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의 함정]<1>멈춰서는 성장엔진

  • 입력 2003년 4월 13일 21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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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 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인 ‘비정상적 저금리’ 상황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저금리 원인은 △경기 부양을 위한 저금리정책 △쉬 들어오는 값싼 외국자금 △기업들의 투자 부진 등이다. 기업들은 ‘돈이 되는 투자처’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마땅한 투자 기회가 없으니→자금 수요가 없고→그 결과 금리가 비정상적으로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최근의 저금리 기조는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 고갈’을 입증하는 매우 중대한 현상일 수 있다. ‘성장 동력 훼손’이라는 문제의식을 통해 현재 저금리 기조의 현상과 원인 대책을 5회 시리즈로 심층분석한다.》

자동차 전장(電裝)부품 생산업체인 용성전장㈜의 우수명(禹洙命) 사장은 “자동화투자 등 원가절감을 위해 노력할 만큼 했다. 이젠 한국에선 더 이상 투자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비싼 땅값과 임금, 노사분규 등 투자환경이 나빠 투자한 만큼의 수익을 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신 국내 공장부지 3000여평을 팔아 중국 웨이하이(威海)공장의 생산라인을 늘릴 예정이다.

▽한국엔 투자처가 없다?=삼성전자는 올 상반기에 반도체 12라인(경기 화성시)과 초막박 트랜지스터액정표시장치(TFT-LCD) 5세대 6라인 증설(충남 천안공장) 등에 4조9900억원을 투자한다. 반도체와 LCD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삼성전자의 선제적(先制的) 개념의 투자다. 하지만 국내에서 굵직한 투자계획을 잡은 기업은 삼성전자 외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앨라배마주 완성차공장 건설에 주력하고 있다. 투자규모는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다. “내수시장이 침체된 한국에선 설비증설 계획이 없다”는 게 현대차측 설명이다.

LG전자도 중국 인도 멕시코 등 현지 생산거점 확대가 최우선 투자 대상이다. 국내에선 연구개발(R&D) 외의 시설투자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효성은 미국과 중국에 타이어코드 공장을 인수하거나 새로 짓는 등 현지 거점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투자재원은 대부분 내부 유보금을 꺼내 쓴다. 은행돈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

계획에 잡혀있던 국내 시설투자도 경기침체로 유보되거나 늦춰질 가능성이 있다. 정보통신 중견업체 A사 관계자는 “최근 삼성전자 SK텔레콤 등이 경기침체 등을 이유로 통신장비부문 시설투자를 유보하는 바람에 납품했던 설비자재까지 되돌려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성장잠재력의 훼손인가=미래에셋증권 박만순 상무는 “이자가 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데도 국내 기업이 돈을 빌려 쓰지 않는 것은 돈 될만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투명한 시장 상황은 그 다음 이유라는 것.

국내 시설투자는 반도체의 추가증설, 통신서비스 등 일부 산업에서 일어날 뿐 그 외 업종에선 대규모 시설투자 계획이 별로 없다. 고도성장의 엔진역할을 하던 철강 석유화학 등 장치산업 분야에서 새 투자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기업은 내실경영에 주력하고 해외투자자금은 현지 금융기관을 통해 조달하는 등 국내은행 자금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국내 상장사(12월 결산)의 현금성 자산은 무려 30조원을 웃돈다. 외환위기를 전후로 자본시장 자유화가 급진전되면서 상대적으로 값싼 외국 자본이 밀려들고 있는 것도 국내 금리를 낮추는 요인이다.

메릴린치증권 이원기 전무는 “이런 요인들이 복합돼 ‘지나친 저금리’ 구조가 형성됐다. 앞으로 저성장 단계로 들어서면 저금리 기조는 고착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저성장-저금리'현상 무늬만 선진국형 ▼

선진국 경제에서는 1∼2%대 저성장과 저물가가 동시에 나타난다. ‘실질성장+물가상승률’로 표시되는 금리 수준도 낮다. 그렇다면 한국의 저성장, 저금리 현상도 ‘성숙경제’가 보여주는 특징인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선 선진국 경제는 이미 방대한 자본과 투자가 형성돼 있는 성숙경제다. 자본의 과잉 누적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이런 경제에선 웬만큼 투자나 소비가 늘어나도 성장률 자체는 낮게 나올 수밖에 없다. 분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미만의 국가와 2만달러 이상의 국가는 성장률이 갖는 의미가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 선진국 경제에선 물가도 충분한 공급 능력과 현대화된 유통시스템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

한국 경제는 99년 10.9%, 2000년 9.3%, 2001년 3.0%, 2002년 6.3% 등 높은 성장률을 보여 왔다. 하지만 올해는 성장률이 자칫하면 3%대로 떨어질 가능성까지 제기될 만큼 저성장 국면이다. 앞으로도 과거와 같은 고성장을 기대하긴 어렵다. 물론 4%대를 보인다면 선진국에 비해선 높은 수준이다.

한국은행은 연 5%대 성장률을 유지해야 10년 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의 선진국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조용길 한은 국민소득통계팀 차장은 “앞으로 10년간 질적 투자가 이뤄져야 1인당 2만달러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며 “정보인프라, 인적 자본, 환경 투자 등에 집중 투자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한국 경제는 좀 더 활발한 투자가 있어야 하며 ‘실질금리 0’ 수준의 저금리는 어색한 미성숙 경제라는 지적이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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