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만지고 보기만 하면 어찌 알겠나”…코 없는 코끼리의 질문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3월 9일 14시 42분


엄정순 작가 ‘보푸라기-촉각적 사건’ 개인전

엄정순 ‘무늬 없는 리듬 2-3’(2025년). 학고재 제공
엄정순 ‘무늬 없는 리듬 2-3’(2025년). 학고재 제공


세상은 한눈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갈수록 빨라지는 변화는 두 눈을 부릅떠도 포착하기 힘들다. 사실은 모두가 이런 망망대해에서 ‘눈먼 자’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지난달 25일부터 열리고 있는 엄정순 작가의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사건’은 “우리는 세상의 어느 일부분에 닿고 있는가”를 묻는다. 불교 경전 ‘열반경’ 속 ‘맹인모상(盲人摸象·장님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에서 착안해 코끼리를 주제로 한 조각과 회화 등 39점을 선보인다.

엄정순 ‘코없는 코끼리’(2025년). 학고재 제공
엄정순 ‘코없는 코끼리’(2025년). 학고재 제공

관람객은 작품을 자유롭게 손끝으로 더듬으면서 교감할 수 있다. 갤러리에서 만난 엄 작가는 “작가는 모든 감각을 다 써서 작품을 만들지만, 관람객이 이를 만지는 행위는 그동안 금기시됐다”며 “관람객의 감상도 작품의 일부다. 눈으로만 판단해선 편견에 갇히기도 쉽다”고 말했다. 전시는 ‘눈에만 의존해선 결코 세상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이어진다.

전시장에서 시각과 촉각은 거의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조각상 ‘코없는 코끼리 4’를 받치고 있는 뒤집힌 사다리꼴 모양의 대좌는 작품의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관람객이 코끼리 상 가까이 다가설 때 신발 앞코가 부딪히는 부분을 없애 접근 장벽을 허물었다.

엄정순 ‘무늬 없는 리듬 1-4’(2025년). 학고재 제공
엄정순 ‘무늬 없는 리듬 1-4’(2025년). 학고재 제공

작품을 만진 뒤에 남은 ‘흔적’은 다시 작품이 된다. 회화 연작 ‘무늬 없는 리듬’은 2023년 광주비엔날레를 찾은 관람객들이 양모와 천으로 이뤄진 코끼리 설치물을 만지면서 생겨난 보푸라기를 핵심 재료로 활용했다. 엄 작가는 “당시 일주일도 안 돼서 작품 전체에 보푸라기가 생겼다. 문득 보푸라기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닌, 사람의 체온이자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 올 한 올 아껴 모은 보푸라기를 뭉치거나 엮어 재료로 썼다”고 설명했다.

학고재 제공
학고재 제공

점자책 1000여 권이 선풍기 바람에 흔들리는 공간도 눈길을 끈다. 맹인모상 이야기를 작가가 각색해 점자로 쓰고, 바로 아래 같은 내용을 흑연을 사용해 손글씨로 썼다. 점자를 손으로 훑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흑연은 뭉개지고 여백은 까매진다. 그러다 눈에 들어 오는 벼락같은 한 문장. “이제 책을 덮으시게나. 자네의 그 검게 얼룩진 손끝 속에 보이지 않는 코끼리가 서 있으니.”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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