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대표소송땐 국민에 손해” vs “기업 불법 줄일것”[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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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탁위서 대표소송 전담 논란
국민연금 대표소송 본격 채비… 이달말 수탁위로 일원화 추진
기업 “자문기구에 책임 떠넘겨”… 시민단체 “기업가치 증대 효과”
전문가 “엄격한 소송기준 필요… 정부 입김 반영 유례없는 일”

송충현 산업1부 기자
송충현 산업1부 기자
《지난해 12월 국내 30여 개 기업들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받은 과징금 내역 등을 스스로 정리해달라는 국민연금의 공문을 받았다. 구체적인 위법 사실과 손해발생액 등을 포함해 주주가치가 훼손될 만한 징계 사실을 적어달란 요구였다. 기업들 사이에선 국민연금이 올해부터 주주대표소송을 본격화하기 위해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는 우려가 나왔다.

7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등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이달 말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 개정을 논의할 예정이다. 주주대표소송의 결정 권한을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에 일임하는 내용이다.

재계에서는 주주대표소송의 결정 주체를 수탁위로 일원화하는 것이 기업 가치와 주주 이익에 반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반면 시민단체들은 장기적인 기업 가치 상승을 위해 주주대표소송을 포함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 소송결정권의 수탁위 일원화가 논란의 핵심


현재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대표소송의 결정 권한을 기금운용본부가 아닌 수탁위가 도맡는 게 정당하냐는 점이다. 지금까지 주주대표소송은 원칙적으로 기금운용본부가 소송을 결정하고 판단이 곤란한 경우에만 수탁위에서 결정하게 했다. 하지만 지침이 현안대로 개정되면 수탁위가 소송 개시 여부를 전담하게 된다.

기업들은 국민연금법상 수탁위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심의 및 의결 사항을 사전에 검토하는 자문 역할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금운용을 책임지는 기금운용본부가 사회적 논란이 예상되는 주주대표소송을 직접 결정하지 않고 자문기구인 위원회에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주주대표소송은 투자대상 기업의 장기적 주주가치 증대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진행할 수 있다. 사실상 경영활동에 대한 모든 결정이 소송 대상에 포함되는 셈이다. 수탁위가 소송 결정권을 가질 경우 소가 남발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게 이 때문이다. 기금운용본부는 주주 이익이나 기금 수익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에 소송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반면 기금운용과 관련이 없는 수탁위는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수익률 고민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소가 남발되면 연기금과 기업은 물론 연금 가입자인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피해를 미칠 수 있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총장은 7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국민연금 대표소송, 바람직한가’ 간담회에서 “국민연금이 소송에서 질 경우 장기간에 걸친 소송 비용으로 기금의 주인인 국민만 피해자가 된다”고 했다. 이어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소송 자체로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고 주가가 떨어져 기업과 연기금 모두 손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포퓰리즘식 소송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처음 대표소송을 낸다면 아마 대기업 중 가장 덩치가 큰 곳부터 노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기업 경영 참여 강화하는 국민연금

국민연금의 주주 대표소송은 2018년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 의결권 행사 지침)가 도입되며 추진이 본격화했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전 국민연금은 중립투표 등으로 의결권을 소극적으로 행사해 왔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기업의 운영을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며 주주와 기업의 이익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며 스튜어드십코드가 도입됐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후 국민연금은 2019년 고(故)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반대 표명 등으로 본격적으로 ‘적극적 주주활동’에 나섰다. 당시 대한항공 지분의 11.56%를 가졌던 국민연금은 수탁위 자문을 거쳐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이 기업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며 반대 결정을 내렸다.

이후 자본시장법 개정 등으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길이 확대됐고 올해부턴 주주대표소송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주주대표소송 대상은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에 과거 재직했거나 현재 재직 중인 이사, 감사, 업무 관여자 등이다. 회사 임직원이 기업에 손해를 끼쳤는데 회사가 피해 복구에 미온적일 경우 주주가 기업을 대신해 해당 임직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형태다. 주주가 승소하면 기업이 손해를 배상받는다. 아직 국민연금이 대표소송을 제기한 적은 없다.

기업들은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에 주주대표소송 등 경영활동에 대한 직간접적 관여가 많아질수록 기업경영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걱정한다. 지난해 10월 기준 국민연금 기금 규모 917조8000억 원 중 국내주식 투자 규모는 17.9%인 163조9000억 원이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국민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6.7%에 이른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가진 상장사 수는 261개로, 이 중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인 곳은 9개, 2대주주인 곳은 208개다.

주주대표소송이 그동안 문제가 돼 온 오너 리스크나 기업 불법행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경제개혁연대는 최근 입장문을 내고 “수탁위가 정치 사회적 이해관계 및 여론에 따라 소송을 결정할 것이란 비판은 근거가 없다”며 “국민연금은 주주대표소송을 통해 장기적으로 주주가치 증대에 기여하겠다고 한 공언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 정부 직접 운영하는 구조


주주대표소송의 결정 주체가 누가 될지 여부와 무관하게 소송이 남발되지 않도록 명백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소송을 결정할 때는 기업과 주주의 가치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명백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만 소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연기금처럼 국민연금에 대한 정부의 입김과 과도한 의결권 행사를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해외 연기금의 경우 기업 경영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막기 위해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장치들이 마련돼 있는데 한국은 오히려 이를 풀어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 후생연금의 경우 단일기업 발행주식에 대한 투자 한도를 기금의 5% 내로 제한하고 기업별 주식 보유 지분 한도도 5%를 넘기지 못하게 했다. 주주권을 직접 행사하는 것도 금지된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정부가 기금을 직접 지배하지만 기업별 보유 지분 한도를 5% 이내로 규정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한국은 정부가 기금 조성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정부 지배 하의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는 유일한 경우”라고 말했다.

해외 연기금은 지배구조를 개혁하며 수익률 제고에 힘쓰는 반면 국민연금은 오히려 기업에 대한 지배력만 강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광 한국외국어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는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에 대해 제재를 가할 이유가 생기더라도 완전히 독립된 주체가 전문성을 갖고 개입해야 한다”며 “정부 입김이 그대로 반영되는 지금 구조는 세계적으로 사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 주주대표 소송 ::
회사 경영진이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경우 소액주주가 회사를 대표해 이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송충현 산업1부 기자 balg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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