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끄고 별 켜진 하루… 발리의 ‘녜피’ 다큐에 담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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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창사 10주년 특집 ‘지구는 엄마다’ 내일 1부 방영
1년에 하루 섬 안 모든 전기 차단… 통행금지와 함께 아무 일도 못해
외국인 관광객도 숙소에만 있어야… 매일 신과 교감하는 주민들 삶과
자연과 환경에 미친 영향도 조명… 4년간 3개월씩 현지 머물며
촬영한 김해영 감독-김정홍 작가 “미리 이동해 텐트 치고 작업”

인도네시아 발리 사람들에게 1년이 며칠이냐고 물으면 364일이라는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1년 중 하루는 모든 것이 멈추는 날이기 때문에 365일 중 하루를 뺀다. ‘녜피(Nyepi·바른 표기는 녀피)’라 불리는 이날은 힌두교력의 새해 첫날(3월 중 유동적)로 섬 전체의 모든 불이 꺼지고 통행이 금지되며 사람들도 외출할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다. 발리인은 물론 관광객들도 예외 없이 녜피에는 네 가지 수칙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불 켜지 말 것, 일하지 말 것, 이동하지 말 것, 놀지 말 것. 서퍼들과 휴양객들로 1년 내내 쉴 틈 없는 발리의 바다와 하늘이 하루 동안 쉬어가는 날이다.

김해영 감독(왼쪽), 김정홍 작가
김해영 감독(왼쪽), 김정홍 작가
녜피를 4년에 걸쳐 카메라에 담은 이가 있다. 산악인 고 박영석 대장이 북극에 도달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 ‘박영석 대장의 그랜드 슬램’(2005년)을 연출한 김해영 감독(55)이다. 2016년 발리를 방문했을 때 녜피를 처음 알게 된 김 감독은 그의 40년 지기인 김정홍 작가(55)와 함께 녜피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다. 두 사람이 2018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3개월씩 총 12개월 동안 발리에 머물며 촬영한 녜피의 모습은 채널A가 올해 창사 10주년을 맞아 제작한 다큐 ‘지구는 엄마다’에 담겼다.

24일 서울 종로구 씨네큐브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김 감독은 “발리를 방문했을 때 녜피에 호텔 방에서 우연히 하늘을 봤는데 까만 도화지에 설탕 가루를 뿌려놓은 것같이 별이 빼곡하더라. 디스커버리, BBC를 찾아봤는데도 녜피를 다룬 게 하나도 없었다. ‘이건 특종이다’라는 생각에 제작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지구는 엄마다의 1부 ‘녜피’는 이달 26일, 2부 ‘이부쿠’는 다음 달 3일 오후 9시 50분 채널A에서 방송한다. 1부에서는 녜피를 앞둔 발리인들의 준비 과정과 녜피 당일의 모습을 담았다. 2부는 ‘신들의 섬’이라 불리는 발리에서 매일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신과 교감하는 발리인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채널A 창사 1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지구는 엄마다’에서 1년 중 하루 모든 활동을 멈추는 날인 발리섬의 ‘녜피’ 때 김해영 감독이 밤하늘을 촬영한 장면. 채널A 제공
채널A 창사 1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지구는 엄마다’에서 1년 중 하루 모든 활동을 멈추는 날인 발리섬의 ‘녜피’ 때 김해영 감독이 밤하늘을 촬영한 장면. 채널A 제공
세계 최초로 녜피 당일을 다채롭게 담기 위해 김 감독과 제작진은 4년 동안 각기 다른 장소를 정해 녜피의 모습을 촬영했다. 녜피 아침 강아지 한 마리만 배회하는 텅 빈 마을의 골목, 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파도와 어우러진 서퍼들은 찾아볼 수 없고 조각배들만 둥둥 떠 있는 바다까지. 시사 후 만난 김 감독은 “녜피에는 이동수단이 없고 움직이는 것도 금지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공간에만 있어야 했다. 매해 녜피 때마다 하늘, 산, 마을, 바다 등을 한 곳씩 골라 미리 텐트를 치고 꼼짝없이 있었다”고 말했다. 밤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이 가득한 장면을 ‘녜피를 가장 잘 담은 장면’으로 꼽은 김 감독은 “불이 다 꺼지니 별빛이 훨씬 환했다. 별다른 효과를 주지 않았는데도 그런 장면이 연출됐다”고 말했다.

발리 주민들이 신에게 바치는 꽃바구니를 만들고 기도하는 모습. 채널A 제공
발리 주민들이 신에게 바치는 꽃바구니를 만들고 기도하는 모습. 채널A 제공
녜피를 앞두고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하는 발리의 모습도 다채롭다. 바다에서 행하는 집단 제례 ‘멜라스티’(나쁜 것을 버린다는 뜻)와 귀신들을 형상화한 조형물들을 사람들이 들고 행진하는 ‘오고오고’(가장 나쁜 귀신들의 행렬이라는 뜻)에서 악귀를 빼내기 위해 불이 붙은 숯을 이로 깨무는 사람부터 접신이 돼 바다로 뛰어드는 이들까지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김 작가는 “빙의되는 장면이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민으로 촬영하기 어려웠고, 각본을 쓰는 것도 가장 까다로웠다. 저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기에 글로써의 설명은 최소화했다”며 “발리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신과 가까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빙의도 수월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녜피는 발리의 바다와 하늘이 쉬는 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터넷이 끊기고 외출도 할 수 없는, ‘자가격리’ 상태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기회를 갖는다. 김 작가는 “하루를 쉰다고 해서 지구가 말끔히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녜피는 인간이 하루 동안 자신을 정화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1년 중 하루 동안 명상을 하며 나를 만나는 것”이라며 “코로나19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 해결 방안 중 하나가 녜피가 될 수 있다. 시청자들에게 ‘당신의 녜피를 찾으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박영석 대장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잠 좀 자자. 잠을 자야 꿈을 꾸지’라는 말을 하셨다. 발리에서 만난 사제도 똑같은 말을 했다.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꿈을 꿉니다’라고 하더라”며 “녜피는 꿈꾸기 위한 준비 단계다.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지구는 엄마다#발리#녜피#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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