 간에 풀어야 할 민사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고의성이 없더라도 배임죄로 ‘걸어서 잡아넣을 수 있게’ 돼 있는 나라는 한국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 우리 형법의 배임죄는 문구상 일본의 형법을 베낀 것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 형법에서는 배임죄의 성립 요건으로 ‘자기 또는 제삼자의 이익을 꾀하거나 또는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으로’라는 표현이 들어 있지만, 우리 형법에는 이런 문구가 없어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배임죄 그물을 너무 넓게 치려다 보니 법조문이 애매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서도 공감을 표시하는 의견이 많다. 이코노믹리뷰라는 잡지가 2013년 2월 교수와 변호사 등 법률 전문가 52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결과 82.7%가 “배임죄의 범죄성립 판단기준이 애매하다”고 지적했다. 배임죄 조항으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도 양산된다. 2005∼2008년 우리나라의 무죄율은 1.2%인 데 비해 배임죄의 무죄율은 5.1%에 이른다. 더구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의 무죄율은 11.6%로 평균의 10배에 육박한다. 외국에서는 전혀 죄가 되지 않는 일로, 한국의 기업인들은 수사기관 조사실과 재판정 문턱을 수도 없이 들락거려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설령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기업의 신용도는 땅에 떨어지고, 경영은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다. 하소연할 곳도 보상받을 곳도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경제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인 ‘기업가정신’이 싹트려고 해도 싹틀 길이 없다. 글로벌 경제의 통합이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기업경영 환경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불확실성과 위험(risk)의 증대다. 노키아처럼 특정 분야에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기업들도 의사결정이 경쟁 기업에 한발만 뒤처지면 한순간에 패망하는 것이 글로벌 경쟁의 현주소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고 신속하게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기업가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마침 국회 부의장인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 지난달 말 배임죄의 조항을 일부 손보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개정안은 배임죄를 없애자는 게 아니다. 고의성이 있을 때만 배임죄를 적용할 수 있게 하자는, 온건하고 타당한 내용이다. 배임죄 규정이 기업가정신과 건전하게 동행할 수 있도록 과유불급의 문제점을 이 기회에 꼭 고쳐야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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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반환점의 경제학

    “여러분, ‘경포대’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 (실제로는) 경제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다.” “지지율 29%짜리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에 해당하는 2005년 8월 25일 KBS의 특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자신은 경제를 잘 챙겼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언론의 비우호적 보도로 인해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는 불만을 특유의 반어법과 독설로 표현한 것들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는 데보다는, 경제가 나쁘지 않다고 강변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집권 후반부를 보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주 임기 반환점을 맞는다. 경제정책 책임자로서 박 대통령이 받는 평가는 최소한 ‘포기’라는 수식어가 붙는 정도는 아니다. 지지율도 노 전 대통령에 비해 10%포인트가량 높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처한 경제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당시만 해도 전자 화학 조선 등 우리 주력 산업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잠재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가시적인 형태로 눈앞에 닥쳐 있다. 또한 ‘고용 없는 성장’이 체질화하면서 청년실업은 비탈길에서 절벽으로 치닫는 중이다. 경제적 난제들을 잔뜩 안은 박 대통령이 참고할 만한 전례는 노무현 정부 외에도 두 가지 정도가 더 있는 것 같다. 먼저 또 다른 반면교사로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다. 기업 친화적인 MB노믹스를 앞세워 당선된 이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 활성화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력과 소통능력 부족으로 ‘부자감세’ ‘영리병원’ ‘귀족학교’ 등 좌파진영의 낙인찍기 전술에 발목이 잡혀 반환점도 돌기 전에 자신의 정책 컬러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러면서 들고나온 것이 친서민, 공정사회, 동반성장 등의 구호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진정으로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한 정책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문제는 빈 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한 포퓰리즘 정책이었다는 데 있다.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에 이은 알뜰주유소 도입, ‘배춧값 국장’으로 통하는 물가관리책임실명제 시행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포퓰리즘의 단맛에 빠져 집권 후반기를 허송한 결과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박근혜 정부로 고스란히 상속됐다. 박 대통령에게 벤치마킹이 될 만한 것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사례다. 1998년 집권한 슈뢰더 전 총리는 노사정 대타협이 무산되자 집권 중반경인 2002년 경직적인 노동시장을 개혁하기 위한 ‘어젠다2010’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과 노동계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그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인기 없는 개혁안을 강행한 결과 그는 2005년 총리 자리에서 밀려났다. 당시에는 그의 개혁안이 싸구려 일자리를 양산한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슈뢰더 전 총리를, ‘유럽의 병자(病者)’라고 불리던 독일의 경제를 되살려 오늘이 있게 한 주역이라고 칭송한다. 슈뢰더 전 총리는 5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개혁을 추진하고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정치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의지다.” 노동 공공 교육 금융 등 4대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건 박 대통령이 남은 2년 반 동안 두고두고 되새겨 봐야 할 말이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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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대통령의 휴가와 경제 살리기

    1969년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로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해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국 정부가 외국 정상을 서부 해안으로 초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정상회담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화제를 낳았다. 닉슨 대통령이 당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샌클러멘티에서 같이 휴가를 보내자고 박 대통령 부부에게 제안한 것도 그중 하나다. 참모들 사이에서는 “한미관계를 튼튼히 할 좋은 기회”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육영수 여사가 “우리가 지금 한가롭게 휴가를 즐길 때가 아니지 않으냐”고 반대해서 결과적으로는 없던 일이 됐다. 대통령의 휴가는 단순한 휴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앞의 사례에서 보듯 때로는 중요한 외교수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국내적으로 유·무언의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부터 닷새간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현재로선 외부 일정 없이 관저에서 조용한 휴가를 보낼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번잡스러운 일정에서 벗어나 푹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하고 의미 있는 휴가라고 생각한다. 다만 닷새 중 하루 정도는 박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를 위해 ‘가벼운 나들이’에 나서 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침체의 늪에서 헤매온 내수산업은 올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복병까지 만나 최악의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중소기업청 등이 지난달 9일부터 5일 동안 전국 2000여 중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절반 이상이 “지난해 세월호 사고 때보다 국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라고 예상했고, 전통시장 매출은 지역에 따라 최대 80%까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메르스가 ‘끝물’이라고 하지만 해외관광객들의 방문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어 휴가 성수기인 8월 말까지는 많은 관광지들이 파리를 날려야 할 처지다. 동아일보와 경제 5단체가 ‘국내 휴가로 경제 살리자’ 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도 소상공인들의 고통을 온 국민이 조금씩이라도 나눠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 캠페인에는 현재 경찰청이나 국세청 같은 대형 정부기관이나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같은 대기업들이 동참하겠다고 앞다퉈 선언했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국내 여행지로 휴가를 가거나 전통시장을 찾아가서 물건을 산 뒤 인증샷을 올리는 이벤트에 일반인들의 참여가 줄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인증샷’ 이벤트가 처음 시작된 13일부터 20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에만도 1003장의 인증샷이 올라왔고 그 다음 일주일 동안에는 3배 가까운 2941장이 올라왔다. 지방으로 휴가를 떠나는 것만이 이 캠페인의 취지는 아니다. 서울에 있는 전통시장을 찾아 떡볶이를 사먹거나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도 훌륭한 실천이다. 물론 박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전통시장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국내 휴가로 경제 살리자’는 열기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박 대통령이 전통시장을 찾는다는 것은 평상시와는 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이 휴가 이후 경제 살리기에 매진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혹시라도 경제 살리기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관저에서 외롭게 휴가를 보내는 동안 결정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흔히 경제는 심리고, 답은 늘 현장에 있다고 한다. 한 달 뒤면 임기반환점을 돌게 될 ‘박근혜노믹스’의 성공을 위해서도 박 대통령이 이번 휴가 기간 중 전통시장을 꼭 찾아 상인들의 투박한 손을 맞잡았으면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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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국민연금의 선택을 주목한다

    1994년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중에 ‘베이비 데이 아웃(Baby‘s Day Out)’이라는 코미디가 있다. 3인조 유괴범이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기를 유괴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내용이다. 극 중에는 유괴범들의 손에서 벗어난 아기가 우연히 동물원의 고릴라 우리(Cage)로 기어서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 다행히 고릴라는 아기에게 호감을 보인다. ‘돈벌이 밑천’인 아기를 우리에서 꺼내기 위해 고릴라의 눈치를 살피는 극 중 유괴범들의 곤혹스러운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최근 삼성과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간에 벌어지는 공방전은 이 영화와 잘 오버랩된다. 삼성이 비즈니스 성과 면에서는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고 하지만 지배구조 면에서는 아주 취약하다. 월가 전체를 등에 업은 거대 헤지펀드가 보기에는 손쉬우면서도 좋은 돈벌이 밑천이다.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경우 범법자는 아니지만, 오직 돈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극 중 3인조와 비슷하다. 헤지펀드들은 한국의 산업 발전이나 일자리, 사회공헌과 같은 공익적 측면에는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다. 본전을 뽑을 기회가 오면, 과거 론스타나 소버린이 그랬던 것처럼 돈 보따리를 챙겨서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삼성과 엘리엇 간의 공방에서 국민연금의 존재는 영화 속 고릴라에 비견할 만하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지분 11.2%를 갖고 있다. 단일 주주로는 최대다. 국민연금이 17일로 예정된 삼성물산 임시 주총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에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을 하면 엘리엇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가 된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과 경영 활동에는 큰 타격이 예상된다. 거센 후폭풍은 삼성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국민연금은 2014년 말 기준으로 국내 시가총액 20위 기업 중 15개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큰손이다. 이런 국민연금이 ‘OK 사인’을 준다면 유괴범들은 마음 놓고 어린아이를 꺼내 가서, 계획했던 돈벌이를 할 것이다. 국내에는 경영권 방어 제도가 거의 없는 데다가, 100대 그룹 중 73%가 오너 세대교체기에 진입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대기업이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한다. 물론 국민연금으로서는 이와 반대되는 고민도 있을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보험료를 받아 운용하는 처지에서는 단기적으로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1위 의결권자문회사인 ISS가 삼성물산의 합병 건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한 것이 무엇보다 큰 부담일 수 있다. 하지만 ISS의 의견은 단순한 참고 사항일 뿐이다. 국제금융계에서는 목표가 되는 기업에 대해 1단계로 헤지펀드가 5%(나라에 따라서는 2% 또는 3%)가 조금 넘는 지분을 매집해서 경영참여 선언을 하고, 2단계로 의결권자문회사가 헤지펀드의 행동을 지지하는 의견을 내놓고, 3단계로 뮤추얼펀드 등 공격성이 덜한 다양한 기관투자가들이 뒤따르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ISS의 의견은 오히려 비판적으로 뜯어보는 것이 맞다. 선택을 앞둔 국민연금은 올해 5월 행동주의 펀드인 트라이언이 화학회사 듀폰을 공격했을 때 미국의 최대 공무원연금인 캘퍼스가 보였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캘퍼스의 앤 심프슨 기업 거버넌스 담당 헤드는 트라이언 펀드에 맞서 듀폰 경영진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기업)들을 잘 보살펴야지 거위 털을 잘라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익이 아니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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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시안의 꿈, 중국의 똥

    중국 최대의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馬雲) 회장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고, 당신은 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위험을 무릅쓰고 실천에 옮기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느냐, 즉 실행력의 차이가 세계적인 기업가와 보통 사람의 구분을 만들어낸다는 대답인 셈이다. 그런데 마윈 회장의 말을 “중국은 하고, 한국은 봅니다”로 바꿔 놓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최근 중국 서부 내륙에 위치한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 시를 둘러보고 들었던 생각이다. 시안에는 가오신(高新)개발구라는 공업지구가 있다. 총면적이 서울 여의도의 307배에 이르고, 아직 80%가 빈 땅으로 남아있는 이 개발구에는 요즘 전자산업 분야의 첨단기업들이 연이어 진출하고 있다. 전기자동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를 생산하는 삼성SDI도 그중 하나다. 삼성SDI가 상하이(上海) 등 해안 도시에 비해 인프라도 취약하고 물류도 불편한 시안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중국 중앙정부와 이곳 지방정부의 원대한 ‘꿈’을 읽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전기자동차를 통해 미국 독일 일본 한국 등 자동차 강국들을 단숨에 추월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내연기관의 경우는 기술 격차가 너무 커서 불가능하지만 새롭게 부상하는 기술인 전기자동차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자동차 대국의 꿈과 함께, 서부지역 개발이라는 또 다른 정책 목표가 맞물리면서 산시 성과 시안 시는 파격적인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삼성SDI의 경우 설비투자에 들어가는 금액의 절반을 보조금 등의 형태로 돌려받는다. 또한 전기자동차를 구매하는 기업이나 개인들에 대해서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어서 관련 기업들은 판로까지도 사실상 보장받고 있다. 전기버스의 경우는 차량 값 2억 원 중 1억 원을 정부에서 지급할 정도로 지원 규모가 크다. 삼성SDI 공장에서 7km가량 떨어진 곳에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공장을 짓는 과정에서 지방정부가 보여준 실행력과 열정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반도체공장이 들어선 자리는 당초 밀밭과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마을에는 260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고 묘지도 적지 않았다. 지방정부가 나서서 이곳을 공터로 만드는 데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방정부는 이어 삼성전자가 공장시설을 짓는 15개월 동안 전기와 물, 도로 등 관련 인프라를 완벽하게 갖춰주었다. 반도체 제조설비가 너무 커서 트럭이 톨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하자 지방정부가 나서서 톨게이트를 뜯어내는 일까지 있었다. 중국 정부의 실행력은 개발 분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20km 떨어진 곳에는 높이 2000, 3000m대의 봉우리가 1500km에 걸쳐 이어지는 거대한 친링(秦嶺)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안의 오염된 공기 때문에 삼성전자 공장에서 친링 산맥이 보이는 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반대로 친링 산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이 드물다. 지방정부가 공기 질을 개선하기로 작심한 지 1년여 만에 나타난 변화다. 조선 말 연암 박지원은 중국의 신문물을 둘러보고 열하일기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거기에는 ‘똥 덩어리를 처리하는 방식만 보아도 천하의 제도가 다 여기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감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놀라운 속도로 변신하는 중국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시절의 한중(韓中) 관계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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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58년 개띠, 94년 개띠

    사람이 태어난 해의 띠로 운명을 점쳐보는 것을 당사주라고 한다.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해서 운명이 같을 리는 없다. 하지만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학교에 가고, 성인이 되고, 퇴직하는 것을 감안하면 동갑내기가 함께 겪어야 할 공동의 운명이란 게 어느 정도는 있는 듯하다. “58년…” 하면 “…개띠”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58년 개띠는 애환이 많은 세대다. 베이비붐 세대 중심부에 속해 있다 보니 언제나 사람에 치여 살았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고, 사회에 나가서도 늘 좁은 문을 지나 다녀야 했다. 직장에서 중간간부가 됐을 때는 세계화와 디지털화의 소용돌이를 만나 ‘브로큰 잉글리시(Broken English)’와 ‘독수리 타법’으로 힘겹게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일부는 정년을 코앞에 두고 늦복이 터졌다. 정년이 58세인 회사에 다니는 58년생은 원래대로라면 만 58세가 되는 내년에 직장을 떠나야 하지만, 60세 정년이 의무화하면서 2018년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8년 개띠가 고생을 많이 한 세대라면 70년 개띠는 억세게 운 좋은 세대다. 윤택한 유년을 보냈고 교복 자율화, 대학생 과외합법화, 해외여행 자유화와 같은 혜택을 가장 먼저 누렸다. 넓게 보면 386세대에 속하지만 1980년대 중반과 같은 치열함은 사라진 캠퍼스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대다수는 외환위기 직전에 사회에 진출해, 극심한 취업난을 간발의 차로 피하는 행운까지 누렸다. 82년 개띠는 70년 개띠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더 팍팍한 청춘을 보냈다. 이들이 대학을 다닌 2000년대 초반은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뜻의 신조어 ‘이태백’이 등장하는 등 청년 실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 비정규직이 확산되면서 82년생 개띠의 상당수는 아르바이트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야 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취업문을 두드린 2007년 ‘88만 원 세대’라는 단행본이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재수하지 않고 대학에 갔다면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94년 개띠들의 인생은 아직 미래형이다. 앞길이 창창해야 할 청춘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원인 중 하나가 58년 개띠와의 ‘악연’이다. 94년 개띠의 경우 여학생들이나 군 복무를 면제받은 남학생들은 내년에, 군대에 간 남학생들은 2018년에 처음 취업문을 두드리게 된다. 58년 개띠가 정년 연장으로 혜택을 누리는 시기와 맞물린다. 정년 연장으로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 기업들이 신입사원 채용을 줄일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천길 낭떠러지를 연상시키는 청년 고용절벽이 94년 개띠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런 결과는 58년 개띠가 원했던 바가 아니다. 58년 개띠와 94년 개띠가 모두 웃을 수 있는 길도 얼마든지 있었다. 일이 꼬이게 만든 것은 무책임한 정치권이다. 정치권이 임금피크제 등 청년 고용절벽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무작정 정년 연장부터 법제화하는 바람에 58년 개띠와 94년 개띠 간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뺏어야 하는 악연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권은 국회에 계류 중인 청년 일자리 창출 법안과 민생법안을 하루빨리 통과시켜야 한다. 58년 개띠들이 현장에서 더 오래 뛰는 것이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94년 개띠들의 일자리를 늘리는 결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58년과 94년 개띠 간의 ‘만들어진 악연’은 정치권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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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

    대학병원에서 정교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를 그린 의학드라마 ‘하얀 거탑’의 일본 원작을 보면, 출세욕에 가득 찬 주인공인 조교수가 고가의 그림을 실세 정교수에게 선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림을 돌려보낼지 받을지를 놓고 정교수 부부간에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공짜이니 그냥 받자”는 부인에게 정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공짜보다 비싼 것은 없는 법이야.” 공짜가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역설적인 이치는 신문 사회면을 조금만 들춰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농촌지역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침구나 건강용품을 실제 가격보다 수십 배 비싼 값에 떠안기는 사기 상술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들이 하나같이 내거는 미끼가 바로 공짜다. 무료공연이나 공짜선물로 유인한 뒤 인정(人情)에 호소해서 안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이들의 수법이다. 공짜의 무서움을 몰랐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노인들뿐만이 아니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의 뒤늦은 후회는 더 뼈에 사무칠 것이다. 공돈의 올무에 걸려 수십 년간 공을 들여 얻은 권력과 명예를 하루아침에 내놓으려면 얼마나 속이 쓰릴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의 요즘 행태를 보면, 수령자로서뿐만 아니라 공여자로서도 공짜의 달콤함에 푹 절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정책에 공짜라는 달콤한 포장을 씌워 국민들을 현혹하는 ‘정치상술(商術)’에 있어서는 세계 어느 정치인들이 우리 정치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싶다. 무상급식과 무상의료 등 무상복지 시리즈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려 한 여야의 짬짜미도 공짜 선호 심리를 파고드는 전형적인 정치상술이다. 소득대체율 상승으로 이득을 보는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표를 줄 것이라는 계산에 취해, 나라 곳간이나 미래세대의 부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우리 정치인들의 지금 모습이다. 소득대체율을 올리지 않고 현 수준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연금의 파산은 예정돼 있는 상태다. 2014년 말 현재 470조 원 규모인 국민연금기금은 2043년에 2561조 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2060년에는 완전히 바닥나게 된다. 이후에도 연금을 계속 지급하려면 가입자들에게 보험료를 더 내게 하거나 혈세를 투입해야 하지만 급속히 고령화하는 인구구조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부채 때문에, 때를 놓치면 어느 하나도 쉽지 않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지금은 15∼64세의 청장년 100명이 노인 16명을 부양해야 하지만, 2060년에는 청장년 100명이 노인 80명을 부양해야 한다. 현재 3%대 후반인 잠재성장률은 고정적인 0%대에 진입하고, 지금 500조 원대인 국가채무는 무려 1경4612조 원으로 ‘조’를 넘어 ‘경’의 시대에 들어서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과잉복지 때문에 2033년경 한국 정부가 파산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실정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연금에 더 퍼줄 궁리를 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연금재정을 건전화하고 나라 곳간을 채우는 데 모든 지혜를 짜내도 부족할 때다. 현 세대가 공짜를 앞세운 정치상술에 계속 놀아날 경우, 후손들은 빈껍데기 연금과 파탄 난 재정, 제로성장이 체질화된 허약한 경제를 유산으로 받게 된다. “공짜에 취해 나라를 거덜 내먹은 세대”라는 역사적 평가를 면하려면, 얄팍한 정치상술에는 세상에서 제일 비싼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표와 여론으로 정치인들에게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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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날다람쥐 닮아가는 한국경제

    날다람쥐는 재주가 많은 동물이다. 달리기는 기본이고, 나무를 타거나, 헤엄을 칠 수도 있으며, 나무에 구멍을 팔 줄도 안다. 또 날다람쥐의 옆구리에는 엷은 막이 자라 있어서 네 다리를 활짝 펼치면 마치 행글라이더처럼 나무 사이를 활공(滑空)할 수도 있다. 재주가 많아서 자연계의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날다람쥐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이유는 날다람쥐가 갖고 있는 재주가 하나같이 어중간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지붕을 넘지 못하고, 나무를 타지만 가지 끝까지는 못 가고, 헤엄을 치지만 계곡을 건널 수 없고, 구멍을 팔 줄 알지만 자기 몸을 충분히 숨기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다. 달리는 속도 또한 어중간하다고 한다. 한국경제가 날다람쥐를 닮아가고 있다. 이것저것 욕심은 많이 내지만, 말만 앞서고 실천력이 뒤따르지 않다 보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지난 10여 년간 정부와 정치권이 대대적으로 발표한 비전과 청사진만 보면 한국은 지금쯤 전통적인 제조업은 물론이고 금융 의료 교육 등 고급서비스업과 미래형 제조업 분야에서도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거창하게 등장했던 비전일수록 속 빈 강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2월 야심 찬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 로드맵’을 발표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숲을 기르면 호랑이는 저절로 오게 돼 있다”며 외국 금융사들을 대거 유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금융허브 비전에 따라 서울 여의도에는 국제금융센터(IFC)가, 부산에는 부산국제금융센터가 지어졌다. 그런데 1월 말 현재 시점에서 IFC는 3개동 중 1개동은 입주한 금융사가 하나도 없다. 부산국제금융센터에는 외국 금융사는 1곳도 없고, 한국 금융공기업 9곳만 입주해 있다고 한다. 칡넝쿨 같은 규제가 개선되지 않다 보니, 오라는 호랑이는 안 오고 집고양이 몇 마리만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한강의 기적에 이어 한반도 기적을 만들 미래전략”이라면서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정비전으로 제시했다. 이후 저탄소차협력금제 등을 법제화했으나 현실은 뒷전이고 의욕만 앞서는 내용이어서, 많은 반론에 부닥친 끝에 사실상 백지화됐다. 되지도 않을 일에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됐다. 현재로선 녹색성장의 성과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어서 ‘한반도의 기적’은 고사하고, ‘동네 기적’이라고 하기에도 낯 뜨거운 수준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등 4대에 걸쳐 추진돼온 서비스산업 선진화는 첫 단추도 못 끼우고 있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조차 3년 넘게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실정이다. 이 밖에도 역대 정부와 현 정부가 요란한 구호와 함께 벌여만 놓고 제대로 실행을 하지 않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마당에 정부와 야당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새 애드벌룬을 띄우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소득주도성장이 한국경제를 ‘저성장-저고용의 늪’에서 건져낼 비책(秘策)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은 내수시장이 협소한 한국에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자칫하면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리고 기업의 연구개발 역량을 훼손해, 지금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수출산업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훼손할 위험성이 크다. 이미 몸에 지닌 다섯 가지 재주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갈고닦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새로운 재주만 찾아 헤매는, 어설픈 날다람쥐를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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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임금 조정의 나비효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았던 서울 신당동 사저가 최근 일반에 공개됐다. 뉴스를 보면서 박근혜 대통령 취임 직후 금융권에서 돌았던 ‘괴담’ 한 토막이 떠올랐다. 당시 사저 건너편에는 모 은행 대리가 살았는데, 월급을 어찌나 많이 받는지 씀씀이가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육영수 여사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정희 장군은 은행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됐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 뒤 은행원들의 급여를 무자비하게 삭감했다. 아버지의 연(緣)이 딸에게도 이어져 이번 정권에서도 ‘은행원 잔혹사’가 재연될 수도 있다는 게 괴담의 줄거리였다. 현 시점에서 볼 때 괴담의 예측 부분은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괴담에 나오는 ‘은행원 잔혹사’ 자체는 과거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은행은 최고의 연봉이 보장된 ‘신의 직장’이었다. 이 시절 한국은행에 근무했던 정운찬 전 총리는 “1년에 보너스만 50번씩 받았던 것 같다”고 회고한 적이 있을 정도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부터 은행원 고액연봉에 본격적으로 칼을 대기 시작했다. 그해 6월의 신문기사 한 토막을 보자. ‘봉급 삭감에 이어 예년 같으면 몇 번씩 쏟아져 나왔을 각종 보너스가 한 푼도 안 나오자 은행원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 심한 이는 자기 은행에 들어오는 예금마저 “다른 은행에 가서 하라”고 할 정도로 일을 기피하고 있다.’ 은행원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박정희 정부는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1975년에는 모든 은행원의 월급을 무려 30% 이상 삭감하는 고강도 조치까지 내놓았다. 그러자 은행원들의 무더기 이직(移職)이 시작됐다. 당시는 수출주도형 고속성장에 가속도가 붙던 시절이다. 종합상사를 비롯한 수출기업과 중동 붐을 탄 건설업체들은 고급인력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었다. 이들의 ‘고급인력 갈증’을 해소해 준 것이 바로 이직 행렬에 뛰어든 은행원들이었다. 1976년 한 해 동안 이직한 은행원만 1500명이 넘었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만약 박정희 정부의 은행원 임금 삭감 정책이 없었다면 한국경제가 걸어온 길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임금 정책은 한 나라의 경제구조나 경제발전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이런 점에서 최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임금을 인상하도록 대기업들을 압박하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박정희 정부의 은행원 임금 삭감 정책이 국가경제 전체로 볼 때는 나름 순기능을 했던 것과는 반대로, 최 부총리의 임금 인상 드라이브는 아무리 뜯어봐도 국가경제에 보탬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우선 대기업들이 임금을 올리면 인재의 대기업 쏠림 현상이 가속화하고 중소기업의 구인난은 더 심해질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도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정부의 강압에 못 이겨 마지못해 임금을 올린 기업들은 노동생산성이 높은 해외로 생산시설을 이전하거나, 일자리를 줄이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대기업들의 임금 수준이 너무 높아서 국제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정부가 팔을 비틀지 않더라도 정년 연장,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확대 등으로 대기업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과거 은행원들이 한창 좋던 시절에는 이런저런 명목을 달아 마구 수당을 만들다 보니 ‘비 오는 날에는 우중(雨中)수당, 갠 날엔 청명(淸明)수당’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정부가 지금처럼 임금 인상 드라이브를 걸다 보면 우중수당, 청명수당이 다시 등장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어 보인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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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불침항모와 갤럭시S6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에서 벗어난 1999년경의 일이다. 삼성그룹의 분기당 순이익이 처음으로 1조 원을 넘어서자, 당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이제 우리는 ‘불침항모(不沈航母)’가 됐다”고 자평했다. 불침항모란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는 뜻이다. 삼성그룹이 어지간한 외부환경에는 끄떡하지 않을 수 있는 시장지배력과 수익창출력을 갖추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10∼12월)에만 ‘1조 원’의 5배가 넘는 5조2900억 원을 영업이익으로 남겼다. 15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지만 5조 원은 여전히 엄청난 돈이다. 분기 영업이익이 아니라 연간 매출로 따져도 5조 원을 넘기면 한국의 1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그런 삼성전자가 “지금이 위기”라며 최근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다. 전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의 급여를 인상하지 않기로 일찌감치 방침을 정한 데 이어, 최근에는 삼성전자 직원의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급여뿐만 아니라 평가와 승진에서도 전례 없이 빡빡한 기준을 적용해 상당수 직원들이 패닉에 빠져 있다. 삼성이 안팎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강도 긴축에 나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이 5조 원을 넘겼다고는 하지만 2013년 4분기에 비해서는 3조 원이나 줄어 수익성이 악화된 반면, 임직원 수와 급여총액은 늘어나는 등 군살이 많이 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상의 문제는 오히려 지엽적인 문제다. 8000만 대의 판매량을 기록한 히트작, 갤럭시S3 이후 불침항모 선단을 이끌 ‘기함(旗艦)’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다. 삼성전자는 2013년 4월과 2014년 4월 각각 갤럭시S4와 갤럭시S5를 내놨지만 시장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전자업계는 S4와 S5 두 모델 모두 5000만 대 안팎의 판매에 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매출 200조 원이 넘는 거대 선단을 이끄는 기함으로서는 자격 미달이었다. 1일(현지 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공개된 갤럭시S6는 삼성전자의 절박한 위기감이 반영된 승부작이다. 옆면에는 금속을 소재로 채택하고 앞면과 뒷면에는 강화유리를 사용해 S5 등 이전 모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하드웨어의 스펙은 삼성이 갖고 있는 첨단 기술력을 다 쏟아 부었다는 설명이 과장으로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S6 실물을 처음 접했을 때, 지금 쓰고 있는 S5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S4와 S5를 약간 부정적으로 봤던 외신들도 “삼성의 스마트폰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는 것을 보면 비단 필자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제품력이 뛰어나고 디자인이 좋은 제품이 시장에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갤럭시S6의 진정한 승부처는 지금부터, 제품이 일반 소비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4월 중순까지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의 광고·마케팅 및 공급 능력에 S6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긴축경영 분위기가 S6의 발목을 잡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기업이 돈을 버는 데는 비용을 줄이는 ‘분모(分母)경영’과 파이를 키우는 ‘분자(分子)경영’의 두 가지가 있다”면서 “경영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손쉬운 분모경영에 집착하는 기업은 성장할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S6라는 승부수를 띄운 현 시점에서 삼성의 경영진이 깊이 되새겨 봐야 할 이야기다. S6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좁게는 삼성의 기함이지만, 넓게는 한국 경제의 기함이기 때문이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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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十亂과 十常侍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 행보가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규제를 개혁하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끝장토론을 벌이고, 대기업들이 만드는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열성을 보이고 있지만 경제는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연말정산 파동과 건강보험료 정책 난맥에서 보이듯, 이제는 경제 살리기를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국정동력마저 사라지는 듯한 조짐도 보인다. 어디에서 꼬인 것일까. 십상시와 십란(十亂)의 고사가 떠오른다. 십상시는 황제의 귀와 입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하다 후한(後漢)을 패망으로 이끈 10명의 환관을 말한다. 중국사에서 이 십상시와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존재가 십란이다. 십란은 문왕과 그 아들인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하고 태평성대를 열었던 ‘10명의 유능한 신하’를 뜻한다. 십란이라는 말은 무왕이 상나라의 폭군인 주왕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들을 모아 놓고 했던 연설에서 나왔다. 무왕은 “주왕에게는 억조(億兆)의 군사가 있지만, 나에게는 마음과 덕이 하나로 통하는 10명의 유능한 신하가 있다(有亂臣十人)”는 점을 들어 승리를 장담한다. 무왕이 꼽은 십란은 주공단, 소공석, 태공망, 필공, 영공, 태전, 굉요, 산의생, 남궁괄, 읍강 등 10명이다. 이 중 태공망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전략가 중 한 명이었고, 소공석은 지방관의 사표(師表)로 오늘날까지 추앙받는 인물이다. 십란 중 가장 걸출했던 인물인 주공단은 군사적으로도 혁혁한 공을 세웠고 무왕이 죽은 이후에는 어린 조카를 대신해 섭정을 하면서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했다. 그는 인재를 소중히 여기기로 특히 유명했다. 무왕의 동생이자 성왕의 숙부라는 존귀한 신분이었지만 손님이 찾아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즉시 손님을 만나러 뛰어나갔다. 목욕하다가 머리카락을 틀어쥔 채 나간 것이 세 번이고, 먹던 밥을 뱉어내고 허겁지겁 나간 것이 세 번이라는 삼착삼토(三捉三吐)의 고사가 주공 이야기다. 하루 저녁에 70명의 인재를 대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무왕이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아 천하를 통일하고, 주공이 역사에 길이 남는 정치적 문화적 업적을 남긴 것은 유능하면서 덕이 높은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아무리 간절한 바람으로 경제를 살리려고 해도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경제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정치 군사 외교 사법 교육 분야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홀로 발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제 살리기는 대통령이 십란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고, 수시로 대면해서 열린 대화를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최근 곤두박질치는 데는 ‘수첩인사’ ‘문고리 권력 3인방’ ‘십상시’ 등의 용어가 상징하는 것처럼 과거의 친소관계에 얽매이는 편협한 인사가 발단이 됐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불통(不通)에 책임이 큰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두둔하면서 쇄신 인사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외면한 것이 지지율 하락의 도화선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소영’ ‘강부자’ ‘만사형통’ 등 잘못된 인사에서 이명박 정권의 추락이 시작됐던 것과 다르지 않다. 박심(朴心)과 민심(民心)이 멀어질 때 그 결과를 예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왕은 이런 말을 남겼다. “하늘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백성이 원하는 바를 반드시 따른다(天矜于民 民之所欲 天必從之).”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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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한국경제의 바람구멍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이 자리 잡은 울산 전하·미포만 일대를 지난주 둘러봤다. 이곳의 항공사진을 보면 힘차게 날아오르기 위해 양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의 모습이 연상된다. 포효하는 호랑이를 닮은 듯도 한데, 풍수의 문외한이 보더라도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된다. 이곳은 뒤로 염포산, 봉대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앞으로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다. 향토풍수학자들은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형세의 명당이어서 부와 명예가 한꺼번에 모이는 땅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이 천하의 명당도 ‘바람구멍’이 뚫리면 좋은 기운이 쇠하게 된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3조 원이 넘는 적자를 내면서 현지에서는 이 바람구멍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나온다. 일부 향토풍수학자는 바람구멍의 실체로 개통을 5개월 앞둔 염포산터널을 꼽는다. 하지만 진정한 바람구멍은 땅과 땅 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름 아닌 현대중공업 노사관계 이야기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7개월여에 걸친 협상 끝에 지난해 말 임금 및 단체협약에 대한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러나 이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돼, 현대중공업의 노사관계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표류상태에 빠져들었다. 근로자들의 정서에도 일면 공감은 간다. 조선업의 작업환경은 힘들기로 유명하다. 한여름에는 뜨겁게 달궈진 무쇠 덩어리 안에서 한 말도 넘는 땀을 흘려야 하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거센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한다. 그런데도 쾌적한 실내에서 편하게 일하는 현대자동차 등 인근 대기업의 근로자들보다 연봉이 적으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의 경쟁상대는 현대차 근로자들이 아니다. 이미 수주 물량 면에서 한국을 앞지른 중국 조선업체의 근로자들이다. 종전에는 해양플랜트 등 첨단 분야에서의 기술적인 우위로 간신히 경쟁력을 유지했지만 지금은 기록적인 저유가로 석유 관련 선박과 설비 발주의 씨가 말라 더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한다. 더구나 한중 간의 기술격차는 무서운 속도로 좁혀지고 있다. 그 결과가 3조 원이 넘는 적자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생사의 기로에서 노사 간 내부갈등으로 시간을 허송한다는 것은 공멸을 뜻한다. 비단 현대중공업만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전반이 비슷하다. 지난 40여 년간 ‘국제시장 세대’들이 뼈 빠지게 일한 덕분에 한국경제는 세계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성취를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고도성장을 견인한 주력산업들이 한꺼번에 비틀거리는 등 한국경제의 기반에 금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런데도 모두가 노(勞)와 사(使), 갑과 을로 편을 갈라 힘겨루기를 하느라 중국 쇼크, 엔화 약세, 역오일쇼크 등 동시다발적인 초대형 악재에 속수무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는 반기업 정서와 관료주의의 포로가 돼 짐이 된 지 오래다. 지속성장이냐, 일본식 장기침체냐의 기로에 선 한국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설비투자도, 연구개발도, 신시장개척도 아니다. 노와 사, 정과 노, 사와 정,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 사이에 뚫린 바람구멍을 막는 것이 이런 것들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돌로 성을 쌓은 자는 망하고, 사람으로 성을 쌓은 자는 흥(興)한다’고 한다. 인화(人和)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양보와 배려로 우리 사회 구성원 사이에 생긴 간극을 메우는 것이 위기를 넘는 첫걸음이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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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정주영의 돼지몰이론-빈대론

    2015년은 한국 기업사(史)에서 큰 의미가 있는 해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소 판 돈을 들고 야반도주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 한국 최고의 기업가로 성공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이자 역사이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은 세계 5위의 자동차그룹도, 세계 최대의 조선그룹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 대부분이 불모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년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잿빛 전망이 쏟아져 나온다. 건설과 조선업종의 대기업들은 분기당 수천억 원에서 최고 2조 원에 이르는 부실을 털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화학과 유화업종은 중국 특수(特需)가 꺼지면서 구조적 불황으로 빠져들 조짐을 보인다. 투자와 소비 어느 것 하나 온기가 도는 곳이 없다. 이처럼 어려운 때이기에 좌절과 포기를 몰랐던 정 회장의 일생은 종전보다 훨씬 더 값진 교훈을 던진다. 1996년 스웨덴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정 회장을 추천한 적이 있다. ‘대학교는커녕 중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사람에게 노벨경제학상이 웬 말이냐’고 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정 회장의 ‘돼지몰이론’과 ‘빈대론’은 지금의 한국 경제에 어떤 고급 경제이론보다도 훌륭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정 회장은 ‘고정관념’과 ‘적당히 주의’를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가 유조선을 가라앉히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서산 천수만 물막이 공사를 성공시키고 미포만 갯벌 사진 한 장으로 그리스에서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것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이 역(逆)발상을 강조한 정 회장의 ‘돼지몰이론’이다. 돼지를 우리에서 내몰 때는 앞에서 귀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꼬리를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돼지몰이론은 시장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경비 절감에만 매달리는 기업들도 귀담아들어야겠지만, 그보다는 정치권이나 정부가 더 뼈아프게 새겨야 할 이야기다.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 법인세를 올리자거나, 기업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내부유보금에 과세를 하는 등의 발상이 모두 앞에서 돼지 귀를 잡아당기는 행동이다. 다음으로, 정 회장이 ‘적당히 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평소 강조했던 것은 ‘빈대론’이다. 빈대론은 정 회장이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할 때 직접 겪었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정 회장은 잠을 자는 동안 빈대에게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갖은 꾀를 낸 끝에, 밥상 다리 네 개를 물이 담긴 큰 그릇 4개에 담그고 밥상 위에서 잠을 잤다. 빈대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해자(垓字)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빈대의 공격이 재개됐다. 빈대들은 밥상 다리를 기어오를 수 없게 되자,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사람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고공침투’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정 회장은 빈대론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렇게 덧붙였다. “찾지 않으니까 길이 없는 것이다. 빈대처럼 필사적인 노력을 안 하니까 방법이 안 보이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더이상 “투자할 곳이 없다”, “미래의 먹거리가 안 보인다”고 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문(自問)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해보기는 했어? 빈대만큼이라도….”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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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단두대보다 무서운 감사원

    올해 경제 분야에서 천송이 코트나 푸드트럭만큼 화제를 모았던 키워드는 많지 않다. 천송이 코트와 푸드트럭은 3월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 공무원들과 기업인, 중소 상공인들을 모아서 주재한 토론회에서 규제 완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토론회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의지가 너무도 결연했기 때문에 많은 국민은 규제 완화의 성과가 풍성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규제개혁 성과는 기대 이하다. 외국인들의 천송이 코트 구매를 가로막는 주범으로 지목됐던 ‘액티브 X’ 보안프로그램 설치 의무는 내년부터 없어진다. 9개월이 걸린 셈인데, 이미 타이밍을 놓쳐서 뾰족한 정책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푸드트럭은 수혜 대상이 고작 22대에 불과하다. 박 대통령의 ‘단두대’ 발언은 지지부진한 규제 완화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을 읽은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들을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하겠다”며 ‘규제 기요틴’ 도입 의사를 밝혔다. 해당 부처가 필요성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규제를 자동으로 일괄 폐기하는 ‘규제 기요틴’의 유용성은 멕시코와 헝가리 등에서는 이미 검증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제도가 ‘규제대국(大國)’ 한국에서도 과연 통할 수 있을까? 결론을 내기에 앞서 지난달 말 한 경제신문에 난 다음 기사가 떠오른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서울 서초구 우면동 삼성전자 우면연구개발센터에 지하연결통로를 만들기 위해 승인신청을 했다. 관련법에는 이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었는데도 서울시와 서초구청의 담당부서는 ‘공무원 재량권’을 내세워 18개월 동안이나 발목을 잡았다. 특히 서초구청에서는 구청장이 공사허가를 내주라고 지시했지만 담당부서가 구청장의 지시를 뭉개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담당 공무원들이 나중에 감사에서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몸을 사렸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규제를 ‘암 덩어리’로 지목해서 없애려 해도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 등 선출권력은 길어봐야 4, 5년 뒤면 바뀌지만 공직사회의 ‘슈퍼 갑’인 감사원은 영속하는 권력이고, 공무원들로서는 후자의 눈치를 더 살피게 되는 것이다. 투자도 마찬가지지만, 정책과 행정은 부족한 정보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따르게 된다. 결과가 다 드러난 다음에 당초 의사결정이 맞았느니 틀렸느니 꼬투리를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런데 상당수 감사원 감사가 이런 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규제 공무원들은 마지못해 복지부동(伏地不動)을 하거나, 적어도 복지부동을 할 수 있는 핑곗거리를 마련하게 된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으로 규제개혁을 한 공무원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면제해주는 방안을 추진하다 감사원의 반발에 부닥쳐 포기한 바 있다. 이는 규제 공무원들에게 ‘어느 줄이 생명줄인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결정적인 악수(惡手)였다. 12월 현재 중앙부처가 관리하는 규제는 1만4977건에 이른다. 지자체 권한에 속하는 규제는 4만1910건이나 된다. 이 두 무더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규제 실타래는 단두대로 잘라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규제 공무원들의 뇌리에서 ‘빅 브러더’의 검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이 병행되지 않으면 규제 단두대도 천송이 코트와 푸드트럭에 이은 또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게 될 것이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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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경제수석의 위험한 ‘엔저’ 인식

    1995년 상반기 한국의 수출은 기록적인 신바람을 내고 있었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앞세운 수출은 단군 이래 가장 좋았다는 ‘3저 호황’에 버금가는 호경기를 구가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사상 최고 기록이 쏟아졌다. YS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띄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이헌 당시 대통령경제수석은 그해 8월 “안정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호언했다. 일각에서는 ‘문민(文民) 호황’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이 호황은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수출 증가를 주도한 요인이 ‘슈퍼 엔고’ 현상이었기 때문에 외환시장의 흐름이 바뀌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YS 정부가 낯 뜨거운 자화자찬을 할 즈음 서서히 시동을 걸던 엔저 현상이 본격화되자 한국 경제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1996년 1, 2월 경상수지는 2개월 연속 사상 최대 적자를 냈고, 4월에는 수출증가율이 26개월 만에 한 자릿수로 주저앉았다. 반면 수입은 계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이어갔다. 외환시장에는 심각한 달러 기근이 찾아왔고,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엔저라는 거시적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거시적 정책이 절실했지만 YS 정부는 엉뚱하게도 ‘경쟁력 10% 강화’라는 미시적 대책을 들고 나와 기업들을 닦달했다. 결과는 환란(換亂)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이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환란의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는 환율 문제에 대해 잘못된 대응을 하거나 타이밍을 놓쳤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잊어버린 것 같아서다. 최근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서 자동차 조선 화학 등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 여파로 한국 경제는 작년 4분기 이후 4개 분기 연속 0%대 성장을 했다. 과거에 비해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가공할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기업들로부터도 협공을 당하고 있어서 상황이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경제정책 결정자들의 상황 인식은 한가하다 못해 낭만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안종범 경제수석은 이달 초 경제정책 브리핑에서 “엔저를 투자 확대의 기회이자 기업 체질 개선을 통한 경쟁력 강화의 기회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은 우리 기업들이 원가 1%를 줄이려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대기업들의 단가 쥐어짜기에 고통스러워하는 중소협력업체들의 비명소리가 어째서 안 수석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안 수석은 또한 “지금은 가격경쟁시대가 아닌 창조경제시대인 만큼 기술과 아이디어를 통해 경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며 “우리 경제의 활력을 높이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 전력을 다할 예정이다”라고 강조했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앞세운 창조경제로 엔저 환경을 헤쳐 나가겠다는 안 수석의 발상은 거시적 증세(엔저 현상)에 미시적 처방(경쟁력 10% 강화)을 했던 YS 정부 경제참모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창조경제가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좋은 영양제일 수는 있지만 영양제로 암을 고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포크는 샐러드를 먹는 데는 안성맞춤이지만 수프를 떠먹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제발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앞뒤가 맞는 엔저 대책을 세우기 바란다.천광암 산업부 부장 iam@donga.com}

    • 201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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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미래의 취업준비생을 위한 팁

    정도전, 장영실, 김구, 노무현. 올해 하반기 현대자동차 입사시험에 출제된 에세이 문제의 답으로 많이 거론된 인물들이다. 시험 문제는 ‘본인의 관점에서 역사상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 쓰시오’였다. 특히 수험생의 절반 정도는 정도전에 대해 썼다고 한다. 상반기 내내 안방극장을 달궜던 TV 사극 ‘정도전’의 영향일 것이다. 과거 에세이를 채점했던 경험을 떠올려 ‘내가 만약 현대차 채점위원이라면 어떻게 점수를 매길까’ 하는 상상에 빠져봤다. 에세이를 채점할 때는 대개 질문 취지에 충실한 답을 하는지, 주제와 소재는 참신한지, 일관성과 설득력은 있는지, 표현력은 좋은지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시험 채점이라는 게 비슷비슷한 내용의 답안지를 수십 장씩 읽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참신성이 없거나 질문의 취지에서 벗어난 답안지에는 아예 눈길이 가지 않게 된다. 이런 연유로 정도전이나 노무현이라는 답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 것 같다. 정도전의 경우, 채점위원이라면 누구나 ‘책을 얼마나 안 읽었기에 TV 드라마 이야기로 답안지를 채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고인이기는 하지만 측근과 추종자들이 현실정치의 최대 세력 가운데 하나다. 그를 역사라고 하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르다. 아직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해 고평가, 저평가를 논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장영실과 김구도 참신한 답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모 기업 면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6·29선언’이라는 대답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나름 준수한 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 대기업들이 인문학 비중을 크게 늘리고 난도(難度)를 높인 것은 올 하반기 채용에서 처음 시작된 현상이 아니다.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확고한 경향이다. 대응할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취업준비생들이 내놓는 답은 기대치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가뜩이나 ‘스펙’ 쌓기에 바쁜 취업준비생들을 두고 기업들이 역사다 인문학이다 해서 괴롭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7월 신한은행이 고졸 고객들에 대해 대졸 고객들보다 비싼 이자를 물리는 등 차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인 적이 있다. 당시 신한은행의 한 임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예금과 대출 등 금융상품을 설계할 때는 수학 통계학 전공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권도 이공계 출신 채용을 크게 늘리고 있다. 물론 이공계 출신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들이 인문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보니 큰 문제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들이 상품을 개발했다면 학력에 따라 대출을 차별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겠느냐.” 이런 종류의 고민은 비단 금융권만의 몫이 아니다. 한국의 주력 제조업이 ‘빠른 추격자’에서 벗어나 ‘시장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함께 ‘인간’을 이해하는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최근 기업들이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교육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기술력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의 역사 중시 추세는 결코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제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난도 또한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평소 책이나 신문기사를 꼼꼼히 읽고 자신만의 역사관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스펙이 있어도 대기업 문턱을 밟아보기 어려운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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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넛크래커에서 쥐라기로

    세계 최대 인터넷기업인 구글의 본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동남쪽으로 5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푸른 잔디가 깔린 야외 정원에는 거대한 공룡의 뼈 모형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악기에 이 일대에 서식했던 지구역사상 최강의 포식자,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렉스)의 화석이다. 구글이 T렉스를 마스코트로 삼은 것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글이 세계 정보통신기술(ICT)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행동양식을 보면 T렉스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624조 원이 넘는 시가총액을 무기로, 수많은 기업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구글이 2001년 이후 인수합병(M&A)한 기업은 168개에 이른다. 구글과의 생존경쟁에서 밀려 도태한 기업의 수는 그 이상일 것이다. 이 같은 ‘포식본능’은 구글이 줄기차게 잘나가는 원동력이다. 구글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안드로이드나 유튜브를 인수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구글은 없을 것이다. T렉스가 북아메리카 대륙을 주름잡던 시절, 아시아 대륙의 지배자는 타르보사우루스 바타아르(T바타아르)였다. 할리우드로부터 멀리 떨어진 탓에 지명도는 낮지만 사냥 솜씨에서는 결코 T렉스에게 뒤지지 않던 육식공룡이다. 만약 영화 ‘쥬라기공원’에서 T렉스와 T바타아르가 경쟁적으로 사냥감을 쫓는다고 생각해보자. 모든 초식공룡들과 다른 육식공룡들은 숨이 멎는 공포를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최근 세계 ICT산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알리바바가 19일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알리바바는 상장하자마자 시가총액에서 페이스북과 삼성전자를 제쳤다. 상장으로 천문학적인 자금을 손에 쥔 알리바바의 다음 행보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기술 진보 속도가 다른 산업에 비해 월등히 빠른 ICT산업에서 독자 기술만으로 변화를 쫓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M&A나 제휴가 생존을 좌우하는 전략이고, 이 전략을 뒷받침하는 무기가 시가총액이다. 중국의 울타리를 부수고 글로벌 무대로 뛰어나올 준비가 끝난 인터넷 공룡은 알리바바뿐이 아니다. 중국판 페이스북 텅쉰과 검색 포털 바이두는 이미 홍콩 증시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상태다. 이들 중국 3대 인터넷기업의 시가총액은 460조 원에 이른다. 거기에 비하면 네이버, 엔씨소프트, 넥슨 등 한국 3대 인터넷기업의 시가총액은 34조 원. 초라한 금액이다. 하드웨어 분야에 삼성전자가 버티고 있다고 하지만 중국의 샤오미 등 후발주자가 뒤쫓아 오는 속도는 매우 위협적이다. 지금까지는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우리 산업이 처한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로 ‘넛크래커(호두까기)’가 널리 쓰였다. 앞서가는 일본과 뒤쫓아 오는 중국 사이에 낀 괴로운 처지를 상징하는 말이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따라 배울 일본이 있고 적당한 거리로 뒤쫓아 오는 중국이 있는 구도는, 앞뒤로 페이스메이커를 둔 마라톤 경기였다. 적당히 긴장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안한 ‘골디록스’였다. 세월호특별법 논란에 가로막혀 한 걸음도 못 내딛는 정국, 대통령이 나서도 외국인들이 ‘천송이 코트’ 살 수 있게 해주는 데 몇 달씩 걸리는 철벽 규제, 회사가 분기 1조 원이 넘는 손실을 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을 올려 달라고 떼를 쓰는 노조문화를 보면, 산업의 지질연대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넛크래커 시대가 좋았다”는, 고통에 찬 탄식이 터져 나올 날이 머지않은 느낌. 필자만의 기우일까.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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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천광암]청산 옆에서 땔감 걱정 안 하려면

    올 5월 말과 6월 초에 걸쳐 중국암웨이사(社)에 소속된 직원과 사업자 1만5000여 명이 단체관광으로 한국을 찾았다. 3000여 명씩 5차례로 나눠 방한한 이들은 제주도 부산 서남해안 등을 둘러봤다. 이들은 여수 엑스포장에서 공연과 함께 저녁식사를 즐기면서 5박 6일간의 일정을 마감했다. 식사 메뉴로는 갈비구이와 삼계탕이 나왔고 반주(飯酒)로 소주, 맥주, 복분자주가 제공됐다. 여기서 퀴즈. Q. 이들이 일정 마지막 날 한 끼 저녁의 반주로 곁들인 순(純) 술값은 얼마일까? 정답은 2억4040만 원이다. 메인 메뉴를 포함한 총 식비는 40억 원, 개인 지출을 빼고도 회사 측이 단체관광에 쓴 직접경비만 238억 원에 이른다. 이어지는 퀴즈. Q. 국제선과 국내선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에서 여객 수가 가장 많은 항공노선은 어디일까? 정답은 김포∼제주 구간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모든 수학여행이 중단되고, 전 국민적인 애도 분위기에 따라 국내 여행 수요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지만 김포∼제주 구간이 여전히 북적거리는 데는 유커(游客), 즉 중국인 관광객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유커가 놀랍다. 먼저 ‘대수(大數) 효과’의 위력이 놀랍고, 씀씀이에 다시 한 번 입이 벌어진다. 관광업계에서는 “50대 중국 남성이 고가의 핸드백 가게에서 진열대 한 줄을 몽땅 쓸어 갔다” 등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유커의 통 큰 씀씀이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중국의 1인당 소득은 일본의 6분의 1에 불과하지만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관광하면서 평균적으로 쓰는 돈은 일본인들보다 2.3배나 많다. 명나라 때 문학자 능몽초가 엮은 소설집 초각박안경기에는 ‘청산(靑山)이 있는 한 땔감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지금 유커와 한국 경제의 관계가 딱 청산과 땔감이다. 유커 효과를 잘 활용한다면 ‘내수(內需) 불황’과 ‘일자리 기근’에 대한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다는 이야기다. 통계를 보면 연간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 수는 2007년 100만 시대를 연 이후 4년 뒤인 2011년에는 200만 시대에 진입했고, 이어 2년 만에 400만 시대로 점프했다. 이런 기세는 앞으로도 이어져 6년 뒤인 2020년에는 방한 중국인 수가 1500만 명에 근접할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유커 432만 명이 만들어낸 일자리는 모두 24만 개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단순 산술로 유커 1500만 시대인 2020년에는 83만 개 정도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계산이지만 이보다 훨씬 빨리 100만 개를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방한 중국인 수가 늘어나는 속도보다 이들의 씀씀이가 커지는 속도가 2배나 빠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자세다. 한국의 관광 인프라는 지금의 유커 400만 시대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중저가 호텔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호텔 대신 찜질방에 중국인 관광객들을 몰아넣는 악덕 여행사까지 나온다. 다양한 음식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먹는 중국인들의 식습관은 무시되기 일쑤다. 의자 대신 방바닥에 앉혀놓고 삼계탕 한 그릇 내주는 것으로 끝이다. 중국인들은 익히지 않은 채소는 잘 먹지 않는데 유커들에게 상추나 깻잎을 내놓는 식당이 대다수다. 중국의 해외여행 붐이 아무리 거세고 한중 간 거리가 가까워도, 잠자리 불편하고 먹을 것 없는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유커는 없을 것이다. 400만 명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마이너스 구전(口傳)’의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청산을 옆에 두고 땔감 걱정을 하는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자문(自問)해 봐야 한다. ‘한국은 유커들이 다시 오고 싶은 나라일까.’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 201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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