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석연/‘2선후퇴-임기단축’ 발언은 위헌이다

  • 입력 2005년 9월 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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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사회는 경제적 어려움에 더하여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국가정체성의 위기마저 겪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핵심세력들이 권력행사 과정에서 헌법을 위반하거나 무시하는 데 있다고 본다.

심지어 대통령의 언행이나 정책을 매사 헌법적 기준으로 재단하면 어떻게 개혁을 하느냐는 말까지 나돈다.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물론 지식인들까지 줄지어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대통령의 직무수행 자체가 헌법 집행행위이며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은 헌법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교과서적 상식인데도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권 후반기를 맞는 첫날에도 방송에서 수도 이전 위헌 결정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위헌 시비가 있는 연정론에 대하여 “위헌이니 뭐니 하는 형식논리 갖고 말하지 말라”면서 헌법 경시의식을 드러냈다. 또한 부동산 정책에는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원리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헌법이 보장한 대한민국 경제질서의 기본을 흔드는 발언이다.

엊그제는 헌법의 어디에도 없는 2선 후퇴, 조건부 조기사임이라는 모호한 신상발언으로 또다시 국민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완전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제를 상정하고 있는 현행 헌법하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정치적으로 축소하고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사임이 아닌 조건부 사임 역시 헌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헌법이 추구하는 기본원리인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적법절차를 중핵으로 하는 법치주의, 행복추구권에 바탕을 둔 기본권 존중정신은 인류보편의 가치이자 헌법개정의 한계사항이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5년 동안 권력을 맡기면서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이와 같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권한까지 위임하지는 않았다. 이는 우리 헌법의 확고한 의지이다.

“대통령의 의무는 현 정부를 인수한 상태에서 관리하고 후임자에게 손상되지 않은 채로 넘겨주는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후보시절 닮고 싶어 했던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말이다. 헌법의 기본정신을 존중하면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실용주의적 정책, 법률, 제도를 시행하여(이것이 개혁정책의 방향이다) 좀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사회를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헌법적 책무이다. 링컨은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야당과 언론 등 반대세력을 관용의 정신으로 포용하면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 미 연방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했다. 링컨의 국민통합의 한복판에는 헌법이 자리하고 있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 대통령에게 대통령 직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판단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대통령의 권한과 정치적 권위는 헌법에 의하여 부여받은 것이며,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은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로서 헌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한도 내에서만 대통령으로서의 영(令)이 서고 국민적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과 정책이 줄을 잇고 걸핏하면 “대통령 직을 내놓겠다”면서 국민을 당혹스럽게 하는 대통령은 이제 헌법과 국민 앞에 겸허해야 한다. 국민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하는 것이다(순자). 지금부터라도 노 대통령은 헌법의 정신에 바탕을 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한다. 헌법의 정신을 존중하는 통합의 리더십이야말로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개혁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석연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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