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日다나카 前총리 구속

  • 입력 2005년 7월 2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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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시녀’에서 ‘성역 없는 검찰’로.

도쿄지검 특수부가 1976년 7월 27일 록히드 사건의 주역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구속하면서 일본 검찰은 다시 태어났다. 정계 오직(汚職)사건을 제대로 수사한 적이 없었던 일본 검찰이 정권 실세를 법정에 세운 것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록히드 사건은 1976년 2월 4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에서 록히드사의 회계담당자가 신형 비행기 판매 공작자금으로 일본 고위 공직자들에게 200만 달러의 뇌물을 주었다고 증언하면서 시작됐다.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다나카 전 총리를 겨냥한 검찰 수사 착수는 쉽지 않았다. 금권정치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었다. 권력의 전방위적인 압력이 검찰을 짓누르는 듯했다.

사건 발생 2주일 뒤인 2월 18일 검찰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가미야 히사오(神谷尙男) 도쿄고검장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사가 난관에 부닥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망설인다면 검찰은 아마도 앞으로 20년간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받아 후세 다케시(布施健) 검사총장이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마음껏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곧바로 도쿄지검 특수부 젊은 검사들로 구성된 수사팀은 태평양을 오가는 광범위한 수사에 들어갔다. 총리로 재직 중이던 1972년 일본 항공사인 젠니쿠(全日空)가 록히드 비행기를 구입하도록 운수상에게 지시했고, 성공 보수로 5억 엔을 받았다는 다나카 전 총리의 비리가 밝혀졌다. 젊은 검사들이 수사에 착수한 지 5개월 만에 그의 두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그러나 구속 당시 91명이던 자민당 내 다나카 파벌은 10년 뒤 140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은 4명의 총리 선출과정에서 ‘킹 메이커’ 역할을 맡기도 했다.

다나카 전 총리는 1, 2심에서 징역 4년, 추징금 5억 엔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건 발생 19년 만인 1995년 2월 최고재판소는 록히드사건 확정판결을 내렸다. 그때 ‘정치는 돈과 머릿수’라는 ‘명언’을 남겼던 그는 이미 사망(1993년)한 뒤였다.

금권정치의 그림자는 그만큼 길었던 셈이다.

김동철 정치전문기자 eastph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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