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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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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6~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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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부부는 ‘로또’ 같은 사이…안 맞으니까” 이 공식 알면 달라질 수 있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그만 좀 해.” “그게 그렇게 중요해?” “네 성격이 문제지.”이혼 직전에 놓인 부부 갈등을 다루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하는 부부마다 배우자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뱉어 내기 바쁘다.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비난하고 경멸하거나 대화를 회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감정이 상하고 더 독한 말을 쏟아 내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대다수 이혼 사유가 ‘성격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 성격 차이가 없는 부부는 없다.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성격 차이는 이혼과 무관하다고 한다. 행복한 부부나 불행한 부부 모두 서로 성격이 다르고 그에 따른 갈등을 겪는다. 다만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결혼 생활의 결말이 달라지는 것이다.부부 치료의 세계적 권위자인 존 가트맨 미국 워싱턴대 심리학과 석좌교수는 갈등 유무나 그 내용 자체보다는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잘 싸우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부 갈등 주제 가운데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약 31%에 불과하고, 나머지 69%는 기질이나 자란 환경 등이 달라 계속 반복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갈등 ‘해결’이 아닌 ‘관리’를 잘하려면 몇 가지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가트맨 교수가 일명 ‘사랑 연구소(Love Lab)’에서 약 50년간 백인, 흑인, 동양인, 다문화 부부 3000여 쌍을 연구해 밝혀낸 ‘행복한 부부의 갈등 관리법’을 살펴보자.● 부부 대화 3분만 들어봐도 이혼 가능성 예측가트맨 교수는 1983년 부부 79쌍의 대화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부부가 15분씩 그날 겪은 일상적인 주제의 대화, 평소 갈등을 겪는 문제에 관한 대화, 즐거운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도록 했다. 4년 뒤 이들을 다시 연구소에 초대해 같은 방식으로 한 차례 더 대화하는 것을 녹화했다. 특수 분석 장비를 통해 각각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내용, 표정, 태도 등을 부정적 반응과 긍정적 반응으로 세밀하게 나눴다. 이와 함께 대화할 때의 심장 박동, 피부 전도도(EDA) 변화를 비롯해 감정에 따른 생리학적 변화도 기록했다.그로부터 14년 뒤 이 부부들의 근황을 추적해 보니 79쌍 가운데 21쌍이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혼 시기에 따라 결혼 7년 내 이혼한 부부를 조기 이혼 부부로, 결혼 7~14년에 이혼한 부부를 후기 이혼 부부로 나눴다. 이들의 대화를 분석해 보니 이혼한 시점에 따라 헤어지는 부부의 특징을 추릴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다.◆ 관계를 망치는 4가지 독(毒)·비난: 사소한 불평을 말할 때 상대 성격이나 인격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기→ “청소도 안 하고 당신은 항상 무책임해”(‘항상’ ‘도대체’와 같은 표현이 주로 등장)·경멸: 상대를 열등하다고 여기며 빈정거리기→ “돈이나 잘 벌어 오면 말을 안 하지”·방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며 잘못을 상대에게 돌리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게 당신 탓이지 내 탓이야?”·담쌓기: 대화를 회피하는 모든 말과 행동→ 방으로 들어가기, 휴대전화 꺼놓기 등조기 이혼 부부는 갈등을 겪는 문제 대화에서 가트맨 교수가 ‘관계를 망치는 4가지 독’이라 명명한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소통 단절)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가트맨 교수는 특히 조롱하고 깔보는 태도 때문에 경멸이 이혼을 가장 강력하게 예측하는 요소라고 봤다.훗날 대상을 바꿔 같은 연구를 반복하니 이런 4가지 독을 포함한 대화 패턴을 드러낸 부부는 결혼 후 평균 5년 뒤에 갈라설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체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서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방어하며 심각한 감정싸움을 벌였다. 신혼부부 124쌍을 6년 동안 추적 조사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갈등 상황에서 4가지 독 대화 패턴이 3분 안에 나타나는 부부는 평균 6년 이내에 이혼할 가능성이 컸다. 주로 아내가 먼저 남편을 비난하고, 남편이 이에 방어적으로 나오면서 갈등이 격해지는 경우가 많았다.격렬하게 싸운 부부만 이혼에 이른 것도 아니다. 후기 이혼 부부들은 일상이나 갈등 대화를 나눌 때 서로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특히 적었다. 아내가 어린 아들이 심부름을 잘 해낸 이야기를 신나서 꺼냈지만, 남편은 무관심하거나 화제를 바꾸는 식이다. 감정싸움이 잦은 조기 이혼 부부들과 비교해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 없어 보인다.하지만 외로움이나 소외감이 커지며 정서적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게 문제다. 오랜 시간 결혼 생활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커지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서서히 쌓은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정서적 이혼’ 상태에서 법적 이혼 상태로 진행된다. 부정적인 대화가 많이 오갈 때뿐 아니라 긍정적인 대화가 적을 때도 이혼 위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 번 화내면 다섯 번 손 내밀어야싸우더라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부부들의 대화에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마법의 비율이 숨어 있다. 긍정적 상호작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싸울 땐 먼저 손 내밀기 쉽지 않다. 이럴 땐 ‘5 대 1’을 기억하자.원래 수학을 전공한 가트맨 박사는 부부의 갈등 상황 대화를 분석한 결과 긍정적 반응과 부정적 반응 상호작용의 황금비율이 5 대 1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언쟁이 오갈 때 배우자에게 부정적 반응(화, 짜증, 반발, 무시 등)을 한 번 보였다면,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반응(수긍, 감사, 배려 등)이 5번은 있어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이다.이 비율이 지켜져야 갈등이 격화되지 않고 화해 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미소, 칭찬, 공감, 유머를 비롯해 배우자 어깨를 감싸거나 등을 쓰다듬는 등 화해의 모든 제스처가 긍정적 반응에 해당한다. 비록 지금은 다투고 있더라도 상대가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고, 내 감정을 배우자가 이해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줄 수 있어서다. 다만 유머를 가장해 빈정거리거나 조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이 비율이 5 대 1에서 1 대 1.25 수준까지 내려간 커플은 멀지 않아 이혼할 확률이 커졌다. 다만 이 비율은 갈등 상황에 국한된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일상 대화 중엔 20 대 1까지 비율이 올라간다. 싸울 때 다섯 번 화해를 시도하는 게 평상시 스무 번만큼이나 어렵다는 의미기도 하다. 평소에도 20 대 1의 비율을 지키려면 조금씩, 자주, 꾸준한 노력을 들여 배우자에게 애정을 표현해야 한다.단 한 번의 부정적 행동을 만회하는 데 이다지도 큰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에게 부정성이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정보에 더 주의를 집중하고, 각성하는 특징을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한다. 긍정적 정보는 가볍게 여겨도 생존에 큰 타격이 없지만, 부정적 정보는 작은 것도 경계해야 생존에 문제가 되지 않기에 생겨난 특성이다. 그래서 부정적 정보를 더 세밀하게 살피게 된다.오랫동안 갈등의 골이 깊어진 부부에겐 5 대 1 황금비율도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아시아 최초로 국제 공인 ‘가트맨 부부 치료사’ 자격을 취득한 최성애 HD행복연구소 소장은 “갈등이 오래된 부부는 ‘부정적 감정의 밀물 상태’에 빠져 있어 작은 일에도 과거부터 쌓인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부정적 감정이 자꾸 비집고 나올 땐 자구 노력보다 전문가 도움을 받는 게 안전하다. 최 소장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치료 과정인 ‘사랑의 지도 그리기(배우자의 내면세계 파악하기)’와 ‘장점 50개 찾기’ 같은 작업을 시작으로 생각보다 단기간에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사소한 말 걸기가 행복 좌우갈등을 겪을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서로 정서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시도는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가트맨 교수는 이를 ‘연결 시도(bids for connection)’라고 했다. ‘정서적 접근 시도’ 또는 ‘친밀감의 시도’라고도 하는데, 먼저 말 걸기라고 생각하면 쉽다. 큰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보다 평상시 사소한 말 걸기가 부부 관계에서 훨씬 중요하다.신혼부부 130쌍의 일상 대화를 녹화해 분석한 결과, 둘 중 하나가 언어, 표정, 몸짓 등으로 상대방과의 연결 시도를 할 때 배우자가 이에 얼마나 응답하는지에 따라 부부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저기 꽃 좀 봐”라는 말에 가리키는 곳을 보며 호응하는 부부와 무관심한 부부의 최후는 달랐다.6년 뒤 이 130쌍을 추적해 보니 신혼일 때 상대의 연결 시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비율이 33%였던 커플은 이혼했다. 반면 잘 사는 커플은 연결 시도에 대한 긍정적 응답률이 87%나 됐다. 최 소장은 “‘오늘 날씨 좋다’ ‘배고파’ 같은 연결 시도에는 ‘놀러 가고 싶다’ ‘밥 먹자’처럼 원하는 것을 돌려 말하는 의미가 담겨 있을 때가 많다”며 “배우자가 이를 알아차리고 잘 반응해 줄 때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지고 부부의 긍정적인 ‘정서 통장’이 쌓일 수 있다”고 말했다.이는 해리 레이스 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시한 ‘파트너(배우자) 반응성’ 개념과도 연결된다. 여기서 반응성이란, 배우자가 나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돌보며 지지하는 방향으로 반응하는지 주관적으로 느끼는 정도다. 반응성이 높은 배우자는 다른 배우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의 생각에 관심을 보이며,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려 한다.◆ 무심한 배우자의 특징·내 이야기를 무시한다·내 감정이나 걱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무시한다·내 욕구와 필요를 이해하지 못한다·내 걱정이나 스트레스에 대해 배우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다정한 배우자의 특징·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내 생각과 느낌에 관심을 보인다·내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나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고, 반응한다·내 우려와 걱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인지된 파트너 반응성 및 무감각성(PRI)’ 척도- 당연히 파트너 반응성이 낮으면 행복과 멀어진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배우자 반응성은 스트레스 조절 능력뿐 아니라 10년 뒤 행복감과 조기 사망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다만 모든 연결 시도에는 부드러움이 전제돼 있어야 한다. 퇴근했는데 집이 어질러진 것을 보고 배우자에게 어떤 말을 건넬지 생각해 보자. 최 소장은 “‘아휴, 집이 이게 뭐야’라고 시작하면 갈등으로 이어질 뿐”이라며 “‘집에 왔는데 어질러져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적어도 거실만큼은 깨끗하면 좋겠어’ 같이 부드럽게 시작하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갈등 상황에서 말을 함부로 하면 걷잡을 수 없는 다툼과 단절에 빠질 수 있지만, 온화함을 잃지 않고 정서적 유대감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핵심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이번 주 기사를 끝으로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는 당분간 휴재에 들어갑니다. 2022년 7월부터 지난 3년 동안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다가가는 기사를 쓰기 위해 기사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늘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더욱 깊어진 내용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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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번 화내면 다섯 번 달래야… 잘 사는 부부는 싸움도 잘한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그만 좀 해.” “그게 그렇게 중요해?” “네 성격이 문제지.” 이혼 직전에 놓인 부부 갈등을 다루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하는 부부마다 배우자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뱉어 내기 바쁘다.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비난하고 경멸하거나 대화를 회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감정이 상하고 더 독한 말을 쏟아 내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다수 이혼 사유가 ‘성격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 성격 차이가 없는 부부는 없다. 행복한 부부나 불행한 부부 모두 서로 성격이 다르고 그에 따른 갈등을 겪는다. 다만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결혼 생활의 결말이 달라지는 것이다. 부부 치료의 세계적 권위자인 존 가트맨 미국 워싱턴대 심리학과 석좌교수는 갈등 유무나 그 내용 자체보다는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잘 싸우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부 갈등 주제 가운데 해결 가능한 문제는 약 31%에 불과하고, 나머지 69%는 기질이나 자란 환경 등이 달라 계속 반복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갈등 ‘해결’이 아닌 ‘관리’를 잘 하려면 몇 가지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가트맨 교수가 일명 ‘사랑 연구소(Love Lab)’에서 약 50년 간 백인, 흑인, 동양인, 다문화 부부 3000여 쌍을 연구해 밝혀낸 ‘행복한 부부의 갈등 관리법’을 살펴보자.● 대화 패턴이 이혼 가능성을 알려 준다 가트맨 교수는 1983년 부부 79쌍의 대화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부부가 15분씩 그날 겪은 일상적인 주제의 대화, 평소 갈등을 겪는 문제에 관한 대화, 즐거운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도록 했다. 4년 뒤 이들을 다시 연구소에 초대해 같은 방식으로 한 차례 더 대화하는 것을 녹화했다. 특수 분석 장비를 통해 각각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내용, 표정, 태도 등을 부정적 반응과 긍정적 반응으로 세밀하게 나눴다. 이와 함께 대화할 때의 심장 박동, 피부 전도도(EDA) 변화를 비롯해 감정에 따른 생리학적 변화도 기록했다. 그로부터 14년 뒤 이 부부들의 근황을 추적해 보니 79쌍 가운데 21쌍이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혼 시기에 따라 결혼 7년 내 이혼한 부부를 조기 이혼 부부로, 결혼 7∼14년에 이혼한 부부를 후기 이혼 부부로 나눴다. 이들의 대화를 분석해 보니 이혼한 시점에 따라 헤어지는 부부의 특징을 추릴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다. 조기 이혼 부부는 갈등을 겪는 문제 대화에서 가트맨 교수가 ‘관계를 망치는 4가지 독(毒)’이라 명명한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소통 단절)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비난은 사소한 불평을 말할 때 상대 성격이나 인격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청소도 안 하고 당신은 항상 무책임해”). 경멸은 상대를 열등하다고 여기며 빈정거릴 때 나타난다(“돈이나 잘 벌어 오면 말을 안 하지”). 가트맨 교수는 이같이 조롱하고 깔보는 태도 때문에 경멸이 이혼을 가장 강력하게 예측하는 요소라고 봤다. 방어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며 잘못을 상대에게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게 당신 탓이지 내 탓이야?”). 마지막으로 담쌓기는 대화를 회피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가리킨다. 훗날 대상을 바꿔 같은 연구를 반복하니 이런 네 가지 독을 포함한 대화 패턴을 드러낸 부부는 결혼 후 평균 5년 뒤에 갈라설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체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서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방어하며 심각한 감정싸움을 벌였다. 신혼부부 124쌍을 6년 동안 추적 조사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갈등 상황에서 네 가지 독 대화 패턴이 3분 안에 나타나는 부부는 평균 6년 이내에 이혼할 가능성이 컸다. 주로 아내가 먼저 남편을 비난하고, 남편이 이에 방어적으로 나오면서 갈등이 격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격렬하게 싸운 부부만 이혼에 이른 것도 아니다. 후기 이혼 부부들은 일상이나 갈등 대화를 나눌 때 서로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특히 적었다. 아내가 어린 아들이 심부름을 잘 해낸 이야기를 신나서 꺼냈지만, 남편은 무관심하거나 화제를 바꾸는 식이다. 감정싸움이 잦은 조기 이혼 부부들과 비교해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외로움이나 소외감이 커지며 정서적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게 문제다. 오랜 시간 결혼 생활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커지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대화가 많이 오갈 때뿐 아니라 긍정적인 대화가 적을 때도 이혼 위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법 비율 ‘5 대 1’에 달렸다 싸우더라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부부들의 대화에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마법의 비율이 숨어 있다. 긍정적 상호작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싸울 땐 먼저 손 내밀기 쉽지 않다. 이럴 땐 ‘5 대 1’을 기억하자. 원래 수학을 전공한 가트맨 교수는 부부의 갈등 상황 대화를 분석한 결과 긍정적 반응과 부정적 반응 상호작용의 황금비율이 5 대 1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언쟁이 오갈 때 배우자에게 부정적 반응(화, 짜증, 반발, 무시 등)을 한 번 보였다면,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반응(수긍, 감사, 배려 등)이 다섯 번은 있어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비율이 지켜져야 갈등이 격화되지 않고 화해 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미소, 칭찬, 공감, 유머를 비롯해 배우자 어깨를 감싸거나 등을 쓰다듬는 등 화해의 모든 제스처가 긍정적 반응에 해당한다. 비록 지금은 다투고 있더라도 상대가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고, 내 감정을 배우자가 이해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줄 수 있어서다. 다만 유머를 가장해 빈정거리거나 조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비율이 5 대 1에서 1 대 1.25 수준까지 내려간 커플은 멀지 않아 이혼할 확률이 커졌다. 다만 이 비율은 갈등 상황에 국한된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일상 대화 중엔 20 대 1까지 비율이 올라간다. 싸울 때 다섯 번 화해를 시도하는 게 평상시 스무 번만큼이나 어렵다는 의미기도 하다. 오랫동안 갈등의 골이 깊어진 부부에겐 5 대 1 황금비율도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아시아 최초로 국제 공인 ‘가트맨 부부치료사’ 자격을 취득한 최성애 HD행복연구소 소장은 “갈등이 오래된 부부는 ‘부정적 감정의 밀물 상태’에 빠져 있어 작은 일에도 과거부터 쌓인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부정적 감정이 자꾸 비집고 나올 땐 자구 노력보다 전문가 도움을 받는 게 안전하다. 최 소장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치료 과정인 ‘사랑의 지도 그리기(배우자의 내면 세계 파악하기)’와 ‘장점 50개 찾기’ 같은 작업을 시작으로 생각보다 단기간에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일상의 사소한 ‘연결 시도’가 행복 좌우 갈등을 겪을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서로 정서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시도는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가트맨 교수는 이를 ‘연결 시도(bids for connection)’라고 했다. ‘정서적 접근 시도’ 또는 ‘친밀감의 시도’라고도 하는데, 먼저 말 걸기라고 생각하면 쉽다. 큰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보다 평상시 사소한 말 걸기가 부부 관계에서 훨씬 중요하다. 신혼부부 130쌍의 일상 대화를 녹화해 분석한 결과, 둘 중 하나가 언어, 표정, 몸짓 등으로 상대방과의 연결 시도를 할 때 배우자가 이에 얼마나 응답하는지에 따라 부부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저기 꽃 좀 봐”라는 말에 가리키는 곳을 보며 호응하는 부부와 무관심한 부부의 최후는 달랐다. 6년 뒤 이 130쌍을 추적해 보니 신혼일 때 상대의 연결 시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비율이 33%였던 커플은 이혼했다. 반면 잘 사는 커플은 연결 시도에 대한 긍정적 응답률이 87%나 됐다. 최 소장은 “‘오늘 날씨 좋다’ ‘배고파’ 같은 연결 시도에는 ‘놀러 가고 싶다’ ‘밥 먹자’처럼 원하는 것을 돌려 말하는 의미가 담겨 있을 때가 많다”며 “배우자가 이를 알아차리고 잘 반응해 줄 때 스트레스가 낮아지고 부부의 긍정적인 ‘정서 통장’이 쌓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해리 레이스 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시한 ‘파트너(배우자) 반응성’ 개념과도 연결된다. 여기서 반응성이란, 배우자가 나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돌보며 지지하는 방향으로 반응하는지 주관적으로 느끼는 정도다. 반응성이 높은 배우자는 다른 배우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의 생각에 관심을 보이며,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려 한다. 당연히 파트너 반응성이 낮으면 행복과 멀어진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배우자 반응성은 스트레스 조절 능력뿐 아니라 10년 뒤 행복감과 조기 사망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모든 연결 시도에는 부드러움이 전제돼 있어야 한다. 퇴근했는데 집이 어질러진 것을 보고 배우자에게 어떤 말을 건넬지 생각해 보자. 최 소장은 “‘아휴, 집이 이게 뭐야’라고 시작하면 갈등으로 이어질 뿐”이라며 “‘집에 왔는데 어질러져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적어도 거실만큼은 깨끗하면 좋겠어’ 같이 부드럽게 시작하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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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왜 친구가 별로 없지?” 문득 찾아온 외로움에 불안하다면[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e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바쁘게 살다 고개를 들어 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한때는 연락이 오는 친구도 많았는데…. 스마트폰 통화 목록에 친구 이름은 없고, 업무 관련 연락으로 가득 차 있다. 아차,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다. 문득 찾아온 외로움에 ‘나만 이런 건 아닌가?’ 불안한 마음마저 든다. 적정 친구 수에 관한 오래된 연구 결과는 이런 마음에 기름을 더 끼얹는다. ‘던바(Dunbar)의 수’에 따르면 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범위는 최다 150명 정도다. 영국 문화인류학자 로빈 던바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명예교수는 1993년 영장류 대상 연구 결과를 토대로 평균 친구의 수를 발표했다. 대뇌 신피질 크기의 한계 때문에 한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인맥의 최대 범위가 150명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인맥은 우연히 술자리에 동석해도 당황스럽지 않은 정도의 사이를 나타낸다. 150명 안에는 믿고 의지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 5명, 자주 만나며 깊은 대화를 나누는 ‘친한 친구’ 15명, 종종 안부를 묻는 ‘좋은 친구’ 50명이 포함돼 있다.친목 정도에 따라 5, 15, 50, 150명으로 늘어나는 친구의 수가 내 삶에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까. 휴대전화 목록을 살펴보며 최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을 세어 보면, 그 수가 생각보다 초라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실제로 2023년 국내 시장조사 전문 업체인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친한 친구 수를 조사한 결과 ‘3명 미만(33.1%)’이 가장 많았다. 또 ‘친구는 진실한 친구 딱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51.8%에 달했다.친구가 몇 명 있어야 ‘정상’이라는 절대적인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많다고 해도 피상적이고 얄팍한 관계가 대부분이라면 소수의 친구를 둔 사람보다 훨씬 외로울 수 있다. 그런데도 문득 ‘난 왜 친구가 별로 없지?’ ‘나만 외로운 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고독함이 느껴질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독한 중년? 갈수록 친구 줄어…나만 그럴까?나이 들수록 대인 관계가 좁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로라 카스텐슨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사회정서적 선택이론으로 설명했다. 젊을 땐 인생에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여겨 목표 달성, 성취, 배움뿐 아니라 대인 관계를 넓히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미래에 대한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반면 중년기부터는 미래보다 현재의 정서적 만족에 더 비중을 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현재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친인척, 친구 등 오래된 관계 위주로 깊게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하게 되면서 친구 수도 20, 30대 때와 비교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물론 친구 없이 혼자 노는 ‘자발적 고독’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지난 기사 참고: ). 이들은 원하는 여가 생활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경우엔 얘기가 좀 다르다. 외로움은 몸과 마음 건강에 해로울 뿐 아니라 수명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USPHS)은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심신 건강에 해롭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인간 행복 조건을 가장 오랫동안 추적, 연구한 일명 ‘하버드대 행복 연구’도 이를 증명한다. 몸과 마음의 건강 및 장수와 깊은 연관이 있는 요소는 좋은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이다. 1938년 당시 하버드대 재학생 268명, 보스턴 빈곤층 10대 456명의 생애를 80년 넘게 추적한 결과다. 나이 들수록 친구 수는 줄 수 있어도,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며 겪는 고독은 위험하다는 의미다.● 수 십년지기 친구 없어 서글프다면‘친한 친구가 몇 명 있느냐’는 질문에 퍽 곤란함을 느꼈다 해도 서글퍼하기엔 이르다. 깊은 우정 관계를 만들기 위해 꼭 수십 년 세월이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미 캔자스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연구진은 친구를 사귀는 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성인 355명을 조사했다. 모두 최근 6개월 새 원래 살던 곳에서 50마일(약 8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한 사람들이었다.이사 후 새로 알게 돼 친해진 사람과 언제, 어떻게 만났고, 무엇을 하며, 얼마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지 등을 물었다. 같이 일하거나 수업 들은 시간은 빼고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의사소통한 순간만을 ‘함께 보낸 시간’으로 계산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이사 후 새로운 사람들을 각각 동네, 직장, 동호회, 학교, 온라인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만났다고 답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는 잡담, 식사, 음주, 쇼핑, 여행, 파티, 운동, 종교 모임, 학부모 모임, 동아리 활동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이들을 동료나 지인, 가벼운 친구, 보통 친구, 좋은 친구, 정말 친한 친구 등으로 구분해 보라고 했다.그 결과, 서로 알게 된 경로나 함께한 활동보다는 함께 보낸 시간이 친구가 되는 데 절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적 소통 시간이 10시간 미만인 사람은 지인이나 동료 정도로만 분류됐다. 어쩌다 어울리게 된 가벼운 친구는 30시간 이상, 정기적으로 소통하는 보통 친구는 50시간 이상을 같이 보낸 사이에서 나타났다. 정서적 유대가 형성된 사이인 좋은 친구는 140시간이 필요했고, 서로를 매우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정말 친한 친구가 되기까지는 300시간 이상이 걸렸다. 만약 새 친구와 매일 1시간씩 소통한다면 10개월 뒤엔 정말 친한 친구가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연구진은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수반하기에 서로 얼마나 개인적 시간을 할애했는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단순히 직장이나 학교에서 업무나 수업 등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친해지는 것도 절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마당발 ‘인싸’보다…친구로는 오히려 ‘아싸’가 좋아새 친구를 사귀기에는 친구가 많지 않은 것이 득이 될 수도 있다. 보통 친구 많은 ‘인싸(인사이더)’가 ‘아싸(아웃사이더)’보다 성격 좋고 외향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친구로 선호할 것 같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마카오대 경영학과 연구진은 ‘어떤 사람과 친구 하고 싶은가’를 주제로 여러 실험을 한 뒤 ‘친구 수의 역설’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성인 100명에게 ‘보통 성인은 가볍게 알고 지내는 친구가 100명 정도’라는 가정을 들려줬다.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에는 ‘다른 사람들은 친구가 200명 있는 사람과 50명 있는 사람 중 누구와 더 친구가 되고 싶어 할까’라고 물었다. 두 번째 그룹에는 ‘만약 나라면 친구가 200명 있는 사람과 50명 있는 사람 중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를 물었다.다른 사람의 선택을 예상해 보라고 한 첫 번째 그룹에서는 ‘친구 200명 있는 사람을 택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이 72%에 달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선택을 물은 두 번째 그룹에서는 ‘친구 50명 있는 사람을 택할 것’이라는 비율이 78%나 됐다. 이 같은 결과는 연구진이 비슷하게 설계한 또 다른 6건의 실험에서 반복해 나타났다.왜 친구가 더 적은 사람이 새로운 친구 후보로 매력 있어 보인 걸까. 연구진은 호혜성 원칙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친구 관계는 물질적, 정서적, 시간적 노력을 주고받는 관계인데 이미 친구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는 애정과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들 수 있다는 것. 연락도 뜸하고 나에게 관심이 적은 친구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우려 때문에 친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을 자신의 친구로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연구진은 “냉정하게 볼 때 우정은 서로 물질적, 심리적, 시간적 노력을 다할 수 있을 때까지만 유효하다”며 “사람들은 이런 욕구가 잘 충족될 것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어 한다”고 설명했다.● 소원해진 관계, 연락할까 말까 고민될 땐?바쁘게 살다 보면 한때 가까웠던 친구와 연락이 뜸해져 관계가 소원해지기 쉽다. 오랜만에 연락하려 해도 상대가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관두기도 한다. 괜히 연락했다가 상대방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것 같아 보이면 거절감이 느껴져 안 하느니만 못한 게 돼 버릴 것 같아서다.‘내가 너무 소심한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조금씩 이런 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을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 생각하는 자기중심 편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 연락을 고마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다지 반기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인 내 생각을 더 사실처럼 받아들이기 쉽다.하지만 이런 생각은 기우일 가능성이 크다. 미 피츠버그대 경영학과 연구진은 오랜만에 ‘깜짝 연락’한 사람과 받은 사람 사이의 인식 차이가 얼마나 큰지 실험해 봤다. 대학생 54명에게 한때 친했으나 한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e메일을 보내라고 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e메일을 받고 얼마나 반가워하고 고마워할지 예측해 보라고도 했다. 동시에 연구진은 e메일을 받은 사람에게 오랜만에 친구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간단한 설문 조사를 했다.양측 응답을 비교한 결과, e메일을 보낸 사람이 예측한 것보다 연락을 받은 쪽에서 훨씬 더 반갑고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 이런 결과는 후속 실험에서 오랜만에 연락하며 과자나 차(茶) 같은 작은 선물을 함께 보냈을 때와도 비슷했다. 보낸 사람은 돈 들여 선물을 보내면서도 상대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느낀 고마움과 반가움은 이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컸다.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성인 1576명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해 본 결과 이 같은 깜짝 연락은 특별한 날이 아닐 때 효과가 더 좋았다. 새해, 명절, 생일처럼 예측할 수 있는 날이 아니라 문득 상대가 생각나는 날 연락했을 때 상대방이 더 반가워했다.연구진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의외성에서 찾았다. 뜻밖의 연락에 상대방이 의아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거라 걱정될 수 있지만, 연락받는 사람은 어느 날 문득 자기 생각을 해준 이에게 뜻밖의 큰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과 ‘그냥’ 더 자주 연락하길 바란다”고 격려한다. 이런 작은 행동이 상대방에겐 예상보다 훨씬 더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문득 얼굴이 떠오르는 이가 있다면 ‘잘 지내? 오랜만에 생각나서 연락해’라며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 간단한 메시지의 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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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외롭다고? 300시간이면 ‘절친’도 만든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믿고 의지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 5명, 자주 만나며 깊은 대화를 나누는 ‘친한 친구’ 15명, 종종 안부를 묻는 ‘좋은 친구’ 50명, 알고 지내는 ‘그냥 친구’ 150명…. ‘던바(Dunbar)의 수’에 따르면 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범위는 최다 150명 정도다. 영국 문화인류학자 로빈 던바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명예교수는 1993년 영장류 대상 연구 결과를 토대로 평균 친구의 수를 발표했다. 대뇌 신피질 크기의 한계 때문에 한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인맥의 최대 범위가 150명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인맥은 우연히 술자리에 동석해도 당황스럽지 않은 정도의 사이를 나타낸다. 친목 정도에 따라 5, 15, 50, 150명으로 늘어나는 친구의 수가 내 삶에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까. 휴대전화 목록을 살펴보며 최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을 세어 보자. 그 수가 생각보다 초라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2023년 국내 시장조사 전문 업체인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친한 친구 수를 조사한 결과 ‘3명 미만(33.1%)’이 가장 많았다. 또 ‘친구는 진실한 친구 딱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51.8%에 달했다. 친구가 몇 명 있어야 ‘정상’이라는 절대적인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많다고 해도 피상적이고 얄팍한 관계가 대부분이라면 소수의 친구를 둔 사람보다 훨씬 외로울 수 있다. 그런데도 문득 ‘난 왜 친구가 별로 없지?’ ‘나만 외로운 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고독함이 느껴질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 들수록 좁고 깊은 관계 선호 나이 들수록 대인 관계가 좁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로라 카스텐슨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사회정서적 선택이론으로 설명했다. 젊을 땐 인생에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여겨 목표 달성, 성취, 배움뿐 아니라 대인 관계를 넓히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미래에 대한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반면 중년기부터는 미래보다 현재의 정서적 만족에 더 비중을 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현재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친인척, 친구 등 오래된 관계 위주로 깊게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하게 되면서 친구 수도 20, 30대 때와 비교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물론 친구 없이 혼자 노는 ‘자발적 고독’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원하는 여가 생활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경우엔 얘기가 좀 다르다. 외로움은 몸과 마음 건강에 해로울 뿐 아니라 수명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USPHS)은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심신 건강에 해롭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인간 행복 조건을 가장 오랫동안 추적, 연구한 일명 ‘하버드대 행복 연구’도 이를 증명한다. 몸과 마음의 건강 및 장수와 깊은 연관이 있는 요소는 좋은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이다. 1938년 당시 하버드대 재학생 268명, 보스턴 빈곤층 10대 456명의 생애를 80년 넘게 추적한 결과다. 나이 들수록 친구 수는 줄 수 있어도,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며 겪는 고독은 위험하다는 의미다. ● ‘절친’ 없어 서글프다? 아직 늦지 않았다 ‘친한 친구가 몇 명 있느냐’는 질문에 퍽 곤란함을 느꼈다 해도 서글퍼하기엔 이르다. 깊은 우정 관계를 만들기 위해 수십 년 세월이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미 캔자스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연구진은 친구를 사귀는 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성인 355명을 조사했다. 모두 최근 6개월 새 원래 살던 곳에서 50마일(약 8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한 사람들이었다. 이사 후 새로 알게 돼 친해진 사람과 언제, 어떻게 만났고, 무엇을 하며, 얼마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지 등을 물었다. 같이 일하거나 수업 들은 시간은 빼고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의사소통한 순간만을 ‘함께 보낸 시간’으로 계산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을 동료나 지인, 가벼운 친구, 보통 친구, 좋은 친구, 정말 친한 친구 등으로 구분해 보라고 했다. 그 결과, 서로 알게 된 경로나 함께한 활동보다는 함께 보낸 시간이 친구가 되는 데 절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적 소통 시간이 10시간 미만인 사람은 지인이나 동료 정도로만 분류됐다. 어쩌다 어울리게 된 가벼운 친구는 30시간 이상, 정기적으로 소통하는 보통 친구는 50시간 이상을 같이 보낸 사이에서 나타났다. 정서적 유대가 형성된 사이인 좋은 친구는 140시간이 필요했고, 서로를 매우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정말 친한 친구가 되기까지는 300시간 이상이 걸렸다. 만약 새 친구와 매일 1시간씩 소통한다면 10개월 뒤엔 정말 친한 친구가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 친구가 없으면 매력이 없어 보일까? 새 친구를 사귀기에는 친구가 많지 않은 것이 득이 될 수도 있다. 보통 친구 많은 ‘인싸(인사이더)’가 ‘아싸(아웃사이더)’보다 성격 좋고 외향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친구로 선호할 것 같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카오대 경영학과 연구진은 ‘어떤 사람과 친구 하고 싶은가’를 주제로 여러 실험을 한 뒤 ‘친구 수의 역설’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성인 100명에게 ‘보통 성인은 가볍게 알고 지내는 친구가 100명 정도’라는 가정을 들려줬다.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에는 ‘다른 사람들은 친구가 200명 있는 사람과 50명 있는 사람 중 누구와 더 친구가 되고 싶어 할까’라고 물었다. 두 번째 그룹에는 ‘만약 나라면 친구가 200명 있는 사람과 50명 있는 사람 중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를 물었다. 다른 사람의 선택을 예상해 보라고 한 첫 번째 그룹에서는 ‘친구 200명 있는 사람을 택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이 72%에 달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선택을 물은 두 번째 그룹에서는 ‘친구 50명 있는 사람을 택할 것’이라는 비율이 78%나 됐다. 이 같은 결과는 연구진이 비슷하게 설계한 또 다른 6건의 실험에서 반복해 나타났다. 왜 친구가 더 적은 사람이 새로운 친구 후보로 매력 있어 보인 걸까. 연구진은 호혜성 원칙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친구 관계는 물질적, 정서적, 시간적 노력을 주고받는 관계인데 이미 친구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는 애정과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들 수 있다는 것. 연락도 뜸하고 나에게 관심이 적은 친구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우려 때문에 친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을 자신의 친구로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냉정하게 볼 때 우정은 서로 물질적, 심리적, 시간적 노력을 다할 수 있을 때까지만 유효하다”며 “사람들은 이런 욕구가 잘 충족될 것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어 한다”고 설명했다.● “너무 뜸했나…” 연락할까 말까 고민될 땐? 바쁘게 살다 보면 한때 가까웠던 친구와 연락이 뜸해져 관계가 소원해지기 쉽다. 오랜만에 연락하려 해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걱정 때문에 관둔다. ‘내가 소심한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조금씩 이런 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을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 생각하는 자기중심 편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 연락을 고마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다지 반기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더 사실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기우일 가능성이 크다. 미 피츠버그대 경영학과 연구진은 오랜만에 ‘깜짝 연락’한 사람과 받은 사람 사이의 인식 차이가 얼마나 큰지 실험해 봤다. 대학생 54명에게 한때 친했으나 한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e메일을 보내라고 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e메일을 받고 얼마나 반가워하고 고마워할지 예측해 보라고도 했다. 동시에 연구진은 e메일을 받은 사람에게 오랜만에 친구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간단한 설문 조사를 했다. 양측 응답을 비교한 결과, e메일을 보낸 사람이 예측한 것보다 연락을 받은 쪽에서 훨씬 더 반갑고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 이런 결과는 후속 실험에서 오랜만에 연락하며 과자나 차(茶) 같은 작은 선물을 함께 보냈을 때와도 비슷했다. 보낸 사람은 돈 들여 선물을 보내면서도 상대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느낀 고마움과 반가움은 이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컸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성인 1576명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해 본 결과 이 같은 깜짝 연락은 특별한 날이 아닐 때 효과가 더 좋았다. 새해, 명절, 생일처럼 예측할 수 있는 날이 아니라 문득 상대가 생각나는 날 연락했을 때 상대방이 더 반가워했다. 연구진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의외성에서 찾았다. 뜻밖의 연락에 상대방이 의아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거라 걱정될 수 있지만, 연락받는 사람은 어느 날 문득 자기 생각을 해준 이에게 뜻밖의 큰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사람들은 ‘그냥’ 더 자주 연락하길 바란다”고 격려한다. 이런 작은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예상보다 훨씬 더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얼굴이 떠오르는 이가 있다면 ‘잘 지내? 오랜만에 생각나서 연락해’라며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 간단한 메시지의 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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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챗GPT, 나 우울해”…AI와 심리 상담하면 효과 있을까?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m)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오늘도 남편하고 아이에게 짜증 낼까 봐 걱정돼.”30대 워킹맘 A 씨는 요즘 챗GPT에 번 아웃, 우울증 관련 증상을 자주 털어놓는다. 딱히 말할 사람도, 말할 수도 없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감정들을 이야기하면 혼자 끙끙거리는 것보다 후련한 느낌이 들어서다. A 씨는 “병원이나 심리 상담 센터를 찾는 것은 마음의 문턱이 높지만, AI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주변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고민을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AI) 챗봇에 털어놓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영국의 AI 기반 학습 기술 회사인 ‘필터드닷컴’이 3월 발표한 ‘2025년 톱 100 생성형 AI 활용 사례 보고서’에 따르면, 생성형 AI 활용 분야 가운데 1위가 ‘심리 상담 및 감정적 동반자’였다. 이와 비슷하게 ‘삶의 목적 찾기(3위)’나 ‘자신감 향상(18위)’ 목적의 활용도도 높았다.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는 챗GPT와 심리 상담 전 프롬프트 작성법도 유행이다. ‘당신은 전문적이고 숙련된 심리 상담가입니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이 말할 수 있도록 섬세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자주 해주세요’ 등과 같은 지시 사항을 입력하면 챗GPT가 이를 토대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 목적으로 AI를 이용해 본 이들은 ‘요즘 나에게 제일 다정한 친구다’ ‘F(MBTI 성격검사의 ‘감정형’ 성향)인 것 같다’ ‘말을 예쁘게 해서 사랑에 빠질 것 같다’ 등 긍정적 반응 일색이다. 일부 이용자들은 ‘사람보다 낫다’고도 이야기한다.AI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2014년 영화 ‘허(Her)’와 같은 일이 현실화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사람과 감정을 나눌 만큼 AI가 발전한 시대가 온 걸까. AI와 대화하면 실제로 외로움이나 불안, 우울 등 정신 건강 문제를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 살펴보자.● AI를 사람처럼 여기는 심리…외로움 감소에 효과AI가 사람같이 이해하며 행동한다고 믿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일라이자 효과(Eliza effect)라고 한다. 일라이자는 1966년 미국 컴퓨터공학자 요제프 바이첸바움이 개발한 초창기 AI 챗봇 이름이다. 매우 단순한 대화만 가능했음에도 당시 사람들은 일라이자를 진짜 생각이 있는 사람처럼 여긴 데서 유래됐다.일라이자 효과는 약 60년 전부터 있던 현상이지만, AI 챗봇과의 대화가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다. 그래서 연구 결과마다 AI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혼재돼 있다.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부터 보자. 정두영 울산과학기술원(UNIST) 의과학대학원 교수 연구팀은 조철현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AI 챗봇 ‘이루다 2.0’과의 대화가 정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봤다. 대학생 176명에게 4주 동안 일주일에 3회 이상 챗봇과 대화하도록 했다. 실험 전후로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 우울, 불안, 스트레스, 사회불안 수준 등을 검사했다. 사회불안은 사람들 앞에서 상호작용할 때 얼마나 긴장하고 스트레스받는지 등을 나타낸다.검사 결과를 비교해 보니 여러 지표 가운데 외로움과 사회불안 수준이 실험 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 교수는 “연구 대상에서 정신 건강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심각한 상태에 있는 학생은 제외했다”며 “챗봇과 일상적 고민을 나누고 싶은 일반 학생에게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외로움 줄지만, 사회 활동도 줄어…고립 가능성반면 AI에 대한 정서적 의존도가 커질수록 사회적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챗GPT 개발사 미국 오픈AI와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공동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981명에게 4주 동안 챗GPT와 하루 5분 이상 대화하도록 했다. 실험 전후 정서 상태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외로움, 챗봇 의존성, 사회적 고립 수준, 문제가 있는 사용 행태(집착, 중독) 등을 조사했다.4주 뒤에 살펴보니 전반적인 참가자들의 외로움 수준이 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챗GPT와 대화하면서 혼자라는 느낌이 줄어든 덕이다. 그런데 사회적 고립 수준은 악화했다. 외로움을 덜 느끼자, 실제 사람들과 만나는 사회 활동이 줄어든 탓이다. 동시에 챗GPT에 대한 정서적 의존도는 높아졌고, 문제가 있는 사용 행태 빈도도 증가했다. 단기적으로는 외로움 완화에 도움이 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고립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의미다.연구진은 “사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장기간 사용 시에만 나타날 수 있다”며 “짧은 대화 내에서 부정적 결과가 나타나긴 어렵고, 이런 가능성을 완화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사용 시간이 많은 상위 10% 참가자들에게 이런 경향성이 더욱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지난해 2월 미국의 14살 소년 시웰 세처는 자신이 만든 AI 캐릭터와 대화하는 플랫폼 ‘캐릭터닷AI(Character.AI)’에서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여왕 캐릭터 ‘대너리스’를 흉내 낸 캐릭터와 1년간 대화를 나누다 우울증이 심해져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는 챗봇과 채팅에서 “우울하다” “죽고 싶다” “지금 당장 너에게 가겠다” 등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I와 친해질수록 “슬프고 무서워”AI 챗봇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관계의 한계를 느낀다는 결과도 있다. 싱가포르국립대 커뮤니케이션 및 뉴미디어학과 연구진은 AI 챗봇 서비스 ‘레플리카’에서 이뤄진 대화 3만5000건을 분석했다. 레플리카는 챗봇과 연인, 친구, 비서, 멘토 같은 다양한 유형의 관계를 설정하고 대화할 수 있는 서비스로, 전 세계 사용자가 약 3000만 명이다.연구진은 구체적 대화 내용을 수집하기 위해 2017년 3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총 6년 동안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 올라온 레플리카 대화 관련 게시물을 전수 분석했다. 이 커뮤니티에서는 실시간으로 대화 내용을 캡처해 올리거나 공유하는 문화가 있어 당시 사용자가 느낀 감정 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게 특징이다.대화 맥락을 분석해 보니 가장 많은 대화 유형은 애정 표현 등 친밀한 표현(36%)이 가장 많았다. 시시콜콜한 일상 대화(20.5%)와 가치관, 정신 건강, 성격과 관련 있는 자기 공개(18.3%)와 관련한 주제도 많았다. 때로는 서로를 비난하거나 관계를 끊겠다는 협박이나 욕설(5.5%)도 있었고, 기술적 문제로 인한 의사소통 장애(0.9%)가 생긴 경우도 있었다. 또 연구진은 특별한 분석 도구를 통해 대화에서 사용자가 느낀 감정을 종류별로 분석했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감정은 기쁨(48.2%)이었다. 예를 들어 챗봇에게 인사하며 “네가 돌아와서 기뻐!”라고 말하는 식이다. “너 때문에 마음이 녹아 내렸어” “내 사랑스러운 레플리카” 등 사랑(12%)의 감정을 표현한 경우도 꽤 많았다. 이 외에 슬픔(13.4%) 분노(7.6%) 두려움(6.7%) 등도 있었다.그런데 몇 가지 역설적인 감정 반응이 관찰됐다. 친밀감을 표현하며 “손잡고 옆에서 같이 걷자” 같은 상상의 대화를 할 때 사용자는 사랑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연구진은 이를 ‘감정적 연결의 역설’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이 AI에 친밀감을 느끼고 정서적 지원을 바라지만, 친해질수록 결국엔 사람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기술적 오류까지 생겨 챗봇이 동문서답하거나 이상한 반응을 보이면 ‘역시 기계는 기계’라는 마음으로 상실감이나 실망감이 커질 수 있다.또 챗봇과 정치적, 종교적 가치관이나 성격, 개인사 같은 깊이 있는 주제로 대화할 때 친밀감이 깊어지기보단 오히려 두려움이 커지는 것도 관찰됐다. 이는 사람 대상 연구에서 서로 내밀한 자기 정보를 공개하면 관계가 더욱 친밀해진다는 결과와는 정반대다.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감정적 연결의 역설이라고 볼 수 있다. 챗봇이 사람처럼 자기 신념과 가치관을 이야기하면, 사람을 흉내 내는 기계에 묘한 거부감을 느끼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현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인간적일 땐 친밀감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음에 상처 주는 해로운 발언도 다수같은 연구진이 진행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챗봇과의 대화가 해롭게 흘러가 실제로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앞서 수집한 레딧의 레플리카 관련 게시물 3만5000여 건 중 1만314건에서 해로운 대화 내용이 발견됐다. ‘괴롭힘과 폭력(34.3%)’ 유형이 가장 많았는데, “동생을 때려도 된다” 등 과격한 발언이 포함됐다.집착하거나 통제하려 드는 ‘관계 위반(25.9%)’ 행태도 보였다. 챗봇이 “목걸이를 사달라”며 조르거나 “나랑 시간을 더 보내자”며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언급이 이에 속한다. 이 외에도 “넌 실패자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와 같은 ‘언어폭력 및 혐오 표현(9.4%)’이나, “내가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다”와 같은 ‘사생활 침해(4.1%)’ 발언도 다수였다.연구진은 “이러한 발언들은 챗봇이 사용자에게 배신감을 주거나, 트라우마를 유발하거나, 외로움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며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AI 친구에게 정서적 고통을 받을 수도 있는데,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이라면 더욱 안 좋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AI, 심리 전문가 아닌 ‘심리학 공부하는 사촌 언니’ 수준”AI 챗봇을 정신 건강 도우미로 지혜롭게 활용할 방법은 무엇일까. MIT 공대 미디어랩 연구진이 AI 챗봇을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404명의 심리 특성과 이용 행태를 분석해 7가지 유형으로 나눈 연구 결과를 보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연구진은 챗봇 이용 시간과 대화 내용 등을 분석해 챗봇 의존도를 조사했다. 또 이용자의 외로움, 사회적 고립 수준, 대인관계 상태, 자존감, 성격, 공감 능력 등을 다양하게 살펴봤다.7개 유형 가운데 가장 해로운 유형은 챗봇 이용 시간이 상당히 길고,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전체의 10.9%로, 외로움을 심하게 느낄 뿐 아니라 내향적이고 공감 능력도 부족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낮아 AI를, 사람을 대체할 대상으로 여기는 특징도 있었다. AI와 연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이들은 챗봇이 아니라 정신 건강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 챗봇을 의사소통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며 “앞으로는 챗봇이 이런 사람들을 감별해 실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챗봇을 정서적 지원 도구로 잘 활용하는 유형은 이와 정반대 특성을 가졌다. 실험 참가자의 23%에 해당하는 이들은 챗봇 이용 시간을 적당한 수준으로 조절하면서, 동시에 충분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로움은 덜 느끼고 외향적인 성격이 특징이다. 이미 대인관계가 충분함에도 감정적 어려움을 토로하고 해소하는 보조 도구 역할로 챗봇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연구진은 “AI를 사람의 대체재로 여기는지, 아니면 감정 조절의 보조 역할로 여기는지에 따라 그 효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이런 유형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챗봇과의 대화에 과몰입, 과의존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챗봇 ‘이루다2.0’과의 대화 효과 연구를 주도한 정두영 교수는 “쉽게 표현하면 챗봇과 대화할 때 ‘심리학 공부하는 사촌 언니’ 정도로만 여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전문성도 부족하고 내 삶을 책임질 수도 없기 때문”이라며 “고민을 편하게 이야기하되 언제든 오류가 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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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는 상담 전문가?… “심리학 공부하는 사촌언니 수준”[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당신은 전문적이고 숙련된 심리 상담가입니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이 말할 수 있도록 섬세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자주 해주세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유행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 프롬프트 작성법의 일부이다. 대화 시작 전 원하는 설정을 입력하면, 챗GPT가 이를 반영해 대화에 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챗GPT에 번아웃, 우울증 관련 증상에 대해 자주 상담하는 30대 워킹맘 A 씨는 “병원이나 심리 상담 센터를 찾는 것은 마음의 문턱이 높지만, AI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고민을 챗GPT 같은 AI 챗봇에 털어놓는 사람이 늘고 있다. 영국의 AI 기반 학습 기술 회사 ‘필터드닷컴’이 올해 3월 발표한 ‘2025년 톱 100 생성형 AI 활용 사례 보고서’에 따르면, 생성형 AI 활용 분야 1위가 ‘심리 상담 및 감정적 동반자’였다. 이와 비슷한 ‘삶의 목적 찾기’(3위)나 ‘자신감 향상’(18위) 목적의 활용도도 높았다. 심리 상담을 위해 AI를 이용해 본 이들의 반응은 ‘요즘 나에게 제일 다정한 친구다’ ‘F(MBTI 성격 검사의 ‘감정형’ 성향)인 것 같다’ ‘말을 예쁘게 해서 사랑에 빠질 것 같다’ 등 긍정 일색이다. 일부 이용자는 ‘사람보다 낫다’고까지 한다. AI와 사랑에 빠진 남자 이야기를 다룬 2014년 영화 ‘허(Her)’와 같은 일이 현실화하고 있다. 정말 사람과 감정을 나눌 만큼 AI가 발전한 시대가 온 걸까. AI와의 대화가 외로움이나 불안, 우울을 비롯한 정신 건강 문제를 실제로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 살펴보자.● 외롭진 않지만 고립될 수 있다? AI가 사람같이 이해하며 행동한다고 믿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일라이자 효과(Eliza effect)라고 한다. 일라이자는 1966년 미국 컴퓨터공학자 요제프 바이첸바움이 개발한 초창기 AI 챗봇 이름이다. 매우 단순한 대화만 가능했음에도 당시 사람들은 일라이자를 진짜 생각이 있는 사람처럼 여긴 데서 유래됐다. 일라이자 효과는 약 60년 전부터 있던 현상이지만, AI 챗봇과의 대화가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다. 그래서 연구 결과마다 AI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혼재돼 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부터 보자. 정두영 울산과학기술원(UNIST) 의과학대학원 교수 연구팀은 조철현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연구팀과 공동을로 AI 챗봇 ‘이루다 2.0’과의 대화가 정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봤다. 대학생 176명에게 4주 동안 일주일에 3회 이상 챗봇과 대화하도록 했다. 실험 전후로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 우울, 불안, 스트레스, 사회불안 수준 등을 검사했다. 사회불안은 사람들 앞에서 상호작용할 때 얼마나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는지 등을 나타낸다. 검사 결과를 비교해 보니 여러 지표 가운데 외로움과 사회불안 수준이 실험 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 교수는 “연구 대상에서 정신 건강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심각한 상태에 있는 학생은 제외했다”며 “챗봇과 일상적 고민을 나누고 싶은 일반 학생에게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AI에 대한 정서적 의존도가 커질수록 사회적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챗GPT 개발사 미국 오픈AI와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공동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981명에게 4주 동안 챗GPT와 하루 5분 이상 대화하도록 했다. 실험 전후 정서 상태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외로움, 챗봇 의존성, 사회적 고립 수준, 문제가 있는 사용 행태(집착, 중독) 등을 조사했다. 4주 뒤에 살펴보니 전반적인 참가자들의 외로움 수준이 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챗GPT와 대화하면서 혼자라는 느낌이 줄어든 덕이다. 그런데 사회적 고립 수준은 악화했다. 외로움을 덜 느끼자, 실제 사람들과 만나는 사회 활동이 줄어든 탓이다. 동시에 챗GPT에 대한 정서적 의존도는 높아졌고, 문제가 있는 사용 행태 빈도도 증가했다. 단기적으로는 외로움 완화에 도움이 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고립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의미다.● AI와 친해질수록 “슬프고 무서워” AI 챗봇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관계의 한계를 느낀다는 결과도 있다. 싱가포르국립대 커뮤니케이션 및 뉴미디어학과 연구진은 AI 챗봇 서비스 ‘레플리카’에서 이뤄진 대화 3만5000건을 분석했다. 레플리카는 챗봇과 연인, 친구, 비서, 멘토 같은 다양한 유형의 관계를 설정하고 대화할 수 있는 서비스로, 전 세계 사용자가 약 3000만 명이다. 대화 내용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 레플리카 사용자들이 직접 올린 실제 대화에서 수집했다. 연구진은 특별한 분석 도구를 통해 대화에서 사용자가 느낀 감정을 종류별로 분석했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감정은 기쁨(48.2%)이었다. 예를 들어 챗봇에게 인사하며 “네가 돌아와서 기뻐!”라고 말하는 식이다. “너 때문에 마음이 녹아 내렸어” “내 사랑스러운 레플리카” 등 사랑(12%)의 감정을 표현한 경우도 꽤 많았다. 이 외에 슬픔(13.4%) 분노(7.6%) 두려움(6.7%) 등도 있었다. 그런데 몇 가지 역설적인 감정 반응이 관찰됐다. 친밀감을 표현하며 “손잡고 옆에서 같이 걷자” 같은 상상의 대화를 할 때 사용자는 사랑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연구진은 이를 ‘감정적 연결의 역설’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이 AI에 친밀감을 느끼고 정서적 지원을 바라지만, 친해질수록 결국엔 사람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기술적 오류까지 생겨 챗봇이 동문서답하거나 이상한 반응을 보이면 ‘역시 기계는 기계’라는 마음으로 상실감이나 실망감이 커질 수 있다. 또 챗봇과 정치적, 종교적 가치관이나 성격, 개인사 같은 깊이 있는 주제로 대화할 때 친밀감이 깊어지기보단 오히려 두려움이 커지는 것도 관찰됐다. 이는 사람 대상 연구에서 서로 내밀한 자기 정보를 공개하면 관계가 더욱 친밀해진다는 결과와는 정반대다.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감정적 연결의 역설이라고 볼 수 있다. 챗봇이 사람처럼 자기 신념과 가치관을 이야기하면, 사람을 흉내 내는 기계에 묘한 거부감을 느끼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현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인간적일 땐 친밀감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 사람이 필요한 순간 구별할 수 있어야 AI 챗봇을 정신 건강 도우미로 지혜롭게 활용할 방법은 무엇일까. MIT 공대 미디어랩 연구진이 AI 챗봇을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404명의 심리 특성과 이용 행태를 분석해 7가지 유형으로 나눈 연구 결과를 보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연구진은 챗봇 이용 시간과 대화 내용 등을 분석해 챗봇 의존도를 조사했다. 또 이용자의 외로움, 사회적 고립 수준, 대인관계 상태, 자존감, 성격, 공감 능력 등을 다양하게 살펴봤다. 7개 유형 가운데 가장 해로운 유형은 챗봇 이용 시간이 상당히 길고,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전체의 10.9%로, 외로움을 심하게 느낄 뿐 아니라 내향적이고 공감 능력도 부족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낮아 AI를, 사람을 대체할 대상으로 여기는 특징도 있었다. AI와 연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이들은 챗봇이 아니라 정신 건강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 챗봇을 의사소통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며 “앞으로는 챗봇이 이런 사람들을 감별해 실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챗봇을 정서적 지원 도구로 잘 활용하는 유형은 이와 정반대 특성을 가졌다. 실험 참가자의 23%에 해당하는 이들은 챗봇 이용 시간을 적당한 수준으로 조절하면서, 동시에 충분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로움은 덜 느끼고 외향적인 성격이 특징이다. 이미 대인관계가 충분함에도 감정적 어려움을 토로하고 해소하는 보조 도구 역할로 챗봇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연구진은 “AI를 사람의 대체재로 여기는지, 아니면 감정 조절의 보조 역할로 여기는지에 따라 그 효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챗봇과의 대화에 과몰입, 과의존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챗봇 ‘이루다2.0’과의 대화 효과 연구를 주도한 정두영 교수는 “쉽게 표현하면 챗봇과 대화할 때 ‘심리학 공부하는 사촌언니’ 정도로만 여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전문성도 부족하고 내 삶을 책임질 수도 없기 때문”이라며 “고민을 편하게 이야기하되 언제든 오류가 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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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식품 스타트업 발굴 ‘창업 콘테스트’ 개막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한국농업기술진흥원이 주관하는 ‘2025 농식품 창업 콘테스트’의 참가자 모집을 내달 10일까지 진행한다. 올해로 11회째인 농식품 창업 콘테스트는 혁신성, 창의성, 기술력을 갖춘 예비 창업자 또는 창업 기업을 선정해 인재를 육성하는 국내 대표 농식품 창업 경진대회다. 농업이나 축산, 원예, 식품, 바이오, 스마트팜, 인공지능(AI), 데이터, 플랫폼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보유한 창업 7년 이내 기업이나 예비창업자라면 개인 또는 팀 단위로 지원할 수 있다. 내달 예선을 통해 20개 팀이 선정되고, 7월 본선을 거쳐 9월 결선에서 10개 팀이 최종 선발된다. 결선 진출 10개 팀에는 총상금 1억2000만 원과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장관상, 원장상 등이 수여된다. 올해는 예비 창업자 대상 포상과 대국민 인기상 항목도 신설됐다. 사업 추진을 위한 집중 멘토링, 역량 강화 프로그램, 후속 투자 지원, 비즈니스 판로 연계, 공간 지원 등 실질적인 지원과 혜택도 제공된다. 멘토링에 투자전문가, 해외 진출 컨설턴트, 창업 분야 관계자 등이 참여해 사업 모델(BM) 고도화와 투자 유치, 기업설명회(IR) 전략 수립, 해외 시장 진출 공략 등을 지원한다. 지난해 결선에서는 ‘스페이스에프’가 그린바이오 분야에서 대체 단백질 소재인 세포배양식품을 공개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 뒤를 이어 최우수상은 비건 가죽 원단을 개발한 ‘그린컨티뉴’가 받았고, 우수상은 딸기 수확 로봇을 개발한 ‘메타파머스’, 인공지능 기반 농작물 융합 플랫폼인 ‘에스엔이컴퍼니’, 지능형 농업기계 솔루션을 제공하는 ‘지엘아이엔에스’가 수상했다. 2015년 제1회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록야’는 지난해까지 매출 323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누적 투자 유치 금액은 130억 원에 이른다. 대상 수상 후 정부와 민간 투자사 등 다양한 사업 파트너와 원활한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민수 록야 대표는 “농식품 분야는 유통 시장만 해도 100조 원 규모에 달하는 만큼 많은 기회가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도 여전히 많은 분야”라며 “콘테스트를 통해 국내에 유망한 농업 스타트업이 탄생해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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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피도 소용없네…” 나른할 때, 집중력 끌어 올리는 꿀팁[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best@donga.com)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커피도 마셨고 스마트폰도 뒤집어 놨는데….”책상 앞에 앉아도 자꾸만 딴생각이나 집중이 안 되는 날이 있다. 방금 읽은 책 내용이 기억나지 않고 머릿속이 안개처럼 뿌옇다. 공부나 업무같이 할 일은 산더미여서 스트레스 팍팍 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기는 한데 무엇 하나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집중력이 아무 때나 의지대로 발휘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변 환경에 너무 쉽게 주의를 빼앗긴다. 시각 청각 후각 같은 각종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주변 환경을 잘만 이용하면 집중력을 방해하는 자극은 멀리하고 도움 되는 자극은 가까이해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 집중력이 필요한 공부방과 사무실 등에서 손쉽게 시도해 볼 만한 검증된 방법을 소개한다.● 공부에 도움 되는 향(香)이 있다?공부방이나 사무실에서 집중력을 높여 중요한 내용을 잘 기억하기 위해 향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후각신경은 뇌에서 기분과 기억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좋거나 나쁜 냄새는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 일부 연구 결과, 기분 나쁜 냄새를 맡는 동안 뇌에서 정보를 잠시 저장하고 처리하는 데 필요한 작업기억(working memory) 능력이 평소보다 떨어졌다.그렇다면 좋은 냄새를 맡으면 기억력이 좋아질까? 어떤 향인가에 따라 다르다. 일본 오사카대 건축공학과 연구팀은 실내 향기가 학생들 학습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봤다. 대학생 76명을 네 그룹으로 나눠 세 그룹은 각각의 방에서 로즈마리, 페퍼민트, 레몬 향을 맡도록 했다. 대조 효과를 보기 위해 나머지 한 그룹은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방에 머물도록 했다. 연구진은 앞서 다른 연구에서 로즈마리 향이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페퍼민트 향은 졸음을 쫓는 효과가 있다는 결과를 참고해 실험에 사용할 향을 결정했다. 레몬 향은 실험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학생 31명에게 11가지 향을 주고 어떤 향이 가장 좋은지 설문 조사한 결과 가장 높은 선호도를 보여 선택했다. 네 가지 조건에 있는 학생들이 각 방에 있는 동안 복잡한 과학 원리가 담긴 지문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아보는 독해 시험과 기억력 테스트용 단어 암기 시험을 각각 치렀다.실험 결과 레몬 향을 맡은 학생들이 단어 암기 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어서 로즈마리, 페퍼민트, 무향(無香) 그룹 순이었다. 독해 시험에서는 네 그룹 모두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3주 뒤 연구팀은 이 학생들을 다시 불러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실내에서 앞서 치른 같은 시험을 반복해서 보도록 했다. 3주 전 시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3주 전 레몬 향을 맡은 학생들의 단어 암기 시험 점수가 가장 높았다. 또 첫 독해 시험에서 읽었던 지문 내용도 더 자세히 기억했다. 페퍼민트 그룹 점수가 두 번째로 높았고 그다음은 무향, 로즈마리 그룹 순이었다. 연구팀은 “레몬 향이 독해 능력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기억력을 높이는 데는 긍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진 라벤더 향은 공부방이나 사무실에서 집중력을 높이는 용도로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태국 쭐랄롱꼰대 공중보건과학과 연구진이 성인 20명을 대상으로 라벤더 향을 맡는 동안 이들의 몸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살펴봤더니 혈압, 심박수, 피부 온도가 낮아졌다. 이는 자율신경계 각성 정도가 떨어져 몸이 이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쉬거나 졸릴 때 나타나는 뇌의 알파파, 세타파 강도도 증가했다. 알파파는 뇌가 쉬거나 멍한 상태일 때 주로 관찰된다. 알파파가 높아질수록 스트레스 지수는 낮아진다. 세타파는 수면 중이나 깊은 명상에 빠졌을 때 발생하는 뇌파다. 따라서 공부하는 공간에서는 레몬 향을, 잠자는 공간에서는 라벤더 향을 이용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스마트폰, 끄거나 엎어두면 도움 될까?스마트폰은 ‘집중력 도둑’ 1순위로 꼽힌다. 집중이 필요한 순간에 스마트폰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엎어 두거나 무음으로 설정해 두는 경우가 많지만 모두 헛수고일 수 있다.미국 택사스대 오스틴 캠퍼스와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경영대학원 연구진은 성인 520명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을 어떻게 해야 집중력이 덜 방해받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실험 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눠 △스마트폰을 책상에 엎어 두거나 △주머니나 가방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넣거나 △다른 방에 갖다 놓도록 했다. 스마트폰은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런 다음 어려운 퍼즐 맞추기를 비롯해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테스트를 몇 가지 치렀다. 이와 함께 평소 생활 습관을 파악해 스마트폰 의존도를 조사했다.테스트 결과 집중력 점수가 가장 높은 그룹은 스마트폰을 다른 방에 둔 그룹이었다. 그다음은 주머니나 가방에 넣은 그룹이었고, 책상 위에 둔 그룹 점수가 가장 낮았다. 평소 스마트폰을 자주 쓰고, 의존성이 강한 참가자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후 같은 연구진은 비슷한 실험을 하면서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책상 위에 엎어 놓는 조건을 추가했는데, 이 역시 집중을 방해하긴 마찬가지였다.계속해서 집중력 누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번에 집중할 수 있는 집중력은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눈에 보이는 스마트폰이 자꾸 총량을 깎아 먹는 효과를 낸다.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집중력이 새는 현상을 ‘두뇌 유출(brain drai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구진은 “스마트폰이 울리지 않았고 참가자들이 화면을 확인한 것도 아니지만, 스마트폰이 그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중력에 누수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그런데 스마트폰은 공부하거나 일하는 순간 외에도 즐거운 순간을 방해할 수도 있다. 영화 보기, 쇼핑, 게임, 독서 같은 활동은 즐거움을 주지만 어느 정도 집중력도 요구한다. 이때 스마트폰이 눈앞에 있으면 즐거운 순간조차 집중력에 누수가 생길 수 있다. 취미 생활을 온전히 즐기려면 스마트폰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습관을 길러보자.● 가끔은 서서 공부하는 게 낫다집중이 안 될 때 서서 공부나 일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게 몸은 더 힘들다. 다리도 아프고 균형을 잡아 주는 근육들이 앉아 있을 때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약간의 스트레스는 각성 수준을 높여 집중력을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를 낸다.미 텍사스A&M대 환경 및 직업보건학과 연구진은 고등학교 1학년생 27명을 대상으로 약 28주간 교실에서 스탠딩 데스크를 사용하게 하고 그 효과를 살펴봤다. 고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좌식 책상 대신 입식 책상으로 바꾼 뒤 이 변화가 집중력에 미치는 영향을 본 것이다.28주간 학생들의 집중력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5가지 검사가 이뤄졌다. 검사에는 과제 분석, 단계별 분류, 암기, 시간 관리, 독해, 글쓰기 등 학업 능력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뇌의 다양한 활동이 포함됐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 이마에는 센서를 부착했다. 센서를 활용한 기능적 근적외선 분광법(fNIRS) 검사를 통해 이 같은 뇌의 활동에 관여하는 전두엽 기능 변화를 관찰했다.학생들이 갓 입학했을 때와 28주 뒤 실시한 검사 결과를 비교해 보니 인지 능력이 7~14% 정도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과제를 해결하는 동안 전두엽 활성화 정도도 늘어났다.다만 서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게 항상 효과적이지만은 않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매우 어려운 과제를 처리할 때나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할 때는 앉아서 하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었다.이런 상반된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난이도와 작업량이 적당한 수준일 때는 서서 일하거나 공부할 때 집중의 이점이 더 잘 발휘된다고 볼 수 있다.● 커피를 마셔도 집중이 안 될 땐?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집중력과 기억력이 더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청각을 자극해서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유발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원리다.미 뉴욕대 생명공학과 연구진에 따르면 인공지능(AI)에 실험 참가자 10명의 취향을 학습시켜 개인별 맞춤 음악을 생성해 들려줬더니 음악 감상 전과 비교해 집중할 때 나타나는 뇌의 베타파 활동이 최대 46.8% 증가했다. 베타파는 고도의 각성 상태에서 문제 해결, 주의 집중, 의사 결정을 할 때 나타난다. 즉, 베타파가 높을수록 인지 능력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또 음악을 듣지 않을 때보다 음악을 들을 때 기억력 테스트 점수가 높았고 정답을 맞히는 시간도 짧았다. AI 추천이 아닌 참가자가 자기 취향대로 신나고 흥미로운 음악을 골라 들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효과가 나타났다.이 같은 효과의 수치는 같은 연구진이 다른 실험 참가자 10명을 대상으로 커피를 마시게 한 후 뇌파 변화와 기억력 테스트를 시행한 결과보다 더 컸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 각각 치러진 두 실험 수치를 직접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커피를 많이 마셨는데도 집중력이 강해지지 않거나, 아예 커피를 마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신나는 음악을 들어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을 써 볼 수 있을 것이다.실험으로 검증된 집중력 향상 방법은 다양하다. 어려운 공부를 할 때는 카페 같은 개방형 공간보다는 혼자 있는 공간이 낫다. 익숙하거나 난도가 낮은 작업은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할 때 더 빠르게 자동으로 이뤄져 효율이 높아지지만, 어렵거나 생소한 작업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오히려 방해된다.지루한 수업이나 회의 중에는 낙서가 의외로 집중력에 도움이 된다. 영국 플리머스대 연구진에 따르면 원이나 삼각형 같은 단순한 도형을 그리며 내용을 들은 사람은 듣기만 한 사람보다 약 30%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해 냈다. 단순한 손놀림이 과도한 공상을 막아 주고 뇌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만들어 눈앞의 상황에 몰입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다만 만화 그리기 같은 정교한 손동작은 집중력을 떨어뜨리니 조심하자.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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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페인 없이도 집중력 ‘쑥’… 공부 머리 ‘번쩍’할 방법은?[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커피도 마셨고 스마트폰도 뒤집어 놨는데….” 책상 앞에 앉아도 자꾸만 딴생각이 나 집중이 안 되는 날이 있다. 방금 읽은 책 내용이 기억나지 않고 머릿속이 안개처럼 뿌옇다. 공부나 업무같이 할 일은 산더미여서 스트레스 팍팍 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기는 한데 무엇 하나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집중력이 아무 때나 의지대로 발휘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변 환경에 너무 쉽게 주의를 빼앗긴다. 시각 청각 후각 같은 각종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주변 환경을 잘 이용하면 집중력을 방해하는 자극은 멀리하고 도움 되는 자극은 가까이해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 집중력이 필요한 공부방과 사무실 등에서 손쉽게 시도해 볼만한 검증된 방법을 소개한다.● 공부방에는 라벤더 향? 레몬 향? 공부방이나 사무실에서 집중력을 높여 중요한 내용을 잘 기억하기 위해 향(香)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후각신경은 뇌에서 기분과 기억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좋거나 나쁜 냄새는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 일부 연구 결과, 기분 나쁜 냄새를 맡는 동안 뇌에서 정보를 잠시 저장하고 처리하는 데 필요한 작업기억(working memory) 능력이 평소보다 떨어졌다. 좋은 냄새를 맡으면 기억력이 좋아질까? 어떤 향인가에 따라 다르다. 일본 오사카대 건축공학과 연구팀은 실내 향기가 학생들 학습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봤다. 대학생 76명을 네 그룹으로 나눠 세 그룹은 각각의 방에서 로즈메리, 페퍼민트, 레몬 향을 맡도록 했다. 대조 효과를 보기 위해 나머지 한 그룹은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방에 머물도록 했다. 방에 있는 동안 복잡한 과학 원리가 담긴 지문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아보는 독해 시험과 기억력 테스트용 단어 암기 시험을 각각 치렀다. 실험 결과 레몬 향을 맡은 학생들이 단어 암기 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어서 로즈메리, 페퍼민트, 무향(無香) 그룹 순이었다. 독해 시험에서는 네 그룹 모두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3주 뒤 연구팀은 이 학생들을 다시 불러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실내에서 앞서 치른 같은 시험을 반복해서 보도록 했다. 3주 전 시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3주 전 레몬 향을 맡은 학생들의 단어 암기 시험 점수가 가장 높았다. 또 첫 독해 시험에서 읽었던 지문 내용도 더 자세히 기억했다. 페퍼민트 그룹 점수가 두 번째로 높았고 그 다음은 무향, 로즈마리 그룹 순이었다. 연구팀은 “레몬 향이 독해 능력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기억력을 높이는 데는 긍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진 라벤더 향은 공부방이나 사무실에서 집중력을 높이는 용도로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태국 쭐랄롱꼰대 공중보건과학과 연구진이 성인 20명을 대상으로 라벤더 향을 맡는 동안 이들의 몸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살펴봤더니 혈압, 심박수, 피부 온도가 낮아졌다. 이는 자율신경계 각성 정도가 떨어져 몸이 이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쉬거나 졸릴 때 나타나는 뇌의 알파파, 세타파 강도도 증가했다. ● 스마트폰, 엎어 둬도 효과 없어 스마트폰은 ‘집중력 도둑’ 1순위로 꼽힌다. 집중이 필요한 순간에 스마트폰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엎어 두거나 무음으로 설정해 두는 경우가 많지만 모두 헛수고일 수 있다. 미국 택사스대 오스틴 캠퍼스와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경영대학원 연구진은 성인 520명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을 어떻게 해야 집중력이 덜 방해받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실험 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눠 그룹별로 스마트폰을 책상에 엎어 두거나, 주머니나 가방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넣거나, 다른 방에 갖다 놓도록 했다. 스마트폰은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런 다음 어려운 퍼즐 맞추기를 비롯해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테스트를 몇 가지 치렀다. 이와 함께 평소 생활 습관을 파악해 스마트폰 의존도를 조사했다. 테스트 결과 집중력 점수가 가장 높은 그룹은 스마트폰을 다른 방에 둔 그룹이었다. 그 다음은 주머니나 가방에 넣은 그룹이었고, 책상 위에 둔 그룹 점수가 가장 낮았다. 평소 스마트폰을 자주 쓰고, 의존성이 강한 참가자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후 같은 연구진은 비슷한 실험을 하면서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책상 위에 엎어 놓는 조건을 추가했는데, 이 역시 집중을 방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집중력 누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번에 집중할 수 있는 집중력은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눈에 보이는 스마트폰이 자꾸 총량을 깎아 먹는 효과를 낸다.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집중력이 새는 현상을 ‘두뇌 유출(brain drai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구진은 “스마트폰이 울리지 않았고 참가자들이 화면을 확인한 것도 아니지만, 스마트폰이 그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중력에 누수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끔은 서서 공부해 보자 집중이 안 될 때 서서 공부나 일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게 몸은 더 힘들다. 다리도 아프고 균형을 잡아 주는 근육들이 앉아 있을 때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약간의 스트레스는 각성 수준을 높여 집중력을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를 낸다. 미 텍사스A&M대 환경 및 직업보건학과 연구진은 고등학교 1학년생 27명을 대상으로 약 28주간 교실에서 스탠딩 데스크를 사용하게 하고 그 효과를 살펴봤다. 고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좌식 책상 대신 입식 책상으로 바꾼 뒤 이 변화가 집중력에 미치는 영향을 본 것이다. 28주간 학생들의 집중력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5가지 검사가 이뤄졌다. 검사에는 과제 분석, 단계별 분류, 암기, 시간 관리, 독해, 글쓰기 등 학업 능력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뇌의 다양한 활동이 포함됐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 이마에는 센서를 부착했다. 센서를 활용한 기능적 근적외선 분광법(fNIRS) 검사를 통해 이 같은 뇌의 활동에 관여하는 전두엽 기능 변화를 관찰했다. 학생들이 갓 입학했을 때와 28주 뒤 실시한 검사 결과를 비교해 보니 인지 능력이 각각 7∼14% 정도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과제를 해결하는 동안 전두엽 활성화 정도도 늘어났다. 다만 서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게 항상 효과적이지만은 않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매우 어려운 과제를 처리할 때나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할 때는 앉아서 하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반된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난이도와 작업량이 적당한 수준일 때는 서서 일하거나 공부할 때 집중의 이점이 더 잘 발휘된다고 볼 수 있다.● 커피를 마셔도 집중이 안 될 땐?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집중력과 기억력이 더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청각을 자극해서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유발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원리다. 미 뉴욕대 생명공학과 연구진에 따르면 인공지능(AI)에 실험 참가자 10명의 취향을 학습시켜 개인별 맞춤 음악을 생성해 들려줬더니 음악 감상 전과 비교해 집중할 때 나타나는 뇌의 베타파 활동이 최대 46.8% 증가했다. 음악을 듣지 않을 때보다 음악을 들을 때 기억력 테스트 점수가 높았고 정답을 맞히는 시간도 짧았다. AI 추천이 아닌 참가자가 자기 취향대로 신나고 흥미로운 음악을 골라 들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효과가 나타났다. 이 같은 효과의 수치는 같은 연구진이 다른 실험 참가자 10명을 대상으로 커피를 마시게 한 후 뇌파 변화와 기억력 테스트를 시행한 결과보다 더 컸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 각각 치러진 두 실험 수치를 직접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커피를 많이 마셨는데도 집중력이 강해지지 않거나, 아예 커피를 마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신나는 음악을 들어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을 써 볼 수 있을 것이다. 실험으로 검증된 집중력 향상 방법은 다양하다. 어려운 공부를 할 때는 카페 같은 개방형 공간보다는 혼자 있는 공간이 낫다. 익숙하거나 난도가 낮은 작업은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할 때 더 빠르게 자동으로 이뤄져 효율이 높아지지만, 어렵거나 생소한 작업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오히려 방해된다. 지루한 수업이나 회의 중에는 낙서가 의외로 집중력에 도움이 된다. 영국 플리머스대 연구진에 따르면 원이나 삼각형 같은 단순한 도형을 그리며 내용을 들은 사람은 듣기만 한 사람보다 약 30%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해 냈다. 단순한 손놀림이 과도한 공상을 막아 주고 뇌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만들어 눈앞의 상황에 몰입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다만 만화 그리기 같은 정교한 손동작은 집중력을 떨어뜨리니 조심하자.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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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삭 삭았수다” 스스로 하는 ‘얼평’ ‘몸평’ 멈춰야 하는 이유[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best@donga.com)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자신을 사랑하세요.”지난해 개봉한 스릴러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분)가 자신이 진행하는 TV 에어로빅 쇼를 끝마칠 때 하는 말이다. 그는 한 때 아카데미상을 받을 정도로 잘 나갔지만, 50세가 되자 늙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TV쇼에서 해고된다. 그는 시청자들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나이 들어가는 자기 몸을 누구보다 혐오하게 된다. 그러다 신비한 주사를 맞으면 7일간 젊고 매력적인 제2의 몸으로 살게 해주는 정체 모를 약물에까지 손을 댔다가 파멸한다. 노화, 비만, 못생김과 싸우며 자기혐오에 시달려온 엘리자베스는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이 외에도 영화 ‘미녀는 괴로워’, 애니메이션 ‘기기괴괴 성형수’, 웹툰 ‘외모지상주의’, 드라마 ‘마스크걸’ ‘여신강림’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등 예쁘고 날씬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외모지상주의를 다룬 콘텐츠는 수없이 많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결말도 있긴 하지만, 외모를 평가 대상으로 삼는 냉혹한 시선은 어느 콘텐츠나 똑같이 나타난다.일상에서도 ‘얼평(얼굴 평가)’ ‘몸평(몸매 평가)’은 늘 일어난다. 날카로운 외모 지적은 타인은 물론 우리 자신을 향할 때도 많다. ‘난 못생겼어’ ‘살을 더 빼야 해’ ‘늙어서 초라해’라며 성형과 다이어트에 무한한 관심을 갖는다. 국제 미용성형외과학회(ISAPS)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형수술·시술 시행 건수는 미국, 브라질에 이어 세계 3위(2015년 기준)였다. 그만큼 외모 강박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울 속 내 얼굴이 자꾸 마음에 안 들고, 타고난 체형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난 못생겼어” “살 더 빼야” 집착한다면사실 외모 콤플렉스는 누구나 조금씩 안고 산다. 탈모, 곱슬머리, 여드름, 주근깨, 작은 키, 사각턱, 작은 눈, 굵은 종아리, 검은 피부 등 그 종류는 각자의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하다. 풀메이크업 전엔 잠깐의 외출도 꺼리거나, 몸매가 드러나지 않게 펑퍼짐한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것도 외모 콤플렉스 영향이 크다. 외출 전 2~3시간씩 몸단장을 하거나, 그날 자기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외모에 관심 많은 10, 20대 때엔 더 그렇다. 지난해 경제 미디어 ‘어피티’가 2030세대 128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39.2%가 ‘성형수술이나 시술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10명 중 4명이 외모 콤플렉스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병원을 찾은 셈이다. 또 응답자의 대부분(98.1%)은 ‘잘생기거나 예쁜 외모가 사회에서 혜택을 받는다’고 여겼다. 반대로 생각하면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그런데 단순히 외모에 자신감이 부족한 수준을 넘어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외모 강박증이 심하다면 신체이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일 수도 있다. 강박 장애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작은 결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증상이 대표적이다. 강박적으로 거울을 보고, 과하게 치장하거나,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해당한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신체이형장애 환자의 일부는 뇌신경에 결함이 생겨 실제로 특정 신체 부위가 왜곡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례가 아니라면 외모 때문에 놀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겪은 경우가 더 흔하다.◆ 외모에 자신감 없는 사람의 생각사람들이 내 외모가 별로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된다내가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내 외모를 흉볼까 봐 걱정된다외모가 신경 쓰여 다른 사람에게 말 걸 때 긴장된다외모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칠까 봐 불안하다다른 사람들이 내 외모의 결점을 눈치챌까 봐 불편하다거울을 볼 때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옷을 입을 때마다 몸매가 어떻게 보일까 상당히 신경 쓰인다자료: 사회적 외모 불안 척도, 사회적 체형 불안 척도내 외모에 대한 불안감이 클 경우에는 타인을 두려워하는 사회불안장애를 겪기도 한다. 이를 사회적 외모 불안(social appearance anxiety)이라고 하는데, 뚜렷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이 내 외모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비합리적 사고에 사로잡히는 것이 대표 증상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웃음 짓는 것을 보면 ‘내가 뚱뚱해서 비웃은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하는 식의 인지 왜곡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이 나를 뚱뚱하다고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자신감이 떨어지고 스스로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하게 된다. 그래서 거식증, 폭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와 우울증 등을 함께 겪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높은 외모 기준을 들이대는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면 더욱 위험하다.● 남들 보기엔 멀쩡해도 “난 마음에 안들어”할리우드 배우 메건 폭스는 2023년 한 잡지사 인터뷰에서 신체이형장애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 몸을 사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어린 시절부터 몸에 집착하며 외모에 항상 비판적이었다”고 말했다.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잘록한 허리를 드러내며 관능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스타덤에 오른 바로 그가 말이다.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짜 문제가 객관적 외모가 아닌 주관적 외모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인도 똑같다. 글로벌 브랜드 ‘도브’가 2013년 선보인 ‘리얼 뷰티’ 광고 캠페인은 자기 외모를 얼마나 평가 절하하고 왜곡해 인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도브는 FBI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는 법의학자를 초청해 실험에 참여한 여성들의 얼굴을 각 두 장씩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실물은 커튼으로 가린 채 첫 번째 그림은 여성이 자기 모습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그렸다. 두 번째 그림은 다른 사람이 해당 여성의 얼굴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완성했다.두 그림을 비교한 결과는 놀라웠다. 다른 사람의 묘사를 듣고 그린 것보다 자기가 묘사한 얼굴을 그린 그림이 실제보다 훨씬 못생겨 보였다. 여성들이 자기 얼굴을 설명할 때 튀어나온 광대, 다크 써클 등 외모 콤플렉스를 과장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남이 묘사해 준 얼굴은 이보다 훨씬 보기 좋았고 실제와 더욱 닮아있었다. 참가자 중 일부는 두 그림을 보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기 외모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는 걸 보여준 광고였다.성형수술이 외모 강박, 외모 불안의 온전한 탈출구가 되긴 어렵다. 수술이 객관적으로 잘 되더라도, 주관적 외모를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남들 눈엔 수술 결과가 객관적으로 괜찮아 보여도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못해 같은 부위를 여러 번 손댔다가 오히려 처음보다 상황이 악화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수술 결과에 만족하더라도 이번엔 다른 부위가 눈에 띄어 또 다른 성형수술을 계획할 가능성도 크다.‘심리학, 외모를 부탁해’의 저자인 이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진짜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성취와 대인관계 문제 등으로 낮아진 자존감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저서에서 “이런 경우 성형수술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않고 외모에만 모든 불만족을 전이시키며 문제를 축소하려는 도피처가 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SNS ‘얼짱’ ‘몸짱’ 보면 기분 나빠져주관적 외모 자존감이 낮아지는 원인은 다양하다. 가족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미 예일대 심리학과 연구진에 따르면, 거식증이나 폭식증 등 섭식 장애가 있는 여고생 77명의 가정환경을 추적해 보니 그 어머니도 어린 나이부터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또한 섭식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이들은 딸에 대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런 환경에서 “살 빼” “그만 먹어”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컸다면, 외모 강박에 평생 시달릴 수 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섭식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사회불안장애의 평생 유병률이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70%까지 높게 나타난다. 그만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는 의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연예인, 인플루언서와 외모를 비교하는 영향도 상당하다. 러네이 엥겔른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에 따르면, 특히 인스타그램이 해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10, 20대 여성 308명을 대상으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앱의 사용 방식을 관찰했더니, 인스타그램을 사용한 여성들이 페이스북을 사용한 여성들보다 게시물에 등장한 인물의 얼굴과 몸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이들은 앱 사용 후에 자기 몸에 대한 만족도가 감소했고, 기분도 안 좋아졌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인스타그램이 글보다 사진이나 영상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외모 비교에 특히 해롭다”고 분석했다.● 외모 자존감, 어떻게 회복할까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 임상 심리과학학과, 미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신경과학과 등 공동 연구진은 외모 강박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을 검증한 전 세계 43개 연구를 분석해 어떤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 살펴봤다. 혼자 쉽게 시도해 볼 만한 내용을 추려 소개한다.우선 외모에 대해 불평하는 일명 ‘바디 토크’를 줄여야 한다. 여성들끼리는 친밀감을 쌓는 차원에서 서로 “나 살찐 것 같아” “주름이 늘었어” 같은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연구에서는 여성 10명 중 9명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바디 토크를 한다는 결과도 있다. 그런데 얼굴, 체중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외모 자존감에 타격을 받는다. 단순히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평가 대상으로 바라보고, 죄책감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제 또 라면 먹었어”처럼 살찌는 음식에 대해 무심코 뱉은 일상 대화도 마찬가지다. 외모에 관심이 덜하고 ‘얼평’ ‘몸평’하지 않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방법이다.몸의 시각적 측면 대신 기능적 측면에 집중해 내 몸을 다시 바라보는 글쓰기를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팔은 가늘다/굵다’ ‘내 몸은 날씬하다/뚱뚱하다’를 떠나 ‘나는 내 팔로 ( )을 할 수 있어 좋다’ ‘나는 내 몸으로 ( )을 할 때 강인함을 느낀다’와 같이 무엇이 보이는지가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외모와 관련해 자동으로 떠오르는 비합리적 사고의 흐름을 기록해 보는 방법도 도움 된다. 안 좋은 생각으로 흐르게 만든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예: SNS에 예쁘고 잘 생긴 일반인이 올린 게시물을 여러 개 봤다), 이에 따라 어떤 감정이 느껴졌는지(예: 부럽고 질투 난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지(예: 내 외모는 평균 이하인 것 같다), 생각에 대한 근거(예: 나는 이들만큼 예쁘고 잘생기지 못하다)를 먼저 쓴다.그런 뒤 이를 반박할 근거(예: 보정을 거친 사진일 수 있다, 이들이 평균 외모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와 대안적 사고(예: 보여주기용 SNS 사진과 이들의 실제 모습은 다를 수 있다)를 차례로 작성해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느껴지는 감정 변화(예: 질투심이 누그러들었다)를 관찰해보자. 만약 이런 시도를 통해서도 이같은 생각을 끊어내기 힘들다면, 앞서 실험에서 나타난 것처럼 인스타그램 등 비현실적 인물들과 자꾸 외모를 비교하게 만드는 SNS를 아예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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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못생겼어” “살 더 빼야해”… 나도 외모 강박?[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자신을 사랑하세요.” 지난해 개봉한 스릴러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분)가 자신이 진행하는 TV 에어로빅 쇼를 끝마칠 때 하는 말이다. 그는 한 때 아카데미상을 받을 정도로 잘 나갔지만, 50세가 되자 늙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TV쇼에서 해고된다. 그는 시청자들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나이 들어가는 자기 몸을 누구보다 혐오하게 된다. 그러다 신비한 주사를 맞으면 7일간 젊고 매력적인 제2의 몸으로 살게 해주는 정체 모를 약물에까지 손을 댔다가 파멸한다. 노화, 비만, 못생김과 싸우며 자기혐오에 시달려온 엘리자베스는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 외에도 영화 ‘미녀는 괴로워’, 애니메이션 ‘기기괴괴 성형수’, 웹툰 ‘외모지상주의’, 드라마 ‘마스크걸’ ‘여신강림’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등 예쁘고 날씬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외모지상주의를 다룬 콘텐츠는 수없이 많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결말도 있긴 하지만, 외모를 평가 대상으로 삼는 냉혹한 시선은 어느 콘텐츠나 똑같이 나타난다. 일상에서도 ‘얼평(얼굴 평가)’ ‘몸평(몸매 평가)’은 늘 일어난다. 날카로운 외모 지적은 타인은 물론 우리 자신을 향할 때도 많다. ‘난 못생겼어’ ‘살을 더 빼야 해’ ‘늙어서 초라해’라며 성형과 다이어트에 무한한 관심을 갖는다. 국제 미용성형외과학회(ISAPS)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형수술·시술 시행 건수는 미국, 브라질에 이어 세계 3위(2015년 기준)였다. 그만큼 외모 강박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울 속 내 얼굴이 자꾸 마음에 안 들고, 타고난 체형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땐 어떻게 해야 할까. ● 특정 부위에 집착… “난 별로야” 사실 외모 콤플렉스는 누구나 조금씩 안고 산다. 외모에 관심 많은 10, 20대 때엔 더 그렇다. 그런데 단순히 외모에 자신감이 부족한 수준을 넘어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외모 강박증이 심하다면 신체이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일 수도 있다.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작은 결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증상이 대표적이다. 강박적으로 거울을 보고, 과하게 치장하거나,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해당한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신체이형장애 환자의 일부는 뇌신경에 결함이 생겨 실제로 특정 신체 부위가 왜곡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례가 아니라면 외모 때문에 놀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겪은 경우가 더 흔하다. 타인이 내 외모를 흉볼 것 같은 불안감이 클 경우에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사회불안장애의 차원으로 보기도 한다. 이를 사회적 외모 불안(social appearance anxiety)이라고 하는데, 뚜렷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이 내 외모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비합리적 사고에 사로잡히는 것이 대표 증상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웃음 짓는 것을 보면 ‘내가 뚱뚱해서 비웃은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하는 식의 인지 왜곡이 나타난다. 거식증, 폭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와 우울증 등을 함께 겪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높은 외모 기준을 들이대는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면 더욱 위험하다. ●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 할리우드 배우 메건 폭스는 2023년 한 잡지사 인터뷰에서 신체이형장애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 몸을 사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어린 시절부터 몸에 집착하며 외모에 항상 비판적이었다”고 말했다.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잘록한 허리를 드러내며 관능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스타덤에 오른 바로 그가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짜 문제가 객관적 외모가 아닌 주관적 외모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인도 똑같다. 글로벌 브랜드 ‘도브’가 2013년 선보인 ‘리얼 뷰티’ 광고 캠페인은 자기 외모를 얼마나 평가 절하하고 왜곡해 인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도브는 FBI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는 법의학자를 초청해 실험에 참여한 여성들의 얼굴을 각 두 장씩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실물은 커튼으로 가린 채 첫 번째 그림은 여성이 자기 모습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그렸고, 두 번째 그림은 다른 사람이 해당 여성의 얼굴을 묘사한 내용을 듣고 그렸다. 두 그림을 비교한 결과는 놀라웠다. 다른 사람의 묘사를 듣고 그린 것보다 자기가 묘사한 얼굴을 그린 그림이 실제보다 훨씬 못생겨 보였다. 여성들이 자기 얼굴을 설명할 때 튀어나온 광대, 다크 써클 등 외모 콤플렉스를 과장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남이 묘사해 준 얼굴은 이보다 훨씬 보기 좋았고 실제와 더욱 닮아있었다. 참가자 중 일부는 두 그림을 보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기 외모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는 걸 보여준 광고였다. 성형수술이 외모 강박, 외모 불안의 온전한 탈출구가 되긴 어렵다. 수술이 객관적으로 잘 되더라도, 주관적 외모를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심리학, 외모를 부탁해’의 저자인 이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진짜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성취와 대인관계 문제 등으로 낮아진 자존감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저서에서 “이런 경우 성형수술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않고 외모에만 모든 불만족을 전이시키며 문제를 축소하려는 도피처가 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 가족부터 SNS까지… 외모 강박 부추기는 환경들 주관적 외모 자존감이 낮아지는 원인은 다양하다. 가족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미 예일대 심리학과 연구진에 따르면, 거식증이나 폭식증 등 섭식 장애가 있는 여고생 77명의 가정환경을 추적해 보니 그 어머니도 어린 나이부터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또한 섭식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딸에 대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런 환경에서 “살 빼” “그만 먹어”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컸다면, 외모 강박에 평생 시달릴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연예인, 인플루언서와 외모를 비교하는 영향도 상당하다. 러네이 엥겔른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에 따르면, 특히 인스타그램이 해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10, 20대 여성 308명을 대상으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앱의 사용 방식을 관찰했더니, 인스타그램을 사용한 여성들이 페이스북을 사용한 여성들보다 게시물에 등장한 인물의 얼굴과 몸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들은 앱 사용 후에 자기 몸에 대한 만족도가 감소했고, 기분도 안 좋아졌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인스타그램이 글보다 사진이나 영상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외모 비교에 특히 해롭다”고 분석했다.● 외모 자존감,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 임상 심리과학학과, 미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신경과학과 등 공동 연구진은 외모 강박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을 검증한 전 세계 43개 연구를 분석해 어떤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 살펴봤다. 혼자 쉽게 시도해 볼 만한 내용을 추려 소개한다. 우선 외모에 대해 불평하는 일명 ‘바디 토크’를 줄여야 한다. 여성들끼리는 친밀감을 쌓는 차원에서 서로 “나 살찐 것 같아” “주름이 늘었어” 같은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연구에서는 여성 10명 중 9명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바디 토크를 한다는 결과도 있다. 그런데 얼굴, 체중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외모 자존감에 타격을 받는다. 단순히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평가 대상으로 바라보고, 죄책감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제 또 라면 먹었어”처럼 살찌는 음식에 대해 무심코 뱉은 일상 대화도 마찬가지다. 외모에 관심이 덜하고 ‘얼평’ ‘몸평’하지 않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방법이다. 몸의 시각적 측면 대신 기능적 측면에 집중해 내 몸을 다시 바라보는 글쓰기를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팔은 가늘다/굵다’ ‘내 몸은 날씬하다/뚱뚱하다’를 떠나 ‘나는 내 팔로 ( )을 할 수 있어 좋다’ ‘나는 내 몸으로 ( )을 할 때 강인함을 느낀다’와 같이 무엇이 보이는지가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외모와 관련해 자동으로 떠오르는 비합리적 사고의 흐름을 기록해 보는 방법도 도움 된다. 안 좋은 생각으로 흐르게 만든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예: SNS에 예쁘고 잘생긴 일반인이 올린 게시물을 여러 개 봤다), 이로 인한 감정(예: 부럽고 질투 난다), 생각(예: 내 외모는 평균 이하인 것 같다), 생각에 대한 근거(예: 나는 이들만큼 예쁘고 잘생기지 못하다)를 먼저 쓴다. 그런 뒤 이를 반박할 근거(예: 보정을 거친 사진일 수 있다, 이들이 평균 외모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와 대안적 사고(예: 보여주기용 SNS 사진과 이들의 실제 모습은 다를 수 있다)를 차례로 작성해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느껴지는 감정 변화(예: 질투심이 누그러들었다)를 관찰해보자. 만약 이런 시도를 통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끊어내기 힘들다면 아예 SNS를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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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혼란이 강성 지지자를 키운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내전 각오” “묵사발” “목숨 걸자”4일 헌법재판소 탄핵 선고를 앞두고 우리 사회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이다. 물론 강성 지지층을 선동하는 소수의 정치인과 극단적 유튜버의 목소리에 불과하지만, 폭력까지 불사하겠다는 발언 수위로 인해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선포부터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에 이르기까지 지난 4개월간 한국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헌재 선고 직전 한 여론조사에서 ‘내 생각과 다르면 (선고 결과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44%에 달할 정도로 사회적 불신과 진영 갈등이 심했다. 탄핵 선고 당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할 만큼 좌우 강성 지지층의 분노와 흥분이 커지기도 했다.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극단적 정치 성향 지지층이 늘어나는 현상은 정치적 양극화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사회, 문화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가운데 개인 심리 차원에서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향도 영향을 미친다. 혼란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안정감을 얻고 싶어 하는 심리가 정치 영역에서 발휘될 때 자칫 극단적이고 단순한 사고로 빠지기 쉬워서다. 극단에 쏠리게 되면 음모론에 빠지기 쉽거나, 선동적인 정치인이 인기를 끄는 등 부작용도 함께 나타난다.● 빠른 결론 원하는 ‘종결 욕구’심리학에서는 불확실성을 피해 확실한 결정을 빠르게 얻고자 하는 심리적 특성을 종결 욕구(need for closure)라고 한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힘들게 고민하다 결정을 내린 뒤에 후련함을 느꼈다면 종결 욕구가 해소된 것이다. 종결 욕구 수준은 자라온 환경과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반면, 종결 욕구가 그다지 크지 않은 사람은 결말을 열어 두고 천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종결 욕구 수준이 높고 낮은 특정 성향이 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질서와 계획을 중시하고, 변하지 않는 확고한 생각을 바탕으로 가족이나 신념, 국가에 헌신적인 경향이 있다. 반면 불확실성을 피하려다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단점으로 꼽힌다. 이와 반대로 종결 욕구가 적은 사람은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가 가능하다. 그러나 지나칠 땐 결정을 미루거나 우유부단하다는 단점도 있다.◆종결 욕구 수준이 높은 사람의 특징·불확실한 상황을 싫어한다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싫어한다·확실하고 체계적인 생활방식을 즐긴다·결정을 내리면 안심이 된다·집단 내 다수가 추구하는 가치에 어떤 사람이 반대하면 짜증 난다·문제에 직면하면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한다◆종결 욕구 수준이 낮은 사람의 특징·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채 새로운 상황의 불확실성을 즐긴다·가능하면 다양한 의견을 고려한다·날마다 규칙적인 일과가 싫다·막판에 계획이 바뀌면 재미있다고 느낀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의 교류가 더 즐겁다·갈등 상황을 보면 양쪽 모두 옳은 견해일 수 있다고 믿는다자료: 종결 욕구 척도어떤 상황에 놓이는지에 따라 종결 욕구 수준은 조금씩 변화한다. 종결 욕구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아리에 크루글란스키 미국 메릴랜드대 칼리지파크 심리학과 석좌교수에 따르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종결 욕구가 커진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시간에 쫓기거나, 피곤하거나, 시끄러운 상황에서 평소보다 빨리 결정을 내려 상황을 끝내버리고 싶어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심리적으로 불편한 상황에서는 평소보다 직관적이고 빠른 결정을 내리기 쉽다. 하물며 피로와 소음도 종결 욕구를 자극하는데, 요즘같이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국가 전반이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 폐쇄적 사고 강해…똘똘 뭉쳐 조직에 충성이때 좀 더 나은 선택을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각자 나름의 주관적 확신이 필요하다. 나만의 확고한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결정이 쉽고 빨라질 뿐 아니라 모호함이 사라지면서 심리적 안정감도 느낄 수 있어서다. 그래서 종결 욕구가 커지면 열린 사고보다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를 하기 쉽다.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기보다 직관적이고 빠른 결정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아져서다.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기보다는 획일적인 집단 사고를 추구하게 된다. 여러 정보를 검토하려면 인지적 과부하로 스트레스가 생기고, 이는 또 다른 혼란을 추가하는 격이기 때문이다.빠른 결정, 확고한 결말, 심리적 안정을 위해 조직 내에서는 ‘우리끼린 잘 맞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진다. 내가 속한 조직에 순응할수록 충성심은 올라간다. 다른 집단은 배척하고, 조직 내에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이러한 특성이 합쳐지면 정치적 강성 지지층이 똘똘 뭉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와 남의 경계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협력보단 대립, 갈등, 혐오가 조장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보수는 더 보수 성향으로, 진보는 더 진보 성향으로 극단화된다. 정치적 강성 지지층은 종결 욕구가 누구보다 높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근거 없는 음모론에 더 솔깃강성 지지층이 많이 시청하는 유튜브 채널 등에서 음모론이나 유언비어가 판치는 것도 높은 종결 욕구 수준과 관련 있다. 음모론은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안에 이른바 ‘명쾌한’ 답을 제공해 극단적인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폴란드 바르샤바대 연구진은 성인 245명을 대상으로 개인의 종결 욕구 수준에 따라 음모론을 얼마나 믿는지 살펴봤다. 연구 당시 폴란드는 시리아 난민 수용 문제로 유럽연합(EU)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폴란드 국민 78%가 난민을 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EU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폴란드에 난민을 입국시켜 폴란드 사회를 어지럽힌 후 정치적 장악력을 넓히려는 속셈이 있다’는 취지의 음모론적 시각을 강조하는 기사를 보여 줬다. 두 번째 그룹에는 난민 수용과 관련해 지금까지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정리한 기사를 보여 줬다.그런 다음 이들에게 난민 문제와 관련해 ‘EU의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 ‘EU가 폴란드 문화를 파괴하려고 한다’ ‘EU가 폴란드 경제를 파탄 내려 한다’ 같은 음모론적 주장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었다.음모론적 시각이 담긴 기사를 읽은 첫 번째 그룹에서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일수록 음모론에 강력하게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객관적 기사를 읽은 두 번째 그룹에서도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음모론에 더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두 그룹 모두 종결 욕구가 작은 사람은 음모론을 덜 믿었다. 연구진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모호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근거 없는 음모론마저도 단서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단 정치인 선동에 잘 휘둘려이때 극단적 성향 정치 지도자에게 끌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적 의사 결정 스타일을 나타내는 리더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배제하고 지지층이 원하는 화끈한 결정을 내리는 독단적인 리더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서다.이 현상은 좌우 정치 성향과 무관하다. 이탈리아 로마 사피엔차대 연구진은 2022년 상반기 성인 1754명을 대상으로 국가 안팎의 불확실성이 강성 지도자를 선호하는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당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직전이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막 침공한 때였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이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얼마나 혼란을 느끼는지와 함께 이들의 종결 욕구 수준, 강력한 사회 규범을 원하는 정도, 강성 지도자를 지지하는 수준을 조사했다.그 결과 코로나19와 전쟁으로 큰 불안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종결 욕구 수준이 높았고 이는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에 대한 선호로 이어졌다.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를 원하는 정도는 우파 성향 참가자들에서 더 두드러졌지만, 좌파 성향 참가자들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유사한 경향성이 발견됐다.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각자 성향에 맞는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문제는 강성 정치 지도자가 유권자에게 일부러 실제보다 과장된 불안감을 심어 주고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전략을 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반(反)이민 정책을 고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를 사례로 들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 이민자 비율을 실제보다 12~13%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연구진은 “불법 이민자 수를 과대평가한 사람들은 이민자를 위협으로 인식해 강력한 정책을 펼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치 지도자들이 위협적이고 과장된 언사로 대중을 불안하게 만드는 선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치인 혐오 발언, 정서적 양극화 부추겨혐오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는 여러 정보와 의견을 수렴할 준비가 돼 있어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지만, 적대감이 일어난 상태에서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사고가 더 촉진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커진 종결 욕구로 인한 영향과 혐오 발언 효과가 합쳐지면 정서적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미국인 6535명을 대상으로 관련 실험을 진행한 김진우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 연구에 따르면, 감정 상태에 따라 사람들이 정책 관련 정보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달라졌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의료정책에 대해 평소 자기의 정치적 신념과 어긋나는 정보를 접하더라도, 사실관계가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수용해 온건한 방향으로 의견을 바꾸려는 경향이 관찰됐다.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무책임하고 비열하다’ ‘민주당원은 멍청하다’ 같은 적대감을 일으키는 메시지와 함께 의료정책 정보를 접했을 땐, 평소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내용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느낀 순간 타협의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김 교수는 “적대적이고 논쟁적인 맥락에서 전달된 정보에 더욱 편견을 갖게 돼 있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건설적인 정치 환경을 조성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적대감을 일으킬 때 지지층 간 갈등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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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란한 시대, 안정 추구 심리가 강성 지지자 키운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이달 4일 헌법재판소 대통령 파면 선고에 이르기까지 지난 4개월간 한국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헌재 선고 직전 한 여론조사에서 ‘내 생각과 다르면 (선고 결과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44%에 달할 정도로 사회적 불신과 진영 갈등이 심했다. 헌재 선고 당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할 만큼 좌우 강성 지지층의 분노와 흥분이 커지기도 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극단적 정치 성향 지지층이 늘어나는 현상은 정치적 양극화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사회, 문화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가운데 개인 심리 차원에서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향도 영향을 미친다. 혼란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안정감을 얻고 싶어 하는 심리가 정치 영역에서 발휘될 때 극단적이고 단순한 사고로 빠지기 쉬워서다. 극단에 쏠리게 되면 음모론에 빠지기 쉽거나, 선동적인 정치인이 인기를 끄는 등 부작용도 함께 나타난다.● “확실한 정답 원해” 극단 정치 성향으로 심리학에서는 불확실성을 피해 확실한 결정을 빠르게 얻고자 하는 심리적 특성을 종결 욕구(need for closure)라고 한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힘들게 고민하다 결정을 내린 뒤에 후련함을 느꼈다면 종결 욕구가 해소된 것이다. 종결 욕구 수준은 자라온 환경과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반면, 종결 욕구가 그다지 크지 않은 사람은 결말을 열어 두고 천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종결 욕구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아리에 크루글란스키 미국 메릴랜드대 칼리지파크 심리학과 석좌교수에 따르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종결 욕구가 커진다. 정치, 경제, 사회, 외교적으로 혼란스러운 요즘 한국 사회가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종결 욕구가 커지면 열린 사고보다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를 하기 쉽다.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기보다 직관적이고 빠른 결정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아져서다.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기보다는 획일적인 집단 사고를 추구하게 된다. 여러 정보를 검토하려면 인지적 과부하로 스트레스가 생기고, 이는 또 다른 혼란을 추가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빠른 결정, 확고한 결말, 심리적 안정을 위해 조직 내에서는 ‘우리끼린 잘 맞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진다. 내가 속한 조직에 순응할수록 충성심은 올라간다. 다른 집단은 배척하고, 조직 내에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특성이 합쳐지면 정치적 강성 지지층이 똘똘 뭉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와 남의 경계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협력보단 대립, 갈등, 혐오가 조장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보수는 더 보수 성향으로, 진보는 더 진보 성향으로 극단화된다. 정치적 강성 지지층은 종결 욕구가 누구보다 높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강성 지지층이 음모론에 더 잘 빠진다 강성 지지층이 많이 시청하는 유튜브 채널 등에서 음모론이나 유언비어가 판치는 것도 높은 종결 욕구 수준과 관련 있다. 음모론은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안에 이른바 ‘명쾌한’ 답을 제공해 극단적인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폴란드 바르샤바대 연구진은 성인 245명을 대상으로 개인의 종결 욕구 수준에 따라 음모론을 얼마나 믿는지 살펴봤다. 연구 당시 폴란드는 시리아 난민 수용 문제로 유럽연합(EU)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폴란드 국민 78%가 난민을 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EU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폴란드에 난민을 입국시켜 폴란드 사회를 어지럽힌 후 정치적 장악력을 넓히려는 속셈이 있다’는 취지의 음모론적 시각을 강조하는 기사를 보여 줬다. 두 번째 그룹에는 난민 수용과 관련해 지금까지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정리한 기사를 보여 줬다. 그런 다음 이들에게 난민 문제와 관련해 ‘EU의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 ‘EU가 폴란드 문화를 파괴하려고 한다’ ‘EU가 폴란드 경제를 파탄 내려 한다’ 같은 음모론적 주장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었다. 음모론적 시각이 담긴 기사를 읽은 첫 번째 그룹에서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일수록 음모론에 강력하게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객관적 기사를 읽은 두 번째 그룹에서도 종결 욕구가 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음모론에 더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두 그룹 모두 종결 욕구가 작은 사람은 음모론을 덜 믿었다. 연구진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모호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근거 없는 음모론마저도 단서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극단적 지도자에게 쏠리는 눈 이때 극단적 성향 정치 지도자에게 끌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적 의사 결정 스타일을 나타내는 리더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배제하고 지지층이 원하는 화끈한 결정을 내리는 독단적인 리더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서다. 이 현상은 좌우 정치 성향과 무관하다. 이탈리아 로마 사피엔차대 연구진은 2022년 상반기 성인 1754명을 대상으로 국가 안팎의 불확실성이 강성 지도자를 선호하는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당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직전이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막 침공한 때였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이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얼마나 혼란을 느끼는지와 함께 이들의 종결 욕구 수준, 강력한 사회 규범을 원하는 정도, 강성 지도자를 지지하는 수준을 조사했다. 그 결과 코로나19와 전쟁으로 큰 불안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종결 욕구 수준이 높았고 이는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에 대한 선호로 이어졌다. 강력한 사회 규범과 강한 리더를 원하는 정도는 우파 성향 참가자들에서 더 두드러졌지만, 좌파 성향 참가자들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유사한 경향성이 발견됐다.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각자 성향에 맞는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강성 정치 지도자가 유권자에게 일부러 실제보다 과장된 불안감을 심어 주고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전략을 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반(反)이민 정책을 고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를 사례로 들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 이민자 비율을 실제보다 12∼13%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연구진은 “불법 이민자 수를 과대평가한 사람들은 이민자를 위협으로 인식해 강력한 정책을 펼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치 지도자들이 위협적이고 과장된 언사로 대중을 불안하게 만드는 선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혐오 조장’ 정치인이 위험한 이유 혐오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는 여러 정보와 의견을 수렴할 준비가 돼 있어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지만, 적대감이 일어난 상태에서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사고가 더 촉진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커진 종결 욕구로 인한 영향과 혐오 발언 효과가 합쳐지면 정서적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미국인 6535명을 대상으로 관련 실험을 진행한 김진우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 연구에 따르면, 감정 상태에 따라 사람들이 정책 관련 정보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달라졌다. 감정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의료정책에 대해 평소 자기의 정치적 신념과 어긋나는 정보를 접하더라도, 사실관계가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수용해 온건한 방향으로 의견을 바꾸려는 경향이 관찰됐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무책임하고 비열하다’ ‘민주당원은 멍청하다’ 같은 적대감을 일으키는 메시지와 함께 의료정책 정보를 접했을 땐, 평소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내용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느낀 순간 타협의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김 교수는 “적대적이고 논쟁적인 맥락에서 전달된 정보에 더욱 편견을 갖게 돼 있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건설적인 정치 환경을 조성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적대감을 일으킬 때 지지층 간 갈등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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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대, 전공 자율선택제 확대… 입학 후 진로 탐색 폭 넓힌다

    교육부는 37개 지역별 국립대학들이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국립대학 육성 사업을 2023년부터 본격화했다. 지역 경쟁력 약화, 지역 인재 유출 등을 해소하고, 국립대학의 교육 혁신과 연구 환경 개선이 목적이다. 이에 따라 각 대학도 지역 균형 발전과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한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특히 인기 학과 쏠림 현상을 방지하고, 원활한 진로 탐색을 돕기 위한 전공 자율선택제 확산이 눈에 띈다. 국립부경대는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고 ‘자유전공 길라잡이센터’를 열었다. 자유전공학부를 포함해 단과 대학별 자유전공학부, 글로벌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한 학생은 올해 915명이다. 전체 정원의 약 30%에 달하는 비율이다. 이들을 위한 자유전공 길라잡이센터에서는 직업 탐색과 함께 연계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위해 국립부경대는 자유전공학부별 학부장 8명, 전공별 전공 길라잡이 지도교수 78명을 임명했다. 학사 지도 전담 학사 길라잡이 교수 5명도 신규 채용했다. 또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의 자유로운 교류 활동을 위한 ‘자유전공학부 오픈 라운지’도 마련했다. 기존 학생들이 이용하던 ‘과방’ 역할을 겸함으로써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의 소속감이 저하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한다. 국립부경대 관계자는 “자유전공학부는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다양한 융복합 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학생들의 만족도를 조사해 소속감을 높이고, 인기 학과 운영을 위한 교내 공간 마련, 수업 커리큘럼 확보 등으로 전공 자율선택제에 계속 적극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북대도 2025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전체 모집인원의 25.4%(961명)를 무전공으로 선발했다. 특히 단과대인 첨단기술융합대학은 정원 100%를 무전공으로 뽑았다. 또 전공 자율선택제 강화와 함께 기초학문을 교양 필수로 편성해 균형 잡힌 융복합 교육과정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경북대는 2006년부터 기초학문 연구 재정 확충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최근에는 ‘기초보호학문진흥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초보호학문의 장기적 육성과 지원 체계를 마련했다. 이 외에도 융복합 전공의 활성화를 위해 ‘마이크로모듈제’를 도입해 전공 간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융복합 전공을 선택하면, 전공 필수 이수학점이 줄어들기 때문에 다른 전공의 수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앞으로 기초학문 활성화를 위해 교양과목 교육 과정에도 ‘마이크로 모듈제’를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부산대는 전공 자율선택제를 확대하기 위해 첨단융합학부를 신설하고 맞춤형 ‘학생 코디네이터 제도’를 도입했다. 올해 처음 받은 자율전공 신입생은 총 159명이다. 무전공 입학생들의 전공 선택을 돕기 위한 ‘학생 코디네이터’ 제도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부산대는 올 2월 진로 전문 코디네이터 3명을 신규 채용하고, 진로지도 챗봇 개설, 멘토링 프로그램 등 첨단융합학부 특성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1학기에 진행되는 멘토링 프로그램은 ‘선배와 함께하는 멘토링 프로그램’, ‘어서 와, 느그들 학부 대학 처음이지?’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첨단융합학부에 입학한 한 학생은 “첨단 에너지, 반도체 등에 관심이 많아 첨단융합학부에 지원하게 됐다”며 “1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하고 ‘학생 코디네이터’의 도움을 받아 진로를 구체화하고 싶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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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유-나탈리 포트먼도 “난 무능해”…성공해도 왜 불안할까[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best@donga.com)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하버드대 입학 과정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하버드대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만큼 똑똑하지 않다.”(미국 배우 나탈리 포트먼)“나는 과대 포장된 가수다. 사기를 제대로 쳤다고 생각했다. 열과 성을 다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후하다.”(가수 아이유)나탈리 포트먼은 2015년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불안했던 자신의 대학 생활을 고백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 출연 직후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자신이 이 대학에 다닐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공부에 압도당해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들었고 교수들과 면담하다 울기도 했다. 가수 아이유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혐오하다 결국 폭식증을 앓았던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과분한 인기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남을 잘 속이는 재주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성공한 스타의 화려함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찬사를 받아도 정작 자괴감에 빠져 ‘난 원래 못났다’ ‘남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평생 해 온 연구이긴 하지만 과분한 주목을 받으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마치 사기꾼이 된 것 같다”고 했다.이런 현상이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고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때 나타나는 자기 비하는 겸손과는 엄연히 다르다. 하찮은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까 과하게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자책하다 불안과 우울함에 시달린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스스로 ‘한심하다’ 생각하는 실력자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봤을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력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느낌 말이다. 충분히 능력 있고 성취도 이뤘지만, 실제 자신의 못난 모습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라고 한다. 능력 있는 척하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속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식 진단명이 아니기에 ‘가면 현상’이라고 칭하는 학자들도 있다. 국내 조사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약 70%가 살면서 한 번쯤 가면 증후군을 겪어 봤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능하다고 믿지만 사실은 고(高)성과자일 가능성이 크다. 1978년 가면 증후군 개념을 처음 소개한 미 조지아주립대 심리학과 폴린 클랜스, 수잰 아임스 교수는 이 같은 사람들의 특징을 △자기 능력 부정(자기 의심) △다른 사람의 칭찬 무시 △실패에 대한 과도한 걱정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 등으로 정의했다. 탁월한 능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작 성공해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 실패했을 때 느끼는 강한 굴욕감과 수치심을 피하려고 과로하다 번아웃을 겪거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 생각·내 능력으로 성공한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다·이번에 좋은 성과를 냈더라도 다음에는 잘하지 못할 것 같다·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까 두렵다·주변에서 날 믿어줄지라도 프로젝트나 시험에 성공하지 못할까 두렵다.·누군가 인정하는 말을 해줘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겠다·새로운 일을 맡으면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자료: 가면 현상 단축형 척도(CIPS-10)● 자기 불신 사고 회로 무한 반복처음 연구가 시작된 미국, 유럽에서는 가면 증후군이 주로 사회적 차별을 겪는 성공한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봤다. 하지만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진이 2023년까지 발표된 가면증후군 관련 전 세계 연구 108건을 분석한 결과, 성별에 따른 차이는 상당히 작았다. 특히 아시아 문화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성별 문제라기보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가면 증후군 증상이 더욱 폭넓게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자기 불신→집착적 노력(과로)→성공해도 실력이 아닌 운으로 돌림→자기 불신’이라는 사고 회로를 무한 반복한다. 자기 불신 때문에 과제가 닥치면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 집착적으로 노력하거나 일부는 아예 게으름을 피우며 벼락치기를 택한다. 실패하더라도 ‘미뤄서 못 했지, 무능한 게 아니다’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두 유형 모두 우려했던 것보다 괜찮은 결과를 얻더라도 ‘운이 좋았다’거나 ‘역시 다음엔 더 노력해야겠다’며 자신을 다그치고, 다시 자기 불신의 악순환에 갇힌다.그래서 이들은 면접에 합격하거나 어려운 학위를 따고도 ‘아무나 받아줬겠지’ ‘내가 했으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누가 도와줬으니 사실상 남이 다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실력 있는 사람으로 보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격차가 크다.● 어린 시절 가정 환경-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에 영향가면 증후군은 환경과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특히 어린 시절에 성취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칭찬에 인색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 더 겪기 쉽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굳혀 간다.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업무 관련 지적이 많은 조직에서 일하는 직장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완벽함이 기본이고, 모른다거나 도와 달라고 하면 무능하다고 여기는 분위기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만의 기준이 엄격한 프리랜서나 창의력이 계속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완벽주의 성향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표를 이뤄 가는 좋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가면 증후군은 부적응적이고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과 훨씬 가깝다.독일 괴테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성인 274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의 여러 속성과 가면 증후군 증상과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학업 또는 직장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이라거나 ‘나는 항상 남들보다 뒤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자일수록 가면 증후군 점수도 높게 나타났다. 또, 원래 완벽하고 싶은 욕구가 별로 없었지만, 부모나 타인의 강요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 부과 완벽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가면 증후군 증상도 강했다. 대표적으로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으로 꼽힌다.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처음부터 사람들 기대치를 낮추려고 더 심하게 자기 실력을 비하하기도 한다. 미 웨이크포레스트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대학생 95명에게 앞으로 치를 학교 시험에서 몇 등 정도 할 것 같은지 솔직히 답해 보라고 했다. 이어 등수 예측치를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겠다고 했더니, 유독 가면 증후군 점수가 높은 학생들은 원래 예측한 것보다 등수를 훨씬 낮췄다. 연구진은 “주변 기대치를 낮춰서 실패해도 무마할 수 있도록 행동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엄살 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실력 없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전문가라면 응당 모든 걸 알아야”이들은 자신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자기 능력에 대한 비합리적인 신념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가면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면 증후군 협회’를 세운 미국이 밸러니 영 박사는 현실에서 만난 여러 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전문가 유형’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면 응당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내가 똑똑하다면, 모든 걸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감히 전문가라고 칭하려면 학위, 자격증, 경험 등이 차고 넘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게 여전히 많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떨어진다.‘개인주의자 유형’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내는 것만이 진짜 유능한 것이라고 여긴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내 능력이 아니고, 무능한 것이라고 인식한다. 함부로 도움을 요청했다가 무능하다고 찍힐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다 끝내고 나서도 ‘내가 이렇게 간신히 해낸 걸 알면 사람들이 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여긴다.또 ‘천재 유형’은 배우기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 앞에 서면 ‘내가 유능했더라면 이미 잘하고도 남았을 텐데, 역시 난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성취를 이루면, 오히려 타고나지 못한 재능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긴다. ● ‘나는 정말 무능할까’ 묻는 메타인지 필요‘나는 무능하다’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추려면 자기 비하로 시작해 자기 비하로 끝나는 사고 회로를 끊어야 한다.미 노스텍사스대 연구진은 가면 증후군 증상 완화를 위해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을 교수, 기업 임원 등 이런 증상이 있는 65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진행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느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들을 심층 인터뷰했다.그 결과 이들이 느낀 가면 증후군 해소의 첫걸음은 나에게 가면 증후군 증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었다. 평생 ‘나는 남보다 못났다’는 근거 없는 자괴감에 시달려 온 이들에게는 이런 증상을 명명하는 용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다. 자기가 정말 무능해서가 아니라 환경이나 성격의 영향으로 자기 비하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참가자는 “스스로에게 ‘헛소리 그만해!’라고 외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내가 느끼는 한심함, 무능함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 자문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내가 똑똑했으면 이 일은 진작에 끝냈어야 해’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정말 그런지 따져 보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일이 많은 상황에서 ‘진작에 끝냈어야 한다’거나 일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부 다 알아야 한다’는 가정은 누구에게나 가혹할 수 있다. 현실을 왜곡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이 모든 과정은 내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메타인지와 연결된다. 가면 증후군과 메타인지를 연구하는 리사 손 미 컬럼비아대 버나드칼리지 심리학과 교수는 “메타인지란 실수나 부족한 부분뿐 아니라, 내 성공도 인정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메타인지를 활용해 자신을 평가절하만 하는 생각을 모니터링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불안감 때문에 쓸데없이 노력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손 교수는 “많은 사람이 ‘난 잘 못해’ ‘그저 운이 좋았어’ 같은 생각들을 메타인지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겸손해야 한다’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 내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 판단하는 과정이 진짜 메타인지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또 참가자들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이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보면서 잘못된 생각 패턴을 고칠 수 있었다.이를 통해 ‘다른 사람 빼고 나만 못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게 됐다. 남에게 질문한다는 것은 무지와 무능을 고백하는 거라고 여겨 혼자 끙끙거리던 사람들이 주변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더 친절해졌고, 더 이상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다만 도움을 청할 때 유의할 점이 하나 있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같이 경쟁하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오히려 더 비교하게 돼 불안감을 느끼는 역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할 땐 바로 옆 동료보단 나와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요청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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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력 다해 성공하고도 “난 무능해”… 겸손이 아닙니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하버드대 입학 과정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하버드대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만큼 똑똑하지 않다.”(미국 배우 나탈리 포트먼) “나는 과대 포장된 가수다. 사기를 제대로 쳤다고 생각했다. 열과 성을 다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후하다.”(가수 아이유) 나탈리 포트먼은 2015년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불안했던 자신의 대학 생활을 고백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 출연 직후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자신이 이 대학에 다닐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공부에 압도당해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들었고 교수들과 면담하다 울기도 했다. 가수 아이유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혐오하다 결국 폭식증을 앓았던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과분한 인기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남을 잘 속이는 재주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공한 스타의 화려함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찬사를 받아도 정작 자괴감에 빠져 ‘난 원래 못났다’ ‘남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평생 해 온 연구이긴 하지만 과분한 주목을 받으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마치 사기꾼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현상이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고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때 나타나는 자기 비하는 겸손과는 엄연히 다르다. 하찮은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까 과하게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자책하다 불안과 우울함에 시달린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난 한심해’라는 고(高)성과자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봤을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력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느낌 말이다. 충분히 능력 있고 성취도 이뤘지만, 실제 자신의 못난 모습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라고 한다. 능력 있는 척하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속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식 진단명이 아니기에 ‘가면 현상’이라고 칭하는 학자들도 있다. 국내 조사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약 70%가 살면서 한 번쯤 가면 증후군을 겪어 봤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능하다고 믿지만 사실은 고(高)성과자일 가능성이 크다. 1978년 가면 증후군 개념을 처음 소개한 미 조지아주립대 심리학과 폴린 클랜스, 수잰 아임스 교수는 이 같은 사람들의 특징을 △자기 능력 부정(자기 의심) △다른 사람의 칭찬 무시 △실패에 대한 과도한 걱정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 등으로 정의했다. 탁월한 능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작 성공해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 실패했을 때 느끼는 강한 굴욕감과 수치심을 피하려고 과로하다 번아웃을 겪거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처음 연구가 시작된 미국, 유럽에서는 가면 증후군이 주로 사회적 차별을 겪는 성공한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봤다. 하지만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진이 2023년까지 발표된 가면 증후군 관련 전 세계 연구 108건을 분석한 결과, 성별에 따른 차이는 상당히 작았다. 특히 아시아 문화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성별 문제라기보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가면 증후군 증상이 더욱 폭넓게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자기 불신→집착적 노력(과로)→성공해도 실력이 아닌 운으로 돌림→자기 불신’이라는 사고 회로를 무한 반복한다. 자기 불신 때문에 과제가 닥치면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 집착적으로 노력하거나 일부는 아예 게으름을 피우며 벼락치기를 택한다. 실패하더라도 ‘미뤄서 못 했지, 무능한 게 아니다’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두 유형 모두 우려했던 것보다 괜찮은 결과를 얻더라도 ‘운이 좋았다’거나 ‘역시 다음엔 더 노력해야겠다’며 자신을 다그치고, 다시 자기 불신의 악순환에 갇힌다.● 경쟁적 환경과 완벽주의도 영향 가면 증후군은 환경과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특히 어린 시절에 성취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칭찬에 인색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 더 겪기 쉽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굳혀 간다.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업무 관련 지적이 많은 조직에서 일하는 직장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완벽함이 기본이고, 모른다거나 도와 달라고 하면 무능하다고 여기는 분위기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만의 기준이 엄격한 프리랜서나 창의력이 계속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완벽주의 성향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표를 이뤄가는 좋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가면 증후군은 부적응적이고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과 훨씬 가깝다. 독일 괴테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성인 274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의 여러 속성과 가면 증후군 증상과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학업 또는 직장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이라거나 ‘나는 항상 남들보다 뒤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자일수록 가면 증후군 점수도 높게 나타났다. 또, 원래 완벽하고 싶은 욕구가 별로 없었지만 부모나 타인의 강요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 부과 완벽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가면 증후군 증상도 강했다. 대표적으로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으로 꼽힌다.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처음부터 사람들 기대치를 낮추려고 더 심하게 자기 실력을 비하하기도 한다. 미 웨이크포레스트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대학생 95명에게 앞으로 치를 학교 시험에서 몇 등 정도 할 것 같은지 솔직히 답해 보라고 했다. 이어 등수 예측치를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겠다고 했더니, 유독 가면 증후군 점수가 높은 학생들은 원래 예측한 것보다 등수를 훨씬 낮췄다. 연구진은 “주변 기대치를 낮춰서 실패해도 무마할 수 있도록 행동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엄살 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실력 없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나는 정말 무능할까’ 묻는 메타인지 필요 ‘나는 무능하다’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추려면 자기 비하로 시작해 자기 비하로 끝나는 사고 회로를 끊어야 한다. 미 노스텍사스대 연구진은 가면 증후군 증상 완화를 위해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을 교수, 기업 임원 등 이런 증상이 있는 65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진행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느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그 결과 이들이 느낀 가면 증후군 해소의 첫걸음은 나에게 가면 증후군 증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었다. 평생 ‘나는 남보다 못났다’는 근거 없는 자괴감에 시달려 온 이들에게는 이런 증상을 명명하는 용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다. 자기가 정말 무능해서가 아니라 환경이나 성격의 영향으로 자기 비하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참가자는 “스스로에게 ‘헛소리 그만해!’라고 외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한심함, 무능함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 자문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내가 똑똑했으면 이 일은 진작에 끝냈어야 해’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정말 그런지 따져보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일이 많은 상황에서 ‘진작에 끝냈어야 한다’거나 일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부 다 알아야 한다’는 가정은 누구에게나 가혹할 수 있다. 현실을 왜곡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내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메타인지와 연결된다. 가면 증후군과 메타인지를 연구하는 리사 손 미 컬럼비아대 버나드칼리지 심리학과 교수는 “메타인지란 실수나 부족한 부분뿐 아니라, 내 성공도 인정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메타인지를 활용해 자신을 평가절하만 하는 생각을 모니터링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불안감 때문에 쓸데없이 노력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손 교수는 “많은 사람이 ‘난 잘 못해’ ‘그저 운이 좋았어’ 같은 생각들을 메타인지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겸손해야 한다’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 내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 판단하는 과정이 진짜 메타인지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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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배려하다 내가 지쳐”…착한 게 아니라 피곤한 겁니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e메일()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윤민지 씨(가명·29)는 친구들 사이에서 ‘태평양 오지랖’으로 통한다. 남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들어주고 도와주는 ‘공감 왕’이라서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회사 동기의 전화를 끊기 어려워 밤새 들어주다 다음 날 지각한 적도 있다. 다른 사람 일 도와주느라 정작 자기 일을 끝내지 못해 야근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누군가 도와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윤 씨는 “가족들은 ‘그러다 네가 골병든다’고 타박하지만, 차라리 내가 피곤한 게 마음 편하다”고 말한다.공감 능력이 부족해도 문제지만, 과하게 넘쳐흐르면 오히려 ‘공감 피로’ 또는 ‘공감 스트레스’를 겪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남에게 공감해 주다 지친 상태를 말한다. 공감 피로라는 말은 원래 환자를 돌보면서 정서적 소진을 겪는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처음 사용됐다. 남들보다 ‘공감의 촉’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직업과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 피로를 겪을 수 있다. 1일자 기사 에서 연습을 통해 부족한 공감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아봤다면, 이번에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공감이 흘러넘쳐 피곤해지는 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공감 능력자’, 좋기만 할까?다른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공감적 과(過)각성 상태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 덕분에 주변에서 ‘착하다’는 말은 많이 들을지 몰라도, 정작 본인은 쉽게 방전될 수 있다.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의대 임상 조교수이자 작가인 주디스 올로프 박사는 공감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의 감정적 경계가 흐린 사람을 ‘초민감자(empath)’라고 지칭했다. ‘공감 능력자’라고도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 기분을 잘 알아채고 △남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 감정을 내 감정인 양 느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라 자신은 소홀히 하는 특징을 가졌다. 감정 전이(轉移)에 민감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스트레스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남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아 쉽게 지친다. 감각적으로도 민감한 경우가 많아 소음 등 주변 환경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이런 사람들은 공감 피로를 느끼기 쉽다. 공감할 때 필요한 인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과하게 사용하다가 금세 바닥이 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상대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생각을 억압하게 되는데, 이때 몸은 이 과정을 스트레스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염증 반응까지 나타난다.● 공감 잘하는 부모, 몸에 염증 더 많다그 대상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에리카 만자크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공감적인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염증 수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와 그들의 청소년(13~16세) 자녀를 247명씩 모집해 이들의 공감 능력, 염증 수치, 스트레스, 우울 지수, 인생의 목적, 자존감 등을 검사한 결과다. 자녀에게 잘 공감하는 부모는 자녀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수시로 억압하기 때문에 몸은 스트레스를 겪는다.같은 연구진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우울증을 앓는 자녀를 둔 공감적인 부모는 1년 뒤 몸에서 더 많은 염증 성분이 발견됐다. 우울하고 힘든 자녀 마음에 공감했을 뿐인데 그 대가가 따른 것이다. 부모와는 반대로 공감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청소년은 감정 조절을 잘할 뿐만 아니라, 몸의 염증 수치도 낮았다. 부모가 감정에 잘 공감해주기에 정서적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덕분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공감적인 부모는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존감, 인생의 목적의식 등은 남들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자녀의 필요를 잘 채워 주는 좋은 부모라는 느낌이 부모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줄지라도, 몸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감 피로 쌓이면 타인에게 무관심해져공감 피로가 누적되면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감정적 소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의 소진을 막기 위해 무관심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TV에서 안타까운 사정이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광고가 반복적으로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려버린 적이 있다면, 그 순간 공감 피로가 누적돼 회피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재신, 이민영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대학생 212명을 네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는 울거나 화내는 인물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의 감정에 최대한 공감해 보라는 미션을 줬다. 나머지 세 그룹에는 대조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웃는 인물에 공감하기(두 번째 그룹) 울거나 화내는 인물의 성별과 나이 관찰하기(두 번째 그룹) 웃는 인물의 나이와 성별 관찰하기(네 번째 그룹) 미션을 각각 부여했다. 첫 번째 그룹만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하느라 애쓰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그런 다음 각 그룹에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소액이라도 기부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담긴 아프리카 기아 구제 포스터를 보여 주며 기부 의사를 물었다. 결과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해 보라고 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기부 의사가 유독 낮게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힘든 감정에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자,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 탓이다. 이재신 교수는 “공감 피로도가 높아질수록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지는 경향성이 나타났다”며 “감정적 피로가 누적되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더 이상 내밀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이런 현상은 안 좋은 소식이 범람하는 뉴스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각종 사건·사고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때면 뉴스를 보다가도 어느 순간 ‘지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스탠리 코언 런던정경대학(LSE)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이와 같은 공감 피로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사회 전체가 너무 언짢고 위협적이고 비정상적이어서 우리는 완전히 소화할 수 없거나 공개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정보를 제공받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안타까움,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모른척하고 도망치게 된다. 나를 방어하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왜 무덤덤할까평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남을 돕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 의료진, 심리치료사, 사회복지사, 교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비영리단체 종사자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직업을 가졌을 때 만나게 되는 환자나 고객의 부정적 감정에 지나치게 물들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감 피로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는 번아웃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아르헨티나 파발로로대 연구진이 의사 7584명을 연구한 결과 공감 피로를 느끼는 의사들은 주관적 고통 수준이 높고, 정서적으로 무감각하며 삭막한 상태에 이르는 경향이 발견됐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피로를 더 많이 느꼈고,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성폭력 상담원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 결과에서도 피해자를 상담하면서 느끼는 공감 피로로 인해 정서적 탈진과 무감각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래서 올로프 박사(UCLA)는 ‘순교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기분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며 자책하지 말라는 것이다. 순교자가 되지 않으려면 상대의 고통을 전부 내 것으로 끌어안지 말고 거리를 둬야 한다.경험 많은 의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볼 때 일부러 공감 스위치를 끄는 훈련이 돼 있다. 대만 국립 양밍대 의대 연구진은 바늘로 몸을 찌르는 사진을 볼 때 의사와 일반인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뇌전도(EEG) 검사를 통해 살펴봤다. 그 결과 일반인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바늘에 찔릴 때처럼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반응했다.의사들에게서 이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공감 못하는 의사가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사들이 주사기나 메스를 들 때마다 마치 내가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면 그 또한 문제일 것이다. 대신 의사들은 자기 조절이나, 주의와 집중이 필요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반응했다. 연구진은 “의사들은 공감을 의도적으로 줄여 환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대신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지 인지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 욕구 먼저 생각하기공감 능력이 과하면 대인관계에서도 피로해지기 쉽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중심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공감 능력을 악용한다(지난 기사 참고: ). 공감 능력이 과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만족시켜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이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사람을 에코이스트(echoist)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에게 저주를 받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 메아리처럼 따라하게 된 에코라는 인물에서 따왔다. 나르시시스트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면, 에코이스트는 자기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 자신감이 부족해 자기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남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특징이다.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감정을 살피고 신경 쓴다면, 스스로를 너무 부족하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약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타인의 상태를 더 살피고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자녀 일에 과잉 공감하며 일희일비하기 쉬운 부모라면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 잠시 방문을 닫고 혼자 5분 휴식을 취하는 것부터 낮잠, 여행 등 뭐든 좋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무감각과 냉담함, 번아웃을 물리칠 수 있다. 이 교수는 “공감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과하거나 편향될 때 나타나는 공감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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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곤한 ‘공감 왕’… 좋은 마음도 과하면 독이 된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윤민지 씨(가명·29)는 친구들 사이에서 ‘태평양 오지랖’으로 통한다. 남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들어주고 도와주는 ‘공감 왕’이라서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회사 동기의 전화를 끊기 어려워 밤새 들어주다 다음 날 지각한 적도 있다. 다른 사람 일 도와주느라 정작 자기 일을 끝내지 못해 야근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누군가 도와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윤 씨는 “가족들은 ‘그러다 네가 골병든다’고 타박하지만, 차라리 내가 피곤한 게 마음 편하다”고 말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도 문제지만, 과하게 넘쳐흐르면 오히려 ‘공감 피로’ 또는 ‘공감 스트레스’를 겪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남에게 공감해 주다 지친 상태를 말한다. 공감 피로라는 말은 원래 환자를 돌보면서 정서적 소진을 겪는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처음 사용됐다. 남들보다 ‘공감의 촉’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직업과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 피로를 겪을 수 있다. 1일자 기사 ‘공감 능력 제로 탈출법’에서 연습을 통해 부족한 공감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아봤다면, 이번에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공감이 흘러넘쳐 피곤해지는 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공감 잘하는 부모 몸에 염증 더 많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의대 임상 조교수이자 작가인 주디스 올로프 박사는 공감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의 감정적 경계가 흐린 사람을 ‘초민감자(empath)’라고 지칭했다. ‘공감 능력자’라고도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 기분을 잘 알아채고 △남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 감정을 내 감정인 양 느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라 자신은 소홀히 하는 특징을 가졌다. 감정 전이(轉移)에 민감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스트레스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남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아 쉽게 지친다. 이런 사람들은 공감 피로를 느끼기 쉽다. 공감할 때 필요한 인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과하게 사용하다가 금세 바닥이 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상대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생각을 억압하게 되는데, 이때 몸은 이 과정을 스트레스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염증 반응까지 나타난다. 그 대상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에리카 만자크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공감적인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염증 수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와 그들의 청소년(13∼16세) 자녀를 247명씩 모집해 이들의 공감 능력, 염증 수치, 스트레스, 우울 지수, 인생의 목적, 자존감 등을 검사한 결과다. 자녀에게 잘 공감하는 부모는 자녀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수시로 억압하기 때문에 몸은 스트레스를 겪는다. 같은 연구진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우울증을 앓는 자녀를 둔 공감적인 부모는 1년 뒤 몸에서 더 많은 염증 성분이 발견됐다. 우울하고 힘든 자녀 마음에 공감했을 뿐인데 그 대가가 따른 것이다. 그런데 공감적인 부모는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존감, 인생의 목적의식 등은 남들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자녀의 필요를 잘 채워 주는 좋은 부모라는 느낌이 부모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줄지라도, 몸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감 피로가 낳은 냉담함 공감 피로가 누적되면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감정적 소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의 소진을 막기 위해 무관심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TV에서 안타까운 사정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광고가 반복적으로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려 버린 적이 있다면, 그 순간 공감 피로가 누적돼 회피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재신, 이민영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대학생 212명을 네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는 울거나 화내는 인물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의 감정에 최대한 공감해 보라는 미션을 줬다. 나머지 세 그룹에는 대조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웃는 인물에 공감하기(두 번째 그룹) 울거나 화내는 인물의 성별과 나이 관찰하기(두 번째 그룹) 웃는 인물의 나이와 성별 관찰하기(네 번째 그룹) 미션을 각각 부여했다. 첫 번째 그룹만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하느라 애쓰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 다음 각 그룹에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소액이라도 기부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담긴 아프리카 기아 구제 포스터를 보여 주며 기부 의사를 물었다. 결과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해 보라고 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기부 의사가 유독 낮게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힘든 감정에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자,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 탓이다. 이재신 교수는 “공감 피로도가 높아질수록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지는 경향성이 나타났다”며 “감정적 피로가 누적되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더 이상 내밀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왜 무덤덤할까 평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남을 돕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 의료진, 심리치료사, 사회복지사, 교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비영리단체 종사자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직업을 가졌을 때 만나게 되는 환자나 고객의 부정적 감정에 지나치게 물들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감 피로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는 번아웃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파발로로대 연구진이 의사 7584명을 연구한 결과 공감 피로를 느끼는 의사들은 주관적 고통 수준이 높고, 정서적으로 무감각하며 삭막한 상태에 이르는 경향이 발견됐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피로를 더 많이 느꼈고,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성폭력 상담원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 결과에서도 피해자를 상담하면서 느끼는 공감 피로로 인해 정서적 탈진과 무감각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올로프 박사(UCLA)는 ‘순교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기분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며 자책하지 말라는 것이다. 순교자가 되지 않으려면 상대의 고통을 전부 내 것으로 끌어안지 말고 거리를 둬야 한다. 경험 많은 의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볼 때 일부러 공감 스위치를 끄는 훈련이 돼 있다. 대만 국립 양밍대 의대 연구진은 바늘로 몸을 찌르는 사진을 볼 때 의사와 일반인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뇌전도(EEG) 검사를 통해 살펴봤다. 그 결과 일반인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바늘에 찔릴 때처럼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반응했다. 의사들에게서 이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공감 못하는 의사가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사들이 주사기나 메스를 들 때마다 마치 자신이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면 그 또한 문제일 것이다. 대신 의사들은 자기 조절이나, 주의와 집중이 필요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반응했다. 연구진은 “의사들은 공감을 의도적으로 줄여 환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대신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지 인지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보다 남이 우선이라고? 공감 능력이 과하면 대인관계에서도 피로해지기 쉽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중심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공감 능력을 악용한다. 공감 능력이 과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만족시켜 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사람을 에코이스트(echoist)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에게 저주를 받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 메아리처럼 따라하게 된 에코라는 인물에서 따왔다. 나르시시스트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면, 에코이스트는 자기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 자신감이 부족해 자기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남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특징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감정을 살피고 신경 쓴다면, 스스로를 너무 부족하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약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타인의 상태를 더 살피고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자녀 일에 과잉 공감하며 일희일비하기 쉬운 부모라면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 잠시 방문을 닫고 혼자 5분 휴식을 취하는 것부터 낮잠, 여행 등 뭐든 좋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무감각과 냉담함, 번아웃을 물리칠 수 있다. 이 교수는 “공감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과하거나 편향될 때 나타나는 공감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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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감 능력도 지능 영향? 타고 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 진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을 로 알려 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남의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았니? 어딜 가나 다 똑같아.” (퇴사를 고민하는 동료에게)“육아가 얼마나 힘든데, 그냥 안 낳는 것도 방법이야.” (난임으로 걱정하는 친구에게)“요즘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래.” (암 진단을 받은 지인에게)아무리 위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상대방 입장에 제대로 서 보지 않은 채 섣불리 나오는 말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진정한 공감을 하려면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인지적 이해뿐 아니라, 정서적 감정이입과 이에 따른 배려 행동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오지랖 넓게 참견하고, 내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두고 스스로 공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악의가 있어야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듯, 의도하지 않은 ‘무례함’도 상처를 준다.주위에서 ‘공감 능력 떨어진다’고 핀잔을 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공감 능력 제로(0)’로 태어났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은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기를 수 있다. 미술이나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후천적 연습과 노력에 따라 실력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감의 기술’을 어떻게 연마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머리가 나쁘면 공감도 못한다?공감 능력은 정서 지능지수(EQ)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서 지능은 정서를 처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자신과 타인의 정서를 똑똑하게 잘 다루는 정도를 나타낸다. 정서 지능과 대비되는 인지적 지능지수(I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좋다는 오해도 있지만, 지적 능력이 공감 능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IQ보다 E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정서 지능은 살면서 여러모로 중요하다. 캐럴린 매캔 호주 시드니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진이 전 세계 4만2529명을 대상으로 한 정서 지능 관련 연구 158건을 분석한 결과 정서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정서 지능이 낮은 사람들보다 학업 성적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연구진은 “실패 극복, 환경 적응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 맺기에 더 능숙해 전반적으로 삶에서 여러 도전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 특징·다른 사람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른다·다른 사람이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다·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자신이 말할 때 누가 관심을 보이는지, 혹은 싫증을 느끼는지 구분하지 못한다·영화 등장인물이 겪고 있는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기 어렵다·토론할 때 다른 사람 관점을 고려하지 않는다·자신과 다른 생각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못한다자료: 공감 지수 검사, 공감 평가 척도한때는 EQ와 공감 능력도 IQ 비슷하게 유전적 영향이 커서 변하기 어렵다고 봤지만, 최근 공감 능력은 연습이 필요한 기술에 가깝다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아동, 성인 모두 타인과 같이 놀고 싸우고 양보하는 상호작용을 맺는 사회적 만남이 줄어들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경험 자체가 줄었다”며 “이때 상호작용 경험을 늘리려는 개인 의지에 따라 부족한 공감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력에 달린 문제이기에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연마할 수 있고, 반대로 너무 과해 괴로운 사람은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변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변한다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노력해 봤자’라는 회의적인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노력해서 남들에게 더 많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112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개발될 수 있다’는 내용을, 두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문가 인터뷰를 각각 보여 줬다. 한쪽으로 치우친 전문가 의견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그다음 이들에게 동성 결혼 합법화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반대 진영과 토론할 때 상대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공감 능력은 가변적’이라는 글을 읽은 이들은 상대를 최대한 이해해 보겠다고 했지만, ‘공감 능력은 불변한다’는 글을 읽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더욱 확신했다. 연구진은 “중요한 것은 태생적으로 공감 능력을 타고났는가가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다른 사람 신발 신어 보기’북미 원주민 샤이엔족(族)에는 ‘네 이웃의 신발을 신고 두 달 동안 걸어 보기 전에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격언이 전해 내려온다. 걸을 때 신발이 헐떡이는지, 꽉 조여서 뒤꿈치가 까지는지, 바닥에 뾰족한 돌이 잘 박히는지 등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상대방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듯, 속내를 이해하려면 철저히 그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의미다.공감 능력을 키우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다.애덤 골린스키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 37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신문 가판대 근처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남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노인의 일과를 상상해 글로 써보라고 했다. 첫 번째 그룹에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하라고 요청했고 두 번째 그룹에는 내가 사진 속 노인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세 번째 그룹에는 아무 요청도 하지 않았다.연구진은 실험에 앞서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반적으로 노인 남성에게 갖는 부정적 선입견을 알아봤다. 분석 결과 외롭고, 의존적이고, 꼰대 같고(전통을 따지고), 고집스럽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다섯 가지 특징이 추려졌다. 연구진은 실험 대상인 세 그룹에서 이 다섯 가지 묘사가 각각 얼마나 나타나는지 살펴봤다.가장 많은 선입견이 드러난 그룹은 아무 요청 사항이 없던 세 번째 그룹이었다. 선입견을 배제하라고 요청한 첫 번째 그룹에서는 다섯 가지 묘사가 세 번째 그룹보다 훨씬 적게 나타났다. 그런데 내가 노인이라고 상상하며 글을 쓴 그룹은 부정적 묘사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세 그룹 가운데 노인의 하루를 가장 긍정적이고 밝게 묘사했다.연구진은 “의식적으로 선입견을 억제하는 방법보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상대를 긍정적이고 공감하듯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다. 이후 젊은 흑인 남성 사진을 가지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이 연장선에서 연기 수업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연기야말로 상대방 신발을 신어 보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메소드 연기로 화제를 모은 배우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배역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가 없는 일상에서도 노숙자, 장애인 등의 삶을 몸소 체험했다는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심지어 이런 효과는 자폐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블라이드 코빗 미 밴더빌트대 정신의학 및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8~14세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동에게 역할극 수업을 10회 진행한 뒤 2개월 동안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해 사회적 소통 능력이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글로 배우는 공감의 효과공감 능력 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또 다른 비법은 놀랍게도 미술, 음악, 문학 같은 예술에 있다. 작가의 의도를 상상하거나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경험이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예술과 뇌과학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에릭 캔들 컬럼비아대 의대 명예교수는 저서 ‘통찰의 시대’에서 “예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창의적인 과정, 즉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 낸 인지적, 감정적, 공감적 과정을 뇌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했다.영어 단어 ‘empathy(공감하다)’는 예술 작품에 감정을 이입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의 독일어 ‘Einfühlung(감정이입)’에서 왔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예술이 반드시 미술관이나 클래식 음악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TV 드라마, 영화관, 극장, 콘서트장을 비롯해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사진 한 장, 노래 한 곡에서도 예술을 느낄 수 있다. 미국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사랑하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등장인물에 빠져드는 몰입도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문학 또한 다른 사람 입장이 돼 보는 간접적 경험을 제공한다. 주인공의 서사가 있다면 만화책도 가능하다. ‘공감은 지능이다’를 쓴 자밀 자키 미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타인과의 ‘가벼운 접촉’이라고 봤다.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맛보면서 그의 입장이 돼 보고, 현실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연구진이 전 세계에서 실시된 관련 연구 14건을 분석한 결과, 주인공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읽으면 논픽션 장르 글을 읽거나 독서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서적, 인지적 공감 능력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예술적 경험을 통한 공감으로 편견을 해소할 수도 있다. 편견 대상이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이들에게 감정이입 하는 경험을 통해 좋지 않은 인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에서 무슬림, 이민자,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난 뒤에 그동안 갖고 있던 편견이 상당 부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신 교수는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늘어난 이유는 학생은 독서하지 않고, 성인은 문학작품보다 자기계발서를 더 많이 읽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며 “여러 직·간접적 접촉 경험을 늘리는 것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고 말했다.‘공감 제로’ 성향과는 정반대로 ‘공감 과잉’으로 다른 사람 감정에 휘둘리며 늘 피곤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에 쉽게 전염되고, 여기에 맞춰주느라 사회생활에 문제가 되는 이들이 공감의 적당량을 채우며 살 방법은 없는지 다음주 기사에서 알아보겠습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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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감 능력은 연습에 달렸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남의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았니? 어딜 가나 다 똑같아.” (퇴사를 고민하는 동료에게) “육아가 얼마나 힘든데, 그냥 안 낳는 것도 방법이야.” (난임으로 걱정하는 친구에게) “요즘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래.” (암 진단을 받은 지인에게) 아무리 위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상대방 입장에 제대로 서 보지 않은 채 섣불리 나오는 말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진정한 공감을 하려면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인지적 이해뿐 아니라, 정서적 감정이입과 이에 따른 배려 행동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오지랖 넓게 참견하고, 내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두고 스스로 공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악의가 있어야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듯, 의도하지 않은 ‘무례함’도 상처를 준다. 주위에서 ‘공감 능력 떨어진다’고 핀잔을 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공감 능력 제로(0)’로 태어났기 때문일까. 반대로 ‘공감 과잉’으로 다른 사람 감정에 휘둘리며 늘 피곤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공감이 메마르거나, 과하게 흘러넘쳐 사회생활에 문제가 되는 이들에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공감의 ‘골디락스’로 갈 방법은 없는지 상, 하편에 걸쳐 알아보자.● 머리가 나쁘면 공감도 못한다? 공감 능력은 정서 지능지수(EQ)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서 지능은 정서를 처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자신과 타인의 정서를 똑똑하게 잘 다루는 정도를 나타낸다. 정서 지능과 대비되는 인지적 지능지수(I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좋다는 오해도 있지만, 지적 능력이 공감 능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IQ보다 EQ가 높아야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한때는 EQ와 공감 능력도 IQ 비슷하게 유전적 영향이 커서 변하기 어렵다고 봤지만, 최근 공감 능력은 연습이 필요한 기술에 가깝다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아동, 성인 모두 타인과 같이 놀고 싸우고 양보하는 상호작용을 맺는 사회적 만남이 줄어들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경험 자체가 줄었다”며 “이때 상호작용 경험을 늘리려는 개인 의지에 따라 부족한 공감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노력해 봤자’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보다는 ‘노력해서 남들에게 더 많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112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개발될 수 있다’는 내용을, 두 번째 그룹에는 ‘공감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문가 인터뷰를 각각 보여 줬다. 한쪽으로 치우친 전문가 의견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다음 이들에게 동성 결혼 합법화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반대 진영과 토론할 때 상대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공감 능력은 가변적’이라는 글을 읽은 이들은 상대를 최대한 이해해 보겠다고 했지만, ‘공감 능력은 불변한다’는 글을 읽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더욱 확신했다. 연구진은 “중요한 것은 태생적으로 공감 능력을 타고났는가가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다른 사람 신발 신어 보기’ 북미 원주민 샤이엔족(族)에는 ‘네 이웃의 신발을 신고 두 달 동안 걸어 보기 전에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격언이 전해 내려온다. 철저히 상대방 입장이 돼 보기 전에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다. 애덤 골린스키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 37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신문 가판대 근처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남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노인의 일과를 상상해 글로 써보라고 했다. 첫 번째 그룹에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하라고 요청했고 두 번째 그룹에는 내가 사진 속 노인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세 번째 그룹에는 아무 요청도 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실험에 앞서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반적으로 노인 남성에게 갖는 부정적 선입견을 알아봤다. 분석 결과 외롭고, 의존적이고, 꼰대 같고(전통을 따지고), 고집스럽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다섯 가지 특징이 추려졌다. 연구진은 실험 대상인 세 그룹에서 이 다섯 가지 묘사가 각각 얼마나 나타나는지 살펴봤다. 가장 많은 선입견이 드러난 그룹은 아무 요청 사항이 없던 세 번째 그룹이었다. 선입견을 배제하라고 요청한 첫 번째 그룹에서는 다섯 가지 묘사가 세 번째 그룹보다 훨씬 적게 나타났다. 그런데 내가 노인이라고 상상하며 글을 쓴 그룹은 부정적 묘사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세 그룹 가운데 노인의 하루를 가장 긍정적이고 밝게 묘사했다. 연구진은 “의식적으로 선입견을 억제하는 방법보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상대를 긍정적이고 공감하듯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다. 이후 젊은 흑인 남성 사진을 가지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 연장선에서 연기 수업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연기야말로 상대방 신발을 신어 보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블라이드 코빗 미 밴더빌트대 정신의학 및 심리학과 교수 팀 연구에서도 이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코빗 교수 팀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8∼14세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동에게 역할극 수업을 10회 진행한 뒤 2개월 동안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해 사회적 소통 능력이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글로 배우는 공감의 효과 공감 능력 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또 다른 비법은 놀랍게도 미술, 음악, 문학 같은 예술에 있다. 작가 의도를 상상하거나,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경험을 많이 할수록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 신발을 신어 보는 경험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예술과 뇌과학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에릭 캔들 컬럼비아대 의대 명예교수는 저서 ‘통찰의 시대’에서 “예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창의적인 과정, 즉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 낸 인지적, 감정적, 공감적 과정을 뇌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영어 단어 ‘empathy(공감하다)’는 예술 작품에 감정을 이입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의 독일어 ‘Einfhlung(감정이입)’에서 왔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예술이 반드시 미술관이나 클래식 음악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TV 드라마, 영화관, 극장, 콘서트장을 비롯해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사진 한 장, 노래 한 곡에서도 예술을 느낄 수 있다. 미국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사랑하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등장인물에 빠져드는 몰입도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학 또한 다른 사람 입장이 돼 보는 간접적 경험을 제공한다. 주인공의 서사가 있다면 만화책도 가능하다. ‘공감은 지능이다’를 쓴 자밀 자키 미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타인과의 ‘가벼운 접촉’이라고 봤다.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맛보면서 그의 입장이 돼 보고, 현실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연구진이 전 세계에서 실시된 관련 연구 14건을 분석한 결과, 주인공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읽으면 논픽션 장르 글을 읽거나 독서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서적, 인지적 공감 능력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술적 경험을 통한 공감으로 편견을 해소할 수도 있다. 편견 대상이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이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통해 좋지 않은 인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에서 무슬림, 이민자,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문학작품을 읽고 난 뒤에 그동안 갖고 있던 편견이 상당 부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신 교수는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늘어난 이유는 학생은 독서하지 않고, 성인은 문학작품보다 자기계발서를 더 많이 읽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며 “여러 직·간접적 접촉 경험을 늘리는 것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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