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헤지펀드 실험은 가능한가

  • 입력 2005년 8월 23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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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해협에는 ‘건지(Guernsey)’라는 섬이 있다. 영국의 행정력이 미치는 섬이지만 나름대로 ‘국가’의 면모도 갖췄다. 인구는 6만5000명이고 수도는 세인트피터포트. 면적은 78km²이지만 경작이 가능한 땅은 별로 없다. 그러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발간한 ‘월드 팩트 북(World Fact Book)’에 따르면 이 섬은 지난해 1인당 역내총생산(GDP) 4만 달러(약 4100만 원)로 룩셈부르크와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에 올라 있다. 한 외국 펀드매니저는 섬 생활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건지에서는 누릴 수 있는 것 하나와 지켜야 할 것 하나가 있다. 마음껏 만끽해도 좋은 것은 ‘자유’이고, 절대 지켜야 하는 것은 ‘비밀’이다.” 바로 이 건지 섬이 헤지펀드(hedge fund)의 천국으로 불리는 조세회피지역이다. 건지 GDP의 55%는 금융 분야에서 나온다. 그 중심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헤지펀드가 있다. ‘자유’와 ‘비밀’은 세계 헤지펀드의 특성을 이해하는 핵심 단어이기도 하다.》

○ 한국은 헤지펀드의 불모지

한국에는 아직 공식적인 헤지펀드가 없다. 제도도 미흡하고, 펀드를 운용할 실력도 부족하다는 평가다.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자산운용회사 외에 원칙적으로 사모펀드를 만들 수 없다. 개인이 만들 수 있는 사모펀드는 기업 지배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사모투자펀드(PEF)뿐이다.

이 때문에 개인이 자유롭게 설립해 어떤 규제도 받지 않고 투자하는 헤지펀드의 출현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일정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헤지펀드의 투자 노하우도 아직 한국에 정착되지 않았다. ‘리앤킴 투자자문’ 등 몇몇 투자자문사가 소수의 투자자를 모아 일정 수익률을 약속하는 헤지펀드식 투자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투자 실력. 시장 상황에 상관없이 일정 수익률을 올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헤지펀드의 투자 노하우는 한국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지난해에는 한 투자자문사가 ‘쇼트 앤드 롱’(한 업종 내에서 두 종목을 동시에 사고팔아 일정한 차익을 남기는 기법)이라는 기법으로 헤지펀드식 투자를 했다가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일정 수익률을 올릴 만한 실력이 한국에서는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다.

○ 한국은 아직 헤지펀드 엄격히 규제

헤지펀드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헤지펀드를 통해 매년 일정한 수익을 얻는 투자자에게는 최고의 안정적인 투자 수단이다.

1999년 말 492조 원이었던 국제 헤지펀드 규모가 지난해 말 1000조 원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대로 헤지펀드가 투기적 경영권 거래를 통해 기업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은 사례도 숱하게 많다. 엄청난 덩치의 펀드가 오직 돈만 보고 돌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기업은 없다.

일단 한국 금융당국은 ‘아무나 펀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원칙 속에서 헤지펀드의 출현을 막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제가 금융시장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헤지펀드의 폐해를 막으려면 증시나 기업 현장에서 횡포를 규제하는 방안을 찾아야지 펀드 존재 자체를 막는 것이 바른 방법이냐는 것이다.

한국 증시에서 일정 수익률을 올리는 투자기법이 외국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도 규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또 국내은행이 외국 헤지펀드와 거래한 금액이 이미 4000억 원을 넘는 현실에서 헤지펀드의 상륙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은 난센스라는 지적도 있다.

헤지펀드를 과감히 허용하는 대신 예상되는 기업 지배권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게 해법이라는 것이다.

한국펀드평가 우재룡(禹在龍) 사장은 “헤지펀드 문제는 투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금융 규제의 문제”라며 “시장 발전을 위해서는 펀드 설립에 대한 규제를 풀고 자유로운 투자를 보장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헤지펀드란? 일정 수익률 약속 사모펀드▼

헤지펀드는 ‘위험한 파생상품에 집중 투자하는 투기 펀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헤지펀드는 투자자 인원을 미국은 100명, 일본은 50명 식으로 제한할 뿐 투자에서 모든 자유를 누리는 사모(私募)펀드를 뜻한다.

헤지펀드의 가장 큰 특징은 시장 상황에 상관없이 투자자에게 일정한 수익률을 제시하는 데 있다. 관행상 제시되는 수익률은 연 10∼12%.

그해 증시가 반토막이 나더라도 헤지펀드는 이 수익률을 달성해야 한다. 주가가 갑절로 올라도 이 수익률만 고객에게 돌려주면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헤지펀드가 종종 국제 금융질서를 교란하는 악역을 한다.

헤지펀드들은 약속한 수익률을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단기 금융상품이나 무리한 투기적 투자를 통해 수익률을 맞추려고 한다.

‘돈만 벌면 무엇이든 한다’는 헤지펀드의 속성도, 국제 금융질서를 교란하는 헤지펀드의 횡포도 절대 수익률을 맞춰야 하는 숙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표적 헤지펀드인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가 1999년 서울증권을 인수한 뒤 2002년 액면가의 60%에 해당하는 고배당을 실시하는 ‘돈만 챙기는 모습’을 보인 것이 좋은 사례다.

헤지펀드의 또 다른 특징은 사모펀드이기 때문에 당국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 ‘주식에만 투자해야 한다’거나 ‘주식과 채권 비중이 6 대 4라야 한다’는 식의 규제가 없다.

운용명세나 투자방식을 금융당국에 보고할 필요도 없다. 헤지펀드 관계자 가운데 사적인 술자리에서조차 회사의 투자 노하우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마음대로 투자하는 자유, 하지만 투자기법에 대한 철저한 비밀 유지가 헤지펀드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헤지펀드에 대한 오해▼

헤지펀드에 대한 정의가 워낙 다양해 한국에서는 몇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우선 헤지펀드가 단기자금이라는 것은 오해다.

물론 헤지펀드 중에는 단기투자를 주로 하는 펀드도 있다. 하지만 헤지펀드의 핵심은 투자 기간이 아니라 고객과 약속한 일정 수익률이다. 헤지펀드도 단기와 장기 등 각자 특징에 따라 투자 기간을 조절한다.

기업의 지배권을 공격할 때 단번에 치고 빠지는 펀드도 있다. 하지만 몇 년째 소유권을 갖고 고배당과 유상 감자(減資) 등으로 수익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헤지펀드가 투기성향이 강한 파생상품 시장을 주무대로 삼는다는 것도 100% 옳은 말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펀드는 위험 회피(헤지)의 목적으로 파생상품을 이용한다.

하지만 ‘약속한 수익률’을 맞추지 못하면 단기 투기시장에 뛰어드는 펀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규제 회피를 위해 투자전략을 비밀에 부친다’고 알려진 것도 잘못이다. 헤지펀드는 사모펀드이고 그만큼 큰돈을 댈 수 있는 전주(錢主)는 국제적으로 한정돼 있다.

당연히 경쟁도 치열하다. 특정 펀드의 투자 노하우를 다른 펀드에 알려주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헤지펀드의 비밀 유지는 다른 펀드와의 경쟁 때문이지 규제를 피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헤지펀드의 투자 성향이 공격적이라는 것도 일부 오해가 있다.

물론 대표적인 헤지펀드인 타이거펀드나 퀀텀펀드 등은 채권, 주식, 선물, 금, 유가 등 각종 영역을 오가며 공격적으로 투자한다. 하지만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이렇게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펀드는 전체의 5% 정도다.

대부분의 펀드는 ‘일정 수익률’을 목표로 할 뿐 ‘공격성’은 헤지펀드를 규정하는 주요 특성이 아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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