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현진/'혼란' 부른 신용불량자 대책

  • 입력 2003년 10월 22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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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카드에서 채권 추심 업무를 맡고 있는 A씨는 최근 빚 독촉을 하려고 연체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고 황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필요하다면 약간의 수고비를 줄 테니 어떻게든 내년 총선 때까지만 기다려 봅시다. 요즘 다들 빚을 많이 깎아 주던데….”

지난주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신용불량자에게 최고 70%까지 원리금을 깎아 주는 것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이런 식의 ‘버티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카드사 등의 채권 추심팀은 지난주부터 사실상 업무가 마비됐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급기야 신용불량자의 채무재조정은 ‘시장 자율’에 맡기겠다며 팔짱을 끼고 있던 금융감독위원회가 나섰다. 22일 각 금융기관의 실무 책임자를 불러 실태조사에 들어간 것이다.

정부가 신용불량자 대책을 내놓으면서 가장 우려했던 신용불량자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 문제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신용불량자의 모럴 해저드 문제를 신용불량자나 금융기관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개운치 않은 측면이 있다. 정부 정책이 이 같은 빌미를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정부는 올 8월 25일 ‘신용불량자 대책’을 발표하면서 연체자의 빚이 한 금융기관에만 있을 경우 해당 금융기관에서 자율적으로 채무조정을 해 주도록 했다. 또 이 같은 실적을 금융기관 경영평가 때 적극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금융권에서는 “경영실태 평가에도 반영한다고 하니 ‘빚 탕감’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했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자산관리공사는 카드사 등의 반발에 부닥쳐 빚 탕감안의 시행 연기를 검토 중이지만 국민은행은 이미 7일부터 40∼50%의 원리금을 감면해 주고 있다.

자산관리공사와 국민은행은 금융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큰손’들이다. 이들이 과감하게 빚 탕감을 하겠다고 나서자 다른 금융기관들이 쩔쩔매고 있다. 신용불량자들은 더 깎아 주지 않으면 빚을 갚지 않겠다고 하고, 더 깎아 주자니 경영에 직접적인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용불량자들은 ‘저울질’을 하고 있다.

정부는 실태조사는 벌이고 있지만 개별 금융기관의 빚 탕감 규모는 ‘시장 자율’을 강조하고 있다.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것만큼 좋은 정책은 없다. 하지만 시장의 자율이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한다’는 신용사회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곤란하다. 모럴 해저드를 막는 것은 금융당국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다.

박현진 경제부기자 will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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