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장하준/공적자금 회수 서둘 일인가

  • 입력 2003년 12월 9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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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선거에서 승리한 뒤 미국인 소유의 동광(銅鑛)을 국유화하는 등 좌파적 정책을 펴자 미국의 배후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자유시장경제 수호를 외치며 1973년 유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 장악 후에는 미국 시카고대학 출신의 소위 ‘시카고 아이들(Chicago Boys)’이 이끄는 경제팀을 구성해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했다.

▼기업 매각 급급해 제값 못받아 ▼

그러나 무리한 금융자유화 정책 때문에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생기고 은행의 부실대출이 급증하면서 1982년 칠레는 엄청난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이렇게 되자 국유화에 반대하고 시장을 수호한다며 쿠데타까지 일으킨 정권이었지만 공적자금을 투입해 모든 은행을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미국도 잘못된 규제완화 때문에 저축대부조합(Savings & Loans)들에 대규모 부실이 생겨 이것이 은행권까지 퍼지자 자유방임주의를 외치던 공화당 정권이 국내총생산(GDP)의 3%에 해당하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일부 은행을 국유화하면서 이를 해결했다. 우리나라도 1997년의 경제위기를 비교적 빨리 벗어난 데에는 과감한 공적자금의 투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대로 일본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1990년대 초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정부의 시장개입이 옳지 않다며 공적자금을 신속히 투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10여년간의 경제 침체였다.

금융위기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공적자금의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위기가 해소된 뒤의 정책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정부는 공적자금을 하루라도 빨리 회수해야 한다며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과 금융기관의 신속한 매각을 추진했다. 과연 현명한 정책이었는가.

‘신속 매각’ 정책의 전제는 국영기업은 비효율적이므로 하루 빨리 민영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영기업이라고 꼭 비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포스코의 성공이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사례다. 최근 일본의 닛산자동차와 우리나라의 삼성자동차를 매수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프랑스의 르노자동차도 1996년까지는 공기업이었다. 르노는 삼성자동차를 매수할 당시도 정부가 44%의 주를 소유한 사실상의 공기업이었다.

한걸음 양보해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매각할 때는 공적자금을 최대한 회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정부는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가.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들을 하루라도 빨리 팔아야 한다며 스스로 시한을 정해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상업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가격에 팔지 않았는가.

17조원가량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을 불과 5000억원에 팔았다. 이는 제일은행이 매각 후 1년반 동안 올린 이윤 정도에 불과한 낮은 가격이었다. 대우자동차를 GM에 4800억원에 넘기고 이것도 부족해 채권은행의 계속적인 대출을 정부가 보증했다. 훨씬 규모가 작은 기아자동차를 산 현대자동차가 1조2000억원을 내고 대출보증도 받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근 매각이 결정된 현대투자증권은 투입된 2조5000억원의 공적자금 중에서 1조원 정도만 회수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푸르덴셜에 사후손실보전까지 약속하면서 판다고 한다.

▼국민혈세 ‘최대한 회수’ 노력을 ▼

국영화 된 기업을 꼭 팔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영기업도 잘 경영할 수 있다. 필요하면 민간에 위탁해 경영할 수도 있다. 당장 제값을 받고 팔 수 없다면 5년, 10년을 기다려서라도 제값을 받아야 한다. 팔 때에도 국내자본에 대해 역차별을 하지 말고 외국계 자본에 파는 경우는 기술개발 수출 금융 등 여러 측면에서 국민경제에 대한 파급효과를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매각시 국민연기금으로 일정량의 주식을 매입해 ‘국민주’를 만들어, 혈세를 내 부실기업을 구한 국민들의 이익이 민영화 이후에도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공적자금은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것이며 정부는 그 위탁경영자다. 공적자금의 조기회수가 사실상 회수포기를 의미한다면, 이는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고려대 교환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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