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아내 性추행’ 첫 유죄 선고

  • 입력 2004년 8월 20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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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성추행하고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한 남편에 대해 법원이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최완주·崔完柱)는 20일 아내를 강제로 추행한 혐의(강제추행치상)로 불구속 기소된 김모씨(45)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판결 내용과 의미=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인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두 손을 꺾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강제로 추행해 다치게 했으므로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부부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첫 판례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성행위를 할 때 당사자의 능동적인 의사가 존중돼야 한다는 것.

재판부는 “남편이 부인의 팔을 억지로 꺾는 등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당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혼인은 부부가 서로의 성적 요구에 응한다는 약속을 포함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부부강간에도 적용”=이 판결은 강제추행에 관한 판결이지만 ‘부부강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의 피고인은 강제추행은 했지만, ‘강간’의 요건인 성교에는 이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1970년 3월 “아내가 간통죄 고소를 취하한 뒤 부부간에 새 출발을 하기로 약속한 경우에는 설사 남편이 폭력을 써서 강제로 간음했다 해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강제추행에 관한 것이므로 부부 사이의 강간죄를 부정한 대법원 판례를 거스른 것이 아니고, 따라서 부부강간죄의 성립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부부 사이의 강간사건에도 이번 판결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아내는 2003년 10월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강간 및 강제추행 혐의로 남편을 경찰에 고소했다. 이후 김씨 부부는 지난달 서울가정법원에서 김씨가 재산 중 일부인 2억2000만원을 아내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이혼했다.

▽여성계 반응=여성계는 이번 판결에 대해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남편에게 아내 성폭력의 면책특권을 주었던 법관행과 사회일반의 인식이 바뀌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국여성민우회도 “지금까지의 사법적 관행을 깨뜨린 선도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강남대 박영란 교수(사회복지학부)는 “폭력적인 부부싸움 후 남편이 ‘화해’를 구실로 아내에게 성행위를 강요하거나, 이혼을 앞둔 사실상 남남인 남편이 아내를 성폭행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부 사이라도 한쪽이 원하지 않는 성행위는 강간이라는 사실을 법에 명문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부는 2001년 ‘부부간 강간죄’ 신설을 추진하려 했으나 법조계의 반발과 전통적인 부부간의 신뢰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여론에 밀려 도입 일정을 확정짓지 못했다.

▽외국의 경우=선진국에서는 형법상 부부 사이의 강간이나 강제추행치상 혐의를 인정하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1976년까지는 부부 사이의 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결혼 강간 면책(marital rape exemption)’ 법 규정이 있었으나, 이후 이 조항들을 폐기하기 시작해 1996년까지 17개 주에서 완전 폐지했다.

현재는 50개 주 모두에서 부부강간을 성폭행법에 따라 범죄로 다루고 있고, 피해자는 민사소송도 제기할 수 있다.

영국은 1994년 부부강간을 인정했고, 독일도 1997년 형법을 개정하면서 강간죄의 대상에서 ‘혼인 외 관계’ 조항을 삭제해 강간죄의 객체에 아내를 포함시켰다.

전지성기자 verso@donga.com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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