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배인준/고개숙인 소로스

  • 입력 2000년 5월 1일 19시 08분


“나는 내 자신이 일종의 신적(神的) 존재, 케인스와 같은 경제개혁가, 또는 과학의 아인슈타인과 같다고 느낀다.” 헝가리 본명 주드 쇼슈라, 영어명 조지 소로스(70)는 언젠가 이렇게 자평했다. 그는 금융시장을 ‘이론이 통하지 않는 혼돈의 세계’라고 읽었으며 ‘합리적 예측이 아니라 현실과 투자자들의 불완전한 예측이 맞물리면서 금융거래의 사건들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바로 그 편파적 예상들과 현실이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간파하는 능력이 ‘소로스 신화’를 낳았다.

▷그는 1992년 9월 어느날 영국 중앙은행을 상대로 파운드화 매도 매수의 숨막히는 기(氣)싸움을 벌여 ‘잉글랜드은행을 하루만에 멸망시킨 사나이’가 되면서 20억달러의 이익을 챙겼다. 이처럼 그는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 상황을 파고들어 각국 중앙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까지 궁지로 몰아넣으며 천문학적 투기이익을 거머쥐곤 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총리는 1997년 IMF총회에서 맞닥뜨린 소로스를 향해 ‘아시아 외환위기의 원흉’이라고 외쳤다.

▷대통령선거를 6일 앞둔 1997년 12월 12일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후보는 국제화상회의를 통해 소로스에게 대한(對韓)투자에 앞장서달라고 호소했다. 소로스는 3주 뒤 코르덴바지 차림으로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김대통령당선자는 일산자택에서 소로스에게 만찬을 베풀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민주주의 동지인 소로스회장이 적극 도와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 소로스가 지난달 28일 “우리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며 “헤지펀드의 대형 투기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외환 주식 채권 파생상품을 가리지 않고 세계 어디든 파고들었던 고위험 고수익의 단기투자전략을 포기한 것이다. 최근 첨단기술주 주가폭락으로 세계최대 헤지펀드인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가 몰락위기를 맞자 ‘덜 벌고 덜 잃는’ 안정보수투자로 살길을 찾겠다는 얘기다. 한달 전 타이거펀드의 파산에 이어 소로스마저 “아무래도 내가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탄식하며 헤지펀드의 깃발을 내렸으니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줄어들까. 아무튼 시장엔 신(神)이 없나 보다.

배인준<논설위원>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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