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권순택]潘장관의 ‘외교적 수사’

  • 입력 2005년 2월 21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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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은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포괄적 역동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는 데 협력하기로 미국 행정부와 다짐했다.”

10일부터 닷새 동안 워싱턴을 방문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마지막 날인 14일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밝힌 방미 결산은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북한의 돌발적인 핵무기 보유 선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적시에 미국에 도착한 반 장관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취임 후 미국을 방문한 첫 외교장관이란 기록을 세웠다.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의회 관계자와 싱크탱크 연구원들까지 두루 접촉한 반 장관이 내린 결론이 사실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반 장관이 서울로 돌아간 뒤 확인된 사실들은 외교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반 장관은 워싱턴과 서울에서 기자들에게 미국이 북한에 대한 비료 제공이나 북핵 문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미 국방부에서는 대북 비료 제공이 적절치 않다며 반대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안보리 회부에 대한 한국의 의견도 타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딕 체니 부통령이 비료 제공 중단을 촉구했다는 뉴욕타임스 12일자 보도도 반 장관은 부인했다. 하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는지, 체니 부통령이 “대북 보상 성격의 경협거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취지를 무시하려 했는지 몰라도 진실을 말했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과 일본은 19일 양국 외무 국방장관 회담을 마친 뒤 양국 장관들이 모두 참석한 기자회견을 갖고 16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한미 외무장관 회담은 공동성명도 없었다. 한국은 반 장관의 브리핑으로, 미국은 백악관과 국무부 대변인의 브리핑 답변을 통해 내용을 소개했을 뿐이다. 이 차이가 한미관계와 미일관계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17세기 영국 외교관 헨리 워턴 경이 “대사란 국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타국에 파견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외교적 수사’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외교관이 국익을 위해 애매모호한 우회적 표현을 사용하거나 심지어 거짓말까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통한다. ‘아니요’ 대신 ‘모른다’ 또는 ‘글쎄요’라고 말한다거나 ‘이견이 있었다’를 ‘솔직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반 장관의 발언은 대북정책의 차이 때문에 한미 간에 갈등이 있다는 현실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거나 불필요한 혼란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교적 수사로 이해하기에는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북한과 북핵에 대한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한국과 미국이 북핵 사태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참여정부의 외교 수장인 반 장관은 “미국 내부에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정도의 외교적 수사는 구사할 수 있었어야 했다.

권순택 워싱턴 특파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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