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땐 뜨거웠는데” 둘만 있으면 고구마 삼킨 듯…우리 사이 괜찮을까?[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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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한국인의 정(情)이라지만, 부부나 연인끼린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남녀 주인공은 속마음을 감추고 갈등을 키운다. tvN 방송화면 캡처

3년 차 부부의 이혼과 재결합 과정을 그린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는 고구마 삼킨 듯 답답한 장면이 자주 나온다. 유산의 아픔을 겪은 후 냉랭한 결혼생활을 이어 온 남녀 주인공은 오해가 쌓이면 적극적으로 풀기보다 침묵을 택한다. 서운하거나 화가 나도 입을 다문다. 한때는 좋았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갈등에 소극적으로 대처해온 긴 시간동안 오해가 겹겹이 쌓여 결국 결별에 이른다.

드라마 얘기지만 사실 주위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배우자, 연인과 갈등을 회피하다 골이 더 깊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외롭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된다.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에 빠지기도 한다.

싸우는 것보단 아무 말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큰 오해다. 당장 기분이 상하고 언짢아지더라도 일단 소통의 물꼬를 트는 게 중요하다. 부부, 연인 간 소통의 중요성을 입증한 여러 연구를 살펴보자.

‘충성’ 다해도…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대화하지 않는 부부, 연인이 행복할 수는 없다. 심지어 상대를 배려하고, 용서하고, 공감해주려고 속으로 애쓴다고 해도 말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연인 28쌍에게 2주 동안 두 사람 간 있었던 일을 일기로 쓰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했고, 그 결과는 어땠는지 자세히 적도록 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자들은 연인들이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을 아래 4가지로 나눴다.

·탈출: 끝을 암시(“더는 못하겠다”), 소리 지르거나 때림.
·방치: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소통하지 않음.
·충성: 상대의 잘못을 인내, 공감하려고 노력.
·대화: 갈등을 공론화해 이야기함.
그리고 어떤 대처방식이 관계에 더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 살펴봤다. 가장 해로운 건 ‘탈출’로 명명된 방식이었다. 헤어지자고 말하거나, 소리 지르고 뺨을 때리는 위협은 그 끝이 가장 안 좋았다. 갈등을 회피하고 상대를 무시하는 ‘방치’ 유형도 이에 못지않게 해로웠다. 근본적 해결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 오해를 더 키워갈 뿐이었다. 여기까진 충분히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연구의 핵심은 상대에게 믿음을 버리지 않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충성’ 방식이 생각보다 효과가 없다는 데 있다. 상대를 배려하고, 잘못을 용서하고, 공감해주는 것은 인격적으로도 상당히 훌륭한 대응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상대방을 위해 조용히 애쓰면 상대는 모른다. 그냥 차라리 생색을 내자. 게티이미지뱅크
상대방을 위해 조용히 애쓰면 상대는 모른다. 그냥 차라리 생색을 내자. 게티이미지뱅크

안타깝게도 이런 ‘조용한’ 노력은 상대방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해, 배려, 용서는 특정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기에 상대에게 크게 와닿지 않아서다. 오히려 상대방에겐 이런 행동이 모호해 보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등을 회피하거나 방치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어느 광고 카피 문구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가 아니라,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가 더 맞는 말처럼 보인다.

그래서 연구팀은 내가 상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굳이 말을 해서 생색을 내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물론 이 또한 지나치면 부작용이 있다) 겉으론 아무 말 안 하고 있지만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나름의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나 나름대로는 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아 서운한 마음이 생겨 제풀에 지칠 수 있다.

● 관계 회복 성공 경험 있어야 돈독해져

4개 유형 중 가장 효과적 대처 방식으로 꼽힌 ‘대화’ 유형은 문제를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시적으로 언성이 높아지거나 말다툼이 일어나도 괜찮다.

세계적인 부부 상담가인 존 고트먼 미 워싱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부부 상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실제 부부들의 대화 패턴을 분석했다. 연구팀은 실험에 참여할 부부 25쌍을 모집하고, 집이나 실험실에서 이들이 결혼 생활에서 나타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녹음했다.

당장 싸움을 피하기 위해 “내가 말을 말아야지”하는 수동적인 태도는 장기적으로 불만이 더 쌓이게 만든다. 게티이미지뱅크
당장 싸움을 피하기 위해 “내가 말을 말아야지”하는 수동적인 태도는 장기적으로 불만이 더 쌓이게 만든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를 분석한 결과 부부 간 갈등에 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때 일시적으로 감정이 상하고 관계가 나빠지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매우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적 효능감’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적 효능감이란, 갈등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의미한다. 대화로 갈등을 극복해낸 성공 경험이 쌓이면,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가 생긴다.

이와 반대로 갈등을 회피할 경우 성공 경험을 쌓을 수 없기 때문에 관계적 효능감은 자라지 못한다. 또 대화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서로를 탓하고, 자기방어에만 급급한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긍정적 효과가 없었다.

● 나도 모르게 넘겨짚고 결론 내

특별한 갈등 상황이 없더라도 소통은 늘 중요하다. 오해는 언제 어디서든 틈을 비집고 끼어들어 관계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자아 방어기제 가운데 하나인 ‘투사(projection)’와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어 소개한다. 우선 자아 방어기제란, 불안이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사고나 행동 수단을 의미한다. 자아 방어기제로 투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내 감정, 생각을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확한 근거 없이 배우자나 연인도 “나를 못났다고 생각한다”고 믿기 쉽다. 이때 자신을 못나게 보는 마음은 자존감이 낮은 자기 생각이지, 상대방의 진짜 생각이 아니다.

부부, 연인 사이에서 이런 투사가 일어나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근거 없이 상대를 의심하고, 오해하고, 넘겨짚어 관계를 섣불리 끝내버릴 수도 있다.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샌드라 머레이 미 뉴욕주립대 버팔로캠퍼스 심리학과 교수 연구진은 연인 65쌍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서로 등지고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한 뒤 각자 질문지에 답을 쓰도록 했다. 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불만을 간략히 쓰라고 했고,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집에 있는 물건을 최소 25개 이상 쓰라고 했다.

불만을 간략히 쓰라고 주문받은 이들은 답을 쓰는데 약 2분 정도 걸렸고, 물건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약 5분 정도 걸렸다. 답안지 작성이 일찍 끝난 이들은 남은 시간 동안 상대방이 열심히 답을 써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멀뚱히 기다렸다.

이때 답안 작성을 일찍 끝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서로의 질문지가 다른지조차 몰랐던 이들은 상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불만을 몇 개 적지도 않고 금방 끝났는데, 도대체 나한테 무슨 불만이 저렇게 많은 거지?”라고 말이다.

답안 작성이 모두 끝나고 이들에게 각각 상대에 대한 애정, 헌신, 신뢰도 등을 추가로 조사했다. 또 앞으로 상대가 잘못한다면 얼마나 용서해 줄 의사가 있는지, 미래에도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는 얼마나 되는지 등도 조사했다.

●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 왜 관계가 나빠지지?

그 결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상대에 대해 안 좋게 답했다. 애정, 신뢰도, 관계 지속 의지, 용서 여부 등에 전부 회의적이었다. 바로 투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자존감 낮은 사람은 파트너도 자신을 별로라고 여겨 답안지에 온갖 불만을 적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더 문제는 섣부른 판단으로 상대방을 오해해 애정을 거둬들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신이 상처받을 것을 미리 방어하기 위해 상대를 비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들은 상대방이 다른 이유로 기분이 안 좋을 때조차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덜했다. 자신에 대해 불만이 적고, 자존감 높은 사람들은 상대방도 자신을 존중해줄 것이고, 그만큼 잘 대우해 줄 것이라 믿으며 쓸데없는 오해에 휩쓸리지 않았다.

두 사람 간 대화 시간이 많은 부부, 연인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게티이미지뱅크
두 사람 간 대화 시간이 많은 부부, 연인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게티이미지뱅크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서로 등을 지고 아무 말도 나누지 못하게 하자 이런 일이 더 극명하게 일어났다.

오해는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관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이를 방지하는 방법은 등 돌리고 앉았던 자세를 고쳐 앉아 서로 마주보고 입을 여는 것 뿐이다. 어쩌면 좋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둘 중에 누가 잘못을 했느냐 보다, 그 주제로 충분한 소통을 했는가에 달려있는지 모른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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