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우산 회장이 전한 현장 이야기…“아이들은 놀 시간조차 없다”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이 한국 아동 현실을 짚었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며 자선 넘어 삶을 바꾸는 ‘임팩트 복지’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진=최강주 기자 gamja822@donga.com
어린이날을 앞둔 5월,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고 묻자 돌아온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놀 시간을 주세요.”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74)은 아동복지 현장에서 마주한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됩니다. 교육 지옥에 놓여 있고, 꿈을 가질 여유조차 없습니다.”
가족을 돌보느라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 생계와 학업 사이에서 버티는 아이들, 온라인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아이들까지. 그는 “단순한 자선으로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며, 삶의 궤적 자체를 바꾸는 ‘임팩트 중심 복지’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황 회장은 이번 인터뷰에서 복지의 방향을 단순한 지원을 넘어,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현장에서 쌓인 경험에서 출발했다.
● 금융에서 복지로…“숫자로는 설명이 안 된다”
삼성증권 사장, 우리금융지주 회장, KB금융지주 회장. 황 회장의 이력은 한국 금융권의 굵직한 자리를 관통한다. 그는 오랫동안 ‘성과’와 ‘결과’로 평가받아왔다.
“금융은 숫자로 평가받는 영역이고, 복지는 숫자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원 규모와 후원 금액, 수혜 인원은 분명 중요한 지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복지 사업이 실제로 사회를 얼마나 바꿨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묻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단기 성과 중심의 평가 방식이 반복될수록, 장기적인 삶의 변화는 지표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 질문이 방향을 바꿨다.
● 삶을 바꾸는 복지…‘임팩트’에 주목하다
초록우산 황영기 회장이 경기 소재 특수교육기관 한사랑학교 아동이 직접 그린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최강주 기자 gamja822@donga.com
황 회장이 꺼낸 키워드는 ‘임팩트’다.
“120만 명을 얇게 돕는 것보다, 30명의 삶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가 말하는 임팩트는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삶의 궤적을 바꾸는 개입’이다. 복지는 일정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로 설계돼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주배경아동의 경우 단순한 생계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언어 적응과 교육, 또래 관계 형성이 함께 이뤄지지 않으면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통합적인 지원이 병행될 때 비로소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자립준비청년도 마찬가지다.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기존 방식은 단기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반면 취업과 사회 적응까지 이어지는 멘토링, 생활 관리, 진로 설계가 함께 이뤄지면 결과는 달라진다.
“돈을 주는 건 자선입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건 임팩트입니다.”
● “복지는 쉽게 흔들리면 안 된다”
복지 조직의 속성에 대한 인식도 분명했다.
“복지재단은 쉽게 흔들리면 안 됩니다.”
후원자 신뢰와 대상자의 안정성을 위해 급격한 변화는 위험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변화를 멈출 수 없다고 봤다.
이를 위해 기업 경영에서 쓰던 전략 방식을 적용했다. 2030년까지의 비전 설정, 단계별 목표, 실행 시점과 재원 계획까지 성과와 임팩트 중심으로 체계화하는 방식이다.
“막연한 비전은 꿈입니다. 누가, 언제까지, 무엇을 할지 정해야 계획이 됩니다.”
조직의 평가 기준도 바뀌고 있다. 단순 지원 인원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성과로 보는 구조로 옮겨가는 중이다.
● 가족돌봄·이주배경…복지 사각지대를 파고들다
초록우산 황영기 회장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최강주 기자 gamja822@donga.com
초록우산은 가족돌봄아동, 이주배경아동, 자립준비청년, 위기영아 등 복지 사각지대에 집중하고 있다. 연간 예산은 약 3000억 원 규모다.
특히 가족돌봄아동 문제는 제도 밖에 머물러 있던 영역이었다. 부모의 질병이나 장애로 어린 나이에 돌봄 책임을 떠안은 아이들이다.
그는 이를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현장 발굴과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 관심을 끌어올렸고, 법 제정까지 이어냈다. “복지단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법을 바꿔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문제는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지나치게 앞당겨져 있다는 점이다. 가족 돌봄과 생계, 학업이 동시에 얹히면서 일상 자체가 유지의 문제가 되는 구조다.
그는 이러한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지원 효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아이들이 일상과 성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의 개입이다.
● “온라인엔 보호구역이 없다”…새로운 위험
“길거리에는 어린이 보호구역이 있는데, 온라인에는 없습니다.”
아동의 생활 공간이 디지털로 확장되면서 위험도 함께 커졌다는 진단이다. 그는 플랫폼 기업의 책임을 강조했다.
“플랫폼이 유해 콘텐츠를 식별하고 제거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초록우산은 최근 조인철 민주당 의원과 국회 기자회견을 열고 디지털 환경에서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법·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플랫폼의 위험평가와 유해 콘텐츠 차단 의무 강화를 요구했다.
● 한 장의 봉투, 그리고 바뀐 삶
아동 가정이 초록우산으로 전달한 편지. 사진=초록우산 제공.
그가 말하는 ‘임팩트’는 현장에서 더 또렷해진다.
한 번은 10만 원이 든 봉투가 재단으로 도착했다. 과거 도움을 받았던 가정의 자녀가 대학에 진학한 뒤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보낸 돈이었다.
“이런 게 삶이 바뀐 사례입니다.”
단순 지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바뀌고, 그것이 다시 사회로 이어지는 구조. 그는 그 지점을 복지의 목표로 보고 있다.
● “아이들은 왜 꿈을 갖지 못할까”
“요즘 아이들을 보면 꿈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짧은 자극에 익숙한 환경, 그리고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 속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할 여유 자체를 잃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질문에 잠시 말을 멈췄다.
“결국 남는 건 두 가지입니다. 꿈과 자존감입니다.”
현실을 버텨내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힘. 그는 그 두 가지가 있어야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봤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질문은 하나다.
지금의 복지는 아이들의 삶을 바꾸고 있는가.
‘함께미래 리더스’는 공익 현장의 리더들이 어떤 선택과 결정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왔는지, 그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통해 미래를 묻는 인터뷰 시리즈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최강주 기자 gamja8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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