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박원재]‘매뉴얼 사회’ 일본의 위기

  • 입력 2005년 7월 4일 0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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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일본 외무성에서 안내말씀 드립니다. 내일 오후 2시 외무성 청사 ○○에서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이 열립니다. 참석을 원하면….”

동아일보 도쿄지사에는 매주 또는 격주에 한 번꼴로 이런 전화가 걸려온다.

용건에 대한 사전 설명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를 바꿔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담당 여직원은 그 흔한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기계음을 연상시키는 딱딱한 말투로 미리 준비한 문장을 읽어내려 간다.

매번 똑같이 듣는 안내여서 ‘알았다’는 뜻을 내비쳐도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전화를 끊는다.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매뉴얼’에 써있는 대로 맡겨진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일본은 매뉴얼을 중시하는 사회로 유명하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들르면 점원은 인사말, 원하는 메뉴 및 사이즈, 포장 여부 등을 똑같은 순서로 묻는다. 정황상 점포 안에서 먹을 게 분명해 보이는 고객에게도 굳이 ‘포장할 건가요, 점포에서 드실 건가요’ 하고 묻는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유학생은 “본사가 내려보낸 매뉴얼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매뉴얼 만능주의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런 자세가 일본의 고도경제 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제조업계의 매뉴얼 중시는 대량생산 시대에 품질의 균등화를 통해 ‘메이드 인 저팬(Made In Japan)’에 대한 전 세계 소비자들의 신뢰를 일궈냈다. 사소한 대목까지도 매뉴얼에 입각해 꼼꼼히 챙기는 사회적 관행은 ‘안전대국 일본’의 신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예전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고가 속출하면서 일본 사회도 ‘매뉴얼 사회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4월 말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효고(兵庫) 현 열차 참사는 20대 초반의 신참 기관사가 철도회사의 운행 시간표(매뉴얼)에 맞추려고 시속 107km로 과속하는 바람에 일어났다. 빡빡한 스케줄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철도회사 측은 시간표를 다소 느슨하게 조정하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학교 안전사고에서도 매뉴얼은 별로 힘을 못 쓰고 있다.

올해 초 17세 소년이 모교인 초등학교 교무실에 들어가 교직원들에게 칼부림한 사건이 터지자 교육 당국은 ‘학교안전 매뉴얼’을 손질하고 외부인 침입을 가정해 대피 훈련을 실시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지난주 시코쿠(四國)의 한 고교에서 고교 3년생이 같은 반 친구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국은 망연자실했다. 아무리 매뉴얼을 강화해도 인성의 영역까지 제어할 수는 없다는 점을 절감한 것이다.

3일 투개표가 끝난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도 매뉴얼은 어김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집권 자민당이 100쪽짜리 정책 보고서 ‘도쿄 그린 프로그램 21’을 100만 부나 발간하자 제1야당 민주당도 ‘도쿄 프로젝트 2005’라는 공약집으로 맞섰다.

일종의 정책 매뉴얼인 공약집은 2003년 중의원 총선거 때 민주당이 처음으로 선보여 민주당 약진의 일등공신이 됐다. 당시 민주당의 전략은 매뉴얼을 선호하는 일본 유권자들의 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이번엔 지방선거인 때문인지 정책 매뉴얼의 효과가 총선거에 비해 미미하다는 게 중론이다.

일본 뺨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한국 사회는 매뉴얼의 값어치를 얼마나 제대로 쳐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매뉴얼에 의존해 눈앞의 작은 것에만 매달리는 것도 딱하지만 ‘임기응변’이 ‘규정’을 압도하면 더 큰 화(禍)를 부를 수 있다.

박원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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