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명성황후’부터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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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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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살해당했다.

범인은 일본군 대본영의 지시를 받은 육군 장교 8명과 동원된 낭인들. 작전명은 ‘여우사냥’. 황후에게 칼을 휘두른 장본인은 미야모토 다케타로 일본 육군 소위였다.(이는 재일 사학자 김문자 씨가 일본 군부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한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에서 최근 밝힌 사실이다) 만행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황후의 처소인 경복궁 곤녕합 옆 녹산에서 황후의 시신을 석유를 붓고 태운 뒤 묻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이 비극을 다뤘다. 1995년 초연 이래 매년 공연이 열리고 뉴욕과 런던에서도 갈채를 받았다. 지난해 말에는 1000회 공연이라는 경이적인 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직 일본에 못 갔다. 윤호진 에이콤 대표는 “여러 차례 추진했지만 번번이 막판에 성사되지 않았다”며 “일본 우파의 반발을 우려한 현지 기획자가 끝내 포기하더라”고 말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도 그랬다.

황후의 114주기인 지난해 10월 8일, ‘특별공연’이라는 이름으로 구마모토 가쿠엔대 60주년 기념관에서 열렸으나 발췌 영상을 틀고 주제가 5곡을 부른 소극장 약식 무대에 불과했다. 구마모토는 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 등 21명의 고향이다.

일본 사회가 을미사변 115년이 된 올해도 조선의 국모를 자국 군인과 낭인들이 살해한 만행을 인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거나 감추려는 이들도 많다. 당시에도 일본 정부는 낭인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시치미를 떼 왔다. 하지만 그 개입의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언론인 출신인 이종각 주오대 겸임강사도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에서 일본 외교 문서를 인용해 “이 사건을 지휘한 일본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 주한공사는 이토 히로부미 총리에게 조선을 독력 지배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어 일본 최고위층도 그 목적에 동의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고 밝혔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식민 지배에 대한 포괄적 사죄를 했으나 조선 강탈의 신호탄이었던 황후 시해를 비롯해 강제병합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문구를 담지 못했다. 일본으로서는 패전 50년 만의 진일보이지만 내부 성찰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일본 지도층의 망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최근 경향신문에 게재한 ‘한국병합 100년과 일본의 사죄’ 칼럼에서 “(한일병합이 강행된 것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없었던)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총리 담화가 나와야 한다”며 “병합 100년을 맞아 새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가 완성된 담화를 발표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하토야마 내각의 출범 이후 와다 교수가 말한 ‘완성된 담화’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총선에서 이긴 뒤 외국 정상과의 첫 통화를 이명박 대통령과 할 만큼 한국을 중시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6월 민주당 대표 시절 정구종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소장과의 인터뷰에서는 “한일병합 100년을 계기로 일본 의회가 메시지를 표하거나 양국 정상 차원의 메시지 교환 등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일본 측의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병합 100년이 일본에겐 과거사 정리의 기회이지만 정치 외교적 선언을 위한 내부 논의는 몸살을 앓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가 먼저 그 물꼬를 틀 수도 있다. 명성황후가 도쿄에 갈 수 없다면 새로운 100년의 첫걸음도 떼기 어렵다. 올해에는 명성황후가 꼭 가야 한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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