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홍난파의 경우

  • 동아일보

1919년 일본 도쿄의 음악학교에 다니던 21세의 젊은 음악도 홍영후는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동참하겠다며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저당 잡히고 독립선언문 수천 부를 인쇄해 주변에 배포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1920년 명곡 ‘봉선화’를 작곡했다. 1931년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떠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했다. 이때 흥사단가를 작곡한 것으로 전해진다. 흥사단에 관계한 일로 옥고를 치렀고 늑막염이 악화돼 1941년 타계했다.

그의 사후(死後)인 1942년 ‘봉선화’는 성악가 김천애에 의해 다시 불려져 일제 말기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 곡이 국민적인 애창곡으로 떠오르면서 일제는 감시의 칼날을 더욱 곤두세웠다. 그는 항일활동과 함께 ‘봉선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나라 잃은 한을 달래주면서 저항 정신을 일깨운 작곡가로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규명위)는 난파 홍영후를 일제 말기(1937∼1945년) 친일행위를 했던 인물 명단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그가 1930년대 후반 일제에 협력하는 음악을 작곡했으며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게 이유다. 후손들은 친일규명위를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명단에 포함시키는 것을 유보해 달라’는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17일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관련법에 규정된 친일 행위가 적극적 주도적으로 협력했을 경우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행위들이 적극적인 협력에 해당하는지 본안 소송에서 더 자세히 따져봐야 한다’고 밝혔다. 많은 음악인들은 일부 친일 행위에 대해 ‘일제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으며 예술가로서 지속적인 발표 활동을 하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강압 상황과 직업적인 특수성에 대한 고려 없이 빈약한 자료만을 놓고 섣부르게 재단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음악계에선 친일 행적을 따지기 전에 가곡 ‘봉선화’를 작곡한 일 하나만으로도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과(功過)를 같이 놓고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다. 친일규명위는 오늘 일제 말기의 친일 명단을 발표한다. 홍난파는 후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일단 친일파 명단에서 빠졌지만 친일규명위가 재단한 그 명단 안에 ‘억울한 친일파’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을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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