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뜻 잊지 않아’…훈장 받은 남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5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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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보건의 날 기념행사에서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장남 형찬 씨(오른쪽)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
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보건의 날 기념행사에서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장남 형찬 씨(오른쪽)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
“‘아버지 윤한덕’은 자신보다 환자를 먼저 생각한 분이었어요.”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51)의 장남 형찬 씨(23·공군 병장)는 5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윤 센터장은 설 연휴 기간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병원을 지키다가 2월 4일 집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돼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형찬 씨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윤 센터장은 2002년 전남대병원에서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자리를 옮길 때 가족들에게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집에는 빨리 들어올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킬 수 없었다. 쏟아지는 환자와 업무로 평일엔 거의 집무실 간이침대에서 눈을 붙여야 했다. 일요일 저녁에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간혹 윤 센터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응급의료 현안에 대한 생각을 남기면 형찬 씨는 조용히 ‘좋아요’를 누르며 응원했다고 한다. 윤 센터장은 형찬 씨와 차남 형우 군(16)에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형찬 씨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처럼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형우 군은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는 게 목표다.

윤 센터장의 부인 민영주 씨(51)는 남편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윤 센터장이 “나이가 들면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 그 이유를 물으니 “치매 환자의 인생도 모두 값지고 소중하니 한 사람 한 사람 곁에서 돕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 센터장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몇 달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머물면서 무척 울었다고 민 씨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때 윤 센터장이 항우울제 처방을 받을 정도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은 최근 업무상 재해 신청을 위해 10년 치 진료기록을 떼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

형찬 씨는 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보건의 날 기념행사에서 윤 센터장을 대신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형찬 씨는 “아버지가 떠난 후 언론 보도로 아버지의 행적을 더 잘 알게 됐다”며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슬퍼해 주셔서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진료시간 이후에 찾아온 정신질환자를 돌보다가 환자의 흉기에 숨진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47)에게는 이날 청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주변의 자살 징후를 일찍 확인할 수 있는 한국형 표준 자살예방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환자를 위해 헌신한 공로다.

남편 대신 훈장을 받은 부인 신은희 씨(49)는 동아일보에 보낸 편지에서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자들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된다면 환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남편이 하늘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보건의 날엔 소아암 치료에 헌신한 신희영 서울대 의대 교수가 황조근정훈장을, 이건세 건국대 의대 교수가 녹조근정훈장을 각각 받았다.

5일 ‘보건의 날’ 기념행사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故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부인 민영주 씨와 청조근정훈장을 받은 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의 부인 신은희 씨가 동아일보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아래 전문을 싣습니다.

▽민영주 씨(故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부인) 편지

남편이 (17년 전) 서울로 오자했을 때 “돈은 많이 못 벌겠지만 집에는 빨리 들어올 수 있어”라고 했어요. 물론 처음부터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요…. 남편의 착한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애들이 어릴 땐 점점 더 바빠지고 힘들어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고 저도 힘들었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남편에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희생하면서도 해내야 하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제가 말해줬습니다. “우린 괜찮아. 미안해하지마. 자기의 일이 정말 중요한 일이란 거 알고 있어. 스트레스 받지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무나 몰랐었죠. 남편이 얼마나 많은 일들에 지쳐있는지도 몰랐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루어냈는지도 잘 몰랐어요. 남편은 최근 몇 년 동안 점점 더 지쳐갔고 둘째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일요일 저녁에만 볼 수 있었어요. 그것도 얘기 나누는 건 밥 먹는 15분 정도…. 안 들어오는 주도 많았고요.

엄청난 양의 일들과 여러 기관 및 단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 수면 부족….
지인에게 “나 오래 못 살 것 같아”라고 말할 만큼 몸도 힘들었을 텐데 떠나고서야 남편이 얼마나 응급의료 체계 발전에 큰 공을 세웠는지 알았습니다. 또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행복하게 일하기 힘들었을 거란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순수한 그 마음과 열정, 책임감 때문에 남편은 정말 모든 걸 희생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웃으며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뜻을 찾아보니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훌륭한 일을 하여 후세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네요. 저는 모든 사람은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남편 또한 그런 생각으로 억울한 죽음을 막는 데 자신의 모든 힘과 열정을 쏟았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해주시는 국민들과 남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말하며 울먹이는 문상 오신 많은 분들, 아이들이 아빠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기사들, 격려들…. 그리고 이 훈장 또한 저희에겐 남편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고, 위로이며 격려입니다. 아이들 가슴에 새겨질 자랑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이들은 아빠의 가슴 속에 있던 순수한 사랑을 이해할 것이고, 그런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남편이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일들이 진정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을 거라 전 믿습니다. 문상 오신 한 남자 분이 자신을 응급구조사라고 하시며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며 말씀하시더군요. “센터장님과 약속한 게 있습니다. 꼭 하겠습니다”라고요. 남편과 같은 마음을 가지신 많은 분들을 보면서 감사했고, 남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고, 당신은 이 사람들과 늘 같이 있는 거라고….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그 일들은 이 분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감사합니다. 남편에게도, 남편의 숭고한 마음에 이런 훈장을 주신 것에도, 남편의 죽음을 애도해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2019년 4월 5일 민영주

▽신은희 씨(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부인) 편지

남편이 이 자리에서 훈장을 수여받는다면 가족 모두 축하를 하는 자리였을 텐데 남편을 대신하여 받는 훈장에 마음이 아픕니다.

아직도 본인의 일에 열심이면서 ‘보고 듣고 말하기’ 프로그램이 공군에 이어 해군과 육군까지 보급되었다고 좋아하던 모습, 아이들에게 “삼성전자와 함께 개발한 정신건강 프로그램이 ‘갤럭시 기어’에 탑재돼 세계 속으로 나가게 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선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일인 정신의학 업무에 열정적이었으며 환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편이었기에 훈장이 수여되었다고 생각하며, 하늘에 있는 남편도 기뻐할 거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아프게 간 남편을 생각하면 하느님이 원망스럽지만…. 오늘 통과되었다고 전해들은 ‘임세원법(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을 통해 의료 현장에서 의료진의 안전과 함께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자들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체계 구축이 하나씩 이루어져 남편이 소망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 없이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가 된다면 하늘에 있는 남편도 기뻐할 듯합니다.

앞으로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아빠, 그리고 남편으로 가슴에 담고 살아갈 것입니다.

2019년 4월 5일 신은희

조건희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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