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최성각/'잃어버린 것' 히말라야서 깨닫다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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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네팔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10여 년 전부터 이런저런 일로 그곳에 자주 가게 된다. 전생에 아마도 히말라야 산군(山群)의 당나귀였던 모양이다. 지난해에는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6년4개월간 정신병원에 감금됐던 네팔여성 찬드라 구릉에게 참회모금액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번에는 의료활동이라는 명목으로 후배 한의사들까지 동행한 모양새였다. 성경책과 의약품이 식민지 장악의 당의정으로 사용되곤 했다지만, 얼마간의 의약품과 문구류를 짊어진 우리는 그 대단찮은 의료활동의 대가로 히말라야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쾌청한 날씨에 설산만 언뜻언뜻 보여주면 흡족할 일이었다.

이번에 갔던 지역은 세계적인 오지 중의 하나인 안나푸르나2봉 언저리의 시클리스 지역이었다. 10여년 전부터 네팔은 격렬한 내전이 진행 중인데, 더욱이 시클리스 일대는 반군(叛軍)에 의해 해방구로 선포된 무정부 지역이었다. 무정부 상태라고 해봐야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는 관리가 줄행랑을 쳐버렸다는 정도일 뿐이다. 왕정 철폐와 빈부격차 해소를 주장하는 반군은 ‘마오이스트’라 불리지만, 중국은 “우리는 네팔 마오이스트들을 키운 적이 없다”고 공언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네팔왕국에서 자생한 게릴라들이다.

하지만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네팔경제가 히말라야라는 천혜의 관광자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관광객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양측의 이상한 보호 속에서 네팔 산중을 걷노라면 야릇하고도 송구스러운 긴장감이 인다.

시클리스 지역도 세계적인 기상이변에서 예외일 수 없어 금년의 몬순이 얼마나 심했는지 차가운 강물에 집과 사람과 가축이 떠내려가고, 길이 파헤쳐지고 끊어졌다. 듣기로 ‘46년 만의 몬순’이었다고 했다. 더 나이 든 사람은 ‘56년 만의 몬순’이라고도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 설산의 눈이 많이 녹았다.” 시클리스 아랫마을에서 만난 몽골리안의 말이다.

네팔의 도시는 힌두교를 믿는 콧날 오뚝하고 빤질빤질한 아리안계가 주류를 이루지만, 히말라야 산중 사람들은 불교를 믿는 몽골리안들이다. 살아 있다는 행복감이 넘치는 부드러운 미소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의 능력을 잃지 않은 그들은 비록 곰발바닥보다 더 두꺼운 맨발에 하나같이 남루한 차림이지만 기품이 있다. 사람을 만날 때나 작별할 때 호흡처럼 읊조리는 인사말 ‘나마스테’는 ‘내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같습니다’라는 뜻이다. 약간의 진료를 받고 의약품과 볼펜을 얻었다고 해서 지나치게 감사하지 않는 의연한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

히말라야 몽골리안들의 평정심을 떠올리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산사태로 휩쓸려 내려가는 사람이 소리쳐 외치기에 귀 기울여 보았더니 이웃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나 먼저 가네. 잘 있게나”하고 이승의 이웃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외침이었다고 한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만큼 그들의 몸은 청정해서 산을 오를 때 약을 발랐던 환부가 하산할 때 보니 나아 있었다. 약간의 연고와 항생제만 있어도 파상풍으로 번져 잘라야 할 다리를 간수할 수 있다. 생전 처음 침을 맞고 부항을 뜨면서도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의사는 신뢰 속에 몸을 맡겼기에 더 효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낡은 총을 들고 무료하게 벼랑 끝에 앉아 있는 산중 게릴라들은 시클리스 외길을 따라 원주민들을 치료하느라 오가는 우리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들이 “우리는 약이 아니라 한국의 한의사가 필요하다”고 요구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한때 화폐가 없어도 행복했던 히말라야의 몽골리안들은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고 애써 말하지 않는다. 자연과 자신들 사이의 구분과 거리를 애당초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히말라야에 가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과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약력 ▼

1955년 강릉 출생.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환경운동과 글쓰기의 결합으로 제2회 교보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성각 소설가·풀꽃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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