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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글로벌 이슈/하정민]트럼프보다 무서운 ‘인플레’

입력 2021-12-01 03:00업데이트 2021-12-0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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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임이 확정된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이 지난해 12월 워싱턴 의회에서 열린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줄곧 대통령의 금리 인하 압박에 시달렸던 그는 이제 인플레이션 위험 관리라는 난제를 떠맡게 됐다. 워싱턴=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2011년 12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원이자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의 임원을 지낸 제롬 파월을 신임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이사로 지명했다. 현직 대통령이 당적이 다른 인물을 연준 이사로 발탁한 것은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원 존 라웨어 이사를 선택한 지 23년 만이어서 큰 관심을 모았다. 당적,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법조인 출신이란 이유로 당내 일각의 반대도 있었으나 오바마는 파월이 정치적 이념을 앞세우지 않는 데다 실용주의적이고 온건한 성향이라는 점을 높이 샀다.

다음 해 5월 임기를 시작한 파월은 미국의 기준금리를 결정하기 위해 1년에 8차례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늘 다수 의견에 따르는 투표를 하며 연준에 무난히 녹아들었다. 본인의 자산 또한 최대 5500만 달러(약 660억 원)로 추정되는 부자지만 ‘일정 수준의 금융 규제는 꼭 필요하다’는 태도도 견지했다.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연임이 예상되던 재닛 옐런 당시 의장을 교체하고 당적이 같은 파월을 연준의 새 수장으로 낙점했다. 그가 똑똑하고 헌신적이며 연준에 필요한 모든 지도력을 갖췄다고도 추켜세웠다. 그러나 파월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금리를 확확 낮추지 않자 곧 본색을 드러냈다. 연준이 금리를 높게 유지해 미국 경제가 로켓처럼 상승하지 않는다며 파월을 ‘배신자’ ‘멍청이’ ‘무능하다’고 깎아내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파월 중 누가 미국에 더 적(敵)인지 모르겠다”는 막말까지 일삼았다.

빌린 돈으로 건물과 땅을 사들여 재벌이 된 트럼프는 고금리를 단순히 재선 가도의 방해물을 넘어 일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여겼다. 급기야 법이 보장하는 연준 의장의 4년 임기를 지켜주지 않겠다며 파월을 쫓아낼 방안을 찾아내라고 참모진을 들볶았다. 해고가 어렵다는 것을 알자 의장에서 이사로 강등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작태를 보다 못한 전직 연준 의장 4명은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라”고 언론 기고문까지 냈다.

파월 또한 진중하고 품위 있게 맞섰다. 반드시 자신의 임기를 마칠 것이며 행정부 압력에 의해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또 실제 그렇게 했다. 민주당 진보파의 교체 요구에도 불구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 역시 지난달 22일 파월의 연임을 확정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확히 반반으로 나뉜 상원에서 민주당원 후보자보다 그의 인준이 쉬울 것이란 현실적 계산도 있었겠지만 의장 파월의 처신이 흠잡을 데 없었다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연임을 확정한 그의 앞에는 트럼프보다 훨씬 무섭고 다루기 어려운 상대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풀린 막대한 유동성 등의 여파로 휘발유값, 집값, 식료품값 등이 연일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통화 긴축이 불가피하나 공급망 교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등으로 무작정 금리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는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풀어 인프라에 투자하고 기후변화 대책 등을 마련하겠다고 야단이다. 당적이 다른 자신을 신임해 준 바이든이 역점 사업을 적극 추진할수록 인플레 위험이 커져 물가 안정이 존립 근거인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현직 대통령과 맞서야 하는 셈이다. 재선이 다가오면 바이든 또한 트럼프처럼 막무가내로 금리 인하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일쇼크 후폭풍이 한창이던 1979년 연준 수장에 취임한 폴 볼커 당시 의장은 고물가와 경기 둔화라는 이중고 속에서 과감히 물가 잡기를 택했다. “인플레라는 용(龍)을 잡겠다”고 선언한 볼커는 취임 때 11%대였던 기준 금리를 19세기 남북전쟁 이후 최고치인 20%대까지 끌어올렸다. 유례없는 고금리에 산업계 반발이 엄청났고 백악관도 우려를 표했지만 눈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소신과 뚝심이 1990년대 미국 경제의 장기 호황으로 이어졌으며 역대 최고의 연준 의장으로 불릴 만하다는 호평이 아직도 나온다. 과연 파월은 볼커처럼 인플레 위험을 관리하면서 경기 회복 불씨도 꺼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진정한 시험대는 지금부터인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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