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 남아 붓장난했네”… 글씨에 담긴 ‘인간 법정’의 情

  • 동아일보

입적 16주기… 유필 등 100여점展
일상 편지-불일암 상량문 등 전시
법정이 손수 만든 ‘빠삐용 의자’도
덕조 스님 “지친 사람에 위안 줄것”

법정 스님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 덕조 스님 제공
법정 스님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 덕조 스님 제공
‘참 무심한 인이군 아무리 침묵이 금이라기로 그동안 건강이 어떤지 더러는 궁금했었는데 … 나는 일에 밀려 계절을 모르고 살았소 교생 실습에 신경이 많이 쓰일 줄 믿소 … 어제 밤 숲에서는 귀촉도가 웁디다 심신이 더불어 건강하시오 사월 스무여드레 래헌’(법정 스님이 지인에게 보낸 서간 중)

그리운 이름 법정(法頂·1932∼2010).

그의 입적 16주기(11일)를 며칠 앞둔 4일 오후, 서울 성북구 스페이스 수퍼노말 갤러리를 찾았다. 법정 스님이 세운 길상사 바로 앞에 있는 이곳에선 21일까지 그의 글씨와 편지, 사진 등 100여 점을 볼 수 있는 ‘우리 곁에 법정 스님, 붓장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은 그가 지인들에게 보낸 소박한 편지와 일상의 모습을 담은 사진. 사진 속 법정이 고독한 수행자의 모습이라면, 편지에서는 정(情)과 외로움 등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법정 스님의 맏상좌인 덕조 스님(길상사 주지)은 “스승님은 지인에게 편지를 쓸 때 늘 한지에 붓으로 써 보냈다”라며 “편지를 다 쓰고 먹이 남으면 그걸로 글씨(작품)를 쓰며 ‘먹이 남아 붓장난했네’라고 하셨다. 당신의 글씨 작품을 ‘붓장난’이라고 한 것은 그런 까닭”이라고 말했다.

1975년 전남 여수 불일암을 세울 때 암자를 지은 이유와 도와준 사람들을 기록한 상량문(上樑文)에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수행자의 삶을 살고자 했는지를 볼 수 있다.

불일암 ‘빠삐용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긴 법정 스님.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불일암 ‘빠삐용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긴 법정 스님.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이곳에 머무는 本分 衲子(본분 납자·참된 수행자)는 오늘같이 흐리고 막막한 세상에 佛日(불일·부처의 지혜)을 더욱 빛나게 라는 뜻에서다 그 소임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이어 도와준 사람들 명단이 나오는데, 익숙한 이름도 눈에 띈다. ‘앙드레 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앙드레 김은 법정 스님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유품으로 유명한 ‘빠삐용 의자’도 편지와 사진 외의 물건으로 유일하게 전시됐다. 법정 스님은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이 절해고도에 갇혀 인생을 낭비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손수 만든 의자를 ‘빠삐용’이라 이름 짓고, 늘 여기에 앉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했다고 한다. 이 의자는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메달 및 증서’ 등과 함께 국가유산청 예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파손을 우려해 무진동차로 불일암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전시회를 기획한 덕조 스님은 “스승님은 당신 이름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전시회를 통해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리 책망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며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법정 스님을 그리워하는 여러분과 성북구청(구청장 이승로) 등 지자체의 도움이 컸다”라고 말했다.

서로 나만 옳다며 악다구니하고,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양심도 파는 세상.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글귀 하나가 발을 잡는다.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靑山(청산)인 것을 九一년 단오절 佛日庵에서’

오늘 내가 좇고 있는 건 건 구름인가, 청산인가.

#법정 스님#길상사#붓장난#빠삐용 의자#불일암#교생 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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