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는 컴퓨팅 전쟁 중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성패를 좌우할 인공지능(AI)과 반도체는 ‘24시간 전원’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 최근 24시간 전원 공급 문제의 해답으로, 기존 원전보다 제작과 설치 기간이 짧고 안전성이 우수한 소형모듈원자로(SMR)가 부상하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러시아는 이미 법과 제도를 개편하고 조 단위 재정을 투입하며 상용화의 9분 능선을 넘고 있다.
원전 강국인 한국은 SMR 상용화 경쟁에서 뒤처져 있어 미래 시장 주도권을 내줄 위기에 처해 있다. 한때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한국의 배터리 산업을 보자. 중국이 자본 투입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우리 기업의 최첨단 생산기지와 핵심 인력을 자국으로 ‘진공 흡입’하면서 시장 주도권을 잃었다. 기술이 아무리 앞서 있어도 이를 뒷받침할 국가적 투자와 정책적 지원이 없으면 혁신의 열매를 빼앗기고 단순 공급자로 전락하게 된다. SMR에서만큼은 이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현재 국내 민간 영역은 국경을 넘어 데이터센터와 산업단지를 잇는 ‘에너지 솔루션’을 구상하며 역동적으로 뛰고 있다. SK이노베이션 등 주요 기업들은 테라파워 등 SMR 글로벌 선도 기업과 지분 투자 및 공급망 협력을 맺으며 시장 전면에 나서고 있다. 현대건설과 두산에너빌리티도 해외 기업과 힘을 합쳐 SMR 관련 투자를 서두르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각종 규제와 틀에 박힌 행정 때문에 SMR 구축을 위한 첫 삽을 뜰 엄두도 못 내고 있다. 한국이 원전에 이어 SMR 선두 주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앞장서 낡은 규제를 타파하고 각종 제도 정비를 통한 지원책을 서둘러 마련해줘야 한다.
우선 기존 원전에 적용되던 오래된 규제 방식을 SMR에도 그대로 적용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 기존의 ‘부지’ 중심의 원전 인허가 틀을 SMR의 본질인 ‘양산형 제품’에 맞춘 ‘형식 승인’ 체제로 전면 재편해야 한다. SMR 설치 시 부지별 적합성 검토는 필수적이지만, 부지가 바뀐다고 해서 매번 해체 수준으로 기체 설계를 재심사하는 것은 명백한 낭비다. SMR은 단순한 ‘작은 원전’이 아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생산하는 제품이자, 수요처 바로 옆에 위치하는 ‘분산형 전원’이기 때문이다. 보잉 737 항공기가 인천공항에 내릴 때와 김해공항에 내릴 때마다 기체 설계를 새로 검사하지 않는다. 원전을 ‘건설’하는 시대에서 ‘설치’하는 시대로 가는 패러다임의 전환만이 상용화 속도전의 유일한 해법이다.
규제 기관도 단순한 ‘심판’을 넘어 SMR 시대를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로 체질을 개선하고 사전검토제(Pre-licensing)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설계 초기 단계부터 규제 당국이 개입해 기술적 불확실성을 선제적으로 제거해 줄 수 있다. 또 데이터센터 등 미래 수요처가 SMR 전력을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전력 시장의 구조적 빗장을 풀어야 한다. 직접전력거래(PPA) 허용과 계통 연계 특례를 통해 민간의 혁신 자본이 전력시장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SMR 시장 확대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 원자력의 건설·운영 능력에 민간의 네트워크와 과감한 제도 혁신이 결합한다면 SMR은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엔진이 될 것이다. 승패를 가르는 것은 기술의 난이도가 아니라 ‘결단의 속도’다. 이제 정치가 답할 차례다. 우리는 주인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구경꾼으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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