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의사는 왜 서로를 못 믿나 [복지의 조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7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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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한 달 넘게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26일 윤석열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을 짤 때 보건의료 분야 투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며 의료계와 의료 예산을 함께 논의할 것을 참모진에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같은 날 한덕수 국무총리는 의료계·교육계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공식적으로 마주한 건 지난달 6일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의 제28차 의료현안협의체 회의가 파행한 후로 처음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수습할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날 의협 회장으로 당선된 임현택 회장은 정부와 대화할 조건으로 대통령의 사과와 의대 증원 백지화를 요구하며 강경 노선을 예고했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 의대에서 열린 의료 개혁 관련 현안 논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건 지난달 6일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의 제28차 의료현안협의체 회의가 파행한 후로 처음입니다. 사진공동취재단


● “필수의료 대책 병행” vs “못 믿겠다” 평행선
정부와 의료계의 가장 첨예한 논쟁은 ‘의대 정원 2000명을 한꺼번에 늘리는 게 맞느냐’는 건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이런 주장이 되풀이됩니다.

정부 “의대 정원만 늘릴 거 아니다. 필수의료 살릴 다른 정책도 할 거다.
의사 “알맹이가 없어서 믿을 수 없다. 정원 말고 다른 정책은 뒷전 아닌가.”

도돌이표도 이런 도돌이표가 없습니다. 정부가 2월 1일 발표한 ‘필수의료 4대 개혁’의 핵심 내용은 △의사를 늘리고(의대 증원) △이들을 필수의료 분야로 유인하고(공정 보상) △특히 지역에 주로 배치하고(지역의료 강화) △의료소송 부담을 덜어주는 것(의료사고 안전망)입니다.

이는 큰 틀에서 의료계도 찬성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의료 소송 부담 완화는 의협이 강력히 주장해온 방안입니다. 의사가 종합보험 등에 가입하면 의료사고가 나도 형사재판을 피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인데, 오히려 그간 정부가 환자단체를 설득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에 머물러왔습니다. 이번에 아예 ‘추진’이라고 못 박은 건 큰 변화입니다.

정부가 2월 1일 발표한 ‘필수의료 4대 개혁’ 주요 내용.
의료계의 지적은 정부의 대책이 선언적이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재원과 실행 계획이 없다는 거죠. 정부 발표 자료를 뜯어보면 전공의 연속근무 시간 단축 등 대다수 방안이 전면 시행이 아닌 시범사업 대상이긴 합니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서 향후 논의하자며 결정을 미룬 내용도 많습니다. 연내 시행이 확정된 건 지역 거점 국립대병원의 인건비 규제를 풀어주는 등 몇 가지입니다.

보건의료 정책을 바꿀 땐 웬만한 비상사태가 아니면 점진적으로 대상과 범위를 넓히는 게 보통입니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큰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직군의 이해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급진적인 전면 개혁안이 뜻밖의 부작용을 낳으면 ‘이 산이 아닌가 벼’라며 가벼이 선회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방향이 맞고 실행 의지가 확고하다면 구체적인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마냥 깎아내릴 일은 아닙니다. 논의에 참여하는 당사자가 서로 합의한 목표를 위해 최선의 대안을 내놓고,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경제적·정치적 손해도 감수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구체적 계획이 없다는 건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신뢰’라는 핵심적인 사회 자본이 정부와 의료계 사이에 바닥난 상태라는 점입니다.

● 둘 다 책임 있는데 서로 ‘네 탓’만… 지켜보는 국민만 초조
정부가 의료계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길게 논하지 않겠습니다. 의대 정원이 동결된 지난 18년간 의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의사단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리면 답이 나옵니다. 정부가 ‘의대 증원을 1년 미루고 의사 수요를 과학적으로 추계해보자’라는 의료계 일각의 제안을 일별도 하지 않은 건 근본적으로 누구의 책임일까요. 사실 이 지점에서는 국민 대다수도 의사단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의사는 정부가 의사를 ‘악마화’했고 국민이 거기 속아 넘어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국민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럼 의료계는 정부를 왜 믿지 못할까요. 정부의 지난 10년을 되짚어보면 됩니다. 정부는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인해 △대형병원 쏠림 △필수의료 의사 부족 △지역의료 붕괴 △부실한 환자·병상 정보 공유 시스템 등 의료체계의 병폐가 드러나자 2년 넘게 ‘의료전달체계 개선 협의체’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권고문도 채택하지 못한 채 활동을 종료했습니다. 2017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일명 ‘문재인 케어’) 발표 이후에도, 2019년에도 비슷한 협의기구를 마련했지만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정책이 발표로만 남고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은 겁니다.

15일 보건복지부 주최 ‘의료개혁 정책 토론회 - 상생의 의료전달체계’에서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발제한 내용 일부. 정부는 그간 의료체계를 뜯어고치겠다며 2, 3년마다 협의기구를 꾸렸지만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정책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보건복지부 유튜브 캡처
특히 정부는 건강보험료 인상이나 경증 환자의 대형병원 이용 제한처럼 정치적인 부담이 뒤따르는 개혁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자기공명영상(MRI) 등 비싼 검사에 건보 혜택을 대폭 넓히면서도 현행법상 건보료율의 상한(8%)을 그대로 방치했고, 윤석열 정부는 노인 외래 정액제 개편을 쏙 뺀 건보 종합계획을 내놨습니다.

이번엔 보건복지부 장관뿐 아니라 국무총리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꼭 추진할 테니 믿어달라’는데도 의사들이 회의적인 배경엔 이런 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10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필수의료 정책도 공수표 아니냐는 거죠. 여기에 ‘다른 정책은 다 점진적·시범적인데 어째서 의대 증원만 전면적·확정적인가’라는 의문이 더해지면서 불신은 커졌습니다.

정부 대책이 구체적이지 않으니 이번에도 실패할 거란 얘기가 아닙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 “환자는 ‘절망스럽다’ 말할 처지조차 못 돼” 호소 안 들리나
의료계가 신뢰를 회복할 방법은 단순합니다. 이제라도 논의의 장으로 나오는 겁니다.

네, 압니다. 평생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는 일념으로 필수의료에 종사했는데 그 자부심이 짓밟혔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끼고 계시지요. 그동안 ‘미숙아 살릴 중환자실 병상 한 자리라도 늘려달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바뀌는 게 없더니 이제는 그 모든 노력을 ‘돈타령’이나 ‘밥그릇 지키기’로 치부하는 것 같아 황당함을 넘어 허탈감이 들 겁니다.

하지만 그 좌절과 허탈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죽어가는 환자의 것에 비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야말로 의료 개혁이 좌초되지 않을 수 있도록 전문가의 식견을 보태주십시오.

정부가 신뢰를 회복하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지금 비상조치로 시행 중인 대책 중 효과가 검증된 것은 사태 종료 후에도 유지한다고 약속하는 겁니다. 정부는 11일부터 대형병원 응급실이 경증 환자를 인근 중소병원 응급실로 돌려보내거나 중앙응급의료센터로부터 수용 곤란 중증 환자를 배정받으면 돈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십여 년간 대형병원 응급실 과밀화를 해소할 방안으로 거론됐지만 전공의의 공백을 메울 임시방편으로 갑자기 현실화했습니다. 이런 제도를 어떻게 살려 나갈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주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인기 없는 정책을 직시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더 줄지”보다 “누구에게 얼마를 ‘덜’ 줄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필수의료 투자를 늘리려면 누군가는 돈을 더 내거나 기존 혜택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걸 공개하고 설득하는 게 정부의 역할입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국민은 답답하고, 환자는 초조합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25일 성명을 내고 “환자는 지금 절망에 빠진 심정을 소리높여 말할 처지조차 되지 못한다. 환자에게는 지금 당장 의사들이 필요하다. 정부와 의료계는 각자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를 위해 나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의사와 정부는 이 호소를 귓등으로라도 듣고 있습니까.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필수의료#의대증원#복지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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