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칼럼]개헌론에서 빠진 사법부 우위론

  • 입력 2000년 7월 12일 18시 33분


제헌절 52주년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우리 헌법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개헌이 잦았던 탓에 각 헌법의 수명이 매우 짧았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현행 헌법 이전의 여덟 헌법은 평균 수명이 4.9년에 지나지 않았고, 특히 두 번째 헌법과 네 번째 헌법은 2년도 지탱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6·29선언의 산물인 현행 헌법이 13년 가까운 수명을 누리고 있음은 예외적인 경우라 하겠다. 헌정사가 반세기의 연륜을 쌓으면서 헌법의 안정성이 그만큼 확보됐다고 할까.

그런데 마침내 개헌론이 국회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개헌의 대상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북한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여기는 제3조가 체제의 상호인정을 바탕으로 해 성립된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한반도 상황에 맞지 않으니 고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 5년 단임제가 부작용이 많으니 4년 중임제 또는 정부통령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비록 당론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해도 여야 모두가 들고 나오는 현실로 미뤄 짐작하건대, 개헌론이 앞으로 어떤 중요한 계기를 만나면 본격화될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다.

개헌론의 초점은 아무래도 국가의 권력구조에 맞춰질 것인데, 개헌론에 국민이 현재로서는 모르는 어떤 정치적 음모나 암수가 개재되어 있지 않다면 시간적 여유를 두고 허심탄회하게 다뤄질 만하다. 현행 제도도 장점을 지녔는데 굳이 바꿔야 하느냐는 반론도 충분히 존중돼야겠지만, 대통령제를 한다면 역시 4년 중임제 또는 정부통령 4년 중임제가 원형이라고 하겠다. 또 대통령 선거와 지방자치단체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을 것이냐, 둔다면 어떻게 두느냐의 문제도 아울러 진지하게 토론될 만하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거니와 개헌론에 불순한 정치적 계략이 숨어 있음이 밝혀진다면 국민적 저항에 의해 좌절되고 말 것이다.

필자는 권력구조에 관해서는 정치권에서 논의가 더 활발해진 뒤 말하기로 하겠다. 이 시점에서는 “만일 여야가 권력구조를 중심으로 개헌에 합의하게 될 때 사법부 우위를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만 강조해 두고자 한다. 사법부 우위가 헌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경우 대통령제의 폐해인 ‘권력의 대통령으로의 집중’을 막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대통령제 아래서 쉽게 ‘선출된 황제’가 되고 마는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견제함으로써 민주주의가 높은 수준에서 지켜지도록 하려면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의 우위에 서서 대통령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법부 우위의 보장을 위한 헌법적 장치들을 논의하지 않은 채 오로지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권력구조를 논의한다면 ‘균형과 견제’의 원칙을 민주헌정의 요체라고 보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대통령제의 원형국가인 미국이 민주주의를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바탕에는 사법부 우위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닉슨 대통령을 하야로까지 몰고 간 첫 번째 조처가 워터게이트사건에 관한 닉슨의 육성녹음이 담긴 테이프를 법원에 제출하라는 1심 판사의 명령에 의해 취해졌다는 사실, 특히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의 판결들이 민권 신장에 크게 이바지해 왔다는 사실 등은 교훈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권위주의 정권일수록 사법부를 경시하거나 약화시키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때 대법관이라는 직함마저 없애고 ‘대법원 판사’로 격하시켰던 사실이 작은 보기라면, 법관의 임면에 행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하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판결에 정보기관이 개입했던 사실이 큰 보기라고 하겠다.

다행히 현행 헌법에서 헌법재판소가 헌정 사상 처음 설립되는 등 사법부의 견제력 제고와 독립성 향상을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아 보완을 기다리고 있다. 한가지 예로 필자는 앞으로 대통령이 대법원장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는 쪽으로 고쳐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법부 우위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법관들의, 특히 대법관들의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금력과 권력의 영향으로부터 초연해야 하며 여론의 압력에 대해서도 의연해야 한다. 엊그제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 청문회를 거쳐 인준을 받아 임명된 대법관들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김학준<본사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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