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80>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2월 13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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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때 한왕 유방은 형양 성안에 머물면서 지치고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고 있었다. 경현과 삭정의 싸움에서 추격하는 초나라 대군을 물리쳐 한시름 놓기는 하였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쫓겨간 용저와 종리매의 군사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반격할 틈을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팽성에 있다는 패왕이 언제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몰려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세상을 보는 한왕의 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겁내고 피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남에게 떠넘기거나 잔꾀만으로는 온전히 이겨낼 수 없다. 이 싸움은 바람잡이를 내세우고 어물쩍 속여 판돈을 후려낼 수 있는 저잣거리 노름판이 아니다. 결국 천하 형세를 결정짓는 것은 정면 승부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번 경(京)삭(索)의 싸움은 우리도 패왕의 대군을 정면으로 맞받아쳐 이길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겨 주었다. 모처럼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니, 이제부터는 무턱대고 피하지만 말고 당당히 맞서보자.)

그러면서 매사에 느긋한 자신을 다그치고 새롭게 전의를 다졌다. 용저와 종리매의 대군을 곡우까지 내쫓고 형양으로 돌아온 대장군 한신을 그날로 불러들여 앞일을 의논한 것도 그런 한왕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인이 듣기로 장군은 광무산(廣武山)의 천험을 두르고 오창(敖倉)의 곡식을 먹으며 성고(成皐)와 연결하여 형양을 지키려 한다 하였소. 허나 가까운 성고가 50리요 광무산이나 오창은 100리가 되니, 그 넓은 땅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지 실로 궁금하구려.”

한왕이 그렇게 묻자 한신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오창은 하수(河水=황하)와 사수(泗水) 수수(휴水)가 이어지는 포구를 끼고 있어 각처의 곡식을 모아들이기 좋은 곳입니다. 거기다가 그곳 날씨가 건조하고 황토 언덕이 단단해 구덩이를 파고 곡식을 갈무리하기 좋은 까닭에 옛날부터 관동의 곡창(穀倉) 노릇을 해왔습니다. 시황제도 그곳에 쌓아둔 곡식으로 함곡관 밖의 군사들을 먹일 수 있었기에 일통천하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먼저 군사들을 풀어 오창에서 이곳까지 용도(甬道)를 쌓고 그리로 식량과 병사를 옮겨 형양을 지키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할 것입니다.

또 광무산은 천하의 동쪽과 서쪽을 가르는 천험으로 예부터 그 이름처럼 용무(用武)의 땅으로 여겨왔습니다. 범 같은 장수에게 한 갈래 군사를 주어 광무산 산성(山城)을 막게 한다면, 동쪽에서 오는 적은 아무리 대군이라도 되돌아가거나 먼 길을 구차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멀리서 온 적에게는 헛되이 기력을 소모하는 꼴이 되니, 오창과 형양을 지키는 데는 그보다 더 큰 보탬도 없을 것입니다.”

“성고와 형양은 어떻게 연결하려 하시오?”

“성고는 그 성을 쌓을 때부터 이곳 형양과는 이와 입술 같은 사이(脣齒之間)였습니다. 봉수대의 연기와 불빛으로 언제든 닿아 있고, 일이 급해 내달으면 반나절에 원병이 이를 수 있으니 달리 힘들이지 않고도 두 성은 서로 의지하는 형세(기角之勢)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한왕은 비로소 낯빛이 환해졌다. 성고와 오창과 형양을 삼각으로 묶어 반격의 발판이자 관동의 전진기지로 쓰는 일은 장량에게도 대강 들은 바 있지만, 한신에게서 직접 들으니 훨씬 뚜렷하고 믿음이 갔다. 모든 일을 두 말 없이 한신에게 맡겼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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