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알몸사진에, 성기 만지고 볼뽀뽀”…유서에 담긴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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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년 1월 25일 15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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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 씨가 지목한 가해자 둘의 모습. 왼쪽부터 반장급 직원 B 씨, 선배 C 씨. MBC 방송화면 캡처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 씨가 지목한 가해자 둘의 모습. 왼쪽부터 반장급 직원 B 씨, 선배 C 씨. MBC 방송화면 캡처
국내 한 중견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던 30대 노동자가 3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유서가 뒤늦게 공개됐다.

24일 MBC는 세아베스틸 직원이었던 A 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남긴 25분 분량의 영상과 유서에 대해 보도했다.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유서에는 A 씨가 상사들로부터 당했던 성추행과 괴롭힘의 구체적인 기록이 담겼다.

2012년 4월 계약직으로 세아베스틸 군산공장 제강팀에 입사한 A 씨는 두 달 만에 떠난 야유회에서 알몸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공개된 사진에서 개울에 발을 담그고 있는 9명의 남성 중 옷을 입고 있는 2명이 A 씨가 지목한 가해자들이다. 사진 가장 왼쪽에 옷을 입은 채 모자를 거꾸로 쓴 사람이 반장급 직원인 B 씨, 가운데에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선배 C 씨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 씨. MBC 방송화면 캡처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 씨. MBC 방송화면 캡처
나머지는 나체 상태로 손으로 가랑이만 가리고 있다. 당시 막내였던 A 씨는 다른 사원들 뒤에서 어깨를 웅크린 채 몸을 숨기고 있다. A 씨는 이 사진에 대해 “B 씨가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진”이라며 “회사 PC에 더 있을 테니 낱낱이 조사해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유서에 적었다.

이 밖에도 B 씨가 문신 여부를 확인한다며 자신을 팬티 차림으로 세워 둔 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수치심을 준 점, 2016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경 한 복집에서 볼 뽀뽀를 하고 오후 5시 40분경 노래방 입구에서 볼 뽀뽀를 한 점 등 구체적인 성추행 기록도 적어 놨다.

아울러 자신이 뇌종양의 일종인 ‘청신경종양’으로 큰 수술을 받았던 2014년, B 씨가 여러 사람 앞에서 큰 소리로 “너 뇌종양이냐”며 면박을 줬다고도 했다. A 씨는 소음이 심한 부서에서 일하느라 청력이 저하돼 부서 이동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A 씨는 선배 C 씨에 대해서도 “왜 이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냐, 성기 좀 그만 만지고 머리 좀 때리지 말라”며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유서에 밝혔다. 인사팀 차장에 대해서는 “절차대로 쓴 연차를 문제 삼았다. ‘귀는 잘 들리냐’며 내 귀에 체온계를 강제로 꽂았다”고 폭로했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 씨. MBC 방송화면 캡처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 씨. MBC 방송화면 캡처
A 씨는 6년간 당했던 일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후배들에게 “쓰레기 같은 벌레 때문에 고통받지 말자”는 글을 남기고 2018년 11월 목숨을 끊었다.

회사 측이 2019년 4월 뒤늦게 조사에 나선 결과 A 씨의 유서 내용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고, 또 다른 피해자들도 나왔다.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비아냥거리며 조롱성 답변을 한 점도 포착됐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반장급 직원 B 씨는 야유회 단체 알몸사진에 대해 “공 차고 더워서 물에 들어가려고 벗은 것이지, 내가 시킨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볼 뽀뽀’ 성추행에 대해서는 “어제도 우리 딸에게 뽀뽀해주고 왔는데 큰일 났다”며 비꼬았다. B 씨는 A 씨의 장례식장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관짝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잘하라”고 막말하기도 했다.

A 씨의 성기를 만지는 등 성추행한 선배 C 씨는 조사에서 “말수가 적은 고인을 살갑게 대하려 한 것”이라는 황당한 해명을 내놨다. 그러나 최근 MBC와 인터뷰에선 “2018년 미투 사건 등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사과했을 뿐”이라며 “잘해준 것밖에 없다”고 말을 바꿨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또 다른 피해자들. MBC 방송화면 캡처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또 다른 피해자들. MBC 방송화면 캡처
당시 사건을 조사한 노무법인은 “B 씨와 C 씨는 명백한 가혹행위를 저질렀음에도 피해자의 수치심에 공감 못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며 반성하지 않는다”며 중징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회사 측은 관련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면서 B 씨에겐 정직 3개월, C 씨에겐 정직 2개월 처분을 내렸다. 이들은 정직 기간이 끝난 뒤 복귀해 현재까지도 재직 중이다.

지난해 1월 근로복지공단은 A 씨의 죽음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산업재해가 맞다고 인정했다. 유족은 B 씨와 C 씨를 성추행 등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지만 수사기관은 “오래전 일이라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며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 냈다.

최근 유족들은 검찰에 재조사를 해 달라며 항고장을 내고 가해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한 상태다.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sykim4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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