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

  • 입력 2001년 1월 19일 18시 45분


몇 년전 서울 지하철노조 파업때의 일이다. 구로역에서 출근열차를 기다리다 화가난 시민들이 30여분만에 도착한 전철의 유리를 깨고 기관사를 폭행한 후 떼지어 몰려가 역 사무실의 집기를 부숴 업무를 마비시킨 적이 있다.

난동을 부린 기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뭇매를 견디지 못해 열차를 버리고 달아난 기관사가 바로 시민의 불편을 덜어주려고 나섰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화풀이 대상이 분명히 잘못 선택된 사건이다. 이 사태로 뒤따르던 열차들의 운행이 중단돼 혼란은 더 커졌고 시민들은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멱살 잡는다고 눈이 그치나▼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지하철노조 파업때의 상황을 보자. 자원봉사에 나선 퇴역기관사들이 열차를 몰고 역에 도착하자 플랫폼을 빽빽히 메운채 반시간가까이 기다리던 시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기관사를 환영했다. 한 할머니가 손주에게 주려고 샀던 꽃을 기관사에게 주는 감동적인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된 후 뉴욕의 지하철은 파업중에도 멈추질 않았다.

이 두가지 상반된 사례는 시민의식의 수준차이가 시민에게 돌아가는 이익이나 손실의 크기를 결정해 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대책을 구할 것인지 혹은 자신이 받는 불편에 대해 참을성없이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이고 그로인한 결과도 당사자의 몫이다.

문제는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만 손해가 국한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지난번 대설 때 국내공항에서 빚어진 일들이 그에 해당된다. 폭설로 항공기가 결항하는 것은 겨울철이 되면 세계 어느나라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신기한 것은 선진국 승객들일수록 천재지변으로 빚어진 상황에 철저히 복종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이라고 급한 일이 없었을까마는 자신들의 모든 권리를 유보한 채 항공사 안내를 믿고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저력을 보는 것 같아 두려움마져 느낀다.

승객들이 '폭동' 을 부리고 '요구와 주장' 을 항공사에 쏟아 내놓는다 해서 내리던 눈이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국내 공항들은 예외없이 항의하는 승객들의 고함과 멱살잡힌 항공사직원들의 몸부림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심지어 어느 공항에서는 분노한 승객이 컴퓨터를 부수는 바람에 날이 갠 후에도 탑승수속이 지연됐다는 소식이고 보면 인간이 얼마나 미련스러울 수 있는지를 이 사태는 잘 말해준다.

어릴 적부터 "큰소리 떵떵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는 부모의 '기대' 를 받고 자란 우리네들은 자신의 권익이 눈꼽만치라도 침해당하면 즉각 큰소리로 대응하는데 숙달되어 있다. 원인이 무엇이고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위의 논리적인 분별력은 필요없다. 심지어 천재지변으로라도 불편이 생기면 그건 인내의 대상이기 보다 누군가에 대해 무한대의 권리로 반격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로 여겨진다.

그런 사회에서는 남이 내게 베프는 온정이 간혹 고마움의 대상이기보다 내가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권리쯤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여름마다 되풀이되는 홍수때 일부 수재민들이 털어놓는 불평이 그것이다. "우리더러 매일 담요껍데기나 덮고 라면 쪼가리만 먹고 살란 말이냐 "는 수재민 아주머니들의 불평이 텔레비전에 방영된 후 "앞으로 절대로 수재의연금을 내지 않겠다" 는 사람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물론 불편하기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햇쌀밥과 비단이불을 도와줘야할 의무까지는 없지 않은가. '담요껍데기' 와 '라면쪼가리' 라도 보내준 사람들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이 겨자씨만큼만 보였더라도 실망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공연히 남을 탓하고 권익을 주장(그럴 권리도 없으면서)하려는 모습이 비쳐질 때 남을 도우려는 사회의 정은 마를 수 밖에 없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우리의 세상은 더욱 삭막하게만 변하게 된다.

자신의 권리와 남의 의무를 무한하게 여기고 내 의무와 타인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보여주는 전형적 증상이다. '인간이 이기적일수록 더 이기적인 인간에게 예속될 수 밖에 없다' 는 독일 문호 괴테의 말은 이기심의 사회적 악순환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혹 그 방향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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