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26)

  • 입력 1998년 8월 17일 20시 09분


제2장 잠행의 꿈 ②

이제 두통마저 이런 식으로 일상이 되어가고 있어요. 두통조차 처음과는 달리 그렇게 견디기 힘들지는 않아요. 거울을 보면, 내 눈은 흡사 오랫동안 고통만을 보아온 갇힌 죄수 같아요. 눈 자체가 참혹한 상처의 화농처럼 깊이 패여 나를 바라봅니다. 나의 생, 그리고 나…. 내 나이,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어요.

나는 몇 년 동안 너무 많은 낮잠을 잤고 낮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면 거울 속의 여인에게 물었답니다. 너는 누구냐고, 나는 어디가고 거기 왠 모르는 여인이 있느냐고.

여인의 어깨는 모래 둔덕처럼 완만하고 가슴은 이스트를 넣은 빵반죽처럼 부풀어올랐으며, 배는 비누거품으로 채운 듯 부드럽고, 엉덩이는 바람을 불어넣은 둥근 비닐 주머니처럼 날마다 더 커지고 있어요. 그리고 여인은, 여인의 눈은 비 내리는 거리의 활짝 펴진 우산같이 젖어 있답니다. 우산살이 더러 부러진 우산같이, 균형을 잃고 구부러진 쪽으로 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는 거예요.

여리다. 사람들은 전에 나를 그렇게 표현했어요. 전에 나는 길고 납작하고 가벼운 몸을 가졌었죠. 부풀어 오른 곳은 한 곳도 없었어요. 가슴마저 작은 종지처럼 뾰족했답니다. 나는 머리를 기른 적이 없었고, 손톱에 에나멜을 칠한 적도 없었고 너무 짧은 스커트를 입지도 않았어요. 친구도 늘 한 명 뿐이었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청결했고 조용했고, 나약했습니다. 소녀 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대학은 불문과엘 갔어요. 불어로 연극을 하기도 했을만큼 배웠지요. 그리고 대학에서 두 해 선배인 남편을 만났고 졸업하고는 사립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할 뻔도 했지만 재단에서 요구한 금액이 너무 많아 다른 친구가 들어갔지요. 저는 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 오월에 결혼을 했고 그리고 다음 해 오월에 아이를 낳았어요. 머리를 다치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반에서 스물세 번째 등수의 아이가 그렇듯, 2남 3녀 중 두 번 째 딸이 그렇듯, 보호색을 가진 여린 곤충들이 그렇듯 나는 눈을 뜨지 않은, 또한 눈에 뜨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답니다. 아직 아이처럼, 나 자신 마저 나를 모르는 채로 말이에요. 전에 나의 꿈은 그런 거였죠. 스물 한 살에 만난 남자가 평생 동안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나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 동안 하나의 생을 함께 사는 것. 삶아 넌 속옷 같이 희고 깨끗하고 간결한 삶, 언제까지나 훼손되지 않는 소박한 가족의 삶. 그것 뿐이었어요. 그러나 남편의 여직원이 온 그 날, 그 일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지요. 모든 것이…….

그곳으로 이사간 뒤로는 거의 낮잠을 자지 않았다. 아침에 잠이 깬 뒤로 수를 보내고 다시 누워도 잠이 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덮인 망막에 내 몸속이 비칠 정도로 정신이 맑고 주변이 적요했다. 나는 깨어 있는 채로 집안을 서성댔다. 창밖은 눈부시게 환한데, 나는 무엇인가 두려운 사람처럼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뜰 수 없도록 맑은 햇빛 아래 집 앞의 숲과 무덤들과 마을과 하늘과 멀리 계곡 바깥으로 뻗어 있는 길은 그저 무심하게 놓여 있을 뿐인데 나는 그것들을 두려워했다. 그것들은 내 눈에 너무 낯설었다. 너무 거대하고, 나를 빨아들여 사라지게 할 것처럼 강렬하고, 나에게 어떤 주문을 외워 마법을 걸 것만 같았다.

전경린 글·엄택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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