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정동영 장관의 평양行

  • 입력 2005년 5월 31일 03시 10분


코멘트
평양 순안공항 민족통일대축전 남측대표단 환송. 동아일보 자료사진(2001)
평양 순안공항 민족통일대축전 남측대표단 환송.
동아일보 자료사진(2001)
서경석(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 목사가 지난주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나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방북에 반대의 뜻을 밝혔다. 정 장관은 다음 달 14일 평양에서 열리는 6·15 공동선언 5주년 축전에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하게 돼 있는데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 장관이 평양에 가고,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것으로 끝장이 나면 그는 북한의 핵 보유를 허용한 장관이 된다”는 게 그 이유다. 서 목사는 “(그럴 경우) 정 장관이 대선 경쟁에서 낙마할 수도 있다”고까지 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나도 그의 평양행이 마뜩찮다.

평양축전은 남북의 직능단체들이 중심이 돼 치르는 민간행사다. 정부대표가 민간행사에 가는 것부터가 어울리지 않지만 가도 할 일이 없다. 평양행사는 일종의 군중대회다. 속된 말로 “으샤, 으샤”하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서 무슨 의미 있는 논의가 가능하겠는가. 북측 대표단과 공동기념식이나 갖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나머지는 나흘 동안 구경하고 박수치는 일뿐이다.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그쯤은 참을 수 있다고? 그렇지 않다.

북한은 평양축전을 통해 이른바 ‘3대 공조’에 남한이 동참하고 있음을 내외에 과시하고 싶어 한다. ‘3대 공조’란 북측 언론이 올해 1월 1일 신년 공동사설에서 제시한 민족자주공조, 반전평화공조, 통일애국공조를 말한다. 한마디로 ‘민족공조’라는 명분 아래 남한을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핵 포기 압력도 분산시키고, 예상되는 미국의 제재(制裁)도 막아 보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24일 남북 대학생 금강산 상봉모임에서도 참석자들로 하여금 ‘민족자주 반전평화 공동선언’을 채택하도록 했다. 이만하면 평양축전의 성격을 알 텐데 운동권 학생도 아닌 정 장관이 꼭 가야만 하는가.

평양축전 직후인 21일 서울에선 남북 장관급회담이 열린다. 평양에 가서 민족공조의 열기에 휩쓸리기보다는 북핵상황 전반을 점검하고 한미공조 방안 모색에 몰두하는 것이 백번 옳다. 평양에서 얼굴이라도 붉히고 온다면 비료를 20만 t이나 주고 성사시킨 장관급회담에서도 결실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령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온다고 해도 ‘민족공조’의 함성이 귀에 쟁쟁할 텐데 어떻게 ‘한미공조’를 말하며, 말한들 누가 그 말을 무게 있게 들어주겠는가.

한미동맹과 대북정책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을 놓고 미국과 일본의 우려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심지어는 중국에서도 “한국의 대북 유화정책 때문에 북한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평양축전은 민간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북한을 다룰 때는 정부와 민간 사이의 역할 분담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정 장관이 통일부의 수장이 된 것은 대북정책에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나는 정 장관에게 “햇볕정책을 넘어설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키우라”고 권하고 싶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지난 7년 동안 햇볕정책이 남북 간 긴장 완화와 교류 협력 증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 핵과 인권문제 앞에선 무력했다. 햇볕을 아무리 쪼였어도 핵 개발 기도를 막지 못했으며 북한 주민의 인권 참상(慘狀)도 나아지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대권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해야 한다. 햇볕정책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새로운 대북 포용정책이 좋을지, 아니면 핵이나 인권과 연동된 햇볕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좋을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평양에 가서 사진 찍는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정치인으로서 남북문제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교한 이론도, 복잡한 수치도 필요 없이 대중의 가슴에 곧바로 호소할 수 있는 게 남북문제다. 한 건 잘 하면 하루아침에 통일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고뇌하고 공부해야 한다. 화해, 협력, 포용, 교류와 같은 기본용어들부터 평소 체화(體化)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시대를 바꾸는 좋은 대북정책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