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서말 구슬 꿰는 ‘아이디어 편집자’와 소통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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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키퍼 전성시대의 경영

수십억 명의 누리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블로그와 포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콘텐츠 과포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바로 ‘아방가르드 예술가’에서 ‘게이트 키퍼(Gate Keeper)’라는 그룹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리더 그룹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게이트 키퍼란 출판사나 신문·잡지 편집자, 미술관·박물관의 큐레이터, 백화점 구매 담당자들처럼 수많은 글, 작품, 상품 중에 쓸 만한 것들을 골라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유행을 선도하는 아이디어의 편집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산물들을 조합해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만들어 준다. 우리 속담을 빌려 표현하면 ‘보배를 만들기 위해 구슬을 꿰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 게이트 키퍼 시대를 연 선구자들

20세기 초 프랑스의 가스통 갈리마르는 ‘게이트 키퍼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 혁명 성공 이후 보편적 교육의 확산으로 문맹률이 급격히 낮아진 프랑스에서는 문학과 저널리즘이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매체가 늘고 출판되는 문학작품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양질의 작품을 선택하기가 어려워졌다. 이 틈을 파고든 게 바로 출판사를 창업한 갈리마르였다.

그는 스스로 문학적 조예가 깊어 출판사를 직접 차린 뒤 밤낮없이 프랑스 문학계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성공잠재력이 높은 작가들을 발굴해 ‘NRF’라는 잡지를 통해 등단시키고, 잡지가 만들어낸 수요를 출판사의 책 구매로 연결시켜 높은 수익을 창출했다. 갈리마르가 만든 출판사가 ‘좋은 작품’만 낸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프랑스 독자들은 그의 안목을 믿고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사서 읽었다. 문학가들은 갈리마르를 거쳐 책을 내면 성공이 보장되는 상황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책을 냈다는 건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진다.

갈리마르가 유럽 최초의 게이트 키퍼였다면, 레오 카스텔리는 미국 뉴욕에서 게이트 키퍼의 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오늘날 ‘뉴욕 스타일’은 잭슨 폴록,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과 같은 예술가들과 그런 예술을 응용한 디자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작가들의 예술 아이디어가 뉴욕 스타일, 나아가 미국의 첨단 디자인을 대표하게 된 데에는 뉴욕의 게이트 키퍼 시대를 연 카스텔리의 역할이 컸다.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거대 도시, 뉴욕으로 이주해 온 유럽의 탁월한 예술가들은 작품을 쏟아냈고 명성을 얻고 싶어 했다. 카스텔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몇몇 집단으로 묶어 새로운 스타일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팝아트’, ‘콘셉트아트’, ‘Op(옵)아트’, 미니멀리즘 같은 단어들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는 지금의 ‘소호’ 지역에 갤러리를 열고 빈민가로 전락했던 지역의 부흥까지 이뤄냈다. 소호의 이런 움직임을 포착한 뉴욕의 부동산업자 레너드 스턴은 ‘소호 스타일’로 호텔을 만들어 부동산 재벌이 됐다. 게이트 키퍼들의 움직임을 잘 파악해 다가올 디자인과 유행, 소비 트렌드를 미리 읽고 자신의 사업에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 게이트 키퍼 전성시대와 경영

할리우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21세기 게이트 키퍼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뒤에서 예술가들을 보조하고 프로모션 하는 역할에서 게이트 키퍼 본인이 전면에 나서, 스스로 스타가 된 사례다. 이 영화는 뉴욕 ‘보그’ 잡지 편집장으로 유명한 애나 윈터를 모델로 했다. 윈터는 21세기 ‘게이트 키퍼 전성시대’를 연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젊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새로운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파악했다. 주로 가정을 지켰던 예전 여성들은 커피숍이나 미용실에서 대화를 하며, 혹은 함께 쇼핑을 다니며 최신 패션 트렌드를 파악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패션 트렌드와 상품이 쏟아지는 시대에,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은 패션 동향 자체를 알기가 어려워졌고 이를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는 ‘보그’ 1988년 11월호 표지에 디자이너가 만든 고급스러운 옷에 대중적인 청바지를 입힌 여성 모델의 사진을 실었다. 부유층을 겨냥한 잡지가 이런 파격적인 시도를 하자 패션계에 파란이 일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다양한 의상을 새롭고 아름답게 조합하면서 ‘보그’를 뉴욕 여피 여성들의 대표 잡지로 만들어냈다. 그는 스스로 유명 인사가 됐고 패션계에서 그 어떤 디자이너보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됐다.

윈터가 연 ‘게이트 키퍼 전성시대’는 인터넷 시대에 새롭게 진화했다. 1997년 ‘웹 블로그’라는 새로운 게이트 키핑 분야가 탄생했고 누구나 실력만 있고 트렌드만 포착하면 ‘스타 게이트 키퍼’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했다. 현재 미국 최강의 패션 게이트 키퍼 중 한 사람은 1996년생 타비 게빈슨이다. 그는 12세에 ‘스타일 루키’라는 블로그를 열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서구 패션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 블로그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루키 매거진’이라는 온라인 패션·팝 문화잡지의 편집장이 됐다. 패션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령층이 대폭 낮아지던 21세기의 트렌드를 포착한 게 주효한 셈이다.

이제는 ‘뉴욕 패션위크’ 초청을 받아 ‘보그’ 등 대형 잡지 편집장과 나란히 앉아 패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게이트 키퍼들의 역할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다.

이제 많은 기업들이 유명 게이트 키퍼들을 유행의 풍향계로 보고 부지런히 찾아 소통을 하고 있다. 게이트 키퍼들이 계속 잡지, 블로그, 유튜브 채널을 통해 미래의 유행과 트렌드를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디자이너나 음악가의 작품이 탁월하다는 걸 잘 알아보던 문화인들도 이를 취사선택해 해석하고 퍼뜨리는 게이트 키퍼들의 속성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유행의 의미를 엉뚱하게 해석해 비즈니스에 적용하기 어려워진다.

사업의 성공을 꿈꾸는 경영자라면 게이트 키퍼들과의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트렌드를 읽어야 한다. 아니 일단 그 중요성부터 깨달아야 한다.

조승연 문화전략가 scho@gurupartners.kr

정리=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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