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간호사 비례대표에게 ‘의대 증원’ 물어보니 [복지의 조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9일 14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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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는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보건의료 정책이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료계 일각에선 ‘총선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자’는 기류도 있다고 합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 계획을 철회하거나 대폭 물러선 수정안을 내놓을 거란 기대겠죠. 다른 쪽에선 야당 대다수도 의대 증원에 반대하지 않는 만큼 총선 결과가 큰 영향이 없을 거란 분석도 나옵니다.

어느 쪽이든, 의료계와 정부 둘 다 ‘2000명’의 대안을 먼저 제시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건 명백합니다. 정부·여당은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면서도 어떤 조건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사 단체도 “2000명은 너무 많다”면서도 대안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대치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사고팔 때 “당신이 먼저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겠다”며 서로 버티는 것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서로 ‘당신이 생각하는 적정한 의대 증원 규모를 먼저 말해보라’며 기 싸움을 하는 모습은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거래할 때 유리한 가격을 유도하기 위해 ‘선(先)제시’를 요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정부와 의료계가 서로 ‘당신이 생각하는 적정한 의대 증원 규모를 먼저 말해보라’며 기 싸움을 하는 모습은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거래할 때 유리한 가격을 유도하기 위해 ‘선(先)제시’를 요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동아일보 취재팀은 2~4일 주요 정당의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의대 증원의 규모와 방식 △의료공백 혼란에 대한 견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수의료 대책 3가지와 그 이유 등을 물었습니다.

이들을 인터뷰한 건 다양한 필수의료 정책이 입법으로 현실화할 22대 국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는 소속 정당을 대표하지 않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진행했지만, 각 직역을 대표해 선발됐고 상당수가 당선권인 만큼 지금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를 내지 않았거나 비례대표가 일정상 인터뷰에 응하지 못한 원내정당 3곳(새로운미래, 자유통일당, 진보당)에는 각 정당의 공식 입장을 물어서 답변받았습니다.

● 비례대표 5명 중 4명은 “의대 증원 필요”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 중 4명은 증원에 찬성했습니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더불어민주연합 비례12번)는 ‘숫자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최소 1000명은 한 번에 증원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김 교수는 ‘점진적 확대’ 주장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만약 2025학년도에 의대 정원을 500명을 증원하면 나중엔 3000명 넘게 늘려야 할 수도 있는데, 점진적 확대를 주장하려면 ‘지금’ 말고 ‘나중에’ 얼마나 늘릴지도 제시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견해입니다.

한지아 을지대 의대 교수(국민의미래 비례11번)는 “증원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지금 구체적인 숫자를 못 박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 교수는 “양질의 의사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 여건을 고려하고 (의대) 학생 의견도 들으며 세밀하게 조율해야 한다”는 단서도 붙였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선민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조국혁신당 비례5번)도 “의대 증원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서 “함께 추진하는 정책과 수용 가능성에 따라 (적절한) 증원 규모는 달라진다”라며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 출신인 나순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녹색정의당 비례1번)은 “정부의 2000명 증원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나 전 위원장은 그중 500명을 지역 공공 의대에서 선발하고 학비를 전액 지원하되 지역에서 10년간 의무 복무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늘어난 의사 인력이 특정 전문과목이나 수도권으로 쏠리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유일하게 의대 증원에 반대 의사를 밝힌 보건의료인 출신 비례대표는 이주영 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개혁신당 비례1번)였습니다. 이 전 교수는 “지금 시점에서는 의대 증원에 찬성할 수 없다”라며 “다른 필수의료 대책이 선행돼야 하고, 필요한 의사 인력의 규모는 과학적으로 추계해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교수는 국내 의료체계를 두고 “이미 망가졌다”라고 표현하며 “여기에 (의사를) 더 쏟아붓는 건 더 빨리 망가뜨리는 것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른 원내정당 3곳은 모두 의대 증원에 찬성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향후 10년간 매년 의대 정원을 전년 대비 15~20% 늘리고 주기적으로 평가해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연평균 500~600명을 늘리자는 겁니다. 자유통일당은 5년간 2000명 증원하거나 10년간 1000명 증원해 ‘10년간 총 1만 명 증원’ 방안을 내놨습니다. 진보당은 최소 1000명 증원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더 늘려야 한다고 봤습니다.

● “의대 증원, 사회적 대화기구서 논의하고 의사들도 참여해야”
의료공백 혼란의 책임이 정부와 의료계 중 어느 쪽에 더 무거운지는 응답자마다 의견이 갈렸지만, 공통으로 나온 답변은 “의료계가 정부의 대화 제의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선 의사·간호사 출신 비례대표 5명뿐 아니라 나머지 원내정당 3곳의 공식 입장이 일치했습니다.

의대 증원에 반대한 이주영 전 교수도 “정부 대책 중엔 의료계가 주장해 온 것도 많다”라며 “의사들은 정부가 손을 내밀면 너무 강경하게 내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져주면서 합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는 “의료계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져 있다’고 하지만, 국민이 보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라며 “국민을 설득하려면 그래도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선민 전 원장은 “양측 모두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환자단체 등 각계가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 기구를 마련해 이번 사태의 해결 방안을 논의하자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나순자 전 위원장은 “의정 합의가 가능하지 않다면 하루빨리 ‘국민 참여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윤 교수도 “의대 증원 폭을 다른 정책과 연계해 조정해나가되, 이는 (의사뿐 아니라) 여러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라며 “예컨대 ‘진료지원(PA) 간호사를 합법화하면 의대 증원 폭을 15% 줄일 수 있다’는 식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

새로운미래와 진보당도 시민사회가 포함된 사회적 대타협(논의) 기구를 설치해 의대 증원을 포함한 종합 로드맵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 필요한 정책 1위는 ‘필수의료 보상 강화’-‘공공병원 확충’
비례대표 5명과 원내정당 3곳에는 “의대 증원 외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수의료 정책 3가지와 그 이유를 말해달라”는 질문도 공통으로 던졌습니다. 제가 정말로 궁금한 건 이거였습니다. 의대 증원은 법적으로 정부가 결정할 수 있지만, 의료소송 부담 완화나 PA 간호사의 업무 범위 확대 등은 다양한 법 개정과 예산 심의 등 국회 내 합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공공병원 확충’이었습니다. 둘 다 4명(곳)이 꼽았습니다. 늘어난 의사를 필수의료 분야로 유인하려면 해당 분야의 건강보험 수가를 높이는 등 보상을 강화하고, 공공병원을 늘려 의료에 대한 정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관련해 이주영 전 교수는 “필수의료 수가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이에 따른 보상을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의료기사 등에 나누자”고 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도 “고위험 고난도 의료행위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정부가 2월 1일 발표한 ‘필수의료 4대 개혁’에 담긴 내용이기도 합니다.

공공병원 확충의 경우 나순자 전 위원장과 김선민 전 원장 등이 찬성했습니다. 나 전 위원장은 “전국 70개 중진료권마다 500병상 이상의 선진국형 공공병원(지역책임의료기관)을 지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 전 원장은 “인구소멸 지역 등 시장실패가 일어나는 지역에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미래는 현재 병상 과잉인 상황을 고려해 지역 민간병원을 국가가 인수해 공공병원으로 운영하는 방식을, 진보당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에 공공병원을 추가하는 방식을 각각 제시했습니다.



● ‘노인 돌봄부터 해결’ 제안이 주목되는 이유
비례대표 3명이 공통으로 꼽은 ‘간병 등 노인돌봄 체계 정비’에 주목합니다. ‘필수의료’라고 하면 흔히 심뇌혈관 수술이나 중증외상 치료, 응급 분만 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노인돌봄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앞으로 필수의료도 가망이 없다는 시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급속한 고령화 때문입니다. 노인 환자 대다수가 생애 말기 몇 년간 간병을 받다가 요양시설에서 숨을 거두는 현 구조라면 의사를 아무리 늘린들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임종을 앞둔 노인 암 환자에게 1년 동안 투입되는 ‘생애 말기 1년’ 의료비가 평균 4000만 원이 넘는다는 연구(2016~2019년) 결과가 있습니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에 지병이나 노환으로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 한 분 정도는 있지 않으신가요? 아마 가족 중 한 분은 벌이를 포기하고 어르신을 돌보거나 전문 간병인을 고용하느라 한 달에 200만 원 안팎을 지출하실 겁니다. 그런데 국내 80세 이상 인구가 올해 238만 명에서 2054년 829만 명으로 3.5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전 세계에 자랑하는 우리의 우수한 건강보험도 머잖아 한계를 맞게 될 겁니다.

지난해 8월 16일 치매 환자 김옥단 씨(88·왼쪽)가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강서구치매안심센터 소속 작업치료사와 함께 TV를 보며 인지 기능에 도움이 되는 운동 동작을 따라 하고 있습니다. 이 센터는 지난해 관내 치매 환자 36명을 선별해 주 1회 방문 서비스를 했습니다. 이런 밀착 관리가 아니었다면 상태가 악화해 요양시설에 입소할 가능성이 작지 않았던 환자들입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많은 비례대표와 정당이 간병 등 노인돌봄 체계의 정비를 시급한 필수의료 대책으로 꼽은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입니다. 김선민 전 원장은 ‘간병비 급여화’를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김 전 원장은 “지금 국민의 허리를 가장 휘게 만드는 간병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사적 영역에 맡겨진 돌봄과 간병 서비스를 공적 영역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순자 전 위원장은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공공병원과 상급종합병원,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 등으로 전면 확대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윤 교수는 “장기요양 노인이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고 방문간호, 노인 주치의 제도 등을 전면 도입하면 의료 수요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역 의료기관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필수의료 대책으로 꼽은 비례대표와 정당도 3명(곳)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정책입니다. 김윤 교수는 “지역 내 병원끼리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해당 지역 병·의원이 다 보상받는 식으로 틀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지아 교수도 “지역 내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네트워크와 협력 체계 구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여론의 관심은 한정된 자원입니다.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보건의료 분야에서 개혁할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의대 증원은 그중 아주 작은 조각 하나일 뿐입니다. 거기 매몰돼 흘려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걸 가장 아까워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정부와 의료계입니다. 의료계가 전문적인 식견을 보태고 정부가 이를 세밀하게 조율해 나가야 할 과제가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만에 하나 의료계 일부 강경파의 주장대로 의대 정원을 동결한다고 칩시다. 그럼 과연 여론이 다른 보건의료 분야의 개혁은 용인할까요. 의료소송 부담을 완화하는 제도가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건강보험료율의 법정 상한(8%)을 높이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집단으로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의 7대 요구안 중 첫 번째가 ‘의대 증원 계획 및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전면 백지화’라고 합니다. 어떤 소설에 나온 말처럼 심지가 심지로 남고 초가 초로 남아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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