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남한서 공무원 되다니… 실감 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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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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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 11명 경기지역 근무… 탈북자 지원 상담
학습동아리 ‘경기백두회’ 결성 올 첫 모임 가져

12일 오후 6시 반. 경기 수원시 팔달산 자락에 위치한 경기지사 공관에 10여 명의 남녀가 모였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누군가가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함경북도 청진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누군가는 “함북 회령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대화에는 군데군데 북한 말투가 섞여 있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바로 ‘경기백두회’ 회원들이다. 이름만 들어서는 간첩활동을 하는 이적단체가 연상되지만 이들의 신분은 어엿한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경기백두회는 경기도와 수원시 등 경기지역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하는 새터민 출신 공무원들이 만든 동아리다. 지난해 12월 결성된 경기백두회의 첫 정기 모임이 이날 경기지사 공관에서 열린 것이다.

○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

평일 오후 2시가 되면 이현자(가명·43·여) 씨는 수원시 자치행정과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가 맡은 업무는 새터민들의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한 지원 및 상담. 1일 4시간의 짧은 근무지만 매일 2, 3건씩 전화나 면접 상담을 한다. 이 씨는 “하나원에서 적응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새터민들에게는 증명서 한 장 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지금은 새터민들의 손발이 돼 일하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 씨 역시 절망 속을 헤매던 새터민이었다. 청진시에 살던 이 씨가 아들과 함께 북한을 탈출해 입국한 것은 2008년 11월. 북한 외국어고등학교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똑똑한 아들의 장래를 위해 선택한 탈북의 길이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먹고살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기 위해 식당 일을 하며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그러던 중 지난해 6월 수원시에서 새터민 공무원 채용 소식을 듣고 원서를 넣어 당당히 합격했다. 이 씨는 “남한에서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라며 “다른 새터민들이 너무 부러워해 미안할 정도”라고 말했다.

용인시에서 일하는 한진희(가명·35·여) 씨 역시 2006년 탈북한 새터민이다. 해령시가 고향인 한 씨는 중국과 몽골 등지에서 갖은 고생 끝에 2007년 9월 남한에 들어왔다. 이후 용인에 터를 잡고 할인매장 계산원과 식당 일을 하며 초등학생인 아들 뒷바라지를 하다 지난해 9월 용인시에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됐다. 한 씨는 “무엇보다 자식 앞에 떳떳해질 수 있어서 좋다”며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사이버대학에도 입학했다”고 말했다.

○ 통일의 디딤돌 되길

새터민을 공무원으로 채용한 것은 2008년 8월 경기도 제2청이 처음이다. 이어 수원시가 지난해 6월 기초자치단체 중 최초로 이 씨를 채용했다. 뒤늦게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1월 경기도의 새터민 채용 정책을 벤치마킹한 지침을 전국에 내려보냈다. 현재 경기지역 새터민 출신 공무원은 11명까지 늘어났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경기백두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새터민 관련 제도를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일종의 학습동아리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수시로 의견을 나누고 2개월에 한 차례씩 정기 모임을 갖는다. 첫 모임은 설 연휴 전인 12일 김문수 경기지사의 초청으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회원들은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갖게 해줘서 감사하다”며 “다만 앞으로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도 검토해 달라”고 건의했다. 김 지사는 “새터민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다”며 “여러분이 잘해주셔야만 앞으로 더 많은 새터민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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