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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팍과 무릎팍 중 어떤 것이 맞는 철자법인가. 수캉아지나 수사슴 같은 단어를 쓸 때 사이시옷(ㅅ)은 언제 넣고 빼야 할까. 희떠운(버릇없는), 재겨운(몹시 지겹다), 사위스러운(불길하고 꺼림직한) 같은 형용사의 뜻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강일고 교사 윤혜정 씨가 최근 채널에이 예능 프로그램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2’에 출연해 이런 문제들을 냈을 때 전현무를 비롯한 출연자들은 정답을 찾느라 끙끙댔다. 원어민인 한국인들도 막상 우리 말을 제대로 모르거나 잊고 있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빨간색을 표현하는 순우리말 형용사를 ‘발그레하다’에서 ‘뻘그죽죽하다’까지 20개 가까이 줄줄 읊어대는 ‘혜정 쌤’을 보고 스튜디오에서는 탄성이 터졌다.‘국어의 신’으로 불리는 윤 교사는 19년째 EBS에서 방송 강의를 하며 얼굴을 알린 일타 강사다. 사교육 업체들로부터 거액의 연봉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교육계 셀럽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제안을 모두 마다하고 꿋꿋하게 교단을 지키고 있다.》윤 교사는 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엄마주도 학습이 아니라 자기주도 학습으로 기본기부터 다지도록 학교에서 돕고 싶다”고 했다. 22년째 가르치고 있는 국어에 대해 “개념만 제대로 잡으면 혼자서도 독해력과 작품 분석력을 키울 수 있다”는 공부 방법을 강조했다. 쏟아지는 신조어와 외래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수십억 원대 연봉을 거절한 ‘공교육 지킴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지는 않나.“왜 사교육 시장으로 옮겨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지금까지 정말로 많이 받았다. 심지어 반 아이들도 왜 사교육 쪽으로 안 가느냐고 묻는다. 거기엔 꼭 수십억 원대 연봉 같은 이야기가 덧붙는다. 교사의 다음 단계가 사교육 강사라고 보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나는 이미 19년째 EBS 강의를 하고 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이 상태로도 행복하고, 지금도 이미 너무 힘들고 바쁘다. 아이들이 내 강의를 돈을 내고 듣는다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연봉과는 별개로 공교육 붕괴 등의 이유로 교단을 떠나는 교사들도 많은데….“주변에서 ‘학교에 남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진짜 많이 듣는다.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그런 말을 해준다. 나한테서 국어를 배우고 대학을 가서 교사가 되어 돌아온 제자들도 생겼는데, 얘들한테서 ‘롤모델’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라도 지금의 이 자리를 잘 지켜야 되지 않나 하는 마음의 부담감이 생겼다.”―학원이 아닌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사교육이 필요한 아이들도 분명히 있다. 사교육 쪽으로 옮겨 간 교사들 또한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챙긴다. 사교육을 악마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학교의 교사는 아이들의 학습 태도뿐 아니라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을 가르쳐줘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그게 정말로 부족하다. 교무실에 들어와서 자기 볼일이 끝나면 인사도 안 하고 나가버리는 학생, 팔짱 끼고 선생님한테 따지며 말을 함부로 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게 문제인지 인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공교육의 붕괴 원인으로 일선 교사들의 실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동의하지 않는다. 학교 교사들은 정말로 치열한 임용 과정을 거쳐서 온다. EBS 강의를 함께 하는 다른 선생님들도 보면 정말 훌륭하다. 학생들의 학습 편차는 매우 크고, 공부 의욕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 아이들이 섞여 있다. 지난해 2학년 담임을 하면서 이런 아이들을 그룹별로 나눠 공부 계획을 같이 세우고 매일 체크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게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이 있은 지 2년이 지났다. 거리로 나섰던 교사들이 토로한 문제들을 어떻게 보나.“교사들이 정말 힘든 상황인 건 맞다.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폭언이나 폭행을 하기도 한다. 학습 지도뿐만이 아니라 생활지도하는 게 조심스럽고 어려운 시대다. 제 주변에도 학생 문제로 밤에 집에 가는 길이 무서워지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는 분들이 있었다. 현장 교사들은 프로그램 기획부터 행사 진행, 물품 구입에 정산 보고서 작성 같은 행정 업무도 같이 해야 한다. 어떤 때는 10원 단위가 안 맞아서 머리를 싸매기도 한다. 제대로 하려면 시간이 모자라서 남은 업무를 집에서 밤늦게까지 해야 한다. 수업만 하라고 하면 정말로 더 많은 것들을 준비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깝다.”―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학생들도 힘들어 보이긴 마찬가지다.“많은 학생들이 자기주도 학습이 아니라 엄마주도 학습을 하고 있다. 엄마표라는 건 참 좋은 거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설명회를 해보면 예전에는 학생 본인이 직접 왔는데 이제는 엄마들이 학원 간 자녀를 대신해서 온다. 엄마들이 들은 이야기를 집에 가서 전달하면 그게 애들한테는 잔소리가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내가 해야 될 시간의 분량을 채워서 하면 점수가 나오게 돼 있다.” 윤 씨 본인은 제대로 된 입시 공부를 시작한 게 고2 때였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입시 준비보다는 동아리 등 다양한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학생이었지만, 보고 싶은 책만큼은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만화를 포함해서 한껏 많이 읽었다. 국어교사로 교단에 선 뒤에는 수업을 위해 “교과서를 빨래 짜듯이 남김없이 비틀어짜서 개념부터 다 털어냈다”고 했다. 품사에서 시작해 여러 국어의 개념들을 재배열하며 공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저서 ‘개념의 나비효과’ 교재는 133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국어에 개념이 있다니 생소하다.“수학이나 영어, 사회 같은 과목들과 달리 국어는 시험 범위가 특정되지 않는다. 당장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니 무작정 문제집을 사서 풀거나 시나 고대 가요부터 외우는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다. 소설에는 주제, 구성, 문제가 있고 인물, 사건, 배경이 중요하다. 이런 개념을 알고 공부하면 처음 보는 지문이나 장면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선생님이 밑줄 그으면서 해석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개념을 잘 잡으면 나비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고전 작품을 하나씩 정리하면 수십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런 개념 강의는 딱 2시간짜리다.” ―그래도 국어 문법은 품사니 어미니 용어만으로 어렵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킬러 문항’ 논란으로 학생들이 혼란을 겪기도 했다.“기본기가 중요하다. 내신이랑 수능도 사실 개념은 다르지 않다. 교사들에게 가장 큰 사고는 등급을 못 맞추는 것이다. 현재는 4%만 1등급을 줘야 하는데 동점자나 만점자 수가 이 비율을 넘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변별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니 고난도 문제 출제를 위해 교과서 외부의 어려운 지문을 내거나 지엽적인 정보를 비틀어 기괴한 문제를 출제하기도 한다. 사실 평가만 제대로 이뤄지면 수업 방식도 상당히 바뀔 수 있다.” ―영어 사용이 늘면서 우리 말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학교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보면 외래어를 정말 많이 쓴다. 아예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이 봤다. 학생들의 경우 외래어를 섞어서 쓴다기보다 신조어들을 많이 만들어서 쓴다. 그냥 다 줄여버리는데, 나도 그게 무슨 말인지조차 알 수 없는, 출처도 모르는 신조어들이 많다. ‘그런 거 너무 많이 만들면 너희들의 자식이 힘들어진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런 외계어 같은 말들이 한글을 해칠 수 있다. 영어는 하루에 200개씩 외우면서 학생들이 국어의 표현들은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막상 외국에서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K팝이나 드라마 인기 덕분에 한국어 전공자도 늘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필요하다. 요즘 애들은 인스타그램 같은 SNS 사용이 많고 문화적으로 교류가 활발하다. 영어를 편하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어는 영어대로 쓰되 우리 국어는 국어대로 지켜야 한다.”강일고 윤혜정 교사(45)△ 1980년 서울 출생△ 2003년 성균관대 교육학·국어국문과 졸업△ 2004년∼고등학교 교사△ 2007년∼EBSi 국어 영역 강사△ 2009년, 2024년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 수상△ 2010∼2012년 EBS 언어영역 최우수강사 연속선정△ 2011년 EBS ‘개념의 나비효과’ 강의 진행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국 국방부 청사 벽에는 미군이 참전했던 주요한 5개 전쟁의 대형 그래픽이 붙어 있다.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걸프전, 그리고 한국전쟁이다. 군 당국자들은 한국전쟁의 치열했던 장면과 ‘코리안 워(Korean War)’라는 전쟁명을 매일 보면서 이 복도를 지나다닌다. 함께 피 흘리며 싸운 동맹임을 인식하고 있어서일까. 한국말은 못 해도 “같이 갑시다”는 외쳐대는 미군 당국자들을 접할 때면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뭔가 좀 다르다고 느꼈다.펜타곤 자주파 vs 국무부 동맹파그랬던 펜타곤의 요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주한미군 4500명 감축설과 방위비 증액 압박, 4성인 주한미군사령관의 계급 격하 검토 등이 현지 언론을 통해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한반도 전구(戰區) 통합 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듯한 움직임도 감지된다. “이대로면 제2의 애치슨 라인이 그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워싱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한국을 향한 메시지도 건조해졌다. 4월 서울에서 진행된 한미일 안보실무회의와 도상 훈련 후 미 국방부가 낸 공동성명은 이례적으로 짧았다. ‘3국은 안보협력의 모멘텀을 유지해 나가기로 약속했다’는 한 줄이 전부다. 고위급 회담은 아니었지만 5년 만에 재개된 훈련을 놓고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내놓은 첫 공동성명이었는데 말이다.불과 두 달 전 미국 국무부가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동 후 낸 공동성명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흔들릴 수 없는 파트너십’ ‘강력한 안보협력’ ‘동맹의 힘 강화’ ‘한국 방어에 대한 미국의 철통같은 약속’ 같은 표현들이 국방부 성명의 10배가 넘는 분량 곳곳에 담겨 있다. 이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국방부 성명을 보면서 워싱턴의 지한파들은 한미동맹 변화의 불길한 전조를 느꼈다고 했다.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의 갑작스러운 인사 교체와 인력 감축으로 급속히 약화된 상태로 알려져 있다. NSC가 지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책을 끌고 가는 건 펜타곤의 소수 강경파 인사들이다. 그 핵심에는 엘브리지 콜비 정책차관이 있다. 오커스(AUKUS) 회원국인 호주와 맺은 핵잠수함 협정의 재검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의 전격 중단 결정도 콜비 차관이 주도했다고 한다. 이런 민감한 결정을 미 의회와도 사전 협의하거나 심지어 통보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는 외신들의 보도는 실세 차관인 그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대중 매파인 콜비 차관은 미국의 군사력을 중국 견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소신이 확고하다. 이를 위해 한반도 유사시 북한의 공격 대응은 한국이 알아서 책임지고 전시작전권도 가져가라는 식이다. 달성이 불가능한 북한 비핵화 대신 군축 협상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밝혀왔다. 확장억제 강화에는 회의적이고, 한국의 자체 핵무장에는 열려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밀어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틀어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국방정책이 하나씩 현실화하면 한국의 안보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콜비 차관 강경책에 동맹 약화 우려시한이 임박한 한미 간 통상 문제가 당장은 시급하지만, 방위비 증액을 비롯한 안보 이슈도 장기적으로는 이와 맞물려 있다. 펜타곤이 새 국방전략(NDS) 구상을 발표할 시점이 9월로 눈앞에 다가와 있기도 하다. NDS의 세부 내용이 확정되기 전에 한국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방책을 찾아야 한다. 외교적 파장을 우려하는 국무부가 국방부의 독주를 막기 위해 물밑에서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소위 ‘펜타곤 자주파’에 맞서는 ‘국무부 동맹파’를 통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고구려 벽화와 석굴암, 거북선, 혼천의 같은 한국 문화유산들을 빛으로 그려낸 홀로그램에서부터 첨단 정보통신기술(ICT)로 구현한 빙판 위 빛의 무대, 이어 하늘에서 펼쳐진 화려한 오륜기 드론쇼까지. 7년 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은 우리 전통문화와 첨단 기술을 세련되게 결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연출을 맡은 양정웅이 송승환 총감독과 함께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양정웅이 다시 국가적 행사 무대로 돌아왔다. 이번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예술총괄감독이다. APEC은 미국과 캐나다, 중국,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모이는 주요한 외교 행사로, 각국 대표단과 비즈니스 관계자 등을 합치면 참가 규모는 2만 명에 이른다. 10월 말부터 열리는 이 행사에서 양 감독은 정상 갈라 만찬을 비롯한 주요 문화, 예술행사를 총괄하게 된다.》양 감독은 “경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키웠던 ‘신라의 꿈’을 디지털 기술과 접목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각국 정상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K팝과 K푸드, K드라마 등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연출의 소재들이 정말 많아졌다”며 “무엇을 골라서 보여줘야 할지 모를 정도여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비상계엄과 탄핵 등으로 APEC 준비가 지연됐는데, 맡은 분야 상황은 어떤가.“외국 정상들과 대표단에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알리겠다는 방향과 목표가 확실하다. 행사 콘셉트를 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실질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메시지, 콘셉트와 공연의 디테일을 잘 조합시키는 게 중요하다.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면서 플랜 B에서 C, D, 그 이상으로 최대한의 것을 만들어가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책임자 자리를 고사한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부담은 없었는가.“문화와 예술은 정치와 모든 걸 넘어서 자유롭게 대중을 만난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일이다. K콘텐츠가 역대급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때에 한국의 문화 저력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제안을 받았을 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번 APEC 주제가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이고 중점 과제는 연결· 혁신·번영이다. APEC이 함께하는 미래에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발전적인 메시지를 문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다.” ―한국, 특히 경주의 특징과 매력을 잡아내는 게 중요할 것 같다.“제 본적이 경주다. 경주시 황오동 16번지. 방학 때면 할머니 집으로 내려와 신라 왕릉에서 미끄럼 타고 개구리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주를 소재로 한 ‘미실’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때 배우들을 데리고 경주로 내려가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워크숍을 하면서 ‘신라의 꿈’을 펼쳤다.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매력을 보여줄 것이다.” 배우 출신으로 연극 무대 연출을 해 온 양 감독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이어 지난해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개·폐회식 등 국가급 대형 행사, 성남페스티벌과 명량대첩축제 같은 지자체 이벤트 무대를 진두지휘한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남북,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에 김여정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 참석으로 주목받았던 평창 올림픽은 “미사일을 쏘네 마네 하면서 전쟁 나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마음 졸이고 간절히 기도하며 준비했던 행사”라고 회고했다. ―당시 현대적 정보기술(IT)을 융합한 독창적인 무대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미디어 아트, 뉴폼 아트라고 부르는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접목은 내가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강의를 한 분야이기도 하다. 인간은 예술과 인간성을 찾는 아날로그적 본성이 있는데, 동시에 디지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장르적인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엮어내느냐는 미래 숙제다.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고, AI나 기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변한다. 미디어 아트가 전통과 현대의 예술과 만났을 때 어떻게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한다. APEC에서도 이를 콘셉트에 맞게 잘 보여줄 방법을 찾고 있다.” ―APEC은 21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난도가 높은 행사다. 기존의 다른 행사들과 차이가 있다면….“각 나라를 이끄는 정상들 앞에서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더 즐겁게, 재미있게 잘하고 싶다. 한국인의 흥 같은 것들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보여주자는, 그런 기대와 흥분 속에서 준비하고 있다. 공연이 펼쳐지는 갈라 만찬 준비가 제일 중요하다. ‘동궁과 월지’, 그러니까 예전에 안압지라고 불렸던 곳이 만찬 행사를 열기에 정말 좋은 곳인데 10월 말은 추위나 가을비 리스크가 있다. 안전하게 실내에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경주박물관 마당에 만찬장을 짓고 있는 중이다.” ―예스러운 아름다움과 현대 문화를 엮어내는 작업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오징어 게임’, ‘기생충’, ‘미나리’, 한강의 작품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 작품이 이제는 정말 많다. 영화는 물론 K팝과 뷰티, 패션, 음식 등까지 인기다. 이제는 공연 부문만 남았다고 했었는데 ‘어쩌면 해피엔딩’이 최근 그 서막을 열었다. 옛날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세계적인 인기다. 사실 평창 올림픽 준비를 할 때까지만 해도 싸이의 ‘강남스타일’ 정도를 빼고는 이렇게 유명한 게 없었다. BTS도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지금은 참 보여 줄 게 많아졌다. 무엇을 골라서 보여 줘야 할지 모를 정도여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20년 전 부산 APEC과는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준비하고 있나.“부산 APEC은 해외 정상들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찍었던 사진이 기억나는, 당시 한국에서 정말로 큰 행사였다. 그래도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기에는 갭이 좀 크다. 이제는 세계 정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 문화와 예술과 음식 같은 것을 직간접으로 겪어보셨기 때문에 그때와는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 IT가 크게 발전했다. 부산 APEC이 좀 더 전통적이면서 아날로그적인, 클래식한 문화 예술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APEC 연출 사례들도 참고하나.“물론이다. 인도네시아 것도 좋았고 중국, 페루 등 거의 모든 나라의 전례들을 참고용으로 훑었다. 결국은 각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표현을 해낸 것들이다. 예술과 문화는 그 나라의 아이덴티티니까. 전통을 베이스로 우리만의 분위기와 느낌을 찾아 표현할 것이다. 문화는 디테일이기도 하다.” 양 감독은 연극계에서 ‘셰익스피어 스페셜리스트’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연극 공연을 많이 해왔다. 해외 투어 공연에 나섰던 ‘한여름 밤의 꿈’, 배우 황정민과 함께 했던 ‘맥베스’ 등은 모두 셰익스피어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있나.“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막장 드라마 작가라는 점이다(웃음). 주인공이 친척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 갈등과 질투와 배신과 유머, 심지어 요정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모든 게 다 있다. 사람이 겪는 모든 드라마틱한 상황들을 문학적인 수사로, 아름다운 대사의 향연과 함께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로 전달한다. 공연 연습을 하다 그의 영혼을 만난 듯한 황홀감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셰익스피어의 37개 작품을 모두 공연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현재까지 10개 정도밖에 못 했지만.” ―연출의 무대를 고전 작품에서 올림픽 개회식이나 APEC 같은 행사로 넓히는 이유가 있나. 이벤트 무대의 매력은 뭐라고 느끼나.“공연하는 자와 즐기는 자가 함께 있는 곳이 무대다. 큰 무대, 작은 무대가 따로 없다. 어렸을 때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면서 알래스카와 남미 안데스 문명의 사원, 아프리카 초원 같은 곳을 꿈꿨다. 연극을 할 땐 전 세계를 돌면서 다른 문화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함께하는 예술을 꿈꿨다. 처음 만들었던 극단 이름이 ‘여행자’였다. 10년 동안 집시처럼 돌아다니면서 해외 공연 투어를 했다. 그렇게 해외에 한국 문화와 예술을 알리고 싶었다. 평창 올림픽이나 APEC 행사는 그런 꿈의 연장선상에 있다.”양정웅 APEC 예술총괄감독△1968년 서울 출생△1992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1997년 극단 ‘여행자’ 창단△2012년 베세토연극제 한국 대표(위원장)△2015∼2020년 서울예대 공연학부 교수△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총연출△2024년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제15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 대상(2003년), 폴란드 그단스크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대상·관객상(2006년),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연출상(2009년), 대한민국 한류 대상(2013년), 체육훈장 맹호장(2018년)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김민석 총리 후보자가 지난주 기자간담회에서 ‘반미(反美)주의자’ 질문을 받았을 때 내놓은 답변은 핵심을 비껴 간 부분이 있다고 본다. 하버드대를 다녔고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딴 것이 곧바로 반박 논거가 되지는 않는다. 한미동맹을 폄훼하거나 미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반복했던 인사 중에 미국에서 공부했거나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사례도 적잖다. 김 후보자가 과거 경력을 설명하는 대신 ‘우리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은 중요하다’고 힘을 싣는 발언을 했으면 어땠을까.동맹파에 힘 실은 국가안보실 인선 반미와 친미를 나누는 과거의 단순한 이분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거나 관저를 향해 짱돌을 던지지 않는다. 강대국을 향해 치기 어린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서로 주고받을 것을 가진 중견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외교적 역량이 그만큼 올라왔다.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안보 참모들도 “반미 여론을 갖고 장사할 때는 지났다”고 말한다. 이 대통령은 한미, 한미일 협력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외교안보 사령탑에 동맹파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임명한 데 이어 주미대사관 정무공사를 지낸 ‘워싱턴 스쿨’ 외교관을 국가안보실 2차장에 앉힌 것에서도 일관된 방향성이 확인된다. 후속 인선이 지연되면서 20여 년 전 이른바 ‘자주파 대 동맹파’ 충돌의 기억이 소환되던 타이밍에 스멀스멀 올라오던 우려를 일단락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위 실장을 ‘찐미(진짜 미국)’로 평가하며 “한미 관계를 잘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에 대해 “DJ(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도 찐미”라고도 했다. 다만 박 의원이 이 자리에서 언급한 자주파 6인회의 영향력 또한 아직도 건재하다. 6인회 멤버인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20대 대선 당시 이재명 캠프에서 실용외교위원장을 맡고 있던 위 실장과 충돌했던 게 불과 3년 전이다.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을 작성하면서 이 후보자가 위 실장을 패싱했다는 논란이 벌어지는 등 강한 견제가 지속됐다. 캠프에서 공약을 놓고 벌어졌던 양측 갈등이 실제 국가 정책을 두고 표면화한다면 재앙이다.달라진 美 상대하는 외교 집중할 때‘찐미’ 외교안보팀이라도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상대하는 일은 점점 험난해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5개월 만에 전국적 비판 시위에 직면했다. 지지율이 계속 떨어진다면 내년 중간선거에서 의회 과반을 놓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중재가 난항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이란 전쟁까지 터졌다. 시한이 임박한 주요국들과의 관세 협상 또한 기대했던 속도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초조해질수록 대외정책은 더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튈 가능성이 높다. 한국을 상대로 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나 주한미군 재배치, 북-미 대화 재개 등을 놓고 무리수를 두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관리도 숙제이지만 시급성과 난이도에 있어선 달라진 미국을 상대하는 게 상위에 놓여 있다. 더구나 대중, 대러 외교는 모두 미국과 교차방정식으로 엮여 있는 게 한반도 외교 판의 현실이다. 이 대통령은 캐나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통해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이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지금부터는 첩첩이 쌓인 외교안보 과제들을 풀어내는 일에 정신없이 속도를 내야 한다. 불안하게 흔들릴 조짐을 보이는 한미동맹을 다잡고 이를 바탕으로 이재명표 실용외교가 뭔지 보여줘야 할 것이다. ‘제2의 자주파 대 동맹파’ 갈등으로 초기 동력을 놓칠 여유는 없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3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내며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만만찮은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국가적 난제들을 풀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어떤 원칙과 방향성을 갖고 국정 운영을 해 나가야 할까.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 보복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수준의 과거 청산은 백해무익”이라며 통합을 바탕으로 국가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4일 업무를 시작한 이재명 대통령 앞에는 국가적 과제가 산적해 있다. 0%대까지 추락한 경제성장률 전망과 민생, 미국발 관세 압박, 급변하는 대외정세와 안보 위협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현안들이다. 극단으로 치달은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 분열 또한 해결이 시급하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라면 정치 이념조차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로 인선과 정책 추진에 나서야 성공한다”고 강조했다. 신학, 철학자이자 시민운동가 출신의 원로 지성인으로 꾸준히 목소리를 내 온 손 교수는 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보복이란 인상을 줄 수 있는 과거 청산에 매달리는 것은 백해무익”이라며 “그 일은 수사와 재판 담당 기관들에 맡기고 이재명 정부는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재명 정부의 첫 인선이 발표됐다. 어떤 인선 원칙과 방향성을 갖고 사람을 써야 한다고 보나.“정당이나 이념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 선택했다고 국민이 믿을 만한 사람을 써야 한다. 그런 인상만 줘도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 거다. 사람을 선택할 때 혼자 하지 말고, 해당 분야 단체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많이 구해야 한다. 당선에 공헌한 사람 몇 사람의 의견만 들어서 하는 인사는 실패다. 소위 폴리페서라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찾아다닐 텐데, 그런 사람은 모조리 끊어야 한다. 뭘 하고 싶다고 덤벼드는 ‘하고재비’들은 순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한텐 어려운 임무라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진짜다.” ―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통합정부’를 공언했다. 어떻게 실현해 나가야 하나.“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갈등은 지역이나 빈부 갈등이 아닌 정치적 이념 갈등이다.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분열이다. 새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인식해서 정당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 대통령이 정당을 아예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당이 아닌 국민을 위해 일하려면 정치 이념조차도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로 임하는 거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내란 규명’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보복 논란 없이 이를 진행할 수 있다고 보나. 그 선은 어떻게 그을 수 있을까.“담당 기관들의 객관적 조사를 따르고, 사법부의 판단을 믿으면 된다. 새 정부는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매진해야지, 적폐니 과거 청산이니 하면 국민들에게 정치보복이라는 인상만 줄 것이다. 정치가 앞서서 미리 결론을 왜 내리나.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에 새 정부가 쓸 에너지와 시간이 어디 있나. 백해무익하다.” ―그러나 선관위나 사법부 자체의 신뢰도부터 흔들리고 있는 상황 아닌가.“사법부의 신뢰도를 흔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장난이다. 권력 집중과 부패를 막는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그동안 사법부에 대해 너무 간섭을 많이 했다. 그게 결과적으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제 당선이 됐으니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린다고 해버려야 한다. 대통령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과거 문제로 시간을 보내다가는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한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해 거대 권력을 갖게 된 이 대통령이 야당과 반대파의 목소리를 제대로 정책에 반영하도록 할 방안이 있을까.“이 대통령이 여당 야당 프레임을 초월해야 한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세기 때문에 정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일단 논공행상부터 반드시 없애야 한다. 정당의 사사로운 이익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심을 좀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수고했다는 이유로 챙겨주려면 대통령 자격이 없는 졸자가 된다.” ―견제 세력이 사실상 없어지는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게 될 경우의 정책 독주 등 위험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큰데….“주어진 그 막강한 권한을 잘못 사용하면 아주 추하게 돼 버린다. 권력이라는 게 무서운 거다. 잘못 사용하면 남도 망치고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고통을 주는, 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임 대통령이 과거 잘못한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심각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부족하고 모르는 분야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변에 자문을 구해야 한다. 잘못한 게 있으면 말도 안 되는 구실 붙이지 말고 즉각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국민의 신임을 얻는다. ‘내가 다 알고, 권력 쥐었으니 내가 모든 걸 다 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 대통령이 내놓은 공약 중에는 찬반이 극렬하게 나뉘거나 우려를 낳는 정책들이 적잖다. 시행 과정에서 예상되는 부작용과 충돌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한 번 내놓은 정책이라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불변 정책은 아니라고 본다. 솔직하게 ‘당선을 위해서 필요했는데 이제는 새롭게, 나라에 정말 이익이 되는 걸 논의하자’고 해주면 좋겠다. 매우 극단적인 반대가 있는데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건 어리석다고 본다. 어느 정도의 반대야 늘 있겠지만, 심하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정도로 갈리는 사안이라면 좀 보류할 수도 있다고 본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주 의회에서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과 벌인 한판 공방은 격렬했다. 15년 지기 의회 동료라는 크리스 밴홀런 상원의원은 목까지 시뻘게질 정도로 고성을 질러가며 루비오 장관을 맹공했는데, 속사포로 받아치는 루비오 장관도 날이 잔뜩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대응, 국제개발처(USAID) 예산 삭감 등 현안을 놓고 양측은 3시간 동안 건건이 충돌했다.6·3 대선 후 몰려올 외교안보 현안들 국내 이슈는 몰라도 외교안보 정책만큼은 초당적으로 협력해온 게 미국 의회였다. 그러나 전례 없이 벌어진 정치 양극화의 간극 속에 미국마저 ‘초당적’이라는 단어는 신화 속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다. “(당파적)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고 외치며 외교안보 분야의 초당적 협력을 끌어냈던 ‘반덴버그 결의안’이 무색하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한국이야말로 초당적 외교가 절실한 나라다. 그러나 전문가와 정치인, 언론이 모두 한목소리로 그 필요성을 외쳐 왔음에도 지금까지의 시도들은 낙제점에 가깝다. 4강에 둘러싸인 것도 모자라 핵 개발에 골몰하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차이부터 현격해 중간 지점을 찾기 어려운 탓이다. 국익을 앞세운다지만 각자가 보는 국익의 성격과 확보 방안, 달성 시점 또한 일치하지 않는다. 대선을 앞두고 각 당 후보들이 내놓은 외교안보 분야 공약은 사안마다 차이가 상당하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주한미군 역할 재조정, 미국의 대중 견제 정책 동참 여부를 놓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다른 대응안을 제시하고 있다. 민감도가 높은 대(對)중국, 일본 정책에 있어서도 양당의 접근법 차이는 적잖다. 이 후보가 ‘실용외교’를 앞세우며 일부 우클릭을 시도하고 있지만, 캠프에 포진한 인사들의 면면으로 볼 때 실제 이행에 들어가면 다시 강경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국의 새 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은 관세 협상 강도를 높이고 주한미군 감축 혹은 재배치, 최대 10배까지 거론됐던 방위비 증액 요구, 대만해협을 아우르는 전쟁구역(전구·戰區) 통합 논의 등을 줄줄이 본격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틈을 타고 한미 관계를 이격시키려는 중국의 시도 또한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국내 여론은 민감해지고, 양당의 갈등은 그만큼 더 첨예해질 것이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분열의 과정은 애써 끌어모아도 부족할 대외적 협상력을 갉아먹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점에 국회 미래연구원이 초당적 외교안보 분야 합의점을 찾아보겠다며 최근 보수, 진보 양쪽의 전문가와 국회의원 등을 모아 ‘코리아 컨센서스’ 포럼을 발족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축사에 나선 우원식 국회의장이 “전환기 복합적 위협 속에서 어느 때보다 초당적 외교가 중요해졌다”고 역설하는 그 시간에 민주당에서는 김문수 후보를 향해 ‘국익을 위협하는 외교 리스크’, ‘위험하고 해로운 졸속 후보’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방위비 분담금을 올릴 수 있다는 김 후보의 한마디를 이렇게 문제 삼았다.이념 절제 속 보수-진보 접점 찾아야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초당적 협력은 아직까지는 달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허상이다. 다만 그 허상이라도 좇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대외적 환경이 엄중하다. 결국 의견 차이를 좁혀가며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접점을 조금씩이나마 찾아 나가는 수밖에 없다. 현안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강경파에 휘둘리지 않고 이념을 앞세운 과격한 주장을 자제하는 절제력부터 발휘해야 한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이런 상황에선 북한이 진짜 쳐들어올 수도 있겠다.’ 더불어민주당의 탄핵안 강행에 직면한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의 1일 밤 사퇴 속보를 접한 순간 한 고위 외교당국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한반도 정세를 지켜보며 남북관계를 다뤄온 전문가를 긴장시킬 만큼 정치권의 혼란 속 리더십 구멍이 그만큼 크게 보였다는 의미다. 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물자와 인력을 쏟아부은 탓에 남침 여력도 의지도 현재로서는 없다는 게 정보당국의 분석이지만, 평양의 오판 가능성은 상존한다.국정 빈틈 우려되는 ‘대대대행’ 체제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의 대행이 된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북한이 어떠한 도발 책동도 획책할 수 없도록 빈틈없는 대비 자세를 유지하기 바란다”는 메시지에는 원고를 읽는 수준을 넘어서는 힘이 없었다. 1년 넘게 의대생 증원 문제의 대응에 급급했던 그다. 그런 이 부총리 개인의 결기나 의욕만으로는 메우기가 쉽지 않은 사상 초유의 국정 공백이자 안보 사령탑 부재 상황이다.글로벌 통상 분야는 미국의 관세 압박 속에 이미 소리 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미국의 5개 우선 협상국으로 지목된 한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는 중이다. 그런 협상팀에 힘을 보태지는 못할망정 ‘매국’ 딱지를 붙여 공격하던 민주당은 아예 협상 선봉에 서 있던 최 전 부총리마저 끌어내렸다.관세 협상은 어차피 6·3 대선 이후 차기 정부가 마무리할 일이니 미국 측에 국내 정치적 변수들을 핑계 삼아 버티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미국 측이 정신없는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감안해줄 것이란 전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90일간의 관세 유예 기간 내에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는 트럼프 행정부가 우리 상황을 되레 이용하려 할 수도 있다. 미국의 속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되지만, 대선 후 새 정부가 제대로 협상할 수 있도록 탄탄한 사전 준비 작업을 해놓을 필요가 있다. 이는 정확한 방향성과 지침 없이 실무자들끼리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안보·경제 후과에 민주당도 책임져야일본의 경우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협상 과정을 일일이 보고받고 취재진에게 직접 설명도 한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J D 밴스 미국 부통령에게 “상대하기 힘든 협상가(tough negotiator)”라는 평가를 들어가며 대미 관세 협상을 밀어붙이고 있다. 비슷한 시기 협상을 시작한 이들 나라는 관세를 대폭 면제받는데 우리만 시한을 넘긴 채 25%가 유지되는 최악의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2, 3주 안에 그냥 가격을 정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국내 정치 갈등이 아무리 극심하더라도 그것은 안에서 치고받고 싸울 일이다. 대외적으로 국가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경제와 안보라는 국가의 두 핵심축을 흔드는 수준까지 치닫는 것은 선을 넘는 자해다. 민주당의 이번 탄핵은 경제 수장인 최 전 부총리를 통해 그나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주요 현안 대응의 끈을 사실상 끊어버렸다는 점에서 질이 나쁘다. 국익보다 당의 이익을 앞세워 폭주한 무책임함은 말할 것도 없다.조기 대선 승리를 점치는 민주당은 남은 한 달여 동안 서열 4위의 대대대행 체제로 적당히 버티고 뭉개면 된다는 심산일지 모르겠다. 33일이라는 국가의 시간이 그렇게 가벼운가. 이 기간의 정부 결정과 대응은 향후 3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후과를 남길지 모른다. 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민주당도 함께 져야 할 것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최근 관세 관련 의회 청문회에서 “왜 적과 친구를 똑같이 대하냐”는 질문에 시달렸다. 동맹과 우방국들에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적’으로 분류돼온 러시아와 벨라루스, 북한, 쿠바에 대해서는 상호관세를 부과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는 질의가 이어졌다. 미국 상원의원들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정책 결정이라는 반응이었는데, 이에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그리어 대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핵폭탄급 관세 정책을 발표하면서 “친구가 적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대미 무역흑자를 보는 국가들은 미국을 ‘약탈하고 후려치고 등쳐먹고 뜯어먹고 호구 삼는’ 나라다. 연간 1조2000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악화시킨 주범 국가들이다. 이런 인식은 트럼프 대통령의 뼛속까지 각인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협상용 수사라고 하기엔 지독하게 일관돼 있고, 반복해서 튀어나온다. 좋은 물건들을 그저 열심히 잘 만들어서 팔았을 뿐인 수출국들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다.‘원스톱 쇼핑’ 맞춘 최적 조합 찾아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콕 찍어 말한 게 여러 차례였지만,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호주는 미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는 나라이자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안보 파트너임에도 관세를 피해가지 못했다. 일본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특별 제작한 황금 투구까지 들고 갔지만 우리보다 단 1%포인트 적은 24% 관세를 맞았다. 대만, 인도 등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협상을 요청하는 나라들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내게 아부를 떨고(kissing my ass) 있다”고 조롱하듯 말했다. 미국이야말로 ‘적보다 나쁜 친구’로 돌변할 판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대가 불신과 편견까지 안고 협상장에 나오니 타협점을 찾는 과정은 전례 없이 험난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원스톱 쇼핑’은 미국이 그리는 협상의 그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도움이 될 방향점이다. 한국의 경우 조선업 협력, 액화천연가스(LNG) 구매, 알래스카 가스관 프로젝트 참여 등에 더해 군사안보 분야까지 패키지로 엮어 총괄적으로 주고받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1기 행정부 때 집요하게 요구했던 게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었다. 글로벌 관세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인 2019년 방위비 분담금을 5배 늘리라고 압박했다. 지난해 대선 유세 기간에는 10배로 높여 불러놓은 상태다. 이번에는 반드시 받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눈치이니 어차피 피해갈 방법도 없다. 1기 때에는 연계된 카드가 주한미군 감축 같은 안보 분야에 국한됐지만 이번에는 경제, 산업 분야까지 넓혀져 있다.방위비까지 패키지로 묶는 대응 필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던 초기 “피로 맺어진 동맹국의 전우를 용병으로 만들려는 것이냐”는 비판이 미국 내 지한파 학자와 의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북한의 핵 위협 사정권에 놓인 미국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 또한 증액 압박에 맞서왔다. 다만 더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한국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돼 있다. 그 성장의 바탕에 미국이 제공해준 안보가 있었음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정부는 협상 과정에서 방위비 같은 안보 이슈를 먼저 꺼내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한시적인 유예기간이 끝나자마자 되살아날 25%의 관세 폭탄 앞에서는 안일한 접근이다. 분야별로 가치가 다른 협상 카드들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담판 과정에서 상대를 설득할 최적의 조합을 찾으려면 우리가 선제적으로 묶어낼 필요가 있다. 큰 틀에서 통 크게 거래의 고차방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얼마 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에게서 “한국의 민주당이 정말 중도 보수냐”는 질문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우리는 진보가 아니다”며 중도 보수를 자처하는 발언을 내놓으면서 논란이 이어지던 시점이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한국 야당의 이념 성향 변화까지 이런 속도로 업데이트하고 있었던가. 이 관계자는 이 대표의 발언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기보다 민주당 노선이 실제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듯했다.美에 도표 그려가며 ‘중도 보수’ 역설민주당 의원들은 요즘 자신들이 접촉하는 미국 측 인사들에게 자신들이 중도 보수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접촉한 지난달 한 면담 자리에서는 한국 진보 정당의 뿌리가 원래는 보수였다는 점을 강변하며 아예 도표를 그려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워싱턴의 상부로 보고됐을 것이다.미국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당국자들이 주 52시간이나 상법 개정안 같은 한국의 경제, 민생까지 관심을 가져서 그랬을 리 없다. 조기 대선이 치러지고 정권이 교체됐을 경우 한국의 대미, 대중 정책 같은 외교안보 방향이 어디를 향할지 가늠하려 했을 것이다. 탄핵 정국 이후의 여러 시나리오를 미국 또한 들여다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민주당이 미국 측에 ‘중도 보수’ 노선을 역설한 것은 자신들의 대외정책 노선을 미국이 껄끄럽게 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중국,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했던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와 툭하면 삐거덕거렸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하노이 정상회담이 틀어진 이후 비핵화 문제는 물론이고 종전선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중국 견제 등 주요 현안마다 충돌했다. 고위 당국자가 대놓고 ‘죽창가’를 외치는 문 정부의 대일 기조 또한 한미일 협력을 외쳐온 미국과 어긋났다. 미국 당국자들이 한국을 향해 “보조를 맞춰야 한다(in lockstep)”는 표현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게 이때다. 보조가 안 맞는다는 미국의 불편함이 역설적으로 더 드러났다.백악관과 국무부 당국자들은 겉으로는 “어떤 정권이냐는 상관없다. 이념은 달라도 각자의 국익에 따라 외교를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국과 다른 외교노선을 타는 동맹국 정부를 향해 보이지 않게, 때로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강대국의 실력행사를 주저하지 않는 게 미국이다.민주당이 지난해 4월 총선 이후 물갈이가 된 만큼 노선 변화가 적잖다는 분석도 있다. “반미나 반일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은 이제 안 나오지 않느냐”는 내부 항변도 들었다. 그러나 중도 보수를 외치면서 주요 정책마다 좌클릭하며 돌아가는 이 대표의 오락가락 행보를 보면 외교안보 분야라고 다를지 의문이다. 586 운동권 인사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진 원로 전문가들도 건재하다.외교안보만큼은 오락가락 행보 안 돼국내 현안을 놓고 정치적 계산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행보는 피곤할지언정 안에서 감내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상대국이 있는 외교안보는 다르다. 말이 바뀌고 불신이 쌓이는 만큼 국가적 손해가 커진다.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전했던 문재인 정부에 대해 “속았다”고 생각했고, 그 인식이 향후 한국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 노선을 물었던 미국 당국자가 대화를 끝내면서 했던 말은 “트럼프 대통령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한마디였다. 민주당이 집권하든 야당으로 남든 피해 갈 수 없는 경고로 들렸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 길을 잃어버려 집으로 못 돌아오는 할아버지, 폭언과 분노 표출이 부쩍 잦아진 배우자…. ‘나’를 잃고 변해가는 치매라는 질병은 당사자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에게 고통이다. 돌봄의 정신적,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느라 가족들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 ‘나’를 잃어가는 경우가 많다. 의료비보다 돌봄 비용의 비중이 크고, 심적인 스트레스로 간병살인 같은 극단적 선택을 부르기도 하는 게 치매다. 김용익 돌봄과미래 이사장은 1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치매 환자는 여러 종류의 노인 돌봄 중에서도 가장 난도가 높은 대상”이라며 “가족에게만 이 부담을 떠넘기는 정책적 방치”라고 지적했다. “치매 대응은 정부와 지역사회가 함께 나서야 하는 문제”라며 “가족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치매 환자들이 집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맞춤형 돌봄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 출신인 그는 공직 활동을 끝내고 돌봄 연구와 제도화 지원에 집중하고 있는 보건정책 전문가다.》―고령화 추세 속에 치매 환자가 내년 100만 명, 2044년엔 200만 명대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7년 전에도 같은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전망치와 비교하면 치매 환자의 규모나 증가 속도가 다소 완화됐다. 당시 전망으로는 올해 이미 100만 명이 넘고 2050년에는 30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었다. 조기진단 시스템 등 그동안의 여러 치매 관리가 조금은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한국의 인구집단에서 규모가 가장 큰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데, 이분들의 소득이나 교육수준이 과거보다 높아진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치매 예방이나 치료가 가능한 약재가 발견된다면 더 좋아질 것으로 본다.” ―치매 돌봄의 경우 형태나 성격이 다른 질병과 어떻게 다른가.“치매는 노인 돌봄의 여러 종류 중에서 난도가 가장 높다. 노인들이 겪는 질환은 중풍, 고관절 골절 같은 신체적 문제와 노인성 우울, 치매 같은 정신적 문제가 있다. 치매는 그 자체가 어려운 병인데 여러 질병이 같이 온다는 점에서 더 어렵다. 고혈압과 당뇨, 치과 질환, 청력 손실 같은 것들이 같이 오고 이것이 다시 치매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노인들이 얻게 되는 만성질환 개수가 보통 2.2개인데 치매 노인의 경우 4개나 5개가 한꺼번에 온다. 그래서 돌봄은 더 어렵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 병의 덩어리 자체가 크다.” ―드라마에 치매의 중증 사례들이 극화돼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보는 것만으로 부담이 되는 상황들인데….“치매를 빙산으로, 삼각형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다. 가벼운 인지장애가 있는 초기 상태의 경우가 대부분이고 중기, 후기로 갈수록 수는 적어진다. 단어를 잊어버리고 때로 기억이 소실되는 정도의 경증 단계에서는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중증으로 악화하면서 행동장애와 망상, 의심, 분노장애가 오는 경우는 전체의 15% 정도다. 식사를 한 직후 왜 밥을 안 차려 주냐고 버럭 화를 내는 사례 등 TV에 나오는 게 중증 단계다. 중증 환자가 특히 문제다. 가족 부담은 감당이 안 되는데 시설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진퇴양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특별 대책이 필요하다.” ―그 특별 대책이라는 게 무엇인가. “가정 방문형 돌봄을 강화하고 중증 치매를 받아 주는 시설에 대해 수가와 인력 지원 등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기술 지원도 따라가야 한다. GPS 위치 추적이나 웨어러블 장비를 통한 환자의 상태 관리 등은 외국에서 이미 널리 활용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치매 관리 체계만 따로 만드는 ‘로빈슨 크루소’ 식의 대응은 안 된다. 지역돌봄이라는 큰 틀을 만들고 그 바탕 위에서 치매라는 어려운 문제를 패키지로 다뤄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작년 2월에 통과한 ‘지역돌봄 통합지원법’이 내년 3월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전국 모든 지자체가 지역사회 돌봄에 나설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미래에는 전 국민 의료보장처럼 전 국민 돌봄 서비스 제공이 이뤄지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역돌봄 체계가 갖춰지면 돌봄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나.“현행 수준의 돌봄 시스템에서는 가족의 희생이 너무 크다. 무급 가사노동의 72%는 여성이 한다는 통계가 있다. 결국 아픈 노인이 행복하려면 여성이 희생돼야 하는 구조다. 이 충돌이 모든 가정에 끼어 있는 먹구름의 실체다. 가족의 이 희생이 없으면 노인들은 갈 곳이 결국 시설밖에 없게 된다. 집에 머물면서도 가족들의 정신적, 물질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다. 지역돌봄 통합지원은 정부가 각 가정으로 복지, 의료, 재활을 비빔밥처럼 통합해 배달해 주는 개념이다. 집을 베이스로 놓고 낮에 어린이들이 유치원 가듯이 노인들이 ‘노치원’을 다니면 여성들도 자기의 일상을 사는 게 가능해진다. 사회복지사와 의료인들이 각 가정을 맞춤형으로 찾아다니게 되니 고독사를 방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치매는 때로 24시간 관리를 필요로 하는 질환이다. 집에서 돌봄이 가능할까.“물론 어려움이 많지만, 다양한 아이디어를 개발해 해외에서는 ‘살던 곳에서 늙어간다(aging in place·AIP)’라는 개념이 실제 이뤄지고 있다. 유럽의 경우 ‘케어팜’이라고 부르는 돌봄농장이 많다. 네덜란드의 노인들이 목축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치유 효과를 누리는 식이다. 한국은 목축보다는 밭농사인데 이 또한 고되지 않게 맞춤형으로 강도와 활동을 조절하면 된다. 다양한 한국형 아이디어들을 개발해서 시도해야 한다.” ―거액의 예산이 투입돼야 가능한 일 아닌가. 관련 예산 부담은 지금도 이미 급증 추세다.“돌봄이라는 꼬리표를 단 예산이 당장에 따로 책정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건강보험과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혜택을 조금씩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으로 본다. 돌봄을 쓰고 끝나는 돈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한다. 돌봄이 일으키는 경제가 있다. 우선 돌봄 일자리가 생기고 욕창 방지 매트리스나 보행기, 가정용 의료기기 같은 수요가 늘면서 관련 산업도 커질 것이다. 보행기가 갈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는 등 집을 개조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인공지능(AI)과 스마트화된 기기가 돌봄에 더 많이 쓰이게 될 것이다. 돌봄체계의 구축 과정에서 제4차 산업혁명도 진척될 것으로 본다. 고령화를 기회로 보고 과감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다.” ―50, 60대가 80대 부모를 돌보는 노노(老老)케어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엔 간병살인이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지역사회 인프라가 없으니 돌봄의 가족화가 지나치게 진행돼서 생긴 문제들이다. 가족돌봄은 자기 삶을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돌봄 비용은 기존 생활수준을 떨어뜨리지 않는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 가족들의 역할은 환자와의 정서적 유대감, 안정감, 보호, 긴급대처, 치매 같은 정신장애의 경우 대리 결정 등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채워져야 한다. 자기 인생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가족을 돌보라고 강요하는 건 못할 짓이다. 어머니가 장애인 아들을 업고 다니며 대학까지 보냈다는 이야기가 미담이 돼서는 안 된다. 가족의 희생이 당연시되면 미담이 아니고 괴담이 된다. 우리 사회는 과거 유교적 전통과 인식이 강해서 그랬던 측면도 있지만, 이제는 가족의 역할이 변했다. 그냥 놔두는 것은 정책적으로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 이사장은 3세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목발을 짚은 채 돌봄 정책과 관련한 세미나 등 관련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는 “돌봄 시스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러 사람의 참여가 동력”이라고 했다. ―돌봄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1970년대에 서울엔 판자촌이 가득했다. 청계천과 모래내, 문래동…. 난지도에는 쓰레기가 정신없이 쌓여가던 때다. 자유로가 생기기 전 난지 샛강에 온갖 곳에서 퍼온 분뇨를 쏟아부었다. 그 먼지와 열기 속에서 쓰레기를 뒤져 살아가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근처 진료소에 견학을 간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뚜렷하다. 그 이후 의료봉사를 하게 됐다. 4년간 매주 주말마다 거의 빠짐없이 봉사활동을 했다. ‘지역사회 의학’이라는 공부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남아 있다. 나의 의학은 진료실이나 연구실이 아닌 길바닥에서 태어났다.” ―고령에 불편한 몸으로 뒤늦게 시작한 재단 업무가 힘드시진 않나.“정책 업무를 하면서 돌봄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그만둔 이후 곧바로 ‘돌봄과미래’ 재단을 만들었다. 그때가 만 70세였는데, 80세가 될 때까지 10년간 돌봄운동을 할 작정으로 시작했다. 이제 3년째가 된다. 취지에 공감한다면서 격려하고 동참해준 사람들 덕분에 후원자가 400명으로 늘어났다. 그 두 배쯤 후원회원이 늘었으면 좋겠다.”김용익 돌봄과미래 이사장△1952년 충남 논산 출생△1971∼1983년 서울대 의대 학사, 석사, 박사(예방의학)△1984∼2013년 서울대 의대 교수△2006∼2008년 대통령사회정책수석비서관△2012∼2016년 제19대 국회의원△2016∼2017년 민주연구원 원장△2017∼202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2017년∼현재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몰아치고 다그친 정상회담의 마지막 10분은 지켜보기가 민망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회담에서 강대국 지도자가 상대국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면박 준 장면은 찾기 어렵다. 부통령과 언론인이 가세한 협공은 ‘매복’ ‘함정’ 등의 평가가 나올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역사에 남을 굴욕의 현장이다. 우크라이나 뒤에는 그간 지지를 표명해준 28개 유럽 국가가 있었다. 자국을 무력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겠다는 명분도 확실했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희토류를 확보하려는 미국에 내밀 광물 자원도 상당했다. 그 어느 것도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안전보장의 교환 조건으로 쓰려던 광물은 과거 받았던 지원에 대해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가 돼 버렸다. 우크라이나가 침략 피해자가 아니라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을 촉발한 나라”로 위치가 뒤바뀌어 버린 것도 순식간이다.트럼프 공세에 맞대응 실패한 우크라 궁지에 몰린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에게는 (협상)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벌써 3년째 전쟁을 치르며 국력을 소진한 우크라이나가 반박할 근거는 없어 보였다. 땅덩이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크지만 사회 분열과 부패에 시달려온 나라, 국내총생산(GDP) 순위가 57위에 그치는 나라, 러시아로부터의 안보 위협이 상존했음에도 이에 대응할 외교력이 부족했던 나라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국제정치는 냉혹하다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몰고 온 냉기는 초저온이다. 한국도 어느 시점에선 신(新)외교 빙하기의 한가운데서 그를 상대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앉았던 백악관의 의자에 한국 대통령이 앉게 됐을 때 공개적으로 “한국이 미국을 호구 삼았다”는 협공을 받게 되지 말란 법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핵 협상에서 패싱 우려를 제기하는 한국에 “북한이 안보 불안 때문에 핵 개발에 나서도록 촉발하지 않았냐”는 식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미국이 안보 지원의 대가로 한국의 핵심 이익을 양보하도록 압박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게 마냥 뜬금없는 상상은 아니다.젤렌스키 자리에 韓 정상이 앉는다면 70년 넘게 동맹을 유지해온 미국과의 경제, 안보 협력이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알던 미국은 이제 없다’는 전제에서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할 때다. 유럽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악을 대비하자”며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고 유럽 중심의 안보 연합 구성 추진에 나섰다. 기존의 나토(NATO)에서 미국을 뺀 유럽만의 ‘이토(ETO·European Treaty Organization)’를 만들자는 제안도 나오는 판이다. 주요국들이 앞다퉈 추구하는 ‘자력갱생’의 핵심은 국부(國富)다. 조 단위로 이뤄지는 국방비 증액도, 미국발 관세 폭탄 대응도 모두 국가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이런 바탕이 탄탄해야 ‘거래적(transactional)’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트럼프 행정부에 우리만의 협상 카드를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방산과 반도체 등 핵심 산업 분야의 초격차 첨단기술을 보유하는 것도 주요한 협상 카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 견제, 그 과정에서 강화해온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과 기술 협력이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다면 그게 손에 쥔 카드다. 그 카드가 점점 얇아지고 작아지고 있는데도 정상 외교는 공백 상태에 여야는 극단의 정쟁만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공전이고 거야(巨野)는 상법 개정안으로 경제를 흔들어대는 중이다. 우리에게 그럴 여유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착각하는 정치권의 행태에 속만 터진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다이빙 주한 중국대사는 이달 초 조태열 외교부 장관을 첫 공식 예방한 자리에서 조 장관의 부친인 조지훈 시인의 시 ‘새아침에’를 읊었다.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는 마지막 구절을 언급했다고 한다. 이태백 같은 옛 문장가들의 한시를 정상회담 등에서 자주 인용해온 중국이 시를 꺼내든 것이 새롭지는 않다. 그래도 다이 대사가 조지훈 시인의 시 일부를 낭송한 것은 부친에 대해 존경심이 각별한 조 장관을 위한 맞춤형 준비였을 것이다. 한중관계를 새롭게 개선해 태양처럼 ‘이글이글’하게 만들자는 취지의 설명에 접견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고 참석자들은 전한다.껄끄러운 대중 외교 현안 쌓였는데… 이런 외교적 노력이 무색하게도 한국은 거센 계엄의 후폭풍 속 중국의 선거 개입 논란으로 시끄럽다. 윤석열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헌법재판소 변론 과정에서 중국의 선거 개입을 기정사실화한 질의를 계속했다. 현직 대통령이 의혹 제기에 앞장서니 지지자들의 동요가 잦아들 리 없다.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한 유튜버가 주한 중국대사관에 “테러를 하겠다”며 난입하려 한 사건은 어쩌면 예고된 난동이었다. 해외에서 불거진 선거 개입 의혹들을 보면 중국을 의심해 볼 만하긴 하다. 지난해 대만선거에서는 ‘스톰1376’이라고 불리는 친중 그룹이 인공지능(AI)을 이용해 후보들에 대한 가짜 동영상과 밈을 생성, 유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대선에서는 러시아와 중국, 이란이 모두 선거 개입을 시도했다는 게 중앙정보국(CIA) 같은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캐나다는 2019년과 2021년 연방선거에 중국이 연달아 개입했다는 의혹이 확산되면서 이를 조사할 특별보고관이 임명됐다. 다만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으로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과 선거 시스템을 해킹해서 결과에 직접 손을 댔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해외 주요국에서 문제가 된 중국의 시도들은 ‘스패머플라지(spam+camouflage)’라고 불리는 허위정보의 소셜미디어(SNS) 유포나 특정 후보에 대한 간접적 자금 지원 등으로, 개표 시스템 서버에 침투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올해 1월 나온 캐나다 특별보고관의 최종 보고서를 보자. 122쪽짜리 보고서는 “중국 등 해외 국가들의 선거 개입 시도가 실제 있었다”고 했지만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선거 결과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국내에서도 2년 2개월의 심리 끝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물론 현재까지 윤 대통령 측이 내놓은 자료 중 계엄 선포까지 해야 할 부정선거 증거를 확인한 것이 없다. 한중관계 관리는 올해 우리의 주요 외교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은 여전히 우리의 최대 수출국이고 첨단기술 분야에서 치고 올라오는 나라다.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한이 예상된다. 한중 정상회담은 물론 시 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한국을 무대로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한중 양국이 지속적으로 협의해야 할 의제들이 줄줄이 생겨날 것이란 의미다.국내 정치적 이유로 嫌中 조장 안돼 그 과정에서 중국과 때로 얼굴을 붉히고 정면으로 맞서야 할 이슈들은 많다. 역사와 문화 논쟁부터 사드(THAAD)와 한한령, 탈북자 북송 문제 등 껄끄러운 현안들도 언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지 모른다. 정확한 팩트를 바탕으로 냉철하게 대응해도 모자랄 판이다. 확실한 근거도 없는 부정선거 의혹으로 반중 감정에 휘둘리며 중국에 공격 빌미를 줄 여유가 어디 있나. 국내 정치적 이유로 부풀어 오른 혐중(嫌中) 여론이 이글이글 타오르게 놔두는 것은 정상 공백 속 가뜩이나 힘든 대중외교의 걸림돌만 될 뿐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에 반발한 시위대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한 폭력 사태는 4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1·6 의회 난입 사태와 닮았다. 보수 대통령이 주장하는 부정선거 의혹 속에 성난 지지자들이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기관으로 몰려가 창문을 깨고 문짝을 부수며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프라우드 보이스’ 같은 단체가 앞장서며 경찰과 거칠게 충돌했다.법치와 국격 훼손한 폭력난입 사태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또 하나의 장면은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상황이 종료됐다고 생각하던 시점에 나왔다. 군복 차림의 병사 수백 명이 의회 내 곳곳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총을 들고 완전군장을 한 채 로툰다홀을 일렬로 가로지르는 군인들도 있었다. 사태 발생 며칠 뒤 조용해진 의회 안으로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의회와 군대의 무시무시한 부조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들은 준(準)전시 상황이 되어버린 워싱턴에 투입된 주방위군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또다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폭력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당시 2만 명이 넘는 주방위군이 투입됐는데, 이들 일부가 숙박시설이 아닌 의회 안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의 추가 폭력에 대비하려고 이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만큼 삼엄했다. 이들의 철수가 완료되기까지는 이후 두 달이 걸렸다. 의회 혹은 사법기관을 겨냥하는 정치적 폭력 사태는 그 자체로도 심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반복되고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서로가 지켜왔던 법치의 선을 넘어버림으로써 내부 혹은 반대쪽 진영을 자극하게 된다. 가뜩이나 악화하는 정치 양극화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한번 경험한 폭동은 불안을 키우고, 그렇게 불어난 불신은 점점 더 많은 공권력 투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적 낭비다. 윤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며 서부지법 앞에 모여있던 이들은 윤 대통령이 ‘애국시민’이라고 부르는 지지자들이다. “나라 안팎의 주권침탈세력과 반국가세력의 준동으로 위험해진 대한민국”을 지켜달라는 윤 대통령의 편지 속 당부 메시지가 향했던 사람들이다. 방식과 방향은 다르지만, 국가의 부를 쌓고 안보를 지키는 일에 진심인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20대 학생부터 80대 기업인까지, 보수의 가치에 공감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나온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폭력 사태로 애국시민은 어느새 극우 유튜브의 음모론에 휘둘리는 막무가내 세력으로 치부될 처지에 놓였다.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를 갉아먹고 국격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계엄만도 벅찬데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했던 국가로 국제사회에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하다. 주요 8개국(G8)이니 G10 같은, 선진국 그룹으로의 편입 기대도 당분간은 접을 수밖에.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는 국가적 신뢰가 기본 조건인데, 그 전제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는 탄식이 나온다.반복, 확산하며 피해 키울 가능성 우려 둑이 터져버린 폭력적 선동은 또 언제, 어떻게 되풀이될지 모른다.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벌써 3명이 월담을 시도하거나 경찰과 충돌했다가 체포됐다.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신변 보호를 요청해야 했다. 긴장감이 팽팽해진 현장에서 또 무슨 우발적 상황이 벌어질지 조마조마하다. 흔들리는 법치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소모되는 국가적 에너지도 상당할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이고 또 동조하는 것이 진짜 애국시민들이 하겠다는 애국이냐고 묻고 싶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필립 골드버그 전 주한 미국대사(사진)는 불법 계엄이 선포됐던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을 대통령실 인사에게 요구했다”고 밝혔다. “계엄에 대해 심각한 우려(grave concern)를 표명했고 그것이 한국의 평판을 크게 훼손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골드버그 전 대사는 퇴임을 하루 앞둔 5일 현직 신분으로는 마지막으로 진행한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내용의, 내가 들은 계엄 포고령 내용에 반대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측과의 접촉에 어려움을 겪다 가까스로 연결된 대통령실 인사와의 통화였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상황을 경고하고, 미국 워싱턴에서 신속하게 성명을 발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엄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며 밤을 새워 한국 측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본국과 교신했던 당시의 긴박한 대응 과정을 설명했다.“고함치며 반대한 韓 계엄… 헌법적 절차 따른 해결 역량 믿는다”韓계엄, 일어나지 않았길 바란 불행… 민주주의와 헌법 작동 역량 믿어‘상종 못할 정부’ 발언은 지어낸 허위… 北 오판, 도발 가능성에 지속적 대비한미동맹, 정권 바뀌어도 초당적 지지… 韓에서 대사 마무리 영광, 최선 다했다《12·3 계엄령이 선포되던 밤, 필립 골드버그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외교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이 외교부 인사가 통보하듯 읽어내린 계엄 관련 성명서. 퇴임까지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은 그의 마지막 한 달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35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콜롬비아, 필리핀, 쿠바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의 대사로 권위주의 지도자들을 상대해 온 그였다. 극적인 순간들을 수없이 겪어낸 국무부 최고위 ‘경력대사’다. 그런 골드버그 대사에게조차 한국의 계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충격적 상황이었을 것이다.》골드버그 대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5일 저녁 서울 중구의 대사관저를 찾았을 때 그는 짐을 싸고 있었다고 했다. 워싱턴으로의 출국을 단 하루 앞둔 날이었건만 미처 떠날 준비를 다 하지 못한 듯했다. 고별파티 대신 방한 중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수행하면서 한미 동맹이 굳건하다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업무로 마지막 일정을 채웠다. 골드버그 대사는 “계엄은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는 불행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한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는 계속 작동하고 있다”며 “우리는 한국인들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계엄 사태는 70년 넘게 동맹을 유지해 온 미국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혼란이었을 것 같다. 정치적 후폭풍도 거세지고 있는데…. “슬픈 사건이고 슬픈 시기이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매우 신속하고 초당적인 (계엄 해제) 조치를 취했고, 두 번째 표결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헌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혼란이 발생했고 정치적 분열이 존재한다. 민주적이고, 헌법적이며, 평화로운 방식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들이다. 그 과정에서 부침을 겪겠지만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됐을 때 내가 언급한 이 원칙들은 지켜져 있을 것이라고 본다.” ―미국대사로서 겪은 ‘계엄의 밤’은 어떤 것이었나. “외교부의 누군가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계엄 관련 성명서(statement)를 읽어줬다. 나는 이의를 제기했고, 반대를 표명했다. 이어서 대통령실의 누군가와 통화했는데 그는 계엄과 관련해 아는 게 없어 보였다. 나는 심대한 우려를 표시했고, 대통령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계엄이 한국의 명성을 크게 훼손할 것이라고 말했다.” ‘통화 중 고함을 질렀냐’는 질문에 답변이 끊겼다. 10초 넘게 침묵하던 골드버그 대사가 “조금 그랬다”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의 표정은 단호해져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계엄 다음 날 곧바로 영문 웹사이트 메인 화면에 적색 경보(Alert)를 띄웠다. 같은 날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심각하게 오판했다”는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의 비판이 나왔다. 동맹국을 상대로 이례적으로 강경한 조치였다. ―대사가 윤석열 정부에 대해 ‘상종 못 할 사람들’이라는 취지로 본국에 보고했다는 한국 국회의원의 발언이 나왔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이에 대해 ‘완전히 틀렸다’는 설명 자료를 냈다. “계엄 선포 후 며칠간 많은 소문이 돌았는데, 많은 것이 나 혹은 대사관, 파이브아이즈 등을 출처로 한 것이었다. 모두 지어낸(all made up) 허위 내용이었다. 이런 헛소문은 멈춰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내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국회의원이 도대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더구나 내가 보고한 내용도 전혀 아니었다. 우리가 하는 일과 말에 대해 이런 식의 허위 정보를 지어내서는 안 된다는 나의 뜻이 분명하게 전달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실제 내용은 어떤 것들이었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논의들이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상황을 경고하고, 워싱턴에서 신속하게 성명을 발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의 관계자들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초기 몇 시간 동안 우리가 아는 모든 이들이 경계 상태를 갖출 수 있도록 대사관 내 조직을 정비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날은 밤을 새웠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미국 측을 ‘오도(mislead)’하기 싫어서 전화를 안 받았다고 했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연락이 안 된 건 문제 아닌가. “조 장관과의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사실 그에게 직접 전화를 하진 않았다. 조 장관이 나에게 콜백하지 않은 것을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닌가 싶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기에 우리에게 연락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린 듯하다. 그날 밤, 내가 앞서 말한 두 통의 전화를 빼면 아무도 전화를 안 받은 건 사실이다. 다만 모두가 일종의 ‘쇼크’ 상태였을 것이기에 너무 비판적으로 볼 생각은 없다.” ―주한미군과 협력해야 할 한국군 수뇌부 상당수는 구속 기소돼 리더십 공백이 발생한 상황이다. 계엄이 촉발한 혼란 상황에서 북한이 오판하고 도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나. “일부 군 인사들이 계엄으로 기소됐지만 합참의장과 다른 수뇌부는 그대로 있고, 공석이 된 자리는 대행이 신속하게 채웠다. 주한미군과 연합사령부,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의 군 지도부와 계속 접촉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떤 사태에도 준비돼 있고, 북한의 위협과 도발에 맞서 지속적인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미국은 12·3 이후 지금까지 한미 동맹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지금 같은 상황이 장기화해도 영향이 없다고 보나. “그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민주주의를 고쳐 나가려는 우리의 시도는 불완전하게나마 결국은 이뤄진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현실화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신뢰하고, 민주적 헌법적 기관들이 작동할 역량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올해 한국에서 다시 대선이 치러져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 한미 관계나 한미일 협력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미국 일각에서도 나오는데…. “한국인의 70∼80%가 미국에 우호적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안보는 물론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기술과 비즈니스 등으로 확장해가는 이 강력한 동맹을 지켜나가는 것은 미국과 한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양국의 동맹은 한국 민주당을 포함해 양국의 엄청난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다. 몇 주 전에 민주당 대표를 만났을 때 그는 한미일 3자 협력 및 일본과의 양자 협력 관계를 지지한다고 했다. 정권이 바뀌면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는 식의 인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맹이 소중하다지만, 거리 시위에 성조기가 나부끼는 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나. “완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다. 다만 시위에 참여한 보수 지지자들의 상당수는 나이가 있는 분들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은 세대이거나, 전쟁을 겪은 이들의 자녀일 것이다. 이것과 상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는 소위 ‘트럼프 리스크’가 닥쳐올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방위비분담금 증액,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상 지원 철회 등이 현실화할 것으로 보나.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펼칠지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직접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만 양국 기본 관계의 바탕은 강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외교 활동에 도전이 되는, 지금과는 다른 정책들이 나오겠지만 경제와 안보의 기본 관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측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직접 대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실제 상황이 전개되면 ‘비핵화’ 목표가 유지될 수 있을까. “비핵화는 트럼프 1기 행정부를 포함한 미국의 지속적인 정책 목표였다.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비확산과 평화, 안정을 위해 중요한 목표다. 러시아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자신들이 지지해 왔던 (유엔) 결의안을 위반하겠다고 할 때까지는 거의 모든 나라가 동의했다. 비핵화 목표는 유지되겠지만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예정했던 인터뷰 시간이 훌쩍 지났다. 골드버그 대사는 “이제 남은 짐을 싸야겠다”며 일어섰다. 그제야 물어본 퇴임 소감에는 “긴 경력을 이제 끝내는 것이 행복하고 슬프고 만족스럽다”고 했다. “지난 한 달은 분명히 어려운 시기였지만, 마지막 부임지인 한국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에서 대사로 근무한 것은 정말로 큰 영광이었다”고 했다. “정말로 멋지고 친절했던 한국 사람들이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는 여운이 짙었다.필립 골드버그 전 주한 미국대사(69)△2006∼2008년 주볼리비아 대사△2009∼2010년 유엔 대북제재 조정관△2010∼2013년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차관보△2013∼2016년 주필리핀 대사△2018년 주쿠바 대사대리△2019년 8월 주콜롬비아 대사△2022년 7월∼2025년 1월 주한 미국대사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그와는 상종을 못 하겠다’라는 말이 영어로 뭘까 궁금했다. 인터넷 번역 사이트 몇 곳에 넣어봤는데 번역된 문장 중에 ‘he is an asshole’이 있었다. 한글로 재번역하면 ‘그는 나쁜 놈이다’로, 경멸적 뉘앙스가 그대로 포함된 의역이다.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이렇게 거친 표현을 썼을까. 그가 한국 계엄 사태 직후 ‘윤석열 정부 사람들과는 상종 못 하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는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의 주장에 고개가 갸웃해진 이유다.美 등 해외 출처로 포장된 제보 이어져 외교관들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국회 질의에서 영어로 뭐였느냐고 묻자 김 의원은 “한글로 들었다”고 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이례적으로 ‘완전히 틀렸다’며 불쾌감 가득한 반박자료를 냈음에도 그는 발언을 수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손절하려는 것”이라며 미국이 출처라는 식의 주장을 지속하는 중이다. 방송인 김어준 씨는 국회에서 ‘한동훈 암살설’과 ‘북한 소행으로 위장’,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군 사살’ 시도 등을 터뜨렸다. 국내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에서 제보받았다고 했다. 이런 수준의 첩보를 다룰 수 있는 우방국은 미국 정도다. 그러나 미국 측과 수시 접촉하며 오랫동안 정보 교환을 해온 관계자들은 모두 “나도 모르는 민감한 내용을 어떻게 야당 정치인이나 방송인이 먼저 알겠느냐”며 고개를 내젓는다. 워싱턴의 한 인사는 “미국은 첩보를 다루는 데 매우 엄격하다”며 “상황 발생 며칠 만에 저런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면 최소 징역 25년 형을 받는다”고 했다. 12·3 계엄 사태 이후 믿기 어려운 주장과 제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설마 했던 내용 일부를 뒷받침하는 진술들이 나오고 있어서 최종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진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타국 정부에서 받았다는 식으로 포장해 사실인 것처럼 퍼뜨리는 것은 외교 관계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다. 첨단 도감청 기술과 첩보 역량을 갖춘 선진국의 신뢰도를 허위정보에 덧입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일부라도 있다면 더더욱 경계해야 할 일이다. 계엄 세력의 무도함을 비판하는 쪽만큼 이를 감싸려는 반대쪽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극우단체 등이 퍼뜨리는 것으로 보이는 허위정보들은 외신을 인용하는 식으로 가공된 게 많이 보인다. BBC방송이 “한국인은 미개한 국민들이다. 법관들의 편향된 이념과 주체사상이 한국을 파탄내고 있다”고 논평했다는 글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돌았다. 영국의 대표 공영방송이 이런 천박한 논평을 낼 리 없건만, 이를 기자에게 보내준 한 보수 기업인의 반응은 “오죽하면 BBC방송까지 저렇게 하겠느냐”였다. 유창한 영어를 쓰는 외국인 해설자가 “계엄은 한국 내 북한의 국가 전복 시도를 뿌리 뽑기 위한 것”, “계엄군을 선거관리위원회에 보낸 것은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의 선거 개입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동영상도 받아 봤다. 어느 매체인지 확인도 되지 않는데, 언뜻 해외 방송뉴스처럼 보이는 영상에 한글 자막을 달아놓으니 그럴싸했다. 미국 대선에서 부정선거 의혹을 퍼뜨리며 1·6 의회 난입 사태를 야기한 극우 음모론 집단 큐어논(QAnon)과 다를 바 없는 행태들이다.‘한국판 큐어논’의 음모론 경계해야 진짜와 교묘하게 섞인 가짜는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허위정보가 반복적으로 퍼지면 확증편향을 낳고, 음험한 음모론에 씨를 뿌려 불신과 불안, 혼란을 부추긴다. 내년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나 이념적,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계엄령만큼이나, 어쩌면 계엄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2019년 북-미 하노이 회담 후 8개월 만에 스웨덴에서 열렸던 후속 협상. 북측 김명길 대표가 스티븐 비건 미측 대북특별대표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준비해 온 장문의 원고를 읽었다. “모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맹비난한 김명길이 일방적으로 협상 결렬을 선언하자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자리를 박찬 북측 대표단이 떠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머뭇거리던 한 명이 비건 대표의 팔을 붙잡고 급히 한마디를 속삭였다. “제발,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Please, don’t give up).”美 NSC 2인자에 지한파 앨릭스 웡 임명 예상치 못했던 이 짧은 한마디에 미국 협상팀은 꽤나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북측의 강경함 외에 다른 기류나 변수가 있는지 등을 놓고 다양한 분석이 이뤄졌다고 한다. 강경파인 북한 통일전선부와 상대적으로 온건파인 외무성 간의 알력 싸움이 있다고 알려졌던 때다. 협상에 참여했던 한 미측 인사가 전한 당시 장면은 ‘북한 내에도 비핵화를 원하는 이들이 몰래 애태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때때로 해보게 만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에 임명된 앨릭스 웡은 당시 이 자리에 있던 협상팀 중 한 명이었다. 1기 때 국무부 대북특별부대표로, 비건 대표와 함께 가장 집요하게 북한을 공부하고 협상 전략을 고민했던 인사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준비했던 전략들을 끝내 진전시키지 못했던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 자신들이 이끌었던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리뷰에 나섰을 때는 “멍청한(stupid) 접근”이라며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공직을 떠난 이후에도 북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던 그에게 하노이 회담은 ‘미완의 협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웡이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2인자에 임명되면서 북-미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 섞인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그를 지명하면서 “김정은과 나의 정상회담 협상을 도왔다”고 소개했다. 웡은 한국과도 인연이 많은 지한파다. 비건 대표와 함께 광화문에서 ‘닭한마리’를 즐겼던 그는 이후 쿠팡 임원으로 서울 출장을 올 때면 짬을 내 한국 외교관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한식집을 찾았다. 웡 같은 인사들이 백악관에 들어간다고 당장 한반도 이슈 논의가 재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중동 전쟁이 우선순위에 올라 있다. 중국 전문가이기도 한 웡은 미중 갈등 현안들도 다뤄야 한다. 무엇보다 북핵 이슈는 일부 참모들의 경험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 이상 비핵화 협상은 없을 것이라는 김정은과 핵 동결 혹은 군축을 논의하게 되더라도 결국 검증이라는 덫에 다시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으로서는 어떤 방식이든 북-미 협상이 재개됐을 경우 우리가 소외되지 않도록 한미 공조를 유지하는 일이 시급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노골적으로 ‘왕따’ 시도를 당하고, 한국이 포함된 3자 회동을 만들어 보려다가 망신당한 전례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북한의 통미봉남 의도가 더 노골화하는 시점이다. 한미 간에는 방위비 분담금 같은 민감한 동맹 현안도 예고돼 있다. 웡 같은 인사들을 연결고리로 트럼프 2기 백악관을 ‘넛징(nudging)’할 필요가 있다.한국, 對美인맥-전략으로 북핵 풀어야 인맥과 전략이 탄탄하게 뒷받침된 세련된 외교로 한국이 이를 매끄럽게 풀어낼 수 있다면 미국과 함께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게 불가능한 장면은 아닐 거라 본다. 또 누가 아는가. 혹시라도 미국 협상 대표의 소맷부리를 절박하게 붙들던 그 북한 외교관과 다시 마주 앉게 될지.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러시아에 붙잡혀 있던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가 8월 풀려나 다시 미국 땅을 밟는 장면은 부럽기 그지없었다. 취재 도중 간첩 혐의로 붙잡힌 에번 게르시코비치 기자가 투옥된 지 약 500일 만이었다. 고문과 가혹한 환경으로 악명 높은 레포르토보 구치소는 비슷한 이유로 체포된 한국인 백모 선교사가 수감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北인권재단-특별감찰관 무리한 연계 미국은 그를 비롯해 러시아에 억류된 자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1년 넘게 치밀한 물밑 외교전을 펼쳤다. 러시아를 상대로 쓸 ‘맞교환 카드’를 확보하기 위해 제3국인 유럽의 동맹국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독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송환을 원하는 러시아 암살범이 구속돼 있었다. 자국 땅에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풀어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는 독일을 미국은 집요하게 설득했다. 그렇게 극적으로 돌아온 미국인 4명을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밤중 공항에 직접 나와 맞이했다. 활짝 웃는 석방자들을 보면서 북한에 갇혀 있는 김정욱 선교사가 떠올랐다. 2013년 평양에서 체포된 지 벌써 4000일이 넘었다. 무기노동 교화형을 선고받은 뒤 생사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이 남한 사람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 조심스럽게 전망할 뿐이다. 김 선교사를 포함해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인은 6명이다. 북한인권 문제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고문받거나 처형당하고,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등에서는 ‘북한인권’을 북한이 가해자이거나 북한에 연루된 인권 사건들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정의한다. 억류자와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들도 엮여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나 북한인권을 중시한다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실질적 개선은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통령실이 최근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을 특별감찰관 후보 추천과 연계시킨 것 또한 그다지 진정성 있는 조치로 보이지 않는다. 상관관계가 없는 두 사안은 여야가 정치적으로 엮으면서 벌써 8년째 공전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도 아닌 여당 대표가 연계를 풀자고 나섰다. 용산이 이를 북한인권재단 이사 문제로 받아친 것은 이렇게라도 재단을 굴러가게 하겠다는 절박함이라기보다는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다루게 될 특별감찰관 선임을 어렵게 만들려는 계산법이 앞섰기 때문은 아닌가. 외교부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선임 과정도 시끄럽다. ‘김정은 금고지기’로 불리는 북한 노동당 39호실 고위관리였던 이정호 씨의 딸 이서현 씨가 단수 추천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탈북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서 특혜를 누렸고, 한국으로 왔으나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해 떠난 인사의 자녀가 북한인권대사를 맡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서현 씨가 김 여사의 방미 기간에 행사를 함께 도왔던 것도 논란을 키우는 분위기다. 수십 년간 활동해온 북한인권 전문가들을 밀어내고 30대 초반의 탈북민이 유력 후보로 검토된다니 ‘여사 라인’이 배경이 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법도 하다.정쟁화할수록 내부 갈등만 키울 뿐 이런 논란들은 결과적으로 북한인권 문제를 정쟁의 늪으로 밀어넣기만 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해결은커녕 우리 안의 갈등을 부추겨 지금까지의 노력마저 퇴보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북한에서는 10대 학생들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가 공개 처벌됐다는 증언이 나오고, 북측 하늘로 띄우는 대북 전단이 많아지는 만큼 이를 접하는 주민들이 통제, 박해받는 정황들도 이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시끄러운 정치적 이슈와 엮어 시간을 흘려보낼 때가 아니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낸 파면 결의안은 신박하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했다는 이유로 고위공직자에 대해 국회에서 “즉각 파면하라”는 결의안이 나온 것은 본 적이 없다. 김 차장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면서 대통령실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같은 시각적 묘사를 해놓은 부분도 낯설다.야당 “경례 안했다” 김태효 파면 결의안 문제가 된 윤석열 대통령의 체코 방문 환영식 동영상을 보면 옆에 도열해 있던 김 차장이 두리번거리다 멈칫한 채 서 있는 모습이 어색하긴 해도 고의적인 경례 거부로 단정하긴 어렵다. 이를 “의도적”이라고 문제 삼으면서 과거 논란이 됐던 그의 일본 관련 발언을 덧붙여 ‘친일 매국’을 제목에 달아 놓은 결의안은 어설프다. 애국가가 나오는 동안 가슴에 손을 얹지 않은 뻣뻣함은 어차피 구실이었을 뿐, 50명이 넘는 민주당 의원들이 겨냥한 타깃은 김 차장이 주도해 온 것으로 알려진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일 것이다. 윤 정부의 대일 전략은 미국 인도태평양 정책과의 연계, 그리고 그 핵심축이 되는 한미일 협력 강화라는 큰 틀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여 온 중국의 공세적 외교,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장기화 속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에 대응하기 위해선 한미일이 더 끈끈하게 뭉쳐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한일 관계를 풀어야만 가능한 3각 협력이다. 조급함이 앞서는 듯한 정책들을 놓고 추진 방식이 거칠고 정교함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계속돼 온 게 사실이다. 강제징용 문제만 해도 제3자 변제 방식을 추진하던 지난해 대통령실의 입장은 “일본에 조건 없이 제안하고 추진하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전향적 입장 선회에 일본 측이 되레 당황해서 “정말 원하는 게 없느냐”고 수차례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 협상을 지켜본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다르게 처리한 셈이니 진정한 ‘반일(反日)’ 아니냐”는 자조적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민주당은 이런 윤 정부의 대일 외교를 공격하고 싶겠지만, 정작 공격 대상으로 삼아야 할 국가안보실장은 수시로 교체되고 있다. 결국 실세 2인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 차장이 대놓고 타깃이 돼 있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 “해리스 후보의 참모들을 가르쳐야 한다” 같은 부적절한 발언들이 누적된 탓도 있으니 김 차장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까칠한 언행과 직설화법 등으로 가뜩이나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다. 그렇다고 해도 민주당이 제출한 이번 파면 결의안은 내용과 방식 모두 핵심에서 한참 벗어났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재선될 경우 1기 행정부 때의 미일 간 밀착 구도가 재현되면서 한국만 어정쩡하게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원칙’이 공고히 유지될지 여부도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아시아판 나토(NATO) 창설을 주장하는 안보통이 새 총리로 선출됐다. ‘친일 프레임’ 속 정부 비판을 넘어 일본과의 미래 협력을 어떻게 끌어갈지,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에 어떤 다자 구도로 대응할지에 대한 현실적 방안이 절실한 시점이다.“왜놈” 막말 공격 넘어 외교정책 지적을 이런 정책적 고민은 뒷전으로 미뤄 둔 채 특정 공직자에게 “왜놈의 후예 아니면 매국노 밀정”이라는 딱지를 붙여 공격한다고 정부의 대일 정책이 개선될 리 없다. 이런 수준으로는 한미일 협력 강화 과정에서 발생한 대중 정책의 구멍이나 편중 외교의 문제점을 짚은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기대 난망이다. 이제 곧 국정감사가 시작된다. 최소한 ‘김태효 파면 결의안’보다는 깊이 들어간 질의가 이뤄져야 지켜보는 이들이 덜 민망하지 않겠는가.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용산 대통령실 경호처 부속건물에 최근 한때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새로 만들어지는 외교안보특별보좌관 사무실을 한번 보고 싶다며 방문 의사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쓰던 다른 사무실 일부를 헐어 특보실로 만드는 공사가 아직 진행 중인 데다 폭염 속 에어컨도 없는 상황. 직원들이 윤 대통령의 발걸음을 막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연쇄이동 논란 속 외교안보특보직 신설 윤석열 정부의 초대 외교안보특보 자리는 지난달 김용현 경호처장을 국방장관에, 신원식 국방장관을 국가안보실장에 앉히는 연쇄 인사 과정에서 신설됐다. 국가안보실 사령탑 자리를 내어주게 된 장호진 전 실장이 맡게 된 새 직함이다. 7개월 만에 돌연 교체된 국가안보실장 인사의 배경을 놓고 경질설, 권력다툼설 등이 난무했다. 윤 대통령이 특보 사무실을 직접 챙기는 것을 보니 후속 조치에 신경이 쓰이는 인사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윤 대통령은 나토(NATO) 정상회의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해외 정세를 보고 군인 출신 국가안보실장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게 인사 발표 당시 대통령실의 설명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도 이제 외교보다는 안보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한의 위협 등에 대비해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은 군이 할 일이다. 중동과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국가안보 사령탑이 군인 출신으로 교체돼야 했는지 의문이다. 국방부 인사들이 ‘즉·강·끝(즉시, 강하게, 끝까지)’의 응징을 외칠 때 다른 한쪽에서 적대국 혹은 비우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고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는 게 국가안보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한 발 더 나아가 전쟁 종식 이후 러시아 등과의 관계 재설정까지, 풀어내야 할 외교 방정식은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다. 불과 60여 일밖에 남지 않은 미국 대선 또한 초박빙 구도 속에 그 결과를 가늠하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재선될 경우 제기될 이슈는 주한미군 감축 같은 군사 문제만이 아니다. 북-미 협상 재개, 미중 관세전쟁,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 등 한국이 대응해야 할 경제안보 분야의 난제가 쓰나미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리베로’로 해외를 뛰면서 이런 현안을 풀어낼 것이라는 장 특보의 역할은 막상 애매하다. 원전 세일즈 같은 특별 임무를 맡게 된다지만 특보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미션이 무엇인지 정확지 않다. 경제안보나 통상 관련 업무라면 산업통상자원부, 한미일 협력은 외교부 장차관들이 언제라도 출장길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업무 중복이나 관할권 충돌의 문제가 불거지지 말란 법이 없다. 윤 대통령은 기존과는 다른 상근 외교안보특보직을 처음 만드는 취지로 “우리도 헨리 키신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했다고 한다. 헨리 키신저가 밀사로 중국을 오가며 미중 데탕트 시대를 열었을 때는 그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재직하던 때였다는 것을 알고 한 언급인지 모르겠다. 키신저의 성과는 충분한 권한과 국가적 지원, 이를 보장받을 직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6년 넘게 백악관에서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한 최장수 국가안보보좌관이다.‘리베로’ 역할 한계와 업무중복 우려 교체 사실을 직전까지도 몰랐던 장 특보는 예정됐던 업무 일정들을 갑작스럽게 조정해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사 배경이 석연치 않으니 이번 연쇄 인사의 출발점으로 보이는 김용현 국방장관 후보자 임명을 놓고 탄핵 대비용이니 계엄령 준비니 하는 야당의 공세만 거세져 간다. 대통령실이 “외교와 안보의 두 마리 토끼를 쫓겠다”고 의미를 실은 국가안보실과 외교안보특보실의 역량을 결국 동시에 흔들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에 대한 워싱턴 정가의 초기 평가는 꽤 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년 전 그가 백악관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모 몇 명이 연달아 사표를 쓰자 ‘부통령실의 대탈출(exodus)’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이어졌다. 업무 역량에 리더십까지 도마에 오르면서 “사람을 품을 줄 모르는 게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의 발언을 일일이 분석해 ‘말비빔(word salad)’ 화법이라고 비판하는 논평들도 있었다. 핵심이나 논리 없이 그럴싸한 수식어들만 두서없이 섞어 놓는다는 지적이었다.‘反트럼프 결기’가 밀어올리는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실권이 많지 않아 언론이 관심 자체를 별로 두지 않는 자리다. 그런 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쏟아지는 걸 보면서 ‘백인 남성이었어도 저랬을까’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있다. 혼혈이자 여성인 해리스 부통령을 향한 여러 비판에 대해 실제로 당시 부통령실은 “인종주의에 성차별적 시각”이라고 발끈했다. 한때 약점으로 여겨졌던 그의 성별과 인종은 그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면서 강점으로 바뀌고 있다. 아시아계와 흑인의 표심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다양성을 주목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다소 경박해 보였던 그의 웃음도 순식간에 매력으로 탈바꿈했다. 호탕하게 웃는 동영상이 코믹한 밈(meme)으로 재구성돼 젊은이들의 스마트폰에 퍼지고 있다. 해리스 정도로 되겠느냐며 당내 경선을 주장하던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순식간에 대의원을 확보한 그는 이제 전국 단위 지지도는 물론 핵심 경합주 여론조사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맹추격하고 있다. 그냥 된 것은 아니다. 해리스의 당선을 위해 민주당의 내로라하는 선거전략가와 소셜미디어 전문가들이 달라붙었다. 당 지도부는 총력전으로 뒤를 받치고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보자며 여성계가 다시 똘똘 뭉치기 시작했고, 큰손 후원자들이 속속 지원에 나서 거액의 캠페인 자금을 대고 있다.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달 모금한 선거자금만 우리 돈으로 4000억 원이 넘는다. 무서운 결집 속도다. 이런 움직임의 밑바탕에는 트럼프에게 정권을 내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대로 끝이라는 민주당 인사들의 토로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대선 번복 시도와 기밀문서 유출, 성추문 입막음 등 91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트럼프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결기가 가득하다. “트럼프는 위험하다”며 그의 역량과 자질, 도덕성 문제를 조목조목 짚은 뉴욕타임스의 이례적으로 긴 사설도 배경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칼럼니스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저서 ‘담대한 희망’에 빗대 ‘담대한 절박함(the audacity of desperation)’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절박함이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결정을 이끌어냈고, 이제 ‘비(非)백인 여성 대통령’이라는, 민주당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좁게나마 뚫어내고 있다. 민주당 후보가 누구든 당선시켜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이어진다. “해볼 만하다”는 인식이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선순환으로 이어지면서 패색이 짙었던 민주당에는 다시 활기가 돌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승리의 간절함이 한계를 강점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매력보다는 “상대 후보만은 절대 안 된다”는 판단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구도가 선거의 정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스의 등판은 순식간에 대선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선거의 역사를 쓰는 과정이다.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건재한 미국의 역동적인 민주주의 현장을 온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