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낮과 밤]'新유목민'들/언제든 훨훨…'짐' 거의 없다

  • 입력 2000년 3월 20일 19시 32분


미국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 중 하나. 상사와 말다툼을 벌인 주인공이 “자넨 해고야!”라는 말을 뒤로한 채 자기 책상으로 걸어간다.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액자, 해외여행에서 사온 기념품 등 잡동사니를 담은 종이상자 하나를 안고 오랫동안 일해온 직장에서 훌훌 떠난다.

직장에서 개인의 짐이 ‘상자 하나’에 충분히 담기는 사회. 이미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더 나은 보수와 스톡옵션이 제공되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며 이직과 전직이 잦은 벤처기업 직원들의 책상위에는 짐이 쌓이지 않는다.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벤처열풍이 가져온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동성의 증가’”라고 설명한다. 유목민이 잦은 이동에 대비해 짐과 몸을 줄이듯이 이 시대의 ‘신유목민’인 벤처기업 직원들의 라이프스타일은 ‘고(高) 이동성(High-Mobility)사회’의 특징을 보이게 된다.

▼"결혼도 부담" 미혼률 높아▼

▽출퇴근은 빈손으로〓인터넷 멀티미디어카드 전문업체인 ‘레떼컴’(www.lettee.com)의 직원 가운데 상당수는 카드를 제작하는 디자이너들. 으레 큼지막한 제도통과 도화지를 든 사람을 떠올리게 되지만 퇴근할 때 짐을 싸들고 퇴근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레떼컴의 박영주(28)씨. “작업을 마치지 못해 집에서 일해야 할 경우 대부분 집에 있는 자기 컴퓨터로 E메일을 보내두거나 디스켓에 작업내용을 담아 가져간다”고 말했다.

▽결혼도 ‘짐’〓인터넷 웹에디터 생산업체에 근무하는 S대리(29·여)는 지난해 10월 결혼했지만 아직까지 결혼신고를 미루고 있다. 결혼전 다니던 통신망업체에서 지난해 8월 이직을 고려하던 중 “회사 옮길 때 유부녀라는 것이 큰 ‘짐’이 된다”던 선배들의 조언을 따른 결과였다. S대리는 “벤처기업으로 한번 직장을 옮긴 사람은 잠재적으로 3,4년 내에 언제든지 직장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있을 ‘이동’을 고려할 때 가정이라는 ‘짐’을 지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젊은 평균연령을 고려하더라도 일부 벤처기업의 미혼율은 80∼90%로 일반 기업에 비해 대단히 높다.

▼사무실에 서류함도 없어▼

▽벤처 사무실에는 캐비넷이 없다〓“벤처기업이 제일 싫어하는 선물은 대형 화분.” 벤처기업전문 홍보대행사 벤처피알의 이백수실장의 설명이다. 날로 성장을 거듭하며 사무실 이사가 잦은 벤처기업은 짐이 늘어나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낀다. 벤처기업 사무실에는 캐비넷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업체인 새롬기술의 강성준(33) 과장은 “업무 서류의 대부분이 디지털 정보로 입력돼 서류가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1년에 한두번 관련 자료를 찾는 ‘윗사람’도 없는만큼 서류를 쌓아둘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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