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동영]‘지검장 간담회’팩스받고 뛰어온 단체장들

  • 입력 2009년 6월 4일 02시 59분


2일 낮 12시경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의 전원풍 한정식 집에 검은색 고급 승용차들이 잇따라 들어왔다. 뒷자리에 탄 모 기초자치단체장은 약속시간에 늦은 듯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다시피 하며 음식점으로 허겁지겁 들어갔다. 주차장에는 ‘경기 XX나 1000’ ‘XX우 1001’ 등 권위주의 시절 기관장을 상징하는 번호판을 단 검은색 고급승용차를 포함해 10여 대가 세워져 있었다. 11시 40분부터 모이기 시작한 차량의 주인들은 경기 북부의 시군과 강원 철원의 시장 군수들, 그리고 박기준 의정부지검장이었다.

이날 자리는 박 지검장이 의정부지검 관할 11개 시군의 시장 군수와 만나는 간담회였다. 의정부지검은 경기 북부 8개 시군과 강원 철원군을 관할하고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이 고양시와 파주시를 관할한다. 의정부지검을 대신해 연락을 맡은 의정부시는 지난달 중순 해당 시군에 ‘6월 2일 의정부지검장과 간담회를 하려 하니 참석 여부를 알려 달라’는 팩스를 보냈다. 한 자치단체장 비서실 관계자는 “간담회의 구체적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쪽(검찰)의 요청이니 당연히 참석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참석 대상 단체장 중 2일부터 휴가 중인 이진용 가평군수만 불참했다.

민선 자치단체장들은 산적한 행정처리 결재와 수많은 지역 내 행사에 참석하느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시장군수협의회 등에도 전원 참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날 점심식사를 겸한 간담회 때문에 모두 의정부시에 모인 것은 이례적이었다. 구체적인 면담 목적을 밝히지 않으면 단체장을 만나기 힘든데 검찰의 요청 한마디에 단체장 10명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 박 지검장은 “올해 1월 부임 후 지역 단체장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고 법무부가 추진 중인 법질서 세우기에 대해서 논의했다”며 “특별한 현안이 있어 만든 자리도 아니고 편하게 모인 것”이라며 ‘가벼운 자리’였음을 강조했다. 검찰이 지역 내 기관장들을 만나 정책 추진과정에서 부닥치는 법적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을 문제삼을 것은 없지만 권위적이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의정부지검은 간담회에 참석한 한 단체장의 전임자를 구속한 바 있다. 참석자 중에도 불구속 기소돼 벌금형을 받은 경우가 있다. 보궐선거로 당선된 후임 단체장이나 이웃 단체장의 구속 사실을 잘 아는 다른 지역 시장 군수들에게 팩스 한 장은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 같다. 선거 또는 행정 과정에 약점이 있을 수 있는 지자체장에게 검찰은 엄청난 갑(甲)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이날 간담회 식사비용은 의정부시가 부담했다.

―의정부에서

이동영 사회부 argu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