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현장]고향 못 간 사람들2-한국통신 계약직 노조원

입력 2001-01-26 13:56수정 2009-09-2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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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삼성의료원 3층 중환자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 충남 공주지부 이동구(29)씨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하 17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농성에 참가했던 이씨는 지난 15일 경기도 분당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쓰러졌다.

"뇌혈관이 막혀서 좌뇌가 상당히 손상됐고, 우뇌도 약간의 이상이 있습니다"

노조원 두 명과 함께 이씨의 곁을 지키고 있는 형 이선구(33·충남 공주시 유부읍)씨는 초췌한 모습으로 중환자실 복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열흘째 눈을 안뜨고 잠만 자고 있습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깨어나도 정상으로 회복하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형은 동생의 상태에 대해 편찮으신 노모에게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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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하고 건강했던 녀석인데…설이 뭐 이렇습니까, 명절이라고 오신다는 부모님도 오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셔도 주무실 곳도 없고…"

병원측은 이씨가 깨어나더라도 신체마비나 언어장애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25일로 농성 44일째를 맞고 있는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는 경기도 분당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임원를 비롯한 11명의 노조원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말 7천여명이 '계약만료'라는 사실상 해고를 통보받은 계약직 사원들은 그동안 정규직의 약 30%정도 임금(월 85만원)을 받으면서도 '정규직 전환'이라는 희망을 안고 버텨왔다.

"한두명도 아니고 7천명을 일시에 자른다는 것이 도덕적,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까"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 홍준표 위원장은 오랜 노숙으로 수염이 길게 자란 거친 얼굴을 비비면서 "이 싸움의 시작은 분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서러움을 참으며 일해왔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뿐"이라며 탄식했다.

이춘하 충남본부장은 "우리 계약직 사원들은 회사가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가야 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가 가장 힘들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눈도 유난히 많이 온 이번 겨울은 이들에게 더 없는 인내를 요구했다.

부산, 대구, 전북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노조원들의 잠자리와 식사등을 해결하기 위한 비용은 막대했다.

홍 위원장은 "특히 여성노조원들이 길에서 자게 될 때, 잠자리 하나 변변히 구해주지 못하는 심정이 가장 가슴 아팠다"면서 "그래도 꼭꼭 집회에 참석하러 올라오는 동지들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웃어 보였다.

계약직 노조 구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전임 위원장 구강회씨는 "고향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계속 같이 있겠다는 노조원들을 설득하는게 가장 어려웠지"라며 '동지애'를 자랑했다.

설날 아침, 시커먼 사내들 11명이 차려내는 차례상의 모습이 사뭇 기대되는 가운데, 멀찌감치 떨어져 이들을 지켜보는 전투경찰들의 설날도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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