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6·15와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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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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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들은 빨치산 출신 장기수들을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하는 편지를 낭독했다. ‘전쟁 위협하는 외세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하자’는 구호를 제창하며 손뼉도 쳤다. 2005년 5월 28일 전북 순창군 회문산에서 ‘6·15 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소속 ‘통일광장’이란 단체 주최로 열린 소위 ‘남녘통일애국열사 추모제’ 전야제에서다. 180여 명의 학생 학부모를 이끌고 간 K중학교 김모 도덕교사는 인민군 혁명가와 ‘주체철학은 독창적 혁명철학’이라는 북한 원전을 소지했다. ‘6·15시대의 전진을 가로막아온 미국의 죄악’이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사람도 그다. 당시 행사에는 빨치산 출신들도 참가해 학생들에게 ‘통일에 기여한 공로’를 치켜세우는 표창장을 줬다. 이들은 “제국주의 양키군대를 한 놈도 남김없이 섬멸하자”고 외치고, 우리 정부를 ‘괴뢰정부’로 지칭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간 화해무드 조성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체제방어 시스템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정상회담 4개월 뒤 결성된 ‘6·15공동선언 실천연대’의 한 간부는 2004년 중국 베이징에 가서 ‘황장엽과 김영삼을 응징(살해)하고 보안법 철폐 및 반미투쟁을 강화하라’는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돌아왔다. 2001년 3월 결성된 통일연대는 “6·15 공동선언에서 (남북의 통일방안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 만큼 연방제 통일안이 과거처럼 불온시될 수 없다”는 성명을 냈다. 2001년 남파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여간첩 원정화는 군 장교들을 포섭해 각종 군사비밀을 빼내다가 2008년 보수정권 출범 후에야 검거됐다.

6·15 공동선언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이끌 것이라는 가설은 그럴듯했지만 의미 있는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개발 등 ‘비대칭 전력’을 강화할 자금만 두둑이 쥐여 줬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6·2지방선거 전이라도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제자리로 돌리라”고 채근하며 “정상회담이 설령 정략적이고 선거에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라 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아량’까지 보였다.

남북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거나 북핵 같은 안보 위협과 국군포로 납북자 송환 같은 인도적 문제 해결을 외면하는 정상회담이라면 안하느니만 못하다. 북한은 1974년 3월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이후 군사·외교 문제는 미국과만 상대하고, 남한은 오직 ‘민족내부 거래’의 상대로서 경협자금을 제공하는 ‘봉’ 정도로만 취급해 왔다. 북한 노동신문이 6·15 선언에 대해 2000년 그해 연말 사설에서 ‘김정일 정치실력의 승리’라고 묘사한 것도 그런 틀이 관철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잘못된 남북협상 프레임을 뜯어고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남북간에 지금 필요한 것은 공허한 ‘우리 민족끼리’ 구호가 아니라 북한의 핵 포기와 진정한 화해 노력을 통한 전쟁위협 제거다. 북한 땅과 비무장지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5만2000명의 국군 전사자 유해를 남북 공동으로 발굴하는 작업도 남북 화해와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곧 10주년이 되는 6·15의 한계를 발전적으로 극복하고 60년 전 6·25와 같은 불행한 무력충돌을 막는 것이 3차 정상회담의 지향점이 돼야 한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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