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좌파의 노래, 우파의 노래

  • 입력 2008년 6월 27일 03시 12분


촛불집회 전에도 청계광장 주변엔 노래가 넘쳤다. 주말과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각종 축제와 이벤트가 이어져 흥겨운 음악이 광장에 울려 퍼질 때가 많았다. 시민들이 누구나 편히 들을 수 있는 밝고 가벼운 곡들은 도심에 낭만을 더했다.

광장의 노래가 바뀐 건 촛불이 켜지면서부터였다. 애초엔 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집회가 정권 퇴진과 이익단체들의 주장을 요구하는 시위로 변질되면서 운동권 노래가 거리에 쏟아졌다. 1970, 80년대 이후 대학과 노동운동 현장을 중심으로 불려 온 이런 노래들은 대체로 보수 우익 진영이 동의하지 않는 이념과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좌파의 노래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물론 집회 참석자들이 다 좌파라는 얘기는 아니다.

‘맞불’ 집회에 나선 보수 진영도 목청껏 노래를 불렀지만 레퍼토리가 짧았다. ‘아! 대한민국’ ‘내나라 내겨레’ ‘아빠의 청춘’ 등으로는 감성을 자극하는, 호소력 짙은 운동권 노래들에 도무지 맞서기 어려웠다.

노래에서 밀린 보수 진영은 난감했다.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세력이 이탈리아 공산당을 세운 안토니오 그람시를 깊이 연구한 것 같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람시는 문화의 힘에 일찌감치 주목한 공산주의 이론가로 옛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 후 운동권에선 마르크스, 레닌에 대한 대안으로 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았던 게 사실이다. 촛불집회의 명칭이 ‘촛불 문화제’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현실에 불만을 품고 세상을 바꾸자고 부르짖는 좌파의 노래가 우파의 노래를 압도하는 건 세계적인 현상이다. 반전 반핵 인권 여성해방 세계화 등의 이슈에 관해 수많은 시위 노래(protest song)가 만들어진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다. 때론 가슴을 적시고, 때론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흡인력 있는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보다 효율적인 비폭력적 시위 수단은 사실 별로 없다.

역설적이게도 시위 노래에 관한 한 미국은 세상의 많은 좌파에게 영감을 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반전 및 민권운동의 기수였던 밥 딜런, 존 바에즈, 피트 시거 등이 통기타를 치며 부른 잔잔한 노래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순수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뭔가 세상을 향해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노래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같은 시기 미국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노래는 멀 해거드의 ‘무스코기에서 온 오클라호마 촌사람(Okie from Muskogee)’이나 공수부대 출신인 배리 새들러의 ‘그린베레 발라드(Ballard of the Green Berets)’ 등 손으로 꼽을 정도다. 보수층이 노래로 주장을 펼칠 필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중 1969년 발표된 컨트리 송 ‘Okie from Muskogee’는 마리화나, 마약, 징집거부, 히피문화 등에 반대하고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애국심 등 보수적인 가치를 옹호했음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엔 ‘나는 담배 한 대 못 피우고 나는 밀밭에도 못 간다네/머리만은 텁석부리지만 히피족은 진정 아닙니다…’라는 가사로 소개됐다. 이 노래를 번안한 가수 서유석은 ‘철날 때도 됐지’라는 곡명을 붙였다. 흘러간 노래 제목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은 세상이 하도 어수선해서인가.

한기흥 국제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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