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현지 시간)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마두로 뒤)가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연방법원에 출석하기 위해 헬기에서 내리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나는 니콜라스 마두로 모로스이며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다. 이곳에 납치돼 잡혀 왔다. 난 무고하다.”
5일 낮 12시(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연방법원 26층 A법정. 주황색 죄수복을 입고 발목에는 쇠사슬을 찬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판사의 질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답했다. 법정을 가득 메운 60여 명의 방청객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이틀 전까지 ‘중남미의 대표적 독재자’였던 그를 지켜봤다. 미국에 대한 마약 테러 혐의로 체포된 그의 바로 뒷자리에는 10여 명의 미 마약단속국(DEA) 요원들이 앉아 철통 감시를 했다.
지난 3일 미국의 군사 작전을 통해 붙잡혀 16시간 만에 미국으로 압송된 마두로 대통령과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는 이날 처음 법정에 출석했다. 이른 오전 뉴욕 브루클린 메트로폴리탄 구치소에서 헬기로 맨해튼으로 호송된 뒤 장갑차를 타고 오전 7시 50분경 법원에 도착했다. 법원 앞에선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반(反)마두로파와 “미국은 남미에서 떠나라”고 외치는 이들이 대치했다.
美법정 선 마두로 “나는 전쟁포로”… 형사재판 무력화 전략
[美법정에 선 마두로] 마두로 첫 재판 현장 르포 “나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결백하다”… 때로 두손 모으는 등 초조한 모습 마약 테러 등 범죄혐의 모두 부인… 부인은 얼굴에 거즈, 체포때 다친듯
법정에 선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그린 스케치. 미국은 법정 내 촬영이 금지돼 있어 재판 풍경을 묘사한 삽화가 유일한 기록이다. 뉴욕=AP 뉴시스“지금 이 순간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이 니콜라스 마두로 모로스가 맞는지 단 하나뿐입니다.”(앨빈 헬러스타인 판사)
“네. 맞습니다.”(니콜라스 마두로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미국이 해외 국가원수를 자국으로 체포해 온 세기의 사건으로 세계적 관심을 끈 이날 재판은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법원에 도착하고 약 4시간 뒤인 낮 12시 정각에 시작됐다. 마두로 대통령 부부는 보안 요원들의 인도를 받으며 족쇄를 찬 채 법정에 들어섰다. 호송 과정에서 차고 있던 수갑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주황색 죄수복 상의 위에 짙은 남색 반팔 셔츠를 덧입고, 카키색 바지에 주황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중 마두로 대통령은 주황색 죄수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얼핏 보면 죄수복이 드러나지 않았다.
기자가 지켜본 마두로 대통령은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차분한 눈길로 방청석을 가득 채운 60여 명의 방청객들을 둘러보고 “해피 뉴이어”라고 서너 차례 말했다. 이어 판사석 앞 세 번째 줄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변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날 법원은 마두로 부부를 위한 변호인을 각각 지정하여 배정해 둔 상태였다. 마두로 대통령 부부는 각자의 오른쪽에 변호인을 두고 같은 줄에 나란히 앉았다.
● 첫 발언부터 “나는 납치됐다” 주장
재판을 맡은 헬러스타인 판사는 이날 피고인 신원을 확인하고 기소 사실 인정 여부를 묻는 절차를 진행했다. 올해 92세의 헬러스타인 판사는 맨해튼 남부연방법원에서만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과거 9·11테러 소송을 담당한 베테랑으로 통한다. 그는 미 법무부가 마두로 대통령을 미국에 대한 마약 테러 혐의로 처음 기소한 2020년부터 이 사건을 담당해 왔다.
“당신이 니콜라스 마두로 모로스가 맞냐”는 헬러스타인 판사의 질문에 미국으로 잡혀 온 뒤 처음 공개 발언 기회를 얻은 마두로 대통령은 체포의 부당함부터 주장했다. 그는 “내 이름은 니콜라스 마두로 모로스이고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라며 “1월 3일부터 납치됐고,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있는 내 집에서 납치됐다”고 말했다. 자신이 적법하지 않은 군사적 납치를 당했고, 국가원수로서 면책 특권이 있기 때문에 형사재판 피고인이 아니란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자 헬러스타인 판사는 말을 끊으며 “이 모든 것에 대해 논의할 적절한 시기와 장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마두로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만 짧게 대답한 뒤 착석해야 했다.
이날 헬러스타인 판사는 마두로 대통령 부부에게 제기된 마약 테러, 코카인 수입 공모, 기관총 소지 등의 범죄 혐의를 설명하고 피고인의 권리를 고지했다. 기소 내용을 인정하느냐는 판사 질문에 마두로 대통령은 “공소장을 (오늘 아침 처음 받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지만 변호사와 판사가 읽어준 요약본을 들었다”며 “나는 무고하며, 소장의 어떤 내용도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도 “나는 베네수엘라의 영부인이다. 나는 무죄이며 완전히 무고하다”며 기소 내용을 부인했다.
● 초조한 마두로… 거즈 붙인 부인은 지친 기색
이날 마두로 대통령은 다소 지쳐 보이는 부인과 달리 A4 용지와 노란색 메모장에 판사의 설명과 검찰 주장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법원이 제공한 스페인어 동시통역 헤드폰을 귀에 댄 채 집중하기도 했다.
심문 도중 마두로 대통령이 돌연 판사에게 “질문을 하나 해도 되느냐”고 물어 법정에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그의 질문은 “내가 메모를 했는데 이를 (구치소에) 가져가도 되느냐”며 판사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재판 도중 때때로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턱 밑에 괴거나 의자 팔걸이를 붙잡는 등 초조한 모습도 보였다.
이날 플로레스는 체포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이마와 오른쪽 관자놀이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변호인들은 “두 사람 모두 건강 문제로 의료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플로레스의 경우 심각한 골절과 멍을 확인하기 위해 X레이 촬영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두로 대통령의 변호인인 배리 폴록 변호사는 “오늘 보석을 통한 석방을 신청하진 않겠지만 추후 그럴 수도 있다”며 “국가원수로서 면책특권과 군사력을 통한 체포의 합법성도 문제”라고 말했다. 폴록 변호사는 과거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언 어산지를 변호했던 인물로, 국제 사건에 연루된 유명 인사를 다수 변호했다. 헬러스타인 판사는 이날 30여 분에 걸친 첫 심리를 끝내며 다음 재판일을 3월 17일로 예고했다.
● 베네수엘라 출신 시민과 설전 해프닝
한편 마두로 대통령은 법정 퇴장 과정에서 방청석에 앉은 베네수엘라 출신 남성과 스페인어로 설전을 벌였다. NYT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정치범 출신의 이 남성은 마두로 대통령에게 “당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두로 대통령은 “나는 반드시 자유를 쟁취할 것이다. 나는 납치된 대통령, 전쟁 포로다”라고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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