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심리[횡설수설/신연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한 해 1000만 명 정도가 찾는, 세계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미술관이다. 원래 그 자리에는 12세기에 필리프 2세가 파리를 지키기 위해 지은 요새(fortress)가 있었다. 그랬다가 성채를 헐고 왕궁을 지었고, 1600년대 루이 14세가 처소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기면서 박물관으로 변신하게 됐다. 지금도 박물관에는 지하홀 등 요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양의 옛 도시를 가면 어디나 성당과 함께 요새가 발달해 있다. 서양의 중세도시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을 제1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보루와 성벽부터 높이 쌓았다. 이름에 -berg, -burg, -burgh 등이 붙은 하이델베르크 잘츠부르크 에든버러 등은 모두 요새에서 출발한 도시라고 한다. 서양뿐이 아니다. 한국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 같은 성곽들이 전국 곳곳에 많다.

▷요새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자칫 외부와 교류를 막고 내부에 안주하는 폐해를 낳기도 한다. 이처럼 외부와 높은 담을 쌓고 자기들끼리만 뭉쳐 보호받으려는 심리를 서양에서는 ‘요새 심리(Fortress Mentality)’라고 부른다.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느껴 타인의 비판과 견해를 무시하는 심리를 일컫기도 한다. 항상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피포위 심리(Siege Mentality)’도 비슷한 말이다.

▷4일 열린 ‘동아비즈니스포럼 2019’ 기조 강연에서 로자베스 모스 캔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요새 심리가 조직을 장악하면 기존 자산을 지키려는 분위기가 강해져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다”면서 “요새에 안주하지 말고 당장 새로운 방식,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라”고 외쳤다. 그는 집중, 신속, 유연, 친절, 재미를 무기로 전통과 관습, 기존 비즈니스 모델의 공고한 성채를 부수라고 제안했다.

▷경제·경영학에는 혁신을 강조하는 이론들이 많다. 1900년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경제발전의 동력이라고 봤다. 1997년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저가 제품으로 시작해 주류 시장까지 장악하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주창했다. 하지만 이론보다 더 급변하는 것은 기업 현장 같다. 인터넷 검색 업체 구글이 자동차 업체가 되고,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이 우주탐사 업체가 되는 현실에선 오히려 혁신이란 말이 낡은 용어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혁신#창조적 파괴#요새 심리#피포위 심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