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대통령 연설문 삭제 소동이 보여준 아마추어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7일 03시 00분


청와대가 미국을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의 현지 간담회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사전 배포한 연설문을 취소한 소동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 어렵다. 이번 간담회는 뉴욕의 외교 싱크탱크 대표들을 상대로 마련됐다. 박 대통령 연설문의 사전 원고에는 “일각에서 한국이 중국에 경도되었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한미동맹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가 일부의 그런 시각을 불식시키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간담회가 끝난 뒤 청와대는 “대통령이 원고대로 발언하지 않았다”며 언론사들에 이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은 언론에 사전 배포된 대로 연설문을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 연설문은 대통령이 발언 요지를 미리 알려주면 외교안보수석비서관실과 외교부 참모들이 함께 만들어 대통령 결재를 받아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몇차례 수정된다. 청와대가 사전 배포한 원고에는 넣어놓고 현장에서 빼달라고 언론사에 요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올해 한국과 중국을 상호 방문하며 우의를 과시했을 때 미국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한미동맹 정책이 불투명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이 틈을 타 일본 쪽에서는 “한국이 중국에 경도돼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박 대통령이 실제 연설에서 뺀 내용은 이런 분위기를 우려하며 한미동맹을 강조한 발언이었다.

박 대통령은 중국 쪽에서 “박 대통령이 미국 눈치를 봤다”는 불만을 표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해당 발언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외교적으로 민감한 문구를 연설문에 포함시켰다가 행사가 끝난 뒤 “단순한 참고자료였다”고 둘러대는 것은 한국 외교가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발언이라면 처음부터 연설문에 넣지 말았어야 했다. 이번 소동이 외교부와 청와대 사이에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결과라면 더 심각한 문제다. 대통령의 연설과 메시지는 명확해야 한다.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는 글로벌 무대라면 더욱 그렇다. 청와대는 자초지종을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박근혜#연설문 삭제 소동#외교#청와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