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승원]고향에서 마음에 담아온 것들

  • 입력 2005년 9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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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지방은 집중호우로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주택이 침수되는 피해가 났다는데, 내가 사는 바닷가 마을(전남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의 날씨는 추석 연휴 동안 내내 맑았다. 마을 앞 들판은 황금색이고, 하늘은 짙푸르고, 백자 항아리만 한 달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 여인들의 강강술래 소리가 그 달을 향해 날아오른다면 제격일 터이지만, 그것은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인 ‘전설’이다.

마을에는 빈집이 여섯 집으로 늘어났다. 홀로 사는 노인이 열다섯 분 계시고, 늙은 부부만 사는 집이 마흔 집이고, 2대나 3대가 사는 집이 열 집이다. 텅 비어 있던 골목에는 서울 부산 광주 등지에서 달려온 자동차들이 줄줄이 머물러 있고, 적막강산 같던 집집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더불어 지지고 볶는 고기 냄새, 참기름 향기가 흘러나온다. 노모를 모시고 있는 우리 집에는 대전 동생네가 왔고 서울의 내 큰아들이 며느리, 손자와 더불어 왔다. 막내아들은 바쁜 일이 있다고 오지 않겠다고 한다. 가슴 한구석이 빈다. 그놈이 오지 않았을지라도 집안은 운집한 가족들로 시끌벅적하다.

“쓸쓸해서 어쩔래? 시장에 가서 송편하고 과일 사다 놓고 먹어라.” 아내는 다례상차림을 하다가 전화를 걸어 막내아들에게 당부한다. 인연 맺은 사람들과 더불어, 만월 같은 기쁨과 즐거움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새 삶을 시작하자는 명절인데, 그 즐기기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홍수로 물에 잠긴 사람들의 절망과 슬픔은 또 어떠한가.

경제가 어려운 데다 기름값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아 장사가 더욱 안 된다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꾸 불안한 소리를 떠들어댄다고, 감자와 쪽파 시세 바닥이라고, 쌀 수입 개방되면 농사는 끝장이라고 시름에 겨워 있었을지라도, 사람들은 그 시름 내던지고 송편 빚어 먹으면서, “내년에는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와 희망을 가슴에 품는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선조들과 함께한다.

아내는 도시에서 온 동생네와 큰아들네 먹이려고 미리 냉동고에 준비해 놓았던 생선회를 꺼내놓는다. 집 나간 며느리로 하여금 그 맛이 그리워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 달콤한 도미와 농어와 주꾸미와 왕새우…. 귀향한 젊은이들은 색동옷 입은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마을 앞산 뒷산 기슭의 묘소들을 찾는다. 납골묘 앞에 꽃다발을 놓고 절들을 한다.

큰아들 큰며느리는 추석날 아침 다례를 지내고 제 아들 재롱을 연출해 주다가 점심 먹기 바쁘게 “장성 처가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겠다”면서 출발했다. 대전 동생네도 함께 떠났다. 경기도에 사는 조카네가 왔다가 총총 떠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이웃집들에 온 자동차들도 골목을 빠져나갔다.

겨우 하룻밤이나 이틀 밤을 묵고 가려면서 왜 그 먼 길을 전쟁 치르듯이 달려왔다가 달려가는 것인가. 마을에 온 자동차들은 부모들이 땀 흘려 지은 쌀농사, 깨농사, 고추농사의 결과물들을 싣고 떠나간다. 몸과 마음속에는 새로운 에너지를 가득 충전해 간다. 어머니 혹은 고향이라는 자궁은 모든 사람의 에너지원이다. 이튿날 한낮에는 마을 골목길에 한 대의 차도 보이지 않는다.

금년 추석은 여느 해의 그것보다 들뜨지 않았다. 느긋하게 즐기지 않는 듯싶다. 연휴가 사흘뿐인 때문일까, 경기가 가라앉은 때문일까. 세상살이가 점차 각박해지고 있다는 증좌일까.

두둥실 떠오른 순은색의 달을 가슴 깊이 들이켜면서 각자 삶의 자리로 달려간 가족들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빈다. 저 달 바라보는 모든 이가, 세상살이 어려울수록 몸과 마음에 그 달 같은 넉넉한 여유와 희망을 품고 살기를 빈다.

한승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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