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당신의 운명을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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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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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전문기자
고미석 전문기자
그는 영국인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동양인 주부였다. 두 살 때 건국 영웅으로 추앙받던 아버지를 암살로 잃고 15세에 고국을 떠나 옥스퍼드대에서 철학과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다. 영국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1988년 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친정을 찾은 뒤 24년 동안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평화적 시위대를 군부가 유혈 진압하면서 운명의 거친 손길은 정치에 관심 없는 여성을 구금과 15년간 가택연금이라는, 민주화를 향한 가시밭길로 밀쳐냈기 때문이다.

내것으로 받아들일 때 위대함 발현

바로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미얀마 야당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다. 최근 유럽 순방의 종착지 프랑스에서 수치 여사는 “군부에 원한이 없다”며 “내가 집중하는 분야는 정의라는 추상적 분야가 아닌 현실 문제”라는 관용의 발언을 남겼다. 가족 생이별의 끔찍한 고통을 겪게 했고, 1999년 타계한 남편이 암 투병 중 아내를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싶다고 간절히 요청한 것도 외면했던 사람들과 국가 개혁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작은 거인의 통 큰 태도에 국제 사회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라며 그를 칭송했다.

가녀린 몸매의 수치 여사는 가는 나라마다 국가원수에 준하는 환대를 받았고 BBC 등 미디어는 만델라에 맞먹는 세계적 우상으로 그를 조명했다. 노르웨이에선 21년 만의 노벨상 수락 연설로 기립박수를 받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빼고 영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한 최초의 여성이란 기록도 남겼다. 그는 기구한 비극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초강력 군부에 비폭력 철학으로 맞서 민주화를 이끈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정치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지혜로운 선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보면서 행복과 불행은 분명하게 나뉜다고 믿는 많은 사람의 인식이 과연 맞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미국에서 복권 당첨자 3분의 1이 파산한다는 얘기가 아니라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어디까지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인지 판단하는 일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26일 별세한 작가 겸 영화감독 노라 에프런은 자신에게 일어난 최악의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로 인생 위기를 극복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워싱턴포스트지 칼 번스타인 기자와 재혼했던 에프런은 둘째를 임신하고 있을 때 발각된 남편의 외도로 세상이 떠들썩한 이혼을 해야 했다. 한데 그는 ‘내게 왜 이런 일이…’ 하며 한탄하고 낙심해 하는 대신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코믹한 자전적 소설로 집필해 전 남편의 행실을 영구불변의 기록으로 만천하에 알렸다. 쓰라린 인생사를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통쾌한 반전을 시도한 그는 이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각본을 쓰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연출하며 승승장구한다.

관점의 변화로 인생위기 극복을

얼마 전 미술관에서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낯선 단어를 접했다.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작가가 오랜 투병생활 중 접했던 X선 필름과 의료용 도구를 재료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열어가면서 이런 전시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운명을 사랑하라.’ 필연적 운명을 긍정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의 위대함이 발현된다는 뜻이란다.

아모르 파티. 내게 주어진 운명 앞에서 도망가지 않겠다는 주체적 수용과 창의적 자세. 겉보기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운명의 양면성 앞에서 체념과 굴복이 아니라 내 몫의 시련을 존중하며 고비를 넘길 때, 그때서야 운명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배고픈 날 누룽지 한 조각 먹어보아라./밥 짓다 태웠다고 푸념할 일이 아님을/꼭꼭 오래 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알리라./인생도 씹을수록 맛이 나는 누룽지처럼/더 타고 속이 타야 멋도 알고 맛도 알까?’(정상현의 ‘누룽지’)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아웅산 수치#노라 에프런#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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