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희

조건희 기자

동아일보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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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를 다루다가 지금은 사건팀 데스크를 맡고 있습니다. 정책이 사건이 되는 지점을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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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3-28~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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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년째 저출생’ 한국이 묻는다 “1억 드리면 아이 낳으시겠습니까” [복지의 조건]

    ‘1억 원 드리면 아이를 낳으시겠습니까?’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비슷한 공약이 나왔을 땐 재밌는 상상 정도로 취급됐죠. 이제는 이 질문이 정부의 공식 설문에 등장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벌이는 온라인 설문입니다. 부영그룹이 직원들에 출산 장려금 1억 원씩 지급하기로 한 것처럼, 정부도 파격적인 현금을 직접 지원하면 아이를 낳겠냐고 물은 겁니다. 설문을 이달 17일부터 26일까지 진행하는데 24일 오후 4시 현재까지 1만 명이 넘게 참여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권익위는 1자녀엔 1억 원, 2자녀엔 2억 원, 3자녀 이상엔 3억 원을 각각 지급하는 방안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잠정 집계)에게 1억 원씩 주면 연간 23조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이런 재정 투입에 동의하는지도 물었습니다.● ‘출생아에 1억 원씩’ 가능한가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냐고 물으신다면, ‘재정만 따지면 불가능하진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가 이미 국가 재정에서 그만한 비중을 가족복지에 쓰고 있거든요.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국내 가족복지 공공사회 지출은 30조253억 원이었습니다. 아동수당과 출산휴가 지원금, 어린이집 보육료 등이 여기 포함됩니다.이 돈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였습니다. 직감하셨겠지만 이 비율이 다른 OECD 회원국보다 상당히 낮습니다. 38개국 중 뒤에서 8번째입니다. 잘못 읽으신 게 아닙니다.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입니다. OECD 평균은 2.1%였습니다. 어리둥절하실 수 있습니다. 정부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300조 원을 넘게 투입했다는데 OECD 평균만도 못한다니요. 그 돈은 다 어디 갔을까요. 적잖은 돈이 ‘흉내 내기’였습니다.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가 2022년 저출산 대응 예산 총 51조216억 원을 분석했더니 실제 국민이 받는 돈보다 부풀려져 있거나 저출산과 관련이 없는 정책의 예산이 상당수 섞여 있었습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거 지원 예산(23조4012억 원) 가운데 40%(9조5300억 원)가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융자 지원이었던 겁니다. 저출생 문제를 두고 ‘백약이 소용없다’고들 하지만 “정말 백약을 다 써본 거 맞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동아일보 5월 24일자 「학교 현대화-성범죄 피해지원도 ‘저출산정책’이라니…」 참고 )주목할 점은 한국보다 합계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이 더 많은 재정 비중을 가족복지에 쓰고 있다는 겁니다. 이 비중이 OECD 1위인 스웨덴은 합계출산율이 1.7명(2020년 기준)입니다. 같은 해 한국(0.8명)의 2배 수준입니다. 스웨덴은 그해 GDP의 3.4%를 가족복지에 썼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대입하면 스웨덴은 64조2876억 원을 가족복지에 쓴 셈입니다. 그해 한국의 관련 지출보다 34조2623억 원이 더 많았던 거죠. 우리나라가 그해 출생아 27만2337명에게 전부 1억 원씩 줬어도, 출산율이 한국의 2배 수준인 스웨덴의 관련 예산에도 못 미쳤을 거란 뜻입니다.물론 이건 재정 측면에서만 분석한 겁니다. 출생아 1명당 1억 원을 주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생각이 없는 남녀가 돈만 노리고 출산하는 등 부작용이 쏟아지겠죠. 이를 보완하려면 단번에 큰돈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다달이 나눠주는 기존 아동수당 등의 액수를 올리면서 수급 조건에 아동학대 예방 교육 수료 등을 붙여야 할 겁니다. 이는 지난해 12월 인천시가 발표한 ‘1억 플러스 아이드림(i dream)’ 정책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인천시는 관내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동에게 18세까지 총 1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고 있는 임신·출산 의료비(100만 원)와 부모급여(1800만 원), 아동수당(960만 원) 등 7250만 원에 인천시가 2870만 원을 더 줘서 총 1억 원 이상을 맞춘다는 겁니다.출생아 1명당 2870만 원을 주는 데 드는 총액은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 기준으로 7조 원 안팎입니다. 적은 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예 논의조차 못 할 규모인지는 의문입니다. 지금은 국가 소멸까지 거론되는 상황 아닌가요.● 22년째 ‘저출생 무력감’ 차곡차곡 쌓아온 한국24일 통계청이 올해 2월치 출생아 수를 발표했습니다. 지난해 2월(2만20명)보다 더 줄어서 1만9362명이 태어났습니다. 2019년 11월 이후 52개월 연속 감소입니다. 충격받으셨나요? 충격받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거라는 데 제가 나중에 받을 한 달 치 국민연금을 걸겠습니다.우리 사회가 저출생에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한국은 2002년 이후 줄곧 합계출산율이 1.3명 이하였습니다. 출산율 1.3명 이하인 나라는 ‘초저출산국’으로 분류됩니다. 독일 막스 플랑크 인구연구소의 한스-피터 쾰러 박사가 2002년 ‘가장 낮은 출산율(lowest-low fertility)’이라며 내놓은 개념입니다. 출산율이 1.3명보다 낮은 나라가 극히 드물고, 그 정도 출산율이 45년간 지속되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취지였습니다. 쉽게 말해 한국은 전 세계 어디서도 ‘가본 적 없는 길’을 22년째 뚜벅뚜벅 걷고 있다는 뜻입니다.한국은 이 기준에 따르면 22년째 초저출산국입니다. 위기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은 “14세기 흑사병 때보다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올 2월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단순한 대책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경고했습니다. 만국이 ‘우리는 한국처럼 되지 말자’며 각오를 다지는데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태평합니다. 며칠 전 ‘이럴 바엔 차라리 출산율 0명을 한 번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칼럼을 썼습니다. 욕먹을 각오를 했는데 의외로 주변에서 ‘건희야, 네가 맞는 말을 할 때도 있구나’라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차피 0.65명(지난해 10∼12월 기준)이나 0명이나 장래가 어둡기는 매한가지인데 차라리 바닥을 찍어보자는 반응이 많았습니다.(동아일보 4월 22일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출산율 0명’에 도전해보자」 참고 )인구학자들은 실제로 출산율 0.65명이 1.0명보다는 0명에 더 가까운 수치라고 얘기합니다. 인구의 ‘복리’ 효과 때문입니다. 가임기 여성이 평생 2.1명을 낳으면 인구가 유지되죠. 평생 0.65명이면 신생아가 3분의 1로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론 두 세대 후에는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 중 절반 정도는 아들이고 절반만 나중에 ‘가임기 여성’이 될 거라서 그렇습니다.● 이민과 AI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간혹 저출생을 이민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생산가능인구가 많지 않아도 된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한국은 인구 밀도가 너무 높으니 사람이 좀 줄어도 괜찮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저는 이런 주장과 예측이 모두 들어맞아서 미래 한국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하지만 이 점을 고려해봅시다. 이민에 가장 열려있던 나라들이 최근 이민으로 인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요. 한국의 사회문화는 이민에 열려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나라가 앞으로 수십 년간 전 세계 어디서도 겪은 적 없는 속도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규모의 이민 인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AI는 어떻습니까. 이민과 달리 AI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지 다른 나라의 선례를 참고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이 그 모든 부작용과 혼란을 가장 먼저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나라가 됩니다. 보통 ‘한국의 장래가 어둡다’고 할 때 노년 부양비를 대표적인 지표로 듭니다. 지금은 생산가능인구(15~64세) 4명당 노인 1명을 부양하지만, 약 40년 이후엔 일대일로 부양해야 한다는 겁니다.그런데 쉽게 간과하는 게, 이런 암울한 예측마저 출산율이 1.09로 회복될 거란 희망적인 시나리오에 기대고 있다는 점입니다.통계청은 장래인구추계(중위)에서 합계출산율이 2025년 0.65명으로 저점을 찍은 뒤 서서히 회복해 2049년부터 쭉 1.09명을 유지한다고 내다봤습니다. 최악을 가정한 저위 추계도 ‘2026년 0.59명으로 최저점 후 2044년부터 0.81명 유지’로, 지금보다 높은 출산율을 가정하고 있습니다.지금 국민연금, 건강보험, 국방, 교육 등 모든 사회 체계의 장래 예측이 이 ‘1.09명’ 시나리오를 토대로 세워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토록 우려하는 암울한 미래가, 기를 쓰고 출산율을 1.09명으로 회복해야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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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왕 이렇게 된 거, ‘출산율 0명’에 도전해보자[광화문에서/조건희]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전 세계가 걱정하는데 본인만 태평하다. 유례없는 한국의 저출생 얘기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은 “14세기 흑사병 때보다 심각하다”고 했다. 올 2월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단순한 대책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경고했다. 만국이 ‘우리는 한국처럼 되지 말자’며 각오를 다진다. 남녀 10쌍이 아이를 7명도 안 낳는 ‘합계출산율 0.65명’(지난해 10∼12월 기준)도 전례가 없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 사회가 저출생에 너무나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한국은 22년 전부터 줄곧 초저출생국(출산율 1.3명 이하)이었다. 위기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됐다. 잦은 공습경보에 귀가 먹먹해진 것처럼, 서서히 끓는 물에 잠긴 개구리처럼. 저출생 문제를 두고 ‘백약이 소용없다’고들 한다. 우리는 정말 백약을 다 써봤을까. 정부가 300조 원 넘게 투입했다는 저출생 예산을 뜯어보면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융자 지원 등 거품이 잔뜩이다. 대다수 기업은 가족 친화 사회 환경을 만들 책임을 버려둔 채 ‘그게 돈이 되냐’는 태도다. 한 인구학자가 한탄했다. “차라리 출산율이 0명으로 떨어져 봐야 정신 차리고 뭐라도 하려나요.” ‘진짜 바닥’을 찍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심지어 가속할 방법도 있다. 아이를 더 낳는 데 도움이 된다고 검증된 정책을 폐기하거나 정반대로 하는 거다. 혹여 일부라도 실현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몇 가지 꼽아봤다. 한국은행이 1월 발표한 초저출산 대책 보고서를 참고했다. 첫째, 청년 고용·주거 지원을 중단하고 서울에 인프라를 ‘몰빵’한다. 청년 고용률과 도시 인구 집중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으로 맞추면 출산율이 0.5명 넘게 증가한다고 한다. 젊은 부부가 ‘내 집’을 엄두도 못 내면 출산율은 반등할 수 없다. 먹이와 둥지를 찾지 못한 새들은 알을 품지 않는다. 지금처럼 서울(특히 강남)에 사회기반시설(SOC)을 몰아주고, ‘영끌’ 매수를 부추기는 건 덤이다. 둘째, 육아휴직을 축소한다. 육아휴직은 ‘제로(0) 출생’으로 향하는 길에 주요한 ‘걸림돌’이다. 국내 육아휴직 평균 기간(10.3주)을 OECD 평균(61.4주)으로 올리면 출산율이 0.1명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휴직할 때 눈치 보는 문화를 조성하고 복귀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면 출산 억제 효과는 더 커진다. 이미 여러 기업이 실천하고 있다. 셋째, 사교육 활성화로 내수를 진작한다. ‘부모 월급=자녀 학원비’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출산을 고민하는 부부 상당수를 ‘딩크족’(자녀 없는 맞벌이 부부)으로 만들 수 있다. 유명 입시학원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권한을 공식 부여하고 초중고 교육과정은 학원 입학 경쟁에 맞춰 재편하면 쐐기를 박을 수 있다. 경찰이 사교육 카르텔 수사를 흐지부지 끝내면 교육 정상화의 기대를 짓밟는 데 도움이 되겠다.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르면 이번 주에 만난다고 한다. 저출생만큼은 꼭 해결하자고 서로 약속하고, 실천해 줬으면 좋겠다. 이대로는 대통령을 기억할 국민도 없어질 판이다.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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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간호사 비례대표에게 ‘의대 증원’ 물어보니 [복지의 조건]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는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보건의료 정책이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료계 일각에선 ‘총선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자’는 기류도 있다고 합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 계획을 철회하거나 대폭 물러선 수정안을 내놓을 거란 기대겠죠. 다른 쪽에선 야당 대다수도 의대 증원에 반대하지 않는 만큼 총선 결과가 큰 영향이 없을 거란 분석도 나옵니다.어느 쪽이든, 의료계와 정부 둘 다 ‘2000명’의 대안을 먼저 제시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건 명백합니다. 정부·여당은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면서도 어떤 조건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사 단체도 “2000명은 너무 많다”면서도 대안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대치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사고팔 때 “당신이 먼저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겠다”며 서로 버티는 것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동아일보 취재팀은 2~4일 주요 정당의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의대 증원의 규모와 방식 △의료공백 혼란에 대한 견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수의료 대책 3가지와 그 이유 등을 물었습니다. 이들을 인터뷰한 건 다양한 필수의료 정책이 입법으로 현실화할 22대 국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는 소속 정당을 대표하지 않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진행했지만, 각 직역을 대표해 선발됐고 상당수가 당선권인 만큼 지금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를 내지 않았거나 비례대표가 일정상 인터뷰에 응하지 못한 원내정당 3곳(새로운미래, 자유통일당, 진보당)에는 각 정당의 공식 입장을 물어서 답변받았습니다.● 비례대표 5명 중 4명은 “의대 증원 필요”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 중 4명은 증원에 찬성했습니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더불어민주연합 비례12번)는 ‘숫자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최소 1000명은 한 번에 증원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김 교수는 ‘점진적 확대’ 주장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만약 2025학년도에 의대 정원을 500명을 증원하면 나중엔 3000명 넘게 늘려야 할 수도 있는데, 점진적 확대를 주장하려면 ‘지금’ 말고 ‘나중에’ 얼마나 늘릴지도 제시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견해입니다.한지아 을지대 의대 교수(국민의미래 비례11번)는 “증원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지금 구체적인 숫자를 못 박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 교수는 “양질의 의사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 여건을 고려하고 (의대) 학생 의견도 들으며 세밀하게 조율해야 한다”는 단서도 붙였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선민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조국혁신당 비례5번)도 “의대 증원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서 “함께 추진하는 정책과 수용 가능성에 따라 (적절한) 증원 규모는 달라진다”라며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간호사 출신인 나순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녹색정의당 비례1번)은 “정부의 2000명 증원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나 전 위원장은 그중 500명을 지역 공공 의대에서 선발하고 학비를 전액 지원하되 지역에서 10년간 의무 복무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늘어난 의사 인력이 특정 전문과목이나 수도권으로 쏠리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유일하게 의대 증원에 반대 의사를 밝힌 보건의료인 출신 비례대표는 이주영 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개혁신당 비례1번)였습니다. 이 전 교수는 “지금 시점에서는 의대 증원에 찬성할 수 없다”라며 “다른 필수의료 대책이 선행돼야 하고, 필요한 의사 인력의 규모는 과학적으로 추계해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교수는 국내 의료체계를 두고 “이미 망가졌다”라고 표현하며 “여기에 (의사를) 더 쏟아붓는 건 더 빨리 망가뜨리는 것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다른 원내정당 3곳은 모두 의대 증원에 찬성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향후 10년간 매년 의대 정원을 전년 대비 15~20% 늘리고 주기적으로 평가해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연평균 500~600명을 늘리자는 겁니다. 자유통일당은 5년간 2000명 증원하거나 10년간 1000명 증원해 ‘10년간 총 1만 명 증원’ 방안을 내놨습니다. 진보당은 최소 1000명 증원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더 늘려야 한다고 봤습니다.● “의대 증원, 사회적 대화기구서 논의하고 의사들도 참여해야”의료공백 혼란의 책임이 정부와 의료계 중 어느 쪽에 더 무거운지는 응답자마다 의견이 갈렸지만, 공통으로 나온 답변은 “의료계가 정부의 대화 제의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선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뿐 아니라 나머지 원내정당 3곳의 공식 입장이 일치했습니다.의대 증원에 반대한 이주영 전 교수도 “정부 대책 중엔 의료계가 주장해 온 것도 많다”라며 “의사들은 정부가 손을 내밀면 너무 강경하게 내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져주면서 합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는 “의료계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져 있다’고 하지만, 국민이 보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라며 “국민을 설득하려면 그래도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선민 전 원장은 “양측 모두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정부가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환자단체 등 각계가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 기구를 마련해 이번 사태의 해결 방안을 논의하자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나순자 전 위원장은 “의정 합의가 가능하지 않다면 하루빨리 ‘국민 참여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윤 교수도 “의대 증원 폭을 다른 정책과 연계해 조정해나가되, 이는 (의사뿐 아니라) 여러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라며 “예컨대 ‘진료지원(PA) 간호사를 합법화하면 의대 증원 폭을 15% 줄일 수 있다’는 식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새로운미래와 진보당도 시민사회가 포함된 사회적 대타협(논의) 기구를 설치해 의대 증원을 포함한 종합 로드맵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 필요한 정책 1위는 ‘필수의료 보상 강화’-‘공공병원 확충’비례대표 5명과 원내정당 3곳에는 “의대 증원 외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수의료 정책 3가지와 그 이유를 말해달라”는 질문도 공통으로 던졌습니다. 제가 정말로 궁금한 건 이거였습니다. 의대 증원은 법적으로 정부가 결정할 수 있지만, 의료소송 부담 완화나 PA 간호사의 업무 범위 확대 등은 다양한 법 개정과 예산 심의 등 국회 내 합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결과부터 말씀드리면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공공병원 확충’이었습니다. 둘 다 4명(곳)이 꼽았습니다. 늘어난 의사를 필수의료 분야로 유인하려면 해당 분야의 건강보험 수가를 높이는 등 보상을 강화하고, 공공병원을 늘려 의료에 대한 정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관련해 이주영 전 교수는 “필수의료 수가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이에 따른 보상을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의료기사 등에 나누자”고 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도 “고위험 고난도 의료행위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정부가 2월 1일 발표한 ‘필수의료 4대 개혁’에 담긴 내용이기도 합니다.공공병원 확충의 경우 나순자 전 위원장과 김선민 전 원장 등이 찬성했습니다. 나 전 위원장은 “전국 70개 중진료권마다 500병상 이상의 선진국형 공공병원(지역책임의료기관)을 지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 전 원장은 “인구소멸 지역 등 시장실패가 일어나는 지역에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현재 병상 과잉인 상황을 고려해 지역 민간병원을 국가가 인수해 공공병원으로 운영하는 방식을, 진보당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에 공공병원을 추가하는 방식을 각각 제시했습니다. ● ‘노인 돌봄부터 해결’ 제안이 주목되는 이유비례대표 3명이 공통으로 꼽은 ‘간병 등 노인돌봄 체계 정비’에 주목합니다. ‘필수의료’라고 하면 흔히 심뇌혈관 수술이나 중증외상 치료, 응급 분만 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노인돌봄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앞으로 필수의료도 가망이 없다는 시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급속한 고령화 때문입니다. 노인 환자 대다수가 생애 말기 몇 년간 간병을 받다가 요양시설에서 숨을 거두는 현 구조라면 의사를 아무리 늘린들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임종을 앞둔 노인 암 환자에게 1년 동안 투입되는 ‘생애 말기 1년’ 의료비가 평균 4000만 원이 넘는다는 연구(2016~2019년) 결과가 있습니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에 지병이나 노환으로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 한 분 정도는 있지 않으신가요? 아마 가족 중 한 분은 벌이를 포기하고 어르신을 돌보거나 전문 간병인을 고용하느라 한 달에 200만 원 안팎을 지출하실 겁니다. 그런데 국내 80세 이상 인구가 올해 238만 명에서 2054년 829만 명으로 3.5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전 세계에 자랑하는 우리의 우수한 건강보험도 머잖아 한계를 맞게 될 겁니다.많은 비례대표와 정당이 간병 등 노인돌봄 체계의 정비를 시급한 필수의료 대책으로 꼽은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입니다. 김선민 전 원장은 ‘간병비 급여화’를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김 전 원장은 “지금 국민의 허리를 가장 휘게 만드는 간병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사적 영역에 맡겨진 돌봄과 간병 서비스를 공적 영역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순자 전 위원장은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공공병원과 상급종합병원,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 등으로 전면 확대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윤 교수는 “장기요양 노인이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고 방문간호, 노인 주치의 제도 등을 전면 도입하면 의료 수요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역 의료기관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필수의료 대책으로 꼽은 비례대표와 정당도 3명(곳)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정책입니다. 김윤 교수는 “지역 내 병원끼리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해당 지역 병·의원이 다 보상받는 식으로 틀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도 “지역 내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네트워크와 협력 체계 구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여론의 관심은 한정된 자원입니다.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보건의료 분야에서 개혁할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의대 증원은 그중 아주 작은 조각 하나일 뿐입니다. 거기 매몰돼 흘려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걸 가장 아까워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정부와 의료계입니다. 의료계가 전문적인 식견을 보태고 정부가 이를 세밀하게 조율해 나가야 할 과제가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만에 하나 의료계 일부 강경파의 주장대로 의대 정원을 동결한다고 칩시다. 그럼 과연 여론이 다른 보건의료 분야의 개혁은 용인할까요. 의료소송 부담을 완화하는 제도가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건강보험료율의 법정 상한(8%)을 높이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집단으로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의 7대 요구안 중 첫 번째가 ‘의대 증원 계획 및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전면 백지화’라고 합니다. 어떤 소설에 나온 말처럼 심지가 심지로 남고 초가 초로 남아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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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조건희]지금 ‘코로나29’를 대비해야 하는 이유

    넷플릭스의 공상과학(SF) 드라마 ‘삼체’에는 태양이 3개인 문명이 나온다. 예측할 수 없는 공전 주기 때문에 기후가 온화한 항세(恒世)와 지옥 같은 난세(亂世)가 불규칙하게 반복된다. 난세엔 3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서 대지가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태양과 너무 멀어져 바다가 얼어붙기도 한다. 혹독한 난세를 버틸 방법은 단 하나, 항세에 대비해두는 것이다. 감염병 대유행(팬데믹)은 난세와 닮았다. 언제 올지 모른다. 궤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시작되고 나서 대비하면 늦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 반드시 다시 온다. 전 세계를 휩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가 종식된 지 곧 1년이 된다. 지금은 황금 같은 항세다. 다음 팬데믹은 더 가혹할 수도 있다. 병원체가 노인뿐 아니라 영유아를 집중 공격하거나, 호흡기를 넘어 두뇌까지 침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살피며 다음 팬데믹을 착실히 대비하고 있을까. 백신 대응부터 보자. 정부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 위기 종식을 선언하며 “신종 감염병 발생 이후 100일 이내에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mRNA 백신은 개발이 빠르고 사망 예방 효과가 큰 ‘게임 체인저’였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개발할 역량이 없고 선구매 경쟁에서도 진 탓에 대통령이 제약사에 전화해 ‘백신을 달라’고 읍소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와 국회의 대응은 거꾸로 가고 있다. 지난 2년간 327억 원을 들여 활동한 국가 mRNA 백신개발사업단은 올 6월 활동을 종료한다. 2단계 사업 예산이 전부 삭감됐기 때문이다. 예산 심사 과정에서 ‘코로나19가 끝난 마당에 굳이 지원해야 하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뚝심 있게 1조 원을 투자한 끝에 지난해 자체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다음 팬데믹 땐 어쩔 건가. 일본에 구걸할 건가. 다음으로 중요한 건 ‘사회적 거리 두기’ 등 방역 조치의 근거 법령을 정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팬데믹 때 자영업자와 학생의 권리를 희생시켜 사회를 지켰다. 당사자는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보상도 미비했다. 신종 감염병이 와도 백신 도입 전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는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비용 효과가 큰 방역 조치부터 해야 하는데, 지금은 영업시간 제한과 등교 중단 등이 실제로 확진자를 얼마나 줄였는지 분석이 전무하다. 마지막은 병상이다. 지난 팬데믹 때 ‘병상 여유’와 ‘의료 여력’은 동의어였다. 정부는 다음 감염병에 대비해 비상시 동원할 수 있는 음압 병상 1700개를 2022년 말까지 설치하기로 했지만 이 계획은 올해 말로 2년 늦춰졌다. 중환자 치료 역량을 갖춘 양질의 병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조금 늦어지는 건 괜찮다. 하지만 중증·응급환자보다 경증·미용환자 치료가 더 돈이 되는 현행 의료비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비상 병상’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재 의료계와 정부가 의대 정원을 두고 벌이는 힘겨루기는 사치에 가깝다.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난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다음 난세에 대비할 지금 이 평화의 시기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도 바이러스는 지구 어디선가 다음 팬데믹을 노리며 숨죽이고 있을 텐데, 우리는 너무 쉽고 빠르게 과거의 교훈을 잊은 게 아닌가.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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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와 의사는 왜 서로를 못 믿나 [복지의 조건]

    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정부와 의료계가 한 달 넘게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26일 윤석열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을 짤 때 보건의료 분야 투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며 의료계와 의료 예산을 함께 논의할 것을 참모진에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같은 날 한덕수 국무총리는 의료계·교육계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공식적으로 마주한 건 지난달 6일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의 제28차 의료현안협의체 회의가 파행한 후로 처음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수습할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날 의협 회장으로 당선된 임현택 회장은 정부와 대화할 조건으로 대통령의 사과와 의대 증원 백지화를 요구하며 강경 노선을 예고했습니다. ● “필수의료 대책 병행” vs “못 믿겠다” 평행선정부와 의료계의 가장 첨예한 논쟁은 ‘의대 정원 2000명을 한꺼번에 늘리는 게 맞느냐’는 건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이런 주장이 되풀이됩니다.정부 “의대 정원만 늘릴 거 아니다. 필수의료 살릴 다른 정책도 할 거다.”의사 “알맹이가 없어서 믿을 수 없다. 정원 말고 다른 정책은 뒷전 아닌가.”도돌이표도 이런 도돌이표가 없습니다. 정부가 2월 1일 발표한 ‘필수의료 4대 개혁’의 핵심 내용은 △의사를 늘리고(의대 증원) △이들을 필수의료 분야로 유인하고(공정 보상) △특히 지역에 주로 배치하고(지역의료 강화) △의료소송 부담을 덜어주는 것(의료사고 안전망)입니다.이는 큰 틀에서 의료계도 찬성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의료 소송 부담 완화는 의협이 강력히 주장해온 방안입니다. 의사가 종합보험 등에 가입하면 의료사고가 나도 형사재판을 피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인데, 오히려 그간 정부가 환자단체를 설득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에 머물러왔습니다. 이번에 아예 ‘추진’이라고 못 박은 건 큰 변화입니다.의료계의 지적은 정부의 대책이 선언적이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재원과 실행 계획이 없다는 거죠. 정부 발표 자료를 뜯어보면 전공의 연속근무 시간 단축 등 대다수 방안이 전면 시행이 아닌 시범사업 대상이긴 합니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서 향후 논의하자며 결정을 미룬 내용도 많습니다. 연내 시행이 확정된 건 지역 거점 국립대병원의 인건비 규제를 풀어주는 등 몇 가지입니다.보건의료 정책을 바꿀 땐 웬만한 비상사태가 아니면 점진적으로 대상과 범위를 넓히는 게 보통입니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큰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직군의 이해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급진적인 전면 개혁안이 뜻밖의 부작용을 낳으면 ‘이 산이 아닌가 벼’라며 가벼이 선회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그러므로 방향이 맞고 실행 의지가 확고하다면 구체적인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마냥 깎아내릴 일은 아닙니다. 논의에 참여하는 당사자가 서로 합의한 목표를 위해 최선의 대안을 내놓고,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경제적·정치적 손해도 감수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구체적 계획이 없다는 건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문제는 그 ‘신뢰’라는 핵심적인 사회 자본이 정부와 의료계 사이에 바닥난 상태라는 점입니다.● 둘 다 책임 있는데 서로 ‘네 탓’만… 지켜보는 국민만 초조정부가 의료계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길게 논하지 않겠습니다. 의대 정원이 동결된 지난 18년간 의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의사단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리면 답이 나옵니다. 정부가 ‘의대 증원을 1년 미루고 의사 수요를 과학적으로 추계해보자’라는 의료계 일각의 제안을 일별도 하지 않은 건 근본적으로 누구의 책임일까요. 사실 이 지점에서는 국민 대다수도 의사단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의사는 정부가 의사를 ‘악마화’했고 국민이 거기 속아 넘어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국민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그럼 의료계는 정부를 왜 믿지 못할까요. 정부의 지난 10년을 되짚어보면 됩니다. 정부는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인해 △대형병원 쏠림 △필수의료 의사 부족 △지역의료 붕괴 △부실한 환자·병상 정보 공유 시스템 등 의료체계의 병폐가 드러나자 2년 넘게 ‘의료전달체계 개선 협의체’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권고문도 채택하지 못한 채 활동을 종료했습니다. 2017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일명 ‘문재인 케어’) 발표 이후에도, 2019년에도 비슷한 협의기구를 마련했지만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정책이 발표로만 남고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은 겁니다.특히 정부는 건강보험료 인상이나 경증 환자의 대형병원 이용 제한처럼 정치적인 부담이 뒤따르는 개혁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자기공명영상(MRI) 등 비싼 검사에 건보 혜택을 대폭 넓히면서도 현행법상 건보료율의 상한(8%)을 그대로 방치했고, 윤석열 정부는 노인 외래 정액제 개편을 쏙 뺀 건보 종합계획을 내놨습니다.이번엔 보건복지부 장관뿐 아니라 국무총리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꼭 추진할 테니 믿어달라’는데도 의사들이 회의적인 배경엔 이런 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10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필수의료 정책도 공수표 아니냐는 거죠. 여기에 ‘다른 정책은 다 점진적·시범적인데 어째서 의대 증원만 전면적·확정적인가’라는 의문이 더해지면서 불신은 커졌습니다.정부 대책이 구체적이지 않으니 이번에도 실패할 거란 얘기가 아닙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환자는 ‘절망스럽다’ 말할 처지조차 못 돼” 호소 안 들리나의료계가 신뢰를 회복할 방법은 단순합니다. 이제라도 논의의 장으로 나오는 겁니다. 네, 압니다. 평생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는 일념으로 필수의료에 종사했는데 그 자부심이 짓밟혔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끼고 계시지요. 그동안 ‘미숙아 살릴 중환자실 병상 한 자리라도 늘려달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바뀌는 게 없더니 이제는 그 모든 노력을 ‘돈타령’이나 ‘밥그릇 지키기’로 치부하는 것 같아 황당함을 넘어 허탈감이 들 겁니다.하지만 그 좌절과 허탈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죽어가는 환자의 것에 비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야말로 의료 개혁이 좌초되지 않을 수 있도록 전문가의 식견을 보태주십시오.정부가 신뢰를 회복하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지금 비상조치로 시행 중인 대책 중 효과가 검증된 것은 사태 종료 후에도 유지한다고 약속하는 겁니다. 정부는 11일부터 대형병원 응급실이 경증 환자를 인근 중소병원 응급실로 돌려보내거나 중앙응급의료센터로부터 수용 곤란 중증 환자를 배정받으면 돈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십여 년간 대형병원 응급실 과밀화를 해소할 방안으로 거론됐지만 전공의의 공백을 메울 임시방편으로 갑자기 현실화했습니다. 이런 제도를 어떻게 살려 나갈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주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인기 없는 정책을 직시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더 줄지”보다 “누구에게 얼마를 ‘덜’ 줄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필수의료 투자를 늘리려면 누군가는 돈을 더 내거나 기존 혜택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걸 공개하고 설득하는 게 정부의 역할입니다.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국민은 답답하고, 환자는 초조합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25일 성명을 내고 “환자는 지금 절망에 빠진 심정을 소리높여 말할 처지조차 되지 못한다. 환자에게는 지금 당장 의사들이 필요하다. 정부와 의료계는 각자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를 위해 나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의사와 정부는 이 호소를 귓등으로라도 듣고 있습니까.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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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공의 사직이 촉발한 의료개혁 ‘자연실험’ [조건희의 복지의 조건]

    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가 한 달이 돼갑니다. 대학병원에서 수술과 항암치료가 미뤄지고 있습니다. 교수들도 단체로 흰 가운을 벗는다고 합니다. 의료 혼란이 ‘대란’을 넘어 ‘재난’이 될까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재난의 피해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별 영향이 없습니다. 병든 사람이 더 아파집니다. 돈 잘 버는 ‘피부미용’ 의사는 큰 타격이 없습니다. 원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처참했던 필수의료 의사만 잠을 줄이며 진료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약자를 가장 먼저 덮치는 재난의 속성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번 사태는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비대면 진료를 떠올려봅시다. 코로나19 재난이 낳은 뜻밖의 효과, 비대면 진료 전면 도입지금은 스마트폰 몇 번 두드리면 손쉽게 비대면 진료를 받을 수 있죠. 그런데 10년 전만 해도 비대면 진료를 언급만 해도 난리가 났습니다. 2014년 3월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총파업(집단휴진)을 벌인 이유가 바로 비대면 진료 때문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원격의료를 추진하자 의협이 ‘의료 영리화’라며 거리로 나온 겁니다. 정부는 결국 원격의료 도입을 철회했습니다. 그 후 1년간 시범사업을 벌였지만 참여 환자는 6145명으로 하루 17명꼴에 그쳤습니다.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진료에 대한 인식은 ‘그거 꼭 해야 해?’에서 ‘이 편리한 걸 그동안 왜 안 했지?’로 180도 바뀌었습니다. 정부는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2월 24일부터 전국 병의원에서 전화 상담과 처방을 전면 허용했습니다. 병원 내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 병원이 감염의 온상이 됐던 악몽도 빠른 대처에 한몫했을 겁니다.그 후 지난해 1월까지 약 2년 11개월간 1379만 명이 3661만 건의 비대면 진료를 이용했습니다. 2022년 한 해만 따져도 약 3200만 건. 즉, 하루 8만 건이 넘었습니다. 별다른 안전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의사도 지금은 크게 반대하지 않습니다.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멈춰있던 개혁의 시계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계기로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를 과학계에선 ‘자연실험’이라고 합니다.:자연실험: 연구윤리상 인위적으로 설계할 수 없는 환경이 재난이나 급격한 사회·제도 변화 때문에 갖춰졌다면 추후 정책의 효과와 인과 관계를 따져볼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함.대형병원 쏠림 해소 ‘자연실험’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이른바 ‘빅5’ 병원을 포함한 상급종합병원은 꼭 필요한 중증환자만 진료하고 나머지 환자는 인근 종합병원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졸지에 주치의가 바뀐 환자와 가족의 당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항암치료가 늦어진 70대 환자는 암이 퍼진 걸 확인하고 ‘제때 입원했다면 전이를 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상급종합병원은 중증환자만 진료한다’는 틀 자체는 정상적인 의료 체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환자가 경중에 따라 적절한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걸 ‘의료 전달 체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게 무너져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극심했던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전공의 인력에 의존해 왔던 상급종합병원은 입원 환자를 평소보다 30~40% 줄였습니다. 반면 인근 종합병원은 북새통을 이룹니다. 서울 A종합병원은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 이후 평소 50~60%였던 병상 가동률이 97% 수준으로 올랐습니다. 약 4km 떨어진 ‘빅5’ 상급종합병원 중 한 곳에서 환자들을 내보내자 그중 일부를 A종합병원이 받게 된 겁니다. 환자 대다수는 경증이라서 A종합병원의 역량으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응급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부에 따르면 6일 기준 응급실을 찾은 경증 환자는 지난달 1~7일 평균 대비 29.3% 줄었습니다. 최근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선 원래 이 병원에 다니던 말기 암 환자가 배에 물이 차서 그걸 빼달라며 응급실을 찾았는데 받아주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정도 시술은 가까운 병원에서 해도 되지만, 그동안은 ‘팔로업(기존) 환자’라면 상급종합병원에서도 받아주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이젠 도저히 이런 환자까지 받아줄 여유가 없으니 돌려보낸 거죠. 해당 환자는 119구급대가 몇 시간 후 인근 종합병원 자리가 나서 데려가 줬고, 무사히 치료받았다고 합니다. 모처럼 응급실이 정상적인 모습을 찾은 사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그간 정부와 의료계는 대형병원 쏠림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상황은 오히려 악화일로였습니다. 그런데 전공의의 부재가 뜻하지 않게 ‘의료 전달 체계 정상화’의 자연실험을 촉진하고 있는 겁니다. 2020년 코로나19 유행 초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증·응급을 제외한 환자들이 감염을 우려해 치료를 미루면서 전체 진료량이 약 30% 감소하고, 빅5 접수·수납 창구마저 한산해지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진 겁니다. 당시 보건학계에선 치료 지연 탓에 ‘간접 사망’이 증가하지 않을까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델타 변이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2021년 7월 이전까진 초과사망은 미미했습니다.:초과사망: 과거 3년의 같은 기간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숨졌는지 나타낸 것. 재난 등의 영향을 받은 사망자를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울 때 활용함. ‘예방 가능했던 사망자’로도 표현함.문제는 지금은 코로나19 유행 초기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겁니다. 코로나19 땐 정말 급한 환자는 진료했고, 만약 격리 병상이 없으면 응급실 의사가 구급차에 올라타서라도 심정지 환자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인력 자체가 병원을 떠나고 있습니다. 현장에 남아 전공의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의사들의 소진도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서울대병원 적자 하루 15억 원… 이게 ‘전공의→전문의’ 전환 비용전공의가 빠졌다고 빅5 병원의 입원 진료와 수술이 30% 넘게 중단된 현실은 거꾸로 그간 인력 구조가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 드러냅니다. 전공의는 원래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교육을 받는 ‘수련생’ 신분입니다. 그런데 실제 병원에선 온갖 궂은일을 맡습니다. 밤을 새워 입원환자를 돌보고 응급 환자가 오면 달려갑니다. 전공의가 병원 진료의 상당 부분에 직접 참여하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의술은 피아노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강의실에서 아무리 오래 수업하고 악보를 들여다봐도 그것만으로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죠. 직접 피아노를 쳐보고 옆에 앉은 교사가 실수를 바로잡아줘야 실력이 늡니다. 전공의 교육이 도제식인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전공의의 역할이 ‘수련’보다는 ‘업무’에 쏠려있던 게 분명해 보입니다. 2021년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공의는 상급종합병원 전체 의사 인력의 37.8%를 차지했습니다.이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합니다. 병원들이 몸값 비싼 전문의를 고용하는 데 인색해지고 인건비가 훨씬 낮은 전공의를 선호하게 되는 겁니다. 전공의 3, 4명을 고용할 돈으로 전문의 1명을 뽑으면 병원장 입장에서는 ‘배임’ 아닐까요? 지금 구조가 그렇습니다. 전문의 입장에서는 전공의 수련을 마쳐도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려우니 아예 필수의료 분야에 지원하지 않는 악순환이 생기는 겁니다.정부는 ‘전문의 중심병원’을 구축하겠다고 합니다. 전공의에게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병원 진료는 전문의가 중심적으로 수행하도록 구조를 바꾸겠다는 얘깁니다. 그러면서 각 병원이 필요 의사 인력을 확보했는지 따질 때 전공의는 1명이 아닌 0.5명으로 치겠다는 대책을 내놨습니다. 그만큼 전문의를 더 고용하게 유도하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 기준만으로 전문의 고용을 늘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지금 병원에서 전공의 1명은 전문의 0.5명분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문의 2, 3명이 할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공의 대신 전문의를 채용하면 병원은 그만큼 손실을 보는데, 정부가 이를 보전하기 위해 예산을 얼마나 쓸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전공의협회 측이 “정부가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과 재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라며 복귀를 거부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간단한 계산법이 있습니다. 지금 상급종합병원에서 적자가 얼마 나는지 보는 겁니다.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은 전공의가 떠난 후로 하루 15억 원 안팎의 적자가 난다고 합니다. 이 병원 전공의 740명의 하루 인건비가 약 1억 원입니다. 서울대병원은 전공의의 격무 덕분에 하루 약 14억 원을 벌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1년이면 약 5100억 원입니다. 아주 거친 계산법이지만, 병원 1개를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적잖은 돈이 들어간다는 건 추산할 수 있습니다. 그 돈을 어디서 끌어올 수 있을까요? 지금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는 정부와 의료계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하는 건 이런 주제가 아닐까요.PA 간호사 양성화, ‘직역 이기주의’ 아닌 환자 중심으로 논의할 기회자연실험은 의사 외 직군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가 대표적입니다. 최근 정부는 그간 법적 사각지대에 있었던 PA 간호사의 활동을 사실상 전면 허용하는 시범사업을 실시했습니다.그간 보건의료 분야에서 특정 직군의 업무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는 다른 직역 단체의 반발로 무산되기 일쑤였습니다. 대표적인 게 응급구조사입니다. 응급구조사는 119구급대와 응급실 등에서 활동하는데, 2000년 응급의료법이 개정된 이후 업무 범위가 혈압 측정 등 14가지로 제한돼 있습니다. 심근경색 환자의 심전도를 재지 못하고, 응급 분만 산모의 탯줄도 자를 수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려고 하면 임상병리사 단체나 간호사 단체가 들고 일어나 막았습니다. PA 간호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양성화하려는 시도가 수십 년간 의협을 포함한 다른 보건의료 직역 단체의 격렬한 반발 탓에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런데 전공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긴급 조치라는 명분으로 ‘전면 합법화’에 가까운 조치가 곧장 현장에서 적용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간 필수의료 인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의사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비(非)의사 직군의 업무 범위도 넓혀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이를 실행에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정부로선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겁니다. 문제는 정부가 급한 나머지 대법원에서 확실하게 ‘간호사가 하면 의료법 위반’이라고 판시한 의료행위만 제외하다 보니 시범사업의 기준이 뒤죽박죽이라는 점입니다. 예컨대 전문 간호사가 뇌척수액을 채취하는 건 괜찮은데 X레이는 촬영하면 안 됩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난도와는 너무 달라서 간호사들도 ‘진짜 이대로 해도 되는 거냐’고 의심합니다.‘기준이 엄밀하지 않으니 시범사업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번 시범사업을 계기로 비(非)의사 직군이 해도 되는 의료행위가 어디까지인지 한 테이블에 놓고 진지하게 논의해 보자는 겁니다. 논의의 중심은 ‘직역의 이해’가 아니라 ‘환자의 최선’이어야 합니다. 만약 정부가 이번 시범사업을 ‘전공의 압박용’으로 쓰고 사태가 끝나자마자 없던 일로 해버린다면 수많은 환자를 살릴 잠재적인 기회를 잃게 되는 겁니다.의협도 ‘문신사 신설’ 같은 정책은 좀 반대하지 맙시다. 문신 권한을 지금처럼 의사가 독점한다고 해서 의사가 타투샵 차릴 건 아니잖습니까. 필러나 피부 레이저 시술을 꼭 의대 교육 6년, 전공의 수련 4년 밟은 의사가 해야 합니까. 계속 그런 주장만 되풀이할 거면 ‘필수의료 전문의가 피부미용 의원으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호소하면 안 됩니다.간호 인력 얘기도 툭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일부 상급종합병원이 요즘 수술실 간호사들에게 무급 휴가를 권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수술실을 못 돌려서 돈을 못 벌고 있으니 간호사들은 무급으로 쉬라는 얘긴데, 사실은 간호사 1명당 환자의 비율은 지금 정도가 딱 맞습니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간호사 대비 입원환자가 너무 많으면 ‘간호관리료’를 깎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되는 간호사 1명당 환자 수가 상급종합병원은 19.2명, 종합병원 28.8명입니다. 국내 최고 병원에서도 간호사 1명이 환자를 19.2명까지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선진국이랑 비교하기 민망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간호사 1명당 환자가 5명이 넘어가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8명입니다. 전공의 사직으로 입원환자가 갑자기 줄어드는 바람에 간호사 1명당 환자를 5명 정도만 돌보게 된 이 상황이 바로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주목할 건, 거꾸로 말하면 병원들이 간호사에게 무급 휴직을 종용할 정도로 우려하는 적자를 누군가 메꿔주지 않으면 선진국형 간호 비율은 달성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정부는 지난해 4월 ‘제2차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안)’을 발표하며 간호사 대 환자 비율 ‘1 대 5’를 목표로 병원 내 간호인력 충원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에 대해 재의요구(거부)권을 행사하기에 앞서 간호계를 달랠 필요가 있던 시점에 나온 대책이었지만, 간협도 방향 자체는 맞다며 반겼습니다. 그런데 1년 가까이 지난 지금쯤 재원에 대한 논의가 진전됐어야 하는데, 들려오는 소식이 없습니다. 이래서야 간호사 단체가 정부를 믿을 수 있을까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돈이 들어서 그런 거면 시간 끌지 말고 솔직히 공개하고 공론에 부치는 게 옳습니다.의협은 책임감 갖고 논의 테이블로 나오고, 정부는 재원 대책 밝혀야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촉발된 이번 ‘자연실험’은 성공할까요. 아쉽게도 전공의의 빈 자리를 다른 인력이 오랫동안 대체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전공의에게 업무가 집중되는 의료 체계의 왜곡이 그만큼 심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지난 48시간 중에 4시간 밖에 못 잤다고 합니다. 다른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도 입원 병상을 줄이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국민 동의도 필요합니다. 의료 전달 체계를 정상화한다는 건 아무나 상급종합병원에 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뜻입니다. 중증·응급질환의 건강보험 수가를 올린다는 건 건강보험료를 더 내거나 경증으로 진료받을 때 병원비를 더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의사들은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무리하게 밀어붙인다고 반발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수 있는 건 누구 덕택입니까. 의사 단체는 그간 의사를 늘릴 필요가 없다며 진지한 논의를 거부해 온 게 정말 환자를 가장 먼저 생각한 결과였는지 스스로 돌이켜보길 바랍니다. 그 책임을 생각해서라도 의협은 논의 테이블로 나와야 합니다. 정부는 의사 인력 증가는 필수의료 정상화의 필요조건일 뿐이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패키지를 병행하겠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정책 패키지를 위한 재원과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어딨습니까. 그동안 ‘밥그릇’보다 환자를 먼저 생각했던 의사들조차 “정부가 의대 정원 늘리고 나면 정책 패키지는 내팽개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합니다. 그걸 정부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마저 의사에게 밀리면 더는 미래가 없다’는 위기 의식을 안고 있는 듯합니다. 정부가 의사를 이겨도 결국 재난의 피해는 아픈 사람들이 떠안습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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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회 윤한덕賞에 중증환자이송센터 고안한 노영선 교수

    노영선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사진)가 2일 제3회 윤한덕상을 수상했다. 전남대 의대 동문을 중심으로 구성된 윤한덕기념사업회는 이날 전남 화순군 전남대 의대 의학도서관에서 열린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 5주기 추모식에서 노 교수에게 윤한덕상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노 교수는 중증·응급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는 중증환자공공이송센터를 고안하고, 교통사고 사망률에 관한 연구를 통해 고속도로 뒷좌석 안전띠 의무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윤 센터장은 2019년 2월 설 연휴 기간 응급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중앙응급의료센터를 지키다가 50세의 나이에 과로사했다. 정부는 그를 민간인으로선 36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서해현 윤한덕기념사업회장(서광병원장)은 “고인은 응급환자가 제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 중심 응급의료 체계를 한평생 꿈꿨다”고 추모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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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윤한덕 센터장 5주기… 한동훈 “누굴 기억하느냐가 사회의 품격 말해줘”

    5년 전,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려다 자신을 희생한 의사가 있었다. 2019년 2월 설 연휴 기간 응급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중앙응급의료센터를 지키다가 과로사한 故 윤한덕 센터장(당시 50세)이다. 이달 4일은 그가 집무실에서 급성 심정지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된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윤 센터장의 5주기를 앞두고 그의 모교인 전남대와 정치권 등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고 있다.2일 오후 4시 전남 화순군 전남대 의대 의학도서관에서 윤한덕 기념사업회 주최로 윤 센터장의 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서해현 기념사업회장(서광병원장)은 “고인은 응급환자가 제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 중심 응급의료체계를 한평생 꿈꿨다”라며 “우리는 그의 이상을 존경하며 동시에 그의 희생을 안타까워한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전남대 의대 동문을 주축으로 윤 센터장을 기리는 사업을 하고 있다. 추모식에 이어 진행된 제3회 윤한덕상 시상식에서는 노영선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윤한덕상을 받았다. 노 교수는 중증·응급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는 중증환자공공이송센터를 고안하고, 교통사고 사망률에 관한 연구를 통해 고속도로 뒷좌석 안전띠 의무화 조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윤한덕상은 윤 센터장을 기리고 공공의료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전남대 의대 등이 2022년 제정했다.한편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윤한덕 선생님은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를 반석에 올려둔 분이었고, 공익을 위해 본인의 모든 걸 바쳤던 분”이라고 말했다. 기자들과 만나 정치 현안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은 자리에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다”라며 한 위원장이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는 “어떤 사회가 누구를 배출했느냐에 못지않게 누구를 기억하느냐도 그 사회 품격을 말해준다고 한다”라며 윤 센터장을 추모했다.윤 센터장은 생전에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며 응급의료전용헬기(닥터헬기) 도입과 권역외상센터 설립, 국가응급진료정보망(NEDIS) 등에 앞장서 왔다. 근로복지공단은 그가 숨지기 전 석 달 동안 주 평균 122시간을 근무했다는 조사 결과를 밝히기도 했다. 정부는 이런 공로를 인정해 윤 센터장을 2019년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민간인이 국가유공자가 된 건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 당시 숨진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이후 36년만이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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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급환자 생기면 인근 병원에 경보 울리는 일본… 한국서 안 되는 이유는

    119구급대가 출동한 후 응급실 도착까지 1시간 넘게 걸린 환자, 19만8892명(2022년 기준, 소방청).김진수(가명·68) 씨는 그런 환자 중 1명이었다. 그는 지난해 1월 12일 오후 8시 37분 가슴 통증과 호흡 곤란 증세로 119에 신고됐다. 만약 심장에 이상이 생긴 거라면 서둘러 치료해야 하는 상황. 인근 구급대가 2분 만에 출동해 3분 만에 진수 씨 자택에 도착했다. ● 병상 찾아 전화 31통, 우리 응급의료의 현실곧 응급실로 출발할 거란 진수 씨의 기대와 달리 구급대원들은 전화기부터 들었다. “68세 남자 환자인데 체스트 페인(가슴 통증)이랑 디습니아(호흡 곤란)가 있습니다. 수용 가능할까요?” 몇 초의 대기.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구급대원은 다시 휴대전화에 저장된 인근 응급실 목록을 훑었다. 전화한 병원에서 ‘대기 환자가 많다’며 진수 씨를 받아주지 않은 것.같은 과정이 30차례 반복됐지만 전화기 너머에선 ‘죄송한데요’로 시작하는 대답만 들려왔다. “중환자실에 빈자리가 없어서”, “응급으로 심장 검사가 안 돼서”, “가슴 통증 환자가 너무 많이 대기하고 있어서”라는 답변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수 씨의 숨이 가빠졌다. 옆에 앉은 진수 씨 부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대형 병원 56곳이 몰려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응급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떠도는 ‘표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 의료진이 모두 가동되는 병원이 어딘지 찾아주는 시스템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시스템은 없었다. 진수 씨는 119에 신고한지 1시간 15분 만에 가까스로 서울의 한 응급실에 도착했다. 구급대가 31차례 전화한 끝에 닿은 곳이었다. 그는 다행히 큰 이상 없이 건강을 회복했지만 아찔한 상황이었다. 중앙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2022년 전국 응급실을 찾은 환자 가운데 3만7926명이 끝내 숨졌다.● 일본, 응급환자 ‘표류’ 멈출 때까지 모든 응급실에 경보일본의 응급의료체계도 16년 전에는 지금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구급대가 병원마다 일일이 전화해 환자의 상태를 불러주며 수용 가능한지 물어야 했다. ‘구급차 뺑뺑이’와 같은 의미의 ‘구급차 다라이 마와시(たらい回し·대야 돌리기)’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2008년 정부와 의료계가 응급의료체계 협력에 나섰다. 그해 구급차에 탄 임산부가 8개 병원에서 수용 곤란 통보를 받은 뒤 뇌출혈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환자가 빈 병상을 찾지 못하고 떠돌면 인근 모든 병원에 경보를 울리는 ‘마못테(まもって·지켜줘) 네트워크’가 그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일본 오사카대 의대 부속병원 고도구급구명센터(응급실)를 찾은 지난해 9월 13일에도 마못테 네트워크 단말기가 ‘깡! 깡! 깡!’ 하며 요란한 소리로 울렸다. 인근 병원 중 한 곳이 ‘수용 가능’을 누를 때까지 이 알람은 계속된다. 위기 상황에 처한 응급환자의 존재를 한 번에 ‘일 대 다(多)’로 알리고 수용 가능 여부를 문의함으로써 ‘표류’를 막은 것. 일본 오사카부는 구급대원 단말기에 이송 가능 병원을 자동으로 띄워주는 ‘오리온 시스템’도 2013년 도입했다. 구급대원이 입력한 환자의 증상과 정보, 현재 위치를 기반으로 이송할 수 있는 병원 목록이 거리순으로 띄워주는 시스템이다. 구급대원이 환자를 이송할 병원을 정하는 과정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 실시간 응급의료체계, 왜 한국서 안 되나한국에서도 응급실이 실시간으로 가용 의료 자원을 공유하고, 구급대가 최적의 병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좌절됐다. 일본의 오리온 시스템과 흡사한 ‘AI 앰뷸런스’ 사업이 대표적이다. 소방서와 응급실의 참여가 저조해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무슨 이유였을까. 취재팀은 2022년 9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국내 응급실과 구급차에서 37일을 보내며 응급환자 ‘표류’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추적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일본과 독일, 캐나다, 호주, 미국 등 5개국의 병원과 구급대 등 현장 15곳을 방문해 그 해법을 찾아봤다. 그 고민을 담은 미니 다큐멘터리 ‘표류’를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한다. 1부 ‘목적지 없이 떠도는 응급환자’는 12일 오후 1시부터, 2부 ‘떠도는 응급의료 해법들’은 15일 오후 1시부터 각각 시청할 수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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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눈을 잃은 뒤, 비로소 내 인생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영하 10도의 칼바람이 불었던 22일 오후 2시. 서울 성북구 보문동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사실모) 사무실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난로 위 주전자가 뿜어낸 김이 나종천 씨(70)의 선글라스에 하얗게 서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먼저 와 있던 박언춘 씨(63)가 종천 씨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형님, 접니다.” “누구?” “언춘이에요.” 종천 씨가 손을 맞잡았다. “언춘이가 왔구나!” 이날 행사는 종천 씨를 포함한 노인 21명의 자서전을 엮은 책을 주인공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열렸다. 노인 참석자는 5명. 구면과 초면이 섞였다. 책에 참여한 구술작가 6명이 동석했다. 자리가 정리되자 이들 앞에 ‘마음의 눈으로 돌아본 내 인생’이라는 제목이 양각된 책이 한 권씩 놓였다. “이게 저희가 쓴 책인가요?” 박순자 씨(68)가 책을 손으로 더듬으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허공을 향한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웃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사전의향서) 공식 상담기관인 사실모는 2019년부터 해마다 연명의료 거부의 뜻을 밝힌 어르신들의 삶을 구술작가가 듣고 옮기는 자서전을 만들어왔다. 올해로 다섯 번째다. 그런데 이번 주인공들은 더 특별했다. 자서전에 참여한 21명 모두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빛을 잃은 빈자리에 들어선 것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눈앞이 캄캄하다’고 한다. 그 일을 실제로 겪은 이들의 일대기라면 책이 온통 고통과 불운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몇 쪽 넘기지 않아 기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서전에 참여한 21명은 ‘괜히 살았다’고 후회하기는커녕 하나같이 “지금이 행복하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배귀엽 씨(76)는 이날 행사 내내 눈물을 훔쳤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번 유산했다. 시댁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는 소리를 듣고 매질을 당했다. 다신 깨어나지 않을 생각으로 입에 털어 넣은 약이 시력마저 앗아갔다. 그 후로도 살얼음 앉은 냇가에서 손을 호호 불며 빨래하고, 얼굴이 새카매지도록 젖은 땔감으로 불을 땠다. 어두운 눈으로 겪은 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묘사가 생생하다. 귀엽 씨는 “그 시절을 어떻게 잊겠냐”고 했다. 하지만 예순셋의 나이에 맹학교에 입학해 안마사 자격증을 따면서 새 삶이 시작됐다. 다발성 척수염과 파킨슨병 등 희귀질환자가 주된 고객이었다. 고통으로 힘들어했던 환자들은 정성을 담은 안마를 통해 잠시나마 편해졌고, 귀엽 씨는 비로소 삶의 보람을 찾았다. 그는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니 스스로 대견하다”며 “마치 할머니 품에서 마냥 귀염둥이로 자라던 어린 시절로 돌아온 것처럼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권택환 씨(72)는 “시각장애를 얻고부터가 ‘인생의 절정기’였다”고 한다. 그는 젊은 날 술에 빠져 사느라 집에 월급봉투를 가져간 적이 없다. 아내가 인형 눈을 붙이며 두 아이를 키웠다. 마흔여덟에 알 수 없는 병으로 두 눈을 잃은 뒤에야 아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아내가 “당신의 눈이 되고 팔다리가 되어 주겠다”며 용기를 준 것. 택환 씨는 아내의 응원 덕분에 재활 훈련을 시작했고, 2019년 시각장애인 최초로 우리나라 100대 명산을 완등했다. 택환 씨는 “길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길이 있었다”고 적었다. 책에는 험난한 시절을 맨손으로 더듬으며 한 뼘씩 걸어온 사람만이 벼려낼 수 있는 명문장이 가득했다. 김경숙 씨(73)는 “두 눈을 가져간 신은 내게 천 개의 귀를 달아주었다”고 한다. 부모 없이 자라 서른 즈음 남편을 잃고 마흔 넘어 시력까지 잃었지만, 장성한 자녀들이 건강하고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돌봄 서비스를 받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는 얘기다.“가족은 나의 빛” 어떤 글은 ‘장애가 있어도 가족은 가족’이라는 말을 되새기게 한다. 순자 씨는 성인이 되고도 키가 132cm로 작아 10년 넘게 은둔 생활을 했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생긴 뒤로는 악착같이 살아냈다. 지하 연탄창고를 개조한 단칸방에서 빗물로 아이 머리를 감기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런 아들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순자 씨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이 됐다. 30년 전, 당시 네 살 아들이 제 엄마를 무시하는 동네 형들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쏘아붙이고 씩씩하게 순자 씨의 손을 잡아준 일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순자 씨는 “우리 아들은 담배꽁초 줍는 일로 연명하는 ‘난쟁이’ 엄마를 한 번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도 부럽지 않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봐줬다”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순자 씨는 이날 행사에서도 수줍게 웃으며 구술작가에게 부탁했다. “책 사진 좀 찍어주세요. 우리 아들에게 보내려고요.” 육성수 씨(68)는 빛을 잃고 반년 넘게 신발을 신지 않았다. 외출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시간이 흘러 ‘눈보다 가치 있는 것을 얻었다’며 마음을 고친 건 큰아들 덕이었다. 큰아들이 입사 지원서에 “나는 어떤 과정도 다 이겨낼 수 있다. 실명한 아버지가 어떻게 시련을 극복해 왔는지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라고 쓴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성수 씨는 “사람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데, 나는 나머지 백 냥이 더 소중하다”고 적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는 달콤한 연애담도 있다. 언춘 씨는 아내 고현숙 씨(60)를 스물한 살에 처음 만났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현숙 씨가 봉사차 언춘 씨가 다니는 맹학교에 방문하면서였다. 자주 만나며 조금씩 가까워지면서도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던 현숙 씨가 언춘 씨를 남다르게 느끼게 된 계기는 해수욕장 나들이였다. 현숙 씨의 발에 박힌 유리 조각을 언춘 씨가 입으로 빼낸 것. 현숙 씨는 “그 순간에 ‘세상에 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회고했다. 처음엔 교제에 반대했던 가족도 사랑으로 설득해 낸 두 연인은 올해로 결혼 36주년을 맞았다. 남궁광수 씨는 실명 후에 찾아온 아내와의 인연에 대해 적었다. 당시 항암 치료 중이던 아내는 광수 씨를 만나며 용기를 얻었고, 먼저 청혼했다. 광수 씨는 짝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사양했지만, 아내의 줄기찬 설득에 마음을 열었다. 둘은 2016년 성탄절 한 교회에서 소박한 결혼 예배를 올렸다. 광수 씨는 “두 눈을 잃고 세상을 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나를 믿고 이해해 주는 아내를 만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했다.“죽음 마중하자 인생이 더 깊어져”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오랜 날을 살아온 노인들이 사전의향서 등으로 죽음을 마주하면서 남긴 글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주인공 중 한 명인 안인랑 씨는 이번 자서전이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됐다. 구술 작업이 한창이던 2021년 8월에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별세했기 때문이다. 인랑 씨가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된 건 상을 치르고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유품을 정리하면서였다. 인랑 씨의 아들은 구술작가 김명실 씨로부터 아버지의 자서전 초고를 건네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원고 안에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빌린 양복을 입고 맞선에서 아내를 만난 일, 무일푼으로 노동을 하다가 사기를 당한 후 눈을 잃은 사연 등이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평생 몰랐던 아버지 속마음을 뒤늦게 안 아들은 오열했다. 아들은 “한 줄 한 줄이 아버님의 목소리가 되어 제 귀에 들어왔다”라며 “아버지가 왜 그토록 절약이 몸에 밴 삶을 사시며 자식들에게 엄격하셨는지 이해가 됐다”고 했다. 주인공들이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다양했다. 김경희 씨(74)는 마흔한 살에 남편을 떠나보낸 뒤 연명의료의 무익함을 느꼈다고 한다. 마지막 한 달을 중환자실에 누운 채 가족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희 씨는 스스로 사전의향서를 작성하고 주변에도 권유하고 있다. 박양하 씨는 2014년 서울의 한 병원에 방문해 시신 기증 서약서를 썼다. 양하 씨는 “이 한 몸 죽은 뒤에 연구에 잘 사용되길 바라는 마음”이라며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라고 했다.다른 장애인들과의 동행 많은 주인공들은 시각장애인이 되고 나서 사회와 동료 장애인들로부터 얻은 도움에 대한 깊은 감사를 글에 담았다. 더 나아가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들에게 베풀기 위해 여생을 사는 이들도 많았다. 종천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시력을 잃은 후에도 법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숭실대 법학과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당시엔 시각장애인에게 사법시험 응시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때 겪은 좌절은 오히려 종천 씨에게 길이 됐다. 시각장애인의 복지와 인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것. 그는 1979년 가톨릭시각장애인선교회를 세우고 컴퓨터 화면의 글씨를 읽어주거나 점자로 출력해주는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해 동료 장애인의 정보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이후로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대한안마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종천 씨는 올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경기 여주시에 시각장애인 인권증진센터인 ‘심청이네’를 설립하고, 시각장애인이 홀몸노인의 말벗이 되어주는 상담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 시각장애인은 읽거나 돌아다니는 데엔 어려움이 있지만 말로 대화하는 것만큼은 비장애인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데서 착안했다. 올 7∼11월 시각장애인 6명을 상담사로 양성해 인근에 사는 외로운 노인 58명에게 성공적으로 상담을 진행했다. 노인들의 만족도가 100점 만점에 83점으로 높았다. 종천 씨는 “새해 목표는 말벗 상담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며 웃었다. 신양수 씨도 시각장애인 단체를 이끌며 여러 복지관에서 시행하는 교육 등 프로그램을 찾아서 동료 장애인들에게 알리는 보람으로 살고 있다. 1919년 충북 청주에서 3·1운동을 벌이려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신영호 선생의 딸인 그는 “곰곰이 생각하면 내 인생엔 존경스러운 아버지뿐 아니라 다정했던 남편, 건강한 두 아들 등 ‘빽’이 참 많았다”라며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빽’이 되고 싶다”고 했다.구술 작업부터 음성 낭독까지 도운 사람들 자서전이 나오기까지는 주인공 21명 외에도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시각장애인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글로 풀어낸 사실모 소속 구술작가들이 대표적이다. 구술작가들은 주인공이 마음을 열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남길 수 있도록 집으로 초대하거나 자기 인생 얘기를 먼저 하는 등 공을 들였다. 양수 씨는 “처음엔 긴장을 많이 했는데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구술작가가 너무 친근한 친구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번 작업은 구술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윤서희 구술작가는 “주인공이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공개하고 공유하는 과정을 중간에서 매개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라며 “주인공 중 한 분은 ‘상실의 아픔도 많았지만 헛된 경험이란 없다고 생각하니 내 삶도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말씀했는데, 이를 받아적는 나도 같은 마음이 됐다”고 했다. 책날개와 각 주인공의 사진 뒷면에는 QR코드가 실려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사실모 유튜브 채널로 접속돼 367쪽 분량의 책을 모두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시각장애인에겐 음성 도서가 훨씬 친숙하기 때문에 음성 도서 제작도 병행한 것. 음성 도서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이 제작해 기부했다. 한승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정보미디어팀장은 “이번 책은 동료 시각장애인에게도 의미가 있는 내용이라서 흔쾌히 참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표지 디자인과 교열 등 출판 작업은 사실모의 이사인 유은실 울산대 의대 명예교수가 운영하는 출판사 허원북스에서 맡았다. 유 교수는 “출판 과정에서 어르신들의 인생과 말씀을 곱씹을수록 뜻깊은 내용이라는 걸 느꼈다”고 했다. 이번 책은 23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올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인공들은 인세를 모두 시각장애인 지원 단체에 기부하는 데 동의했다. 채현기 씨(79)는 “전국 맹학교에 보내달라”며 책을 60권 대량 구매하기도 했다. 구술작가로 활동하는 아내 마정임 씨를 통해 이번 책을 접했다는 그는 “주인공 모두가 큰 절망을 겪었지만 ‘해피엔딩’을 맞았다는 게 감명 깊었다”고 했다. 홍양희 사실모 공동대표는 “귀한 경험을 진솔하게 나눠준 주인공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연명의료임종 과정인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등 치료 효과 없이 생명 연장만을 위해 의학적 시술을 하는 것. 이를 원치 않는 경우 법정 서식인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나 연명의료 계획서를 통해 거부의 뜻을 기록해둘 수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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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9구급대-의료진 환자정보 실시간 공유… 응급환자 ‘표류’ 막을 플랫폼 내달부터 가동

    급성심근경색이나 뇌출혈처럼 촌각을 다투는 심뇌혈관 환자가 응급병상을 못 찾아 거리를 헤매는 ‘표류’가 내년 1월부터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보건복지부는 28일 심뇌혈관질환관리위원회를 열고 내년 1월 말 시행하는 ‘진료협력 네트워크 시범사업’의 참여 기관을 확정했다. 현재는 119구급대와 의료진이 응급환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방법이 없다. 구급대원이 인근 응급실에 일일이 전화해 환자 증상을 불러주면서 받아줄 병상이나 의사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특히 환자의 최종 치료를 맡을 전문의에게 직접 연락하는 게 아니라 응급실을 거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복지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19구급대와 전문의가 환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든다. 119구급대나 응급실 의료진이 심뇌혈관 질환이 의심되는 환자의 정보를 플랫폼에 올리면 인근 병원 전문의들에게 동시에 알림이 가고, 수술할 수 있는 의료진이 ‘우리 병원으로 오라’고 응답하는 방식이다. 15분 내에 환자를 받아가는 병원이 없으면 요일별로 정해둔 ‘당번 병원’의 의료진이 책임지고 환자의 이송과 전원(轉院·병원을 옮김)을 조율한다. 실제 경기 지역 병원들이 지난 몇 달간 비슷한 시스템을 운영해 본 결과 환자의 골든타임을 상당히 아낄 수 있었다. 지난달 말엔 한 병원이 ‘9세 뇌출혈 환자를 수술할 병원을 찾는다’며 관련 정보를 올리자 5분 만에 인근 병원 의료진이 나섰다. 참여 기관은 경기와 인천, 강원, 대구·경북, 부산, 광주·전남, 충남 등 7개 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와 인근 39개 병원이다. 급성심근경색 등 ‘골든타임’이 촉박한 질환을 공동 대응할 전문 의료진 네트워크 52개 팀도 선정했다. 여기엔 전문의 670명이 참여한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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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술 가능 의사 공유하니 9세 뇌출혈 환자 5분 만에 수용… ‘표류’ 막을 시스템, 내년 1월 출범

    급성심근경색이나 뇌출혈처럼 촌각을 다투는 심뇌혈관 환자가 응급병상을 못 찾아 거리를 헤매는 ‘표류’가 내년 1월부터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119구급대가 여러 병원에 동시에 응급환자 정보를 띄우며 환자 수용을 요청하고, 심뇌혈관 전문의는 수술 가능 여부를 신호등 신호처럼 실시간으로 온라인 네트워크에 알려 이송과 전원(轉院·병원을 옮김) 문의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시스템이 경기와 대구·경북 등 7개 권역에서 시행된다.● 심뇌혈관 환자 발생 시 지역 의사들에게 전파보건복지부는 28일 심뇌혈관질환관리위원회를 열고 내년 1월 말 시행하는 ‘심뇌혈관질환 문제해결형 진료협력 네트워크 건강보험 시범사업’의 참여 기관을 확정했다. 현재는 119구급대와 의료진이 응급환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방법이 없다. 구급대원이 인근 응급실에 일일이 전화해 환자 혈압 등 활력징후를 불러주면서 받아줄 병상이나 의사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특히 환자의 최종 치료를 맡을 전문의에게 직접 연락하는 게 아니라 응급실을 거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복지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시범사업을 벌인다. 우선 전국 7개 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와 인근 39개 병원이 참여하는 ‘기관 네트워크’를 만들어 권역 내에 심뇌혈관 환자가 발생하면 응급실을 거치지 않고 해당 분야 전문의들이 곧장 환자 정보를 공유한다. 총 12개 권역이 공모에 참여했는데 경기와 인천, 강원, 대구‧경북, 부산, 광주‧전남, 충남 등 7개 권역이 선정됐다.또 급성심근경색이나 급성대동맥증후군, 뇌출혈 등 ‘골든타임’이 촉박한 경우는 질환별로 전문 의료진끼리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당초 전국에서 30개 팀을 선정하려 했지만, 심사 결과 우수한 제안서가 많아 공모에 참여한 52개 팀을 전부 선정했다. 경기 고양시 건강보험 일산병원 등의 전문의 670명이 참여한다.● 119구급대-병원 실시간 정보 공유복지부는 119구급대와 전문의가 환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도 만든다. 119구급대나 응급실 의료진이 급성심근경색이 의심되는 환자의 심전도 측정 결과 등을 플랫폼에 올리면 인근 병원 전문의들에게 동시에 알림이 가고, 수술할 수 있는 의료진이 ‘우리 병원으로 오라’고 응답하는 방식이다. 15분 내에 환자를 받아가는 병원이 없으면 요일별로 정해둔 ‘당번 병원’의 의료진이 책임지고 환자의 이송과 전원을 조율한다.이번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의 경우 지난 몇 달간 자체적으로 비슷한 시스템을 운영해 본 결과 환자의 골든타임을 상당히 아낄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달 말 권역 내 한 병원이 ‘9세 뇌출혈 환자를 수술할 병원을 찾는다’며 관련 정보를 올리자 5분 만에 인근 병원 의료진이 나선 것. 방재승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적정 병원을 찾을 수 있어 ‘대형병원 쏠림 현상’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 같다”며 “차후 네트워크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고 대상 질환도 심뇌혈관 외 모든 응급 질환으로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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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건비 충당도 어려워”… 31년만에 문 닫는 서울점자도서관

    31년 넘게 시각장애인들의 정보접근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한 서울점자도서관이 31일 문을 닫는다. 시각장애인들이 실물 점자책보다 온라인 음성책을 선호하면서 방문객이 줄어든 영향이 크지만, 최근 몇 년 새 서울시 보조금이 줄어들면서 인건비를 대기 어려워진 탓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한시연)는 “최근 이사회를 열어 31일부로 서울점자도서관을 폐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도서관은 1992년 1월 한시연이 서울 노원구에 설립한 뒤 서울시와 노원구의 지원과 일반 후원금으로 운영해 온 사립 도서관이다. 한국시각장애인도서관협의회에 따르면 서울점자도서관은 전국 40곳 안팎인 점자도서관 가운데 네 번째로 문을 열었다. 서울점자도서관은 회원 대상으로 실물 점자책 700여 권의 열람·대여뿐 아니라, 직접 제작한 전자도서와 녹음도서를 포함한 음성책 1만5000여 권을 온라인 도서관 ‘넓은마을’과 모바일 도서관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에서 서비스해 왔다. 점자를 읽을 줄 모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교실과 점자 악보를 활용한 음악회 등 행사도 꾸준히 열었다. 2018년에는 노원구 관내 식당, 카페들에 ‘점자메뉴판’을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다. 한시연 측은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온라인 콘텐츠가 많아지고 실물 점자책을 읽거나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방문객이 줄어들면서 폐관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음성책 제작과 대여는 곧 신설할 한국점자교육문화원에서, 시각장애인 대상 교육과 행사는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각각 이어갈 계획이다. 김영일 한시연 회장은 “처음 문을 연 1992년과 지금은 시각장애인이 처한 환경도, 점자도서관의 역할도 크게 달라졌다”며 “운영 효율화를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점자도서관은 장애인복지법상 지방이양사업으로 국고 보조가 없는데, 서울시의 지원도 충분하지 않았다. 공익법인 포털에 공개된 한시연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의 관련 보조금은 2020년 7410만 원에서 2021년 5215만 원, 지난해 4627만 원으로 점차 줄었다. 김 회장은 “최근 몇 년 새 사서 인건비를 충당하기도 어려워졌다”고 말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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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병비 최대 80% 정부 지원… 내년 시범사업

    요양병원 입원 환자에게 들어가는 간병비 일부를 내년 7월부터 정부가 선별적으로 지원한다. 정부 차원에서 요양병원 환자의 간병비를 지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요양병원이 아닌 일반 병원에서 간병인이나 보호자 없이 간호사, 간호조무사가 환자를 보는 간호간병통합병동(통합병동)은 기능이 강화된다. 지난해 환자나 그 가족들이 부담한 사적 간병비 규모가 10조 원(추정)에 달하는 등 ‘간병 파산’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정부는 21일 이 같은 대책을 내놨다. ● 요양병원 간병비 70∼80% 정부 지원 이날 보건복지부는 당정 협의를 통해 확정된 ‘국민 간병비 부담 경감방안’을 발표했다. 현재 요양병원에 입원하면 환자는 간병비, 입원비, 진료비 등을 낸다. 이 중 간병비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전부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 하루 간병비는 12만∼15만 원에 달해 월 수백만 원이 든다. 정부는 내년 7월부터 2025년 12월까지 요양병원 10곳의 환자 600명을 대상으로 일반 재정으로 간병비를 지원하는 1차 시범사업을 진행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1차 시범사업에서 정부 지원은 간병비의 70∼80% 수준으로 검토 중인데, 정확한 비율은 내년 2월경 정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2026년 2차 시범사업을 거쳐 2027년 1월 전국으로 확대된다. 지원 대상이 되려면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먼저 중증도에 따라서 요양병원 환자를 5개군으로 분류했을 때 가장 심한 1, 2군에 해당하면서 노인장기요양등급 1, 2등급 판정을 받아야 한다. 심하게 아프면서 일상생활 도움도 많이 필요한 이들로, 전체 요양병원 환자의 5.3%(2만5000명)가 해당한다. 또 해당 환자는 전체 환자 수 대비 중증도 1, 2군인 환자들의 비율이 일정 비율(미정)을 넘는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어야 한다. 재정 부담을 고려해 제한을 둔 것으로 풀이된다. 복지부 관계자는 “정부 재정 투입 대신 간병비 급여화, 즉 건강보험을 적용할지는 건보 재정 안정성을 고려해 1차 시범사업 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통합병동, 경증 환자만 골라 받지 않도록 이번 대책에는 통합병동 개선방안도 담겼다. 통합병동은 가족의 간병 부담을 줄이고 간병인 등 외부인의 병원 출입을 줄여 병원 내 감염 관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2013년 7월 처음 도입됐다. 병원은 통합병동을 운영하면 일반병동보다 수가(건강보험에서 병원에 주는 진료비)를 더 많이 받고, 환자 입장에서는 간병인을 고용할 때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입원할 수 있다. 하지만 병원이 통합병동에 ‘손이 많이 가는’ 중증 환자는 입원시키기를 꺼리고 경증 환자만 골라 받는 현상이 비일비재해 문제로 지적돼 왔다(본보 7월 4일자 A12면 참조). 정부는 내년 1월부터 치매, 섬망 환자 등을 전담하는 중증환자 전담병실을 통합병동에 도입하고 중증도가 높은 환자를 많이 받는 병원에 재정 보상을 늘릴 계획이다. 간호인력이 부족해 중증환자를 통합병동에 받기 어렵다는 의료 현장의 의견에 따라 환자 1인당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수도 늘릴 계획이다. 또 퇴원 후 집으로 돌아가서도 지속적으로 의료·간호·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2027년까지 재택의료센터를 전국 시군구에 1곳 이상 설치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간병비 부담을 사회가 나누는 건 옳은 방향이지만 문제는 재정이라고 지적했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는 “간병비 지원만 늘리면 현재 요양병원에 경증 환자가 오래 입원하는 고질적 문제가 더 심해질 수 있다”며 “환자를 중증도에 따라 분류해서 중증도가 높으면 요양병원에, 낮으면 요양시설로 보낼 수 있도록 구조적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소영 기자 ksy@donga.com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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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업 외과의, 대형병원 수술 참여 쉬워진다

    수술실을 떠나 동네의원을 차렸던 외과 의사가 파트타임으로 대형병원에서 수술에 참여하는 게 쉬워진다. 산간이나 도서지역 등 의료취약지에는 대학병원 전문 치료팀을 주기적으로 파견해 중증 진료 공백을 채운다. 보건복지부는 21일 경북도청에서 지역 의료계 및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과 ‘지역 및 필수의료 혁신을 위한 간담회’를 열고 이 같은 ‘공유형 필수의료 인력 운영체계’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방안이 시행되면 필수의료 인력이 소속 병의원에 구애받지 않고 탄력적으로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개원의가 일주일에 1, 2일 인근 종합병원에서 수술에 참여하는 등의 ‘개방병원’ 제도를 확대한다. 경기 고양시 일산차병원이 인근 정형외과 의원에서 전문의를 초빙해 척추 수술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례가 확대되도록 지원한다. 개방병원 제도는 2009년 도입됐지만 의료분쟁 발생 시 책임이나 수익 분배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미비해 올 9월 기준 참여 병원이 전국 105곳에 불과하다. 복지부는 관련 가이드라인을 정비하고 참여 의료진의 보상도 높일 방침이다. 특히 고위험 임신부의 경우 가까운 산부인과 의원에서 진찰받다가 때가 되면 주치의와 함께 시설과 장비를 갖춘 대형병원으로 옮겨 분만하는 협력 모델을 만든다. 복지부는 대형병원 전문의를 의료취약지로 주기적으로 파견하는 ‘전문치료인력 파견제’도 확대하기로 했다. 현재도 대전 을지대병원 소속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주말엔 경남 거제아동병원으로 파견되는 등 운영 사례가 있지만, 개방병원과 마찬가지로 참여가 저조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4월 기준 의료취약지를 포함한 병의원 2곳 이상에서 근무하는 의사는 828명에 불과했다. 이번 대책은 의대 정원 증원으로 늘어날 의사 인력이 의료 현장에 투입되기까지 지역·필수의료 공백을 채우기 위한 보완책이다. 더 나아가 ‘지방소멸’ 현상이 심해져 의료취약지가 늘어날 것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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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염-허리디스크 한약도 건보 적용

    내년 4월부터 알레르기비염이나 허리 디스크로 한약을 탈 때도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된다. 한방에 대한 건보 보장성이 점차 확대되면서 의사단체는 “효능이 불분명한 치료에 건보 재정을 낭비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현대 의료기기 사용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 권한 등을 두고 대립해 온 의사계와 한의계가 또다시 갈등하는 모양새다.● 내년 4월부터 1만6000원에 비염 한약 처방 보건복지부는 20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첩약(한약) 건강보험 적용 시범사업’ 확대 방안이 통과됐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2020년 11월부터 한의원에서 월경통(생리통)이나 안면신경마비, 뇌혈관 질환 후유증 등으로 한약을 지으면 약값의 절반을 건보로 지원하는 시범사업을 벌여왔다. 내년 4월부터는 이를 확대해 참여기관을 한방병원 등으로 확대하고 본인부담률도 한의원 30%, 한방병원 40%로 각각 내린다. 대상 질환에는 알레르기비염과 요추 추간판 탈출증(허리 디스크), 기능성 소화불량 등이 추가된다. 한약 가격은 알레르기비염의 경우 5만2900원(1회 처방 기준)으로 책정됐다. 이 중 1만5870∼2만1160원을 환자가 낸다. 허리 디스크 한약은 5만1730원, 기능성 소화불량은 4만4220원으로, 이 중 30∼40%가 본인 부담이다. 현재는 환자 1명당 연간 1가지 질환으로 최대 10일까지만 처방 받을 수 있지만, 앞으로는 2가지 질환으로 최대 40일 처방이 가능해진다. 한의사 1명당 건보 청구 상한도 연간 300건에서 600건으로 완화된다.다만 얼마나 많은 한의원과 한방병원이 참여할지는 미지수다. 원래 한약값은 한의원이 ‘부르는 게 값’인데 건보를 적용받으려면 복지부가 정한 수가에 맞춰야 해서 참여 유인이 떨어진다. 1차 시범사업 기간엔 전국 한의원 1만4557곳 중 2992곳(20.6%)이 참여했고, 예상 건보 지출액(1161억 원)의 3.9%인 45억 원만 쓰였다.● 의협 “효능 검증 않고 건보 재정 확대해 합의 위반”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이날 건정심이 열린 서울 서초구의 한 회의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결정을 비판했다. 건보 재정이 한정된 만큼 의학적 타당성과 치료 효과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혜택을 넓혀야 하는데, 이런 검증이 불충분하다는 주장이다. 김교웅 의협 한방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생리통 치료 한약의 경우 복지부가 건보 적용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5년간 연구용역을 벌였는데도 뚜렷한 검증 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의협은 한약재의 안전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건보 적용 한약에 전갈이나 지렁이, 당나귀 가죽 등 동물성 재료가 쓰이는데, 현재는 원산지 표기조차 의무가 아니라서 환자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는 의협의 지적을 ‘악의적인 폄훼’라며 반박했다. 한의협은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한약은 안전성과 효과성이 검증됐고, 건보 적용 혜택을 받은 대상자의 95.6%가 만족했다”고 주장했다. 의사계와 한의계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등 현대 의료기기 사용과 코로나19 진단 검사 권한, 전문의약품 사용 등에 대해 의사계가 형사 고발 등 법적 조치를 취하면서 양측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이런 갈등이 내년 초로 계획된 의대 정원 확대 발표에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의협은 정부가 2020년 9월 의료계 총파업(집단 휴진) 중단 당시 ‘한약 건보 적용의 발전적 방향을 (의료계) 협의체에서 논의한다’고 합의했는데 이를 어겼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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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간병비 건보 적용땐 최소 年15조 필요… 신중 접근을”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국무회의에서 “간병 부담은 ‘간병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라며 “국민의 간병 부담을 하루빨리 덜어드릴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가 관계 부처와 함께 조속한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밝혔다. 올해 국내 65세 이상 인구가 950만 명에 달하는 등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간병 부담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간병비 급여화’ 등 정책 마련에 나섰다. 간병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해서 환자와 보호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다. 정부 내부에서는 간병비 급여화가 시행되면 매년 최소 15조 원 이상의 건보 재정이 소요될 것으로 추계했다. 19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민건강보험공단 산하 연구원 추계 결과 국내 요양병원 환자들을 대상으로 간병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했을 때 매년 최소 15조 원 이상의 건보 재정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양병원 환자의 중증도를 5단계로 분류해서 가장 심한 1단계부터 3단계 환자까지의 간병비에 건보를 적용했다고 가정한 결과다. 간병비는 현재 간병인 없이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환자를 돌보는 간호간병통합병동(통합병동) 환자 등 일부를 제외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루 간병비가 12만∼15만 원에 달해 월 수백만 원이 든다. 연간 요양병원 입원 환자는 47만5949명(2020년 기준)이다. 정치권까지 간병비 경감을 주요 의제로 삼은 이유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최근 총선 공약 1호로 간병비 급여화를 제시했다. 하지만 재정 등을 고려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건보 재정은 현행 보험료율(7.09%) 유지 시 내년부터 적자로 돌아서 2028년이면 적립금이 바닥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간병비 급여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제도를 위해서는 현재 요양병원 구조에 대한 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증 환자들이 요양병원에 장기간 입원하는 건 고질적 문제로 꼽혀왔는데, 간병비 급여화 전면 도입은 자칫 이 같은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통합병동도 손보기로 했다. 의료기관들은 통합병동을 운영할 때 일반병동보다 수가(건강보험에서 병원에 주는 진료비)를 더 많이 받는다. 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중증 환자일수록 통합병동에서 받아주지 않는 등 당초 취지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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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실명위기 미숙아, 안과의사 찾아 200km 거리 서울로

    임신 25주 만에 태어나 비수도권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미숙아 기쁨이(가명)는 생후 3개월 차인 6월 망막에 출혈이 생겼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영영 시력을 잃을 수 있는 ‘미숙아망막증’이 의심됐지만, 병원에 이 병을 진료할 수 있는 의사가 한 명도 없었다. 기쁨이는 인공호흡기를 단 채 200km 이상 떨어진 서울 소재 대학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아야 했다.안과는 흔히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재영(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인기 전공과목 중 하나다. 매년 새내기 의사들이 이들 전공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정작 이들 과목에서도 소아 진료나 중증·응급 질환 진료 인력은 크게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의료 회복을 위해선 단순히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비인기 과목에 대한 지원만 늘릴 게 아니라 ‘풍요 속 빈곤’에 빠진 인기과목에 대한 정교한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사 부족에 미숙아망막증 ‘서울 쏠림’ 심각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백종헌 의원(국민의힘)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숙아망막증을 진단받은 신생아는 총 1만1999명이다. 지난해 전체 출생아 20명 중 1명(4.8%)은 이 병으로 치료를 받은 셈이다. 하지만 서울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미숙아망막증 진료 인프라가 붕괴된 상태다. 대전의 경우 2013년엔 미숙아망막증 환자 379명을 진료했지만 지난해엔 44명밖에 보지 못했다. 울산 경북 전남 등은 지난해 미숙아망막증 진료 건수가 20건 안팎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기쁨이처럼 ‘원정 진료’를 받는 신생아가 매년 수천 명에 이른다. 지난해 서울 소재 병원에서 진료한 미숙아망막증 환자는 총 5313명이었는데, 주소지가 서울인 미숙아망막증 환자는 2068명에 불과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원정을 온 미숙아망막증 환자만 3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실제로 신생아집중치료실(NICU)을 운영하면서도 미숙아망막증을 볼 수 있는 의사가 한 명도 없는 병원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교수 1명이 여러 병원의 NICU를 돌며 미숙아망막증을 진료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김상진 삼성서울병원 안과 교수는 “소아 안과 분야는 고가의 특수 장비가 필요하고, 인력도 성인 환자를 볼 때보다 두세 배로 필요한데 책정된 진료비는 낮아 병원들도 투자를 꺼린다”고 말했다. ● 의사 부족해 시술로 충분한 환자 수술하기도다른 인기 과목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컴퓨터단층촬영(CT)과 자기공명영상(MRI) 등을 판독하는 영상의학과는 대표적인 인기 과목이지만, 영상 ‘인터벤션(중재)’ 분야는 인력난에 허덕인다. 인터벤션은 피부를 절개하는 대신 혈관 등에 가느다란 기구를 넣어 실시간으로 영상을 보면서 뇌혈관 질환 등을 치료하는 시술이다. 하지만 영상의학과 내 다른 분야에 비해 업무 강도가 높고 당직이 잦아 신규 전임의(펠로)가 2019년 25명에서 올해 12명으로 급감했다. 수도권 한 상급종합병원 관계자는 “영상 인터벤션을 할 의사가 없어 간단한 시술로 치료할 수 있는 환자를 수술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고 털어놨다.정형외과 전문의도 도수치료나 동결건(이른바 ‘오십견’) 등 개원가 수요가 높은 탓에 소아나 중증외상 환자를 수술하는 의사를 찾기 어렵다. 특히 골격 기형을 가진 아이를 수술하는 소아정형외과 전문의는 전국에 20여 명에 불과하다. 올해 61세인 조태준 서울대 어린이병원 소아정형외과 교수는 “소아정형외과 전문의 가운데 상당수는 5년 안에 은퇴한다”라며 “이대로 방치하면 가물에 콩 나듯 지원자가 나타나도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포기해야 한다”고 경고했다.성형외과도 마찬가지다. 안면 외상이나 기형 환자를 상대로 재건 수술을 하는 의사는 대표적인 ‘3D 직종’이다. 특히 뇌종양 제거 후 재건 수술은 난도가 높고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기에 의사의 부담이 크다. 정지혁 서울대 어린이병원 소아성형외과 교수는 “국내 최고라는 우리 병원도 소아성형외과만 다루는 펠로를 구하지 못해 다른 분야와 순환근무를 시켜야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과목 아닌 질병 따라 필수의료 재정의해야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9월 기준 국내에서 활동 중인 ‘피안성’ 전문의 8577명 중 가장 중증인 환자들이 가는 상급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는 830명(9.7%)뿐이다. 최근 5년 새 ‘피안성’ 전문의는 1158명 늘었는데, 늘어난 의사 중 95%(1100명)가 동네 의원에서 근무한다. 소아·중증·응급 분야에서 일하면 업무 부담은 큰데 보상은 적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안과를 예로 들면 상급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전문의의 소득(약 1억5000만 원)은 동네 의원 의사의 3분의 1 수준이다.정부는 필수의료 회복을 위해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비인기 과목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왔다. 그 사이 인기 과목 내에서 소아나 중증·응급 진료를 보는 하위 분과들은 오히려 사각지대가 되고 있다.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어떤 과목을 전공했는지가 아닌 ‘어떤 질환을 진료하는가’로 필수의료의 정의를 새로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수익성이 낮지만 생명이 오가는 진료를 하는 의사에 대해선 전공에 관계없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다.병원 현장에서 나타나는 ‘시장 실패’를 바로잡는 게 정부가 할 역할이란 지적도 나온다. 소아 사시 환자를 진료하는 김응수 중앙대 광명병원 안과 교수는 “병원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많은 환자를 보지만 병원에 가져다 주는 수익은 하위권”이라며 “이런 구조가 개선돼야 소아·중증 진료 인프라가 회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종헌 의원은 “단순히 일부 과목에 대한 투자만 늘릴 게 아니라 국민 생명에 꼭 필요한 진료 분야들을 꼼꼼하게 따져 세밀한 지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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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한의대 정원, 의대로 전환’ 오늘 국회 논의… 정부도 긍정 검토

    한의대 정원 일부를 의대 정원으로 전환하는 방안의 타당성을 18일 국회가 처음으로 논의한다.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정부도 이런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1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복지위)는 18일 제2법안심사소위원회(2소위)에서 ‘지역의사제 관련 법안 제·개정 반대 및 한의대 정원을 이용한 의사 확충 재고에 관한 청원안’을 회부한다고 밝혔다. 이 청원안은 2020년 8월 노모 씨가 국회 청원 시스템인 ‘국민동의청원’에 올려 10만 명의 동의를 받아 국회에 접수됐는데, 복지위에 회부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청원안의 쟁점은 2개다. 의대 정원 일부를 별도로 선발하되 일정 기간 의료 취약지에서 의무 근무하게 하는 ‘지역의사제’의 도입과 한의대 12곳의 정원(약 800명) 중 일부를 의대 정원으로 전환하는 방안이다. 이 청원안은 당시 문재인 정부가 의사 단체 반발에 밀려 지역의사제 도입 등을 보류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최근 윤석열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강력히 추진하면서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2소위는 이날 지역의사제 도입 법안도 함께 논의한다. 특히 한의대 정원을 줄이고 의대 정원을 늘리는 방안은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가 지난달 1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정부에 정식 제안했고, 대한의사협회(의협) 일각에서 동의하고 있어 3년 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한의계는 신규 한의사 배출을 줄여 동종업 경쟁을 낮출 수 있고, 의사들도 의대 정원 확대를 저지할 수 없다면 그나마 경쟁 관계인 한의사 수라도 줄이는 게 낫기 때문에 양측 모두 긍정적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복지부도 이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내년 초 의대 정원 증원의 규모와 방식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의대 정원 감축을 함께 발표할 가능성은 낮다. 정부가 의사와 한의사의 면허를 합치는 이른바 ‘의·한 일원화’를 추진하는 것으로 비칠 경우 의사 단체가 강하게 반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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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대면 진료 확대 첫 주말, 약 배송 빠져 여전히 ‘반쪽’

    17일 강모 씨(36)는 한 살 난 아이가 콧물이 점점 심해지자 비대면 진료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했다. 일요일에 문 연 의원을 찾아 영하 10도의 한파를 헤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근 의원과 영상 통화로 진료를 받은 것까지는 순조로웠지만 약을 타는 게 문제였다. 주말에 문을 연 몇 안 되는 약국들이 모두 비대면 처방전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강 씨는 직접 의원에 가서 종이 처방전을 받은 뒤 약국으로 가서 약을 타야 했다. 보건복지부는 15일부터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 대상과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16, 17일은 새 지침이 적용된 첫 주말이었다. 기존엔 주말을 포함한 휴일과 야간에도 비대면 초진은 18세 미만 소아청소년 대상 상담만 가능했지만, 15일부터는 나이와 무관하게 누구나 약 처방까지 받을 수 있게 됐다. 평일 초진을 허용하는 대상 지역도 섬·벽지에서 ‘응급의료 취약지’ 98개 시군구로 넓어졌다. 비대면 재진 허용 대상도 ‘30일 안에 같은 질병으로 대면 진료를 받은 환자’에서 ‘6개월 안에 무슨 질병이든 대면 진료를 받은 환자’로 완화됐다. 하지만 강 씨 사례처럼 약을 받는 단계가 여전히 걸림돌이다. 대한약사회가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약 배송은 불가능해졌고, 특히 주말이나 야간에는 비대면으로 받은 처방전을 팩스나 전산으로 접수하는 약국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회에는 임시방편 격인 시범사업이 아니라 비대면 진료를 정식으로 법제화하는 법안이 5건 계류돼 있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20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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