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총리를 예능인으로 만드는 나라[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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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 더 흔들고 정부 정책에 뒤통수 “부총리가 경제사령탑” 지금도 유효한가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지난해 3월 ‘경제부총리, 그냥 있다 가는 자리 아니다’라는 글을 썼다. 홍남기 부총리가 명실공히 경제사령탑 역할을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로부터 1년 반가량 지나니 알겠다. 부총리가 누가 되든 사령탑은커녕 자리보전도 쉽지 않다. 지금 같은 집권세력 밑에서는 말이다.

홍 부총리는 지난주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서 본인도 전셋집을 빼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실토했다. 법무부가 만들고 여당이 단독으로 처리한 임대차 3법이 경제부총리의 주거권을 때렸다. 그는 전세시장 안정 대책을 추가로 강구하겠다고 했지만 무력한 저항처럼 들렸다. 또 이날 홍 부총리는 주식 양도소득세 부과 기준을 10억 원에서 3억 원으로 낮추는 정책을 놓고 여당의 맹폭을 당했다. 처음엔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줬지만 끝내 “국회에서 논의하면 정부는 협의할 것”이라고 했다. 기재부 안팎에선 “부총리가 좀 더 버텨줬으면 좋겠다. 국감 막판에 집중력이 떨어지면 안 되는데…”라고 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 정부에선 야당보다 여당이 경제사령탑을 더 옥죄고 흔든다. 그러다 보니 부총리가 ‘홍두사미(홍남기+용두사미)’로 불린다. 기재부는 홍두사미가 아니라는 반박 자료까지 내야 했다. 유머와 페이소스가 교차하는 희비극 속에 부총리가 예능인처럼 돼 버렸다.

애초에 ‘진격의 홍남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작년 초 그는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를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직후 열린 당정협의에선 정반대 결론이 나왔다. 참화였다. 증권거래세 인하 논란에서도 처음엔 꿋꿋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았지만 여당 압박에 무릎을 꿇었다. 1차 긴급재난지원금은 소득 하위 50%에게만 지급하겠다고 했다가 여당에 밀려 100% 지급으로 바꿨고, 2차 지원금은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결과는 180도 다르게 나왔다. 재정준칙을 만들겠다고 했더니 여당 중진의원은 “(계속) 고집하면 같이 갈 수 없다”며 교체를 경고했다.

대통령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홍 부총리가 추경 편성에 부정적 견해를 밝힌 이틀 뒤 대통령은 미세먼지 추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채무비율을 40% 안팎으로 관리하겠다고 했다가 대통령에게서 “우리나라만 40%가 마지노선인 근거가 뭐냐”는 말을 들었다.

선출권력은 관료권력을 통제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통제의 합리성과 방향성이다. 주식 양도세 부과 기준이 3억 원인지 10억 원인지는 실은 중요하지 않다. 홍 부총리가 여당 의원에게 마지못해 따져 물은 것처럼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는 2년 전 국회와 정부가 합의해 추진하던 사안이었다. 월급쟁이 근로소득에는 10원 단위에까지 과세하면서 투자수익 소득세는 면제해 주는 건 과거 개발연대 때 부족한 자본을 충당하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에 과세형평을 위해 단계적으로 이를 바로잡자고 약속한 사안이다. 이제 와서 동학개미 눈치 때문에 거대 여당이 일제히 나서 ‘닥치고 뒤집기’를 강요하면 경제정책은 설 자리가 없다.

대통령은 두 달 전 “경제부총리가 경제사령탑으로서 총체적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했다. 부총리가 경제를 책임지라는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한가, 아니면 희비극 대본에 있는 영혼 없는 대사일 뿐인가. 경제부총리에게 할 말은 하라고 요구하는 건 이젠 가학적 주문이 됐다. 버텨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경제부총리#예능인#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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