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아이에 얽매인 삶…'나'는 어디에

  • 입력 2000년 1월 10일 20시 17분


시사만화에서 ‘못난 정치인’을 꼬집을 때 단골로 등장하는 욕설이 “집에 가서 애나 봐라”다. 그러나 애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는 해본 사람만이 안다.

육아는 출산 보다 더 뼈저린 현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엄마 자신의 욕구는 죽이도록 요구하는 가정과 사회에서, 엄마가 된 딸은 갈등한다. 직장을 다니는 젊은 엄마의 경우 친정엄마에게 육아의 짐을 지우기도 하고.

▼이렇게 힘든 건가요▼

“엄마가 되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곧 방해받기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미국의 베트스셀러 작가 알렉산드라 스타더드는 저서 ‘세상의 모든 딸들은 어머니가 된다’에서 토로한다.

성악가 이경희씨(29·서울 강남구 대치동)는 지난달 출산 이후 잠 한번 푹 자보는 것이 소원이 됐다. 때맞춰 우유 먹이기, 기저귀 갈아주기로 이씨 자신의 생활은 없어졌다. 연주제의가 들어와도 아기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다.

딸(25개월)을 돌봐주는 아줌마를 따로 두고 있는 치과의사 노지혜씨(35·서울 서대문구 홍은동)도 예외는 아니다.

“같이 놀아줄 시간이 부족해 아이에게 늘 미안한데도 나한테 투자할 시간이 거의 없어요.예전엔 일 마친뒤 플륫도 배웠고 지금은 운동도 하고 싶은데…또 막상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직장에 다니는 엄마보다 ‘주부’엄마의 육아고통이 더 크다는 것이 페미니스트잡지 이프(IF) 박미라편집장(36)의 말. 7세 3세 자매를 둔 그는 “첫애를 기를 땐 직장에 다니지 않을 때였다. 초자아의 거룩한 모성을 강조하는 온갖 책의 ‘지침’과는 달리 현실에선 내 정체성에 대한 회의에다 벌써부터 고집을 부리는 아이에게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게 되고…”라며 “너무 절망적이었다”고 돌이켰다.

▼엄마처럼 키우지 않을래요▼

이주희씨(31·서울 강동구 명일동)는 공부를 계속하려다 아기 때문에 포기했던 것까지 친정엄마(61)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연말 학예회에서 세 살난 딸은조명등에 눈이 휘둥그래진 또래애들과 달리 자기 무대인양 천연덕스럽게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다. 딸에게서 발견한 것은 어느 곳에 있든 모든 시선을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렸던 엄마, 그리고 주일학교의 ‘단골공주’였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젊은 엄마들이 변하고 있다. 자신도 정신적으로 엄마로부터 독립하면서 딸을 독립적 인격으로 키우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에서 ‘엄마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로. 이씨는 “자신의 틀속에 딸을 가두고 딸에게 몹시 가혹했던 엄마와 달리, 내 딸은 자기자신이 되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박씨도 엄마의 육아방식을 답습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말은 안했지만 자신의 희생을 내세우셨고 나는 보답하려고 무진장 애썼어요. 그러나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딸은 예민한 성격이어선지 조금만 화가 나도 막 소리를 질러요. 그렇지만 난 아이가 본성대로 자라도록 할 거예요.”

▼육아의 짐은 다시 엄마에게▼

그러면서도 왜 딸은 엄마에게 또다시 의지를 하는 것일까. 육아를 위한 사회보장시설이 충분치 않은 현실에서 여성이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 또다른 여성의 희생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대부분 ‘가장 가깝고도 만만한’ 친정엄마가 된다.

20개월된 딸을 둔 이윤영씨(32·서울 성북구 성북동)는 “순하지도 않는 별난 손녀 키우느라 외출 한번 못하는 친정엄마가 건강이 나빠져 요즘 병원에 다닌다”며 “애한테 소홀해져서 오히려 내게 미안하다고 하는 걸 보고 가슴이 찡했다”고 말했다.

딸(36·심리치료사)이 공부하는 동안 외손녀를 4살이 될 때까지 돌봤다는 구훈모씨(61·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는 이같은 육아의 역순환을 말해준다.

“잘난딸 두면 싫어도 다시한번 보모일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아들 손주는 사돈마님이 키우고 나는 또 딸의 자식을 키우고. 결론적으로 다 늙은 엄마들 고생이 주절주렁 열린 거지.”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독자가 보내온 '엄마와 딸'▼

▽딸애의 보통아닌 고집과 성깔로 고생하고 있지만 내심 기뻐요. 남성위주인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는 돼야죠. 어쩌면 21세기엔 남자수가 훨씬 많아서 지금과 반대로 ‘여성우대’란 남녀차별이 있지 않을까요. (백원옥&이홍원)

▽친정엄마가 허드렛옷만 입길래 몸치장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요. 며칠전 남편회사의 옷티켓으로 반코트를 사드렸어요.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엄마의 얼굴에 제가 사준 옷을 입고 춤추며 좋아하던 딸애의 얼굴이 겹치더군요. (백인희)

▽중학교 때부터 거동못하고 누워있는 엄마를 짐으로 느꼈어요. 그런데 두 살난 내 딸이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세상에 무서울 것도 없었어요. 딸을 붙잡을 수 있다면…. 7개월간의 병원생활후 지금은 유지요법 7개월째를 맞고 있어요. 그리고 알았어요.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것은 없어도 누구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셨다는 것을.(김진희)

※다음주엔 딸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처음 보낸 엄마들의 이야기가 실립니다. E메일(kjk9@donga.com)로 의견을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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