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아이콘’ 긴즈버그 후임자는 누구… 美 대선 앞두고 ‘인준 전쟁’ 본격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0일 10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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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 시간)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미국 사법부 ‘진보의 상징’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에 미국 정가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사법부의 성향을 뒤바꿔놓을 수 있는 후임자 임명을 놓고 ‘대법관 인준 전쟁’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긴즈버그 대법관의 별세 하루 만인 19일 기자들과 만나 “(후임자 후보들의) 짧은 리스트를 갖고 있으며 다음주쯤 후임자를 지명하게 될 것”이라며 “매우 신속히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약 45명의 후보가 적힌 명단을 갖고 있다면서 “아마도 여성 후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트럼프, 기다렸다는 듯 “신속히 후임자 지명”
트럼프 대통령은 “신속한 결정을 내린 뒤 이를 의회에 보낼 것”이라며 “(후임자 지명) 절차들이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진행한 노스캐롤라이나주 유세 연설에서도 “매우 능력있고 똑똑한 여성이 될 것”이라며 “여러 명의 여성들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고 했다. 바버라 라고아 제11연방고등법원 판사,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 등의 후보에 대한 질문에 “둘 다 매우 존경받는 법관들”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정치권도 벌써부터 후임 대법관 인준을 둘러싸고 격한 공방전을 시작했다. 미치 매코널은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하는 후임 지명자는 상원에서 인준받을 것”이라며 신속한 의회 인준 절차를 공언했다. 법사위원장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도 트위터에서 “후임 대법관 지명과 관련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어떤 노력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은 2016년 2월 안토리아 스칼리아 대법관의 사망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후임자인 메릭 갤런드 대법관을 임명하지 못하도록 정반대 입장을 피력했던 전력이 있다. 대선이 있는 해인만큼 유권자들이 대통령 선택을 통해 그가 임명하는 대법관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이유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이 불과 50일도 남지 않는 시점에 서둘러 대법관을 지명하려는 움직임을 놓고 공화당 내에서조차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은 앞서 이달 초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너무 빠듯하다”며 후임자 지명에 반대했다. 리사 머코우스키 의원도 마찬가지 이유로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찰스 슈머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성명을 내고 “미국 국민들은 차기 대법관을 선택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며 “새로운 대통령이 임명될 때까지는 공석으로 비워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는 “대법원이 표에 달려있다. 그 결과는 앞으로 수세기 동안 의료보험에서의 시민 권리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투표와 지지를 호소했다.

●“우경화를 막아라” 대법원 진영 전쟁 시작됐다
미국의 대법관은 종신직이지만 건강이나 고령의 나이 등을 이유로 퇴임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고령의 나이에 힘겨운 암 투병을 하면서도 대법관 자리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의 빈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에 따라 미국 사법부의 성향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다.

9명인 연방대법관은 현재 보수 5명, 진보 4명으로 분류된다. 보수 공화당 소속인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이후 현재까지 보수 성향의 브렛 캐버노, 닐 고서치 대법관 2명을 임명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으로 또 다른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하게 되면 보수 대 진보 비율이 6대 3으로 바뀌게 된다. 진보 진영으로서는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다. 긴스버그 대법관은 이런 우경화 상황을 우려한 듯 임종 전 손녀에게 받아 적도록 한 성명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선임될 때까지는 나의 후임이 정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유언까지 남겼다.

실제 보수 진영에서는 “보수 대법관이 후임으로 임명되면 기존의 진보 성향 판결들이 뒤집힐 것”이라는 관측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당장 상원 법사위원회 소속인 공화당의 조시 홀리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하게 될 차기 지명자는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이 잘못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진보적 판결의 대명사로 평가받는 ‘로 대 웨이드’ 사건은 1973년 임신 6개월까지는 여성이 낙태할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다.

워싱턴=이정은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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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소수자의 권익과 인권 신장에 헌신해온 그가 별세하면서 미국 전역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긴즈버그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진보의 영웅이자 수십 년 간 여성 변호사들의 롤모델이었다”고 평가했다. 연방대법원은 19일 성명을 내고 긴즈버그 대법관이 췌장암 전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투병 끝에 워싱턴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 역사상 최초 여성 대법관이었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었다.

●“법조계의 영웅이자 별이 지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코넬대를 거쳐 1956년 하버드 로스쿨 입학하면서 법학의 길에 들어섰다. 500여 명의 로스쿨 학생 중 여학생이 9명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후 1970년대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에서 활동하며 여성평등 및 소수자 인권을 위한 법적 싸움에 헌신했다.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를 거쳐 1993년 워싱턴DC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 중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바이런 화이트 대법관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당시 상원에서 96대 3의 압도적인 지지로 의회 인준을 통과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여성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낙태를 옹호했고, 1996년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가 여성 생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판결을 함으로써 157년 간 남성만 교육대상으로 삼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깨뜨렸다. 남녀 임금차별문제를 소급해서 소송할 수 없다는 판결에 대해서도 소수의견을 통해 강한 반대의견을 내며 의회에 법안 수정을 촉구했다. 결국 의회는 이와 관련된 소송의 시점 제한을 완화한 ‘릴리 레드베터 법’이라고 불리는 공정임금법을 통과시켰다.

미국인들은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런 집요한 노력에 대해 그를 ‘악명높은(notorious) RBG’로 부르며 환호했다. 미국의 인기 래퍼인 ‘악명높은 BIG’에서 따온 애칭이었다. 그의 얼굴과 이름 약자인 RBG가 머그잔과 티셔츠, 지갑 및 각종 기념품에 사용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RBG라는 제목으로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고, 2015년 타임지는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했다.

그는 1999년 대장암이 발병했고 화학치료로 이를 이겨낸 이후에도 2009년 췌장암이 발병해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2018년에는 폐암으로 또 한 차례의 수술을 견뎌냈지만 올해는 또 간에서 암세포가 발견되는 등 모두 5차례나 암과 싸워왔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부정적인 인식 숨기지 않았다. 그는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사기꾼(faker)’라고 부르며 비판했고 “트럼프는 일관성이 없고 자아가 강하다. 그가 당선되면 나라와 사법부가 걱정된다”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긴즈버그 대법관이 나에 대한 멍청한 정치적 발언으로 대법원을 망신시켰다”며 “사임하라!”고 맞공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긴스버스 별세 직후 성명을 내고 “법조계의 거인을 잃은 것을 애도한다”며 “그의 기념비적인 판결과 정의에 대한 헌신, 용기 있는 암투병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기렸다. 이와 함께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워싱턴=이정은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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